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기와 책읽기
파워 오브 원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11. 6. 02:05
영화의 제목 『the power of one』, 즉 ‘한 사람의 힘’은 영화의 마지막 컷에 장황하게 적혀 있는, 영화의 주제인 ‘인종주의에 대한 반대의 많은 힘(power of many)’을 이끌기 위해 필요한 개인의 결단을 촉구하는 일종의 호명이라고도 볼 수 있다. 듀마의 제의를 받고 결심에 이르는 PK가 바라본 것은 ‘한 방울의 물방울이 폭포가 되는’ 자연의 모습이며, 영화의 주장대로라면 그렇게 그들은 이 마을 저 마을로 옮겨 다니며 흑인들을 계몽할 것이다.
10년이 다된 영화 『the power of one』을 보는 일은 솔직히 말하면 고역이었다. 영화를 본다는 입장에서 이 영화에서 마음을 움직인 것은 한스 짐머의 음악뿐이었다. 그나마의 음악도 아프리카의 토속음악에서 느껴지는 어떤 낯선 정취에 대한 접근일 뿐인데, 그것은 마치 한스 짐머의 또 다른 스코어 『the lion king』에서 얻었던 감동과 비슷하다. ‘야만’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은 한편 ‘야생’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와 이어지는데, 소위 ‘월드 뮤직’을 듣는 것은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주류 음악이 봉착한 한계를 타개하기 위해 마련된 일종의 소재주의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여하간, 영화에서 등장하는 인종주의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저 유명한 나찌즘이고 다른 하나는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이다. 하나는 첫 번째 백인에 대한 두 번째 백인의, 또 다른 하나는 두 번째 백인에 대한 흑인의 분리주의인데, 영화에 따르면 영국인은 두 번째 백인의 자리에 위치한다. 영국인 소년 PK는 남아공에 살고 있는 영국인 농장주의 아들로, 어렸을 적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가세가 기울었으며, 까닭을 알 수 없게 어렸을 때부터 흑인들의 삶을 동정하고 이해한다. 그를 가르친 독일인 선인장 교수 Doc 역시 흑인들을 보살피고 이해하는 아량 많은 독일인이고, 나찌즘의 내부적 피해자이다. 그는 자신의 보호자 Doc과 함께 수용소에서 지내며 흑인 죄수 Geel Piet에게 권투를 배우며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사립 학교에 입학하여 장학생으로 Oxford에 입학한다. 그의 ‘파트너’가 되는 Maria는 민족당 지도자의 딸인데, PK를 만난 것만으로 흑인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을 이겨내는 것은 물론 심지어 흑인을 위한 야학 활동을 하다가 목숨까지 잃는다. 불우한 환경에 비해 너무 많은 특권을 가진, 가능할 수 있는 모든 특권을 가진 PK는 듀마와 함께 흑인들을 위한 인권 운동에 뛰어든다.
백인2가 백인1이 가하는 탄압을 견디고, 백인1 중에서 백인2를 이해하는 이와 유대를 한다. 흑인은 백인2가 가하는 탄압을 견디고, 흑인을 이해하는 백인2와 유대를 한다. 하여 흑인은 백인2와 손을 잡고 백인1에 항거하는데 그 과정이 아주 감동적이다. 이처럼 밑도 끝도 없이 생성된 현실적 갈등이 해결되는 과정은 1992년의 남아공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들(만델라의 복귀와 아파르트헤이트의 폐지, 반인종주의의 세계적인 공감대 형성)에 대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으로 인식되는, 백인들에 의한 백인들을 위한 백인들의 '흑인에 대한 응시'를 담아내고 있는 것. 정말 멋쩍은 해피엔딩이다.
이러한 논리의 흐름은 결국 백인 남성중심인 기존의 논리의 피상적 반성에 그친다. 백인-식민자라는 제국주의적 성격과 획일적인 인종주의에 틈을 내밀며 반성을 촉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처럼 확고한 기성-정체성을 가진 주체를 내세우는 흐름은 계급, 인종, 문화 등등 여러 관점에서 갈라지게 되는 대상들에 대한 경험주의라는 한계에 머물러 있다. 제 3세계의 억압 경험을 중시한다는 사실은, 결국 그 경험의 주체가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만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즉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로부터 교묘하게 지배받고 착취당했던 편에 서서 그러한 억압 지배 체제를 비난하는 것처럼 보이는 영화는 사실 획일적이고 단순한 민족분리주의, 원리주의, 국수주의안에서 애매모호한 다양성의 인정을 중시한다.
