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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청회색 노트 - 이충걸 [완전히 불완전한]
toto le heros
2011. 4. 30. 14:08
이충걸이라는 작가(가치중립적인 용어에서의 작가, 그러니까 한국 '문단'의 복잡다단한 사정이나, 저널리즘의 여러 지층들에서 파편처럼 사용되는 '작가'라는 말들의 용례를 고려하지 않은, 혹은 애써 무시한 의미에서의, '글을 적는 사람')를 좋아한다는 것은 범속하거나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알려진대로 그는 패션잡지 에디터 출신이며, 한국사회에서 가장 독특한 (패션)잡지의 편집장 자리를 십년여간 지키고 있는 이다. 물론 몇권의 에세이(혹은 정의할 수 없는 어떤 류)를 출간한 바 있고, 그중 한권은 가장 보수적인 문학상의 심사에서 일독된 바 있으나, 그가 써온 글은 '한국소설'이라는 테두리 내에서 읽고 이해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이충걸이 '소설'을 쓸 것이라고, 다들 기대했으며 예상했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글쎄, 꼭 그랬던 것만은 아니지 싶다.
그가 적는 글에서 그는 매일 엄마에 관해 자랑하는 순진무구한 소년이기도 하고, 이별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베르테르이기도 하며, 내여자에게만 따뜻할 것만같은 다아시 같은 사람이기도 하다. 소설책과 에세이를 내기도 했고, 파리 컬렉션의 오뜨꾸뛰르 쇼에서 맨 앞줄에 앉아 옷에 관한 감상을 적기도 하고, 시사주간지에는 양복에 관한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의 행간뿐만 아니라, 그의 행보 자체가 그의 신간 앞뒤 날개에 적혀 있는 바대로 '세속과 무구가 동시에 섞여 있는' 셈이다. 그러니, 앞서 말했듯 이충걸이라는 작가의 글을 좋아하는 것 자체가 세속과 무구의 모순을 동시에 감식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취향과 협상, 미학과 정치, 문화예술과 문화상품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조율하거나, 혹은, 그 경계에서 방황하는 정체성. 그를 이해하거나 오해하는, 그래서 그를 혐오하거나 사랑하는 모든 까닭은 이 모호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완전히 불완전한' 것이 된다.
그러하니, 첫 두편은 건축과 패션잡지, 혹은 정치라는 작가 본인 사위에 부유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것은 묘사이거나 혹은 농담이지만 진담인 변명들이며, 그 다음 편들은 인간"관계"의 관능, 그리고 그 관능이 지시하고 있는 '생'(생의 지속, 생의 소멸, 생의 재생산) 그 자체에 대한 사변들이다. (<요리수업>은 이러한 분류에서 조금 어긋나 있다, 그래서 맨 마지막에 배치된 걸까?) 이 모든 이야기들은 소재라는 관점에서는 작가 주변의 사실들로부터 비롯되고 있겠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소재들에 대해 사유하는 형식들, 사유의 결과들, 이며, 필연적으로 소설, 이라는 장르를 빌리게 될 수 밖에 없었을까, 싶어진다.
그러니,
난 항상 아름다움을 위한 것에 낭비란 없다는 말을 해요. 아름다움은 곧 삶이에요. 신적인 것을 현실로 드러내게 하는 것, 나에겐 옷을 잘 차려 입고 스타가 돼야 하는 의무가 있어요. (...) 내가 대선에 출마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66)
라는 책 속의 그의 말이 곧 이충걸이라는 작가가 미학과 정치를 연결시키고 있는 방식이며, 지큐라는 잡지가 정치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사실 소설, 넓게는 문학이라는 한 예술의 종류가 시종 시도하고 있는 과업이기도 하다. 물론 이 지난한 주제에 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고, 각각의 개별적인 문제들(일테면, 보테가베네타의 어패럴과 레더구즈와 인류의 존망의 가치를 비교하는 일 같은?)에 있어서 미학적 정당화와 정치(혹은 윤리)적 정당화가 개인의 취향, 혹은 체계적 사유들과의 접점들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져야 '옳은(just)' 게 되는지, 늘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 그러니 이충걸이라는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는 것이 범속하거나 간단한 일이 아니게 되는 까닭이다.
더구나 재밌는 사실은.. 이 '소설'들은, 그가 어딘가에 연재하거나 보여주기 위해 쓴 글이 아니라는 점이다. 월급생활자이자 원고노동자로서가 아니라, 그가 사유하고 체득한 삶에 대한 태도들, 미학에 대한 추구와 정치에 대한 추구들, 삶에 대한 애착들을 올곧이 담아놓은, 그만의 청회색노트가 '현실로 드러'난 것이고, 그래서이 땅에 살며 그의 글을 통해 위로받았던 사람들, 그를 추종했던 사람들, 단순히 그의 글을 즐겼던 사람들 모두 그의 조금 더 솔직하고 내밀한 목소리를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더 잘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다.
