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어증
군대 시절이었던 것 같다. 좁은 곳에 갇혀 있다보면 환절을 단절로 느낀다. 기상변화에 맞는 옷가지들을 한 두 벌씩 차근차근 꺼내는 것이 아니라, 날짜를 정해 두고 규율로써 입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기실 바깥 공기를 쐴 일이 많지 않으니 무감해지는 탓인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올 가을도 습격같이 왔다. 그동안 나는 미욱하게도 여름내 외투를 입고도 감기에 걸렸다. 올 동절기는 혹독히 추울 것 같다. 나는 밤마다 털이불 속에서 외로울 것이다.
팔월 한달 유성에 갇혀 두려워하거나 혹은 짐짓 무심한 듯했다.
구월 한달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시의 경계를 넘고,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얼굴맞대고 무상하게 웃으며 통장에 찍히는 돈에 애써 희희낙락해 했다.
넋없이 시월이 되었고, 나는 이번엔 또 용인에 갇혀 대륙말을 배운다.
선조들이 이 땅에서 애써 배운 말과 사맛디 아니한 글, 이라면 좋을 수도 있었겠지만 대학중용은커녕 동몽선습도 못되는 값싼 실용회화들이다.
오늘날 그 말들이 시장에서 비싼 값에 거래되곤 한다. 참으로 세상일은 알수 없는 것이다.
이제 겨우 예닐곱 날이 지났다. 다 합쳐 오십여일을 견뎌야 한다.
팔월엔 스티비 원더를 놓치고, 시월엔 이츠하크 펄만과 피시만즈를 놓치게 생겼다. 뮤지크 솔차일드나 lcd 사운드시스템이나 카니에 웨스트나 플러시보를 놓친 것은 아쉽지 않은데, 스티비와 펄만과 피시만즈를 볼 기회가 언제 또 올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니, 원래 공연같은 데 잘 가지도 않으면서도 회사의 연수 정책이 못내 밉다.
여기는 둘러보아 사위에는 적막한 침묵뿐이다. 연수원 옥내는 믿을 수 없이 시끄럽지만, 그 허다한 외연에 담긴 내포도 믿을 수 없이 공허하다. 나는 최근 며칠 간 한 번도 내 마음을 담아 말한 적이 없다.
수업은 아침 여덟시에 시작하여 밤 열한시에 끝난다. 공식적인 것이 그러하고, 대부분은 익일 자정을 넘어서도 정신없이 성조와 운모를 익힌다. 모두가 별 말 아닌 것들이다. 나는 건강합니다, 당신의 식구는 몇 명입니까, 방 청소하는 것을 도와주세요, 회사와 집이 멉니다 같은 말들이다. 그런 말들을 일 년에 몇 번이나 쓰는지 가늠해 본다.
교육을 맡은 담당 강사의 취향이겠지만(그는 이 교육 과정 동안 쓰이는 교재의 저자이기도 하다), 예문들이 지독히도 현실적이다.
손에 무엇을 들고 있습니까?
맞추어 보세요.
쵸콜렛이요.
틀렸어요.
금반지요.
틀렸어요. 알려 드릴께요, 자동차 키입니다. 이것은 제가 당신에게 드리는 생일 선물입니다.
정말요? 당신, 너무 좋아요.
교재의 194쪽의 응용 예문이다. 어느 영어회화 교재에 나왔다는 '내 시디 플레이어를 보았니? - 응, 내가 훔쳤어' 가 이오네스코라면, 이건 우디 알렌 정도 되는 것 같다.
사이사이, 회사원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고민했어야 한다는 후회를 한다. 나는 매사에 좀처럼 후회를 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 문제 만큼은 솔직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어느새 내 인생을 하나의 완결될 이야기로 적어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옷을 지어 만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한다. 내가 일함으로써 사람들이 한뼘만치라도 더 우아해질 수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만들까. 그것이 과연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을 늘려가는 일인지, 아니면 부당한 탐욕의 영토를 넓혀가는 인식적 폭력인지 아직 가늠할 수가 없다. 천의무봉이라 했다는데 요사이 옷들은 절개가 많고 성긴 땀들이 많아 우리 몸을 압박해 오기만 한다. 한편으로 최신 기술은 섬유들의 내구 연한을 늘려가지만, 그만큼 그 옷에 더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매분매초 제안되는 모드의 체계들의 뉘앙스는 부지불식간 우리의 의식을 침략하고 정복해온다. 나는 명동거리의 째낸 사람들 틈에서, 차라리 우리 모두 스타트렉의 폴리에스테르 유니폼을 입는 것이 인류 평화에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유명짜한 디자이너들이 죄다 직각의 검정 옷만 입는 것은, 때때로 그들은 그들이 내놓는 색채와 비율이 휘두르는 실재의 공포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 그 사이서 가벼워지는 것은 높은 세번수 모직 원단의 단위 무게 뿐만이 아니라, 내 진득한 성찰의 무게와 그 값어치이기도 하다.
요사이 내가 떠난 곳들의 소식이 간혹 궁금해진다. 언론고시를 준비하던 사람들의 (흉흉한) 풍문들, 문학과 철학의 땅에서 추워하던 사람들의 (마음의) 건강, 혹은 연희관 주변의 담배꽁초들이 문득 궁금하기도 하다. 베버와 홀과 이글턴과 아론슨과 네그로폰테를 운위하던 시절이 가고, 차변과 대변, 자산과 부채, 수량사와 시량사를 구분해야 하는 나는 아직도 내가 즉자인지 대자인지 궁금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이 의미가 없겠지. 계급적 진실에 굴복했으니 나는 아마도 말장난처럼 스스로를 대자적 즉자라고 할 수도 있겠다.
블로그에 이런 류의 글을 적는 것이 너무 오랜만의 일이라, 아마 내 주변 사람들조차 좀처럼 찾지 않겠지만, 나는 요사이 많은 것, 중요한 것과 이별중이다.
앞으로 몇 년을 지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거의 매일의 아침 걷게 될 세종로 정부청사 앞 나무들은 어디에서 뿌리채 뽑혀와 도열하여 있는 것일까. 무엇을 통해 자라서, 무엇을 위해 잎을 흩날릴까, 말 없이 오랜 시간 눈을 가늘게 흡뜨고.
나는 왜 나무가 아닌가.
나무는 왜 입이 없는가.
또한 왜 나는 입이 있는가.
왜 인간은 다른 존재의 사체를 짓이겨 삼키는 폭력에 의지해 살아가야만 하는가.
왜 인간은 다른 존재의 사유를 이해하기 위해 그 지난한 언설을 교환해야만 하는가.
생각나지 않는 이름들, 그려지지 않는 얼굴들에 내 이름과 내 얼굴을 덧씌우는 나를 볼 때마다 짐짓 환멸한다. 생각없이 사는 것이 부끄럽다가도, 왜 사는 것인가 하는 무참한 맘이 들 때마다 힘없이 절망한다. 나는 이별 속에서 모든 것을 그리워하지 않았으면 해보지만, 모든 게 그립고 모든 순간 외롭다.
왜 나는 말을 하는가, 대답을 구하지 못한다. 그래놓고 이리도 수다를 떠는 행간행간마다 나는 실낱같은 자존감을 새기며 애써 입을 뗀다.
그러니 누군가, 왜 말을 듣는가, 에 대해 내게 회답해주면 좋겠다. 어쩌면 이건 살아야겠다, 라고 하는, 내 항상성의 원칙이 요구하는 유일한 해방구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잘 모르겠다. 내가 누군가의 말을 귀담아 들을 준비가 된 사람인지 아닌지.
말을 잃기 일보 직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