티스토리 툴바


2011 (작성중)

분류없음 2012/01/01 16:52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어렸을 적엔, 터미네이터랄지, 세상이 진즉 망해버려서 결코 오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고, 지금도 내년쯤 세상이 온통 무너지리라 믿어의심치 않지만, 도리어 속으로는 또 결코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 짐짓 여기는. 어쩐지 얼토당토 공상같은 년도. 2011년은 나의 아홉수였고, 나는 이제 서럽게 서른이 된다. 펜을 꺾고 책을 덮고, 달마다 꼬박꼬박 돈이 꽂히는 삶을 택했고, 그래서 내 삶은 반들반들 시들시들해졌다. 
 비정한 세상에서 제 밥벌이를 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적잖이 쉽잖은 일이다. 때로 그것이 무척 쉬운 일인 사람도 있고, 한편으로는 애당초 불가능한 사람도 있는 가운데, 어쨌든 하루 세끼 밥먹고 예닐곱시간 몸 뉘어 긴장했던 근섬유들을 이완시킬 수 있는 일정한 시간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권리(그래도 최소한 시간만큼은 모두에게 비교적 공평하다, 그러나 공간의 경우에는 얘기가 다른 법이다)가 보장된다는 것은 차라리 권능에 가깝다. 그러나 소유권과 거래에 대한 공정성 혹은 기초적인 상호 신뢰조차 온통 의심받는 작금의 현실(그러니까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자본주의의 조정 단계, 급진주의자에게는 구조적인 위기) 속에선 그 일은 신성한 동시에, 거지같은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교적 편하게 돈을 벌고 있지 싶다가도,  가끔은 이게 다 뭔가 싶어,  분하고 딱할 때가 있어 이빨을 깨물다가,  이러다 나이들어 치과의사에게 낼 돈이 아까워,  헤벌쭉 웃고 만다.  헤,   벌쭉.
 
  

올해의 사건
  
  올 한해 동안 암수서로 정답게 노니는 '미팅' 따위를 서너번이나 했고, 지난 몇해간 잠시 못했던 밤 지새워 술마시기를 또 여러번이었으며..이렇게 말하면 열심히 논 것 같지만 실은 주당 노동 시간은 평균 60시간에 육박하고, 연애는 끝도 시작도 없었으며.. 세상 돌아가는 일은 참으로 복잡다단한데 난 참 단순한 삶을 살아서, 사건이 없다고 할 동시에 사사건건 사건이었다.
 

올해의 영화

 오, 맙소사, 극장에서 본 영화가 거의 없다. <소셜 네트웍> <토이스토리3> 따위를 올여름이 되어서야 DVD로 보았고,
 

올해의 음반 :
 thurston moore - demolished thoughts
 yuck - (self title)
 justice - music, video, dance
 adele - 21
 jayz+kanyewest - watch the throrne

올해의 가요 :
  gd&top+춘여사 <오예>, 씨스타19 <마 보이>, 보드카레인 <숙취>, 캐스커 <wish>

올해의 책 : <긍정의 배신>

올해의 방송 : 무한도전 조정 특집

올해의 키워드 : 쫄지마 씨발

올해의 성취 : 월 100만원 적립

올해의 잘한 쇼핑 : 포이터리 다운 점퍼 (올해의 후회되는 절제 : 쥰지 더블 코트)

올해의 유머 : 도지삽니다

올해의 여행지 : 씨바 여행을 갔어야 좀 적지...............

올해의 관심사 : 노태우 언제 죽지?

올해의 남들은 다 좋다는데 난 별로 : 루시드폴 새앨범

올해의 남들은 다 싫다는데 난 좋아 :  남성용 어그

Posted by toto le hero

dead calm

최신시사상식 2011/10/23 00:49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아침바람이 냉장고 문 열고 고개쳐박을 때처럼 콧속을 쨍하니 아프게 하는 시월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내가 올 한해를 얼마나 비루하고 미천하게 살고 있나 짐짓 실감해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새 서른이 차근차근 오고 있고, 나는 죽는둥 사는둥 무신경하게, 주변 정리도 제대로 못하고 잠에서 깨나 다시 잠들때까지 별반 의미없는 섭생나부랭이를 반복하고 있다. 진짜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보다 목표의식이 더 불명하다. 심지어 내가 누구를 친애하고 무엇을 대적하는지도 지금은 온통 오리무중이다. 그저 지난날의 가진 관념들이 관성으로 남아 의식무의식적으로 사리를 분별하려 해 보지만, 실은 다 값없는 속단들이고 그래서 실은 죄다 틀려먹은 명제들만 남는다.