서구중심으로 시작된 탈식민주의·반제국주의 기획의 주요한 통찰과 해석은 타자에 대한 자신과의 경계를 은폐하는 일이였다. 소위 다문화사회 논리는 각 주체들의 차이들을 인정하는 경험론에서 비롯된 것인데, 인종과 문화의 다중적이고 복수적인 차이들을 존중하는 동시에 그들 간의 ‘다름’이 ‘다름’이 아니라 ‘같음’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인종’ 대신 ‘인종성(ethnicity)', '정치(politics)’에서 ‘문화(culture)’로 그 논의의 대상을 바꾼다. 이 영화(파워 오브 원)는 'one'이라는 애매모호한 말로 각자의 분명한 경계를 지우고 각개의 인간들이 같음을 호소하며 개개 문화의 동등한 상호작용을 강조한다. 그러나 실은 변화나 개선의 역량은 제국주의 서사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가운데, 제국주의 세력의 중심문화가 허용하는 선 안에서 반주변, 주변의 문화를 인정하는 시혜를 베푼다는 식의 이야기에 그친다. 제국주의적-다문화주의의 맹점은 그런 무분별함에 있다.
사족, 애당초 자본주의가 태생시킨 제국주의적 침략은 제 3세계의 주체들 뿐만 아니라 제 1세계의 사회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스피박Spibak이 주장한 바대로, 푸코나 사이드는 제 1세계 주체가 제 3세계의 주체들에게 타자의 굴레를 지움으로써 스스로의 주체성을 파생시켰다는 점은 간파하지만 실은 실제로 각 세계들의 경제구조나 정치적인 억압을 분석한 것은 아니었다. (여담이지만 제 1세계/제 3세계라는 구분자체가 서구 중심으로 진행된 식민주의·제국주의적 위계질서이며, 나아가 모든 인종과 민족을 관통하는 전 지구적인 사고 체계(globality)를 강조한다) 스피박이 도입한 하위주체sub-altern 개념은 생산 중심의 자본주의 체계에서 사실상 그 중심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를 포괄하는 동시에 인종, 성, 문화적으로 주변부에 속하는 사람을 아우를 수 있는 개념이다. 무리가 있는 주장일지 모르겠지만 일반적 소시민 역시 subaltern에 포함시킬 수 있으며, 자본의 논리에 착취당하는, 즉 자본의 논리에 저항성을 띄(어야 하)는 주체를 개념화한 것이다. 스피박은 그람시가 간과한 하위주체의 젠더화와 ‘말하기’, ‘문화적 재현’에 결부된 문제를 부각시킨다. ‘하위주체가 말할 수 있는가?’라는 부정적 의문 속에는 담론을 생산하고 문화기술지를 작성하는 사람 자체가 그 사회에서 특권을 누려온 남성이라는 점(PK의 경우)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특권적 남성의 시각에 가려진 여성 하위주체(다소 나이브한 주장이지만 여기서 여성은 sex로서의 female이 아니라, 발언권을 얻지 못하는, 즉 female-gendered의 대다수 subaltern을 상정한다. 제국주의 시절 아프리카를 ‘처녀지’라고 불렀던 것을 상기하라)의 모든 경험과 인식은 실제로 통용될 수 있는 담론의 장에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다.
스피박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subaltern의 자기부정이나 subaltern의 해체를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결국 제1 세계 지식인이 제 3세계 주체를 represent한다고 할 때 범하게 되는 오류를 Spibak 스스로도 범하지 않도록, 지식인과 subaltern 간의 괴리를 철저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PK가 흑인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그들의 rainmaker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PK가 나아가 계급적인 차이를 부각시키고(Piet나 Dumar를 하인으로 부른 것이 그것이라면 할 말 없다) 그들 스스로의 충돌 지점을 극명하고 첨예하게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다소 좌파-관념적인 언술이겠지만, 실제로 남아공에서는 흑인들이 각개의 정치적 집단성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물론 그 경우에도 민족 국가의 개념과 feamle-gendered subaltern간의 충돌에 대한 문제 의식은 유효하겠지만).
사족, John G. Avildsen은 Rocky 시리즈를 연출했고, 각본 Robert M. Kamen은 Luc Besson의 『the fifth element』를 공동 집필했다. 과연 그렇겠다. 또 하나 사족, 일본인이 일본 군인이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에게 탄압당한 뒤 태평양 수용소에 갇힌 한국인을 이해한다는 영화가 만들어질까 두렵다. 『반딧불의 묘(火垂るの墓)』같은 영화를 보건대 나오지 않으리란 법도 없다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