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기와 책읽기

<인정사정 볼것없다>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11. 8. 00:11

인정사정 볼 것 없다
Nowhere to hide

난 이명세를 몰랐다. 그가 “한국의 스타일리스트” 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경위도 몰랐고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그의 대표작이란 것도 몰랐다. 안성기나 송영창이 그의 페르조나인 것도, 그의 영화엔 언제나 비와 눈이 내리는 것도 몰랐다. 결국 이 영화를 볼 때, 난 이 영화에 관한 그 어떤 사정도 모르고 볼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 영화는 지독하게 사실적이다. 구구절절 자세하게 풀어나가는 내러티브가 없다. 혹자는 이 점을 이 영화의 단점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장점은 오히려 그러한 “리얼리스틱” 내러티브의 부재이다. 악역인 성민(안성기 분)이 주연(최지우 분)을 어떻게 만나서 어떤 사랑을 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감독은 인물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키지 않는다. 이것이 이른바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하이퍼 리얼리즘”의 소산이다.

영화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영구란 캐릭터의 등장은 실은 영화의 어조를 과장법으로 이끈다. 멜빵바지에 알록달록 티셔츠를 입고 껄렁거리며 가스총을 쏴대는 형사는 우리가 형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반적 스키마를 완전히 깨어 버린다. 이것은 비단 영구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 등장하는 모든 형사는 실은 조폭보다 더 조폭답다. 경찰계의 내면을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은 “어쩜 저렇게 비인간적일 수 있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모습이 어찌 그리 사실적이고 인간적일 수 있을까. 어째서 그런 데에서 짙은 “사람 냄새”가 풍길까.

영화를 보면서 나는 이창동의 “초록 물고기”를 떠올렸다. 난 그 영화를 무척 좋아한다. 느와르 장르의 치부를 슬쩍슬쩍 피해가며 “성, 그거 기억나?” 라며 눈물흘리는 막둥이를 연기했던 한석규의 모습은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장면보다 인간다웠다.

물론 이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초록 물고기”와 완전히 다른 어법을 가지고 있다. 현란한 화면과 감성이 배제된 연기는 이 영화의 비교 대상을 헐리웃 액션 영화로 돌리게 할 정도이다.

하지만 성민을 쫓는 영구의 대사, “세상에서 가장 좇같은게 형사고, 그 중에서 제일 좇같은게 강력반이다” “판단은 판사가 하고, 치료는 의사가 하고, 용서는 목사가 하고, 형사는 무조건 잡으면 되는 거야” 하는 이 대사들은 이 영화가 하부 구조를 이루고 있는 삶과 삶들의 영화라는 것을 말해준다.

달도 참 밝은 밤 영구의 동생이 영구에게 주는 장갑같은, 그리고 그 장갑으로 던지며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기분”을 씻는 눈송이 같은, 그리고 다시 들어보는 “해뜰날”같은, 그리고 “holiday"같은 희망이 넘치는 인간의 삶이 숨쉬는 영화가 되고 만 것이다.


(1999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