이게 자본주의적인, 소외된 삶인가? 맑스니 뭐니 하는 이들의 말을 백날 옮겨놓아도 적당히 먹고 살만한(엄밀히 말해 그렇다고 느끼는) 삶을 사는 필부필부 인생들에게는 그 전언의 진위를 판별할 최소한의 인식적 혹은 도덕적인 여력도 남지를 않는 모양이다. 하긴, 배운 넘들과 배부른 넘들도 다 그모양인데, 정신차릴 틈도 없이 사는 이런 인생에 무슨 성찰과 회의가 깃든단 말인가.

이렇게나 저렇게나 살아가다 문득 이 얄팍한 물질적 토대의 외피가 깨져나가게 되면, 그때그순간 매일 가일층 왜소해져간 존재들은 스스로의 무존재함이 얼마나 가이업고 또 두려울 것인가. 해고 노동자들, 별안간 가족과 동지를 잃은 사람들, 돈 때문에 어떻게 하려 해도 뭐가 안되는 사람들의 외로움과 공포를 새삼 가늠해보면, 아아, 월급쟁이가 되어가면 그 영업권에 대한 이자비용으로 내 영혼의 일부를 야금야금 떼어갔구나, 내 마음이 순식간에 이리도 가난해져갔구나 싶어지며, 예전보다 오히려 더 짙은 경제적 공포와 고독에 휩싸이고 만다.

상스럽거나 범속한 일들에 조금 더 대범하고 싶고, 온당하고 경이로운 일들로 감복하는 삶이 되길 바라보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영수증 한장 더 만들어내는 일밖에 없어서 슬프다. 솔직하고 싶고 솔직한 말 사이사이로 살짝씩 수줍어 보고 싶은데, 마음이 울리지 않으며 입술이 떨어지지 않고 눈길은 가 닿지 않으며 손길은 까슬거리는 것이.. 죽은 자처럼, 무덤 속에서 걸어나갔다가 다시 무덤 속으로 돌아오는 것같만 같다. 인간의 연대와 인간의 공감과 인간의 사랑이 무척 그립지만 난 이순간도 또 어사무사한 말을 채운다.

하여 이토록 말이 많으나 이 말들은 모두 다 죽음처럼 조용하기만 하리라 싶어 쓸쓸한 가을이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Posted by toto le hero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나는 서른 해 가까이를 사는 동안 한 순간도 강건한 육체를 가져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땐 무척 마르고 허약한 체질이었고, 술이 늘면서 뱃살도 늘었으며 내 헐벗은 몸뚱아리는 참으로 보기가 좋지 않다. 그에 비하면 머리 회전은 그래도 제법 명민한 편이지만, 그게 사실 영재라거나 감각적인 데에 발달한 건 아니다. 오히려 따지고보면 대기만성형에 가까웁다.

나는 따지는 걸 즐기는 편이다. 내 인식론을 굳이 분류하자면 사실 불가지론에 가깝고(내 인생의 모토는 오랫동안 "이게 다 뭐란 말인가?"였다), 굳이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실재론적인 비판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일테면 포퍼에 가깝다(혹은 로이 바스카). 세상에 이유 없는 것이란 없다고 생각하면서, 한 가지 판단을 내릴 때에는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최종적인 판단 바깥에 남아 있을 예외라는 잉여를 항상 염두에 둔다. 개념의 공정성과 객관성에 대해 집착하고, 의사소통 쌍방간의 공리와 합의를 중시한다. 기본적으로 공감 혹은 감정이입(empathy)을 의사소통의 기초로 삼는 사람들과는 사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 편이다.

정치적으로는 질적 공리주의 혹은 정치적 자유주의를 선호하되, 현실정치에서는 중도 사민주의에 마음이 간다. 시장원리를 부정하진 않지만 이데올로기에 대해선 늘 비판적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원래 그러한 것, 당연한 것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공동체중심의 자유주의에 공감하며, 그래서 기본적으로 민족주의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역설적으로 민족주의자이기도 하다.

외로움을 잘 타지 않는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태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한만큼,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소통은 지난하며, 승인엔 첩경이 없다. 역설적으로, 그런만큼 인연을 중히 하고 사랑은 기적으로 여긴다. 그 하고많은 어려움들 속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진 까닭이다.