여담 ..이 책을 '한국소설'적으로 읽는다면, 물론, 아주 잘 쓴 소설이라고 칭찬을 하기 쉽지는 않다. 어쩌면, 후기자본주의 시대, 주변 사물에 대한 관찰과 그 심리에 대한 언어 감각이라는 점에서는 윤대녕이나 배수아의 중간쯤에 있다고 말하면 쉬울 수도 있겠고, 고종석이나 김훈 같은 저널리즘 출신 작가들과는 매우 멀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읽다보면 비슷한 점이 많다. 인문학적 현학과 술을 좋아하는 개인적 순진함을 읽는다면 김연수와도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모든 비교가 무색하게도, 이 책은 '한국소설'의 질감을 갖고 있지가 않다. 다만 '이충걸이 소설을 썼다'라고 했을 때 기대할 수 있는 글, 그 보다는 확실히 더 나은, 그래서 더 즐겁고 유의한 책이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그가 적는 글에서 그는 매일 엄마에 관해 자랑하는 순진무구한 소년이기도 하고, 이별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베르테르이기도 하며, 내여자에게만 따뜻할 것만같은 다아시 같은 사람이기도 하다. 소설책과 에세이를 내기도 했고, 파리 컬렉션의 오뜨꾸뛰르 쇼에서 맨 앞줄에 앉아 옷에 관한 감상을 적기도 하고, 시사주간지에는 양복에 관한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의 행간뿐만 아니라, 그의 행보 자체가 그의 신간 앞뒤 날개에 적혀 있는 바대로 '세속과 무구가 동시에 섞여 있는' 셈이다. 그러니, 앞서 말했듯 이충걸이라는 작가의 글을 좋아하는 것 자체가 세속과 무구의 모순을 동시에 감식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취향과 협상, 미학과 정치, 문화예술과 문화상품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조율하거나, 혹은, 그 경계에서 방황하는 정체성. 그를 이해하거나 오해하는, 그래서 그를 혐오하거나 사랑하는 모든 까닭은 이 모호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완전히 불완전한' 것이 된다.
그러하니, 첫 두편은 건축과 패션잡지, 혹은 정치라는 작가 본인 사위에 부유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것은 묘사이거나 혹은 농담이지만 진담인 변명들이며, 그 다음 편들은 인간"관계"의 관능, 그리고 그 관능이 지시하고 있는 '생'(생의 지속, 생의 소멸, 생의 재생산) 그 자체에 대한 사변들이다. (<요리수업>은 이러한 분류에서 조금 어긋나 있다, 그래서 맨 마지막에 배치된 걸까?) 이 모든 이야기들은 소재라는 관점에서는 작가 주변의 사실들로부터 비롯되고 있겠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소재들에 대해 사유하는 형식들, 사유의 결과들, 이며, 필연적으로 소설, 이라는 장르를 빌리게 될 수 밖에 없었을까, 싶어진다.
그러니,
난 항상 아름다움을 위한 것에 낭비란 없다는 말을 해요. 아름다움은 곧 삶이에요. 신적인 것을 현실로 드러내게 하는 것, 나에겐 옷을 잘 차려 입고 스타가 돼야 하는 의무가 있어요. (...) 내가 대선에 출마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66)
라는 책 속의 그의 말이 곧 이충걸이라는 작가가 미학과 정치를 연결시키고 있는 방식이며, 지큐라는 잡지가 정치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사실 소설, 넓게는 문학이라는 한 예술의 종류가 시종 시도하고 있는 과업이기도 하다. 물론 이 지난한 주제에 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고, 각각의 개별적인 문제들(일테면, 보테가베네타의 어패럴과 레더구즈와 인류의 존망의 가치를 비교하는 일 같은?)에 있어서 미학적 정당화와 정치(혹은 윤리)적 정당화가 개인의 취향, 혹은 체계적 사유들과의 접점들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져야 '옳은(just)' 게 되는지, 늘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 그러니 이충걸이라는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는 것이 범속하거나 간단한 일이 아니게 되는 까닭이다.
더구나 재밌는 사실은.. 이 '소설'들은, 그가 어딘가에 연재하거나 보여주기 위해 쓴 글이 아니라는 점이다. 월급생활자이자 원고노동자로서가 아니라, 그가 사유하고 체득한 삶에 대한 태도들, 미학에 대한 추구와 정치에 대한 추구들, 삶에 대한 애착들을 올곧이 담아놓은, 그만의 청회색노트가 '현실로 드러'난 것이고, 그래서이 땅에 살며 그의 글을 통해 위로받았던 사람들, 그를 추종했던 사람들, 단순히 그의 글을 즐겼던 사람들 모두 그의 조금 더 솔직하고 내밀한 목소리를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더 잘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다.
여담 ..이 책을 '한국소설'적으로 읽는다면, 물론, 아주 잘 쓴 소설이라고 칭찬을 하기 쉽지는 않다. 어쩌면, 후기자본주의 시대, 주변 사물에 대한 관찰과 그 심리에 대한 언어 감각이라는 점에서는 윤대녕이나 배수아의 중간쯤에 있다고 말하면 쉬울 수도 있겠고, 고종석이나 김훈 같은 저널리즘 출신 작가들과는 매우 멀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읽다보면 비슷한 점이 많다. 인문학적 현학과 술을 좋아하는 개인적 순진함을 읽는다면 김연수와도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모든 비교가 무색하게도, 이 책은 '한국소설'의 질감을 갖고 있지가 않다. 다만 '이충걸이 소설을 썼다'라고 했을 때 기대할 수 있는 글, 그 보다는 확실히 더 나은, 그래서 더 즐겁고 유의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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