..라고 생각해왔던 요즘, 하나같이 인생이 어사무사하다. 스스로를 위해 마련해둔 명제나 수사들이 죄 맞지가 않다. (몸뚱이가 저질이란 건 안타깝게도 유효하지만) 하루하루 신속정확한 계량적 판단을 요구받고(판단의 수준이 높지 않고), 거의 매주 새로운 사람을 만나 술먹고 놀고, 국내 제일의 재벌 기업(그것도 그 모태라 불리는 부서)에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문득 지독하게 외롭다. 인간관계는 좀처럼 모색이 쉽지 않았다. 사람사이는 상호 호혜라는 게 없다. 내가 맘 가는 사람에게 그 맘을 전한다고 해서 그것에 보답할 의무가 없다는 뜻이다. 그걸 알면서도 문득 부아가 치밀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면서도 맘가는 사람에겐 맘이 가며 맘가지 않는 사람은 냉대하게 된다. 엇갈리는 게 안타까우면서도, 기왕의 쓴 맘들에 맘이 쓰곤 하다.

이토록 내 속에 내가 많은 요즘인데, 실은 통 스스로를 소중히 못하고 업신여겨오는 것이 당연한것만 같은 나나나날들이라 새벽잠 무릅쓰고 나나나 포스팅. 할말이 더 많은 것 같지만 그만 써야지.
Posted by toto le hero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충걸이라는 작가(가치중립적인 용어에서의 작가, 그러니까 한국 '문단'의 복잡다단한 사정이나, 저널리즘의 여러 지층들에서 파편처럼 사용되는 '작가'라는 말들의 용례를 고려하지 않은, 혹은 애써 무시한 의미에서의, '글을 적는 사람')를 좋아한다는 것은 범속하거나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알려진대로 그는 패션잡지 에디터 출신이며, 한국사회에서 가장 독특한 (패션)잡지의 편집장 자리를 십년여간 지키고 있는 이다. 물론 몇권의 에세이(혹은 정의할 수 없는 어떤 류)를 출간한 바 있고, 그중 한권은 가장 보수적인 문학상의 심사에서 일독된 바 있으나, 그가 써온 글은 '한국소설'이라는 테두리 내에서 읽고 이해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이충걸이 '소설'을 쓸 것이라고, 다들 기대했으며 예상했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글쎄, 꼭 그랬던 것만은 아니지 싶다.

그가 적는 글에서 그는 매일 엄마에 관해 자랑하는 순진무구한 소년이기도 하고, 이별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베르테르이기도 하며, 내여자에게만 따뜻할 것만같은 다아시 같은 사람이기도 하다. 소설책과 에세이를 내기도 했고, 파리 컬렉션의 오뜨꾸뛰르 쇼에서 맨 앞줄에 앉아 옷에 관한 감상을 적기도 하고, 시사주간지에는 양복에 관한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의 행간뿐만 아니라, 그의 행보 자체가 그의 신간 앞뒤 날개에 적혀 있는 바대로 '세속과 무구가 동시에 섞여 있는' 셈이다. 그러니, 앞서 말했듯 이충걸이라는 작가의 글을 좋아하는 것 자체가 세속과 무구의 모순을 동시에 감식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취향과 협상, 미학과 정치, 문화예술과 문화상품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조율하거나, 혹은, 그 경계에서 방황하는 정체성. 그를 이해하거나 오해하는, 그래서 그를 혐오하거나 사랑하는 모든 까닭은 이 모호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완전히 불완전한' 것이 된다.

그러하니, 첫 두편은 건축과 패션잡지, 혹은 정치라는 작가 본인 사위에 부유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것은 묘사이거나 혹은 농담이지만 진담인 변명들이며, 그 다음 편들은 인간"관계"의 관능, 그리고 그 관능이 지시하고 있는 '생'(생의 지속, 생의 소멸, 생의 재생산) 그 자체에 대한 사변들이다. (<요리수업>은 이러한 분류에서 조금 어긋나 있다, 그래서 맨 마지막에 배치된 걸까?) 이 모든 이야기들은 소재라는 관점에서는 작가 주변의 사실들로부터 비롯되고 있겠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소재들에 대해 사유하는 형식들, 사유의 결과들, 이며, 필연적으로 소설, 이라는 장르를 빌리게 될 수 밖에 없었을까, 싶어진다.

그러니,

난 항상 아름다움을 위한 것에 낭비란 없다는 말을 해요. 아름다움은 곧 삶이에요. 신적인 것을 현실로 드러내게 하는 것, 나에겐 옷을 잘 차려 입고 스타가 돼야 하는 의무가 있어요. (...) 내가 대선에 출마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66)

라는 책 속의 그의 말이 곧 이충걸이라는 작가가 미학과 정치를 연결시키고 있는 방식이며, 지큐라는 잡지가 정치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사실 소설, 넓게는 문학이라는 한 예술의 종류가 시종 시도하고 있는 과업이기도 하다. 물론 이 지난한 주제에 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고, 각각의 개별적인 문제들(일테면, 보테가베네타의 어패럴과 레더구즈와 인류의 존망의 가치를 비교하는 일 같은?)에 있어서 미학적 정당화와 정치(혹은 윤리)적 정당화가 개인의 취향, 혹은 체계적 사유들과의 접점들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져야 '옳은(just)' 게 되는지, 늘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 그러니 이충걸이라는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는 것이 범속하거나 간단한 일이 아니게 되는 까닭이다.

더구나 재밌는 사실은.. 이 '소설'들은, 그가 어딘가에 연재하거나 보여주기 위해 쓴 글이 아니라는 점이다. 월급생활자이자 원고노동자로서가 아니라, 그가 사유하고 체득한 삶에 대한 태도들, 미학에 대한 추구와 정치에 대한 추구들, 삶에 대한 애착들을 올곧이 담아놓은, 그만의 청회색노트가 '현실로 드러'난 것이고, 그래서이 땅에 살며 그의 글을 통해 위로받았던 사람들, 그를 추종했던 사람들, 단순히 그의 글을 즐겼던 사람들 모두 그의 조금 더 솔직하고 내밀한 목소리를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더 잘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다.

여담 ..이 책을 '한국소설'적으로 읽는다면, 물론, 아주 잘 쓴 소설이라고 칭찬을 하기 쉽지는 않다. 어쩌면, 후기자본주의 시대, 주변 사물에 대한 관찰과 그 심리에 대한 언어 감각이라는 점에서는 윤대녕이나 배수아의 중간쯤에 있다고 말하면 쉬울 수도 있겠고, 고종석이나 김훈 같은 저널리즘 출신 작가들과는 매우 멀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읽다보면 비슷한 점이 많다. 인문학적 현학과 술을 좋아하는 개인적 순진함을 읽는다면 김연수와도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모든 비교가 무색하게도, 이 책은 '한국소설'의 질감을 갖고 있지가 않다. 다만 '이충걸이 소설을 썼다'라고 했을 때 기대할 수 있는 글, 그 보다는 확실히 더 나은, 그래서 더 즐겁고 유의한 책이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Posted by toto le hero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엄마가 그랬다. 나는 걸음마를 배우지 않았다고. 돌이 지나서도 앉아만 있다가, 어느날 번쩍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다녔다고 한다. 내가 원체 성격이 그렇다. 실수하는 걸 싫어하고, 최대한 많이 생각하고 시작하고 싶어한다. 살아간다는 건 자기 자신을 버려간다는 것일까? 업무를 시작하고나서부터, 정말이지 태어나서 가장 속수무책이었던 것만 같다. 갖가지 실수들로부터 업무가 돌아가는 방식들을 많이도 배웠다-_-. 덕분에 좀 무던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단순 전산 작업이 9할인 업무에 대해 마냥 만족스럽진 않다. 그래도 이 팀에서 일하고 있다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 이래저래, 자본주의의 가장 막강한 실체인 '회사'와, 그 실체의 행위인 '거래'에 대해 조금이나마 잘 알게 되서.. 기분이 퍽 삼삼하다.

 지난달의 주말들은, 지난 한달만큼이나 다채롭게 바빴다. 3월 한달동안 가장 빨리 퇴근한 것이 여덟시 반이었고.. 날짜를 넘겨 귀가하기 일쑤였다. 사월이 되니, 그나마 좀 사정이 나아서 주말에는 아직 다 한 번도 출근하지 않았다.-_- 온 종일 뭔가 정신 없이 일을 하다가도, 저녁을 먹을 때쯤 되짚어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가 되었고, 금요일이 되고 주말이 되면 마음이 허하다가도 주말동안 해야지 싶었던 일들을 맘 한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두지만 대부분은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고 넘어가 버린다. 그래도 어제는 무려 최신 트렌드 '직딩 미팅'을 성사시켰으며.., 오늘은 한달간 미뤄두었던 옷장정리를 마치고 비교적 깨끗해진 방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예쁜 옷 입고 다니고 싶다. 날씨가 너무 좋다. 어느새 밤이 늦었다. 씻고 자야겠다.

Posted by toto le h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