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기와 책읽기

<M> - 명세, 기억, 영화만들기 (그리고 '돈')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11. 8. 01:19
M




 이명세의 '페르조나'가 바뀌었다. 전작 <형사 duelist>를 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강동원은 송해성(<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과 이명세라는 극단을 오가며,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필모그래피에서만큼은) 성공적으로 쌓고 있다. 그간 이명세의 영화들의 '페르조나'란 송영창, 안성기, 박중훈이었고, 그의 영화들은 전작을 차기작이 새로이 참조하면서 구시대의 페르조나를 계승하거나 기각하거나 재해석하여 새로운 페르조나를 만들고 새로운 영화어법을 탐색해 왔다. 그렇다면 강동원은 그의 또다른 성공적인 페르조나인가?
 
 신작 <M>은 여러모로 당혹스러운 영화다. 개인적인 소회를 달자면, 이명세가 90년대 이후 르네상스를 맞은 한국 영화계에서도 여전히 '스타일리스트'임을 보여준 <인정사정 볼것 없다>의 기념비적인 성과가 얼마간은 그리울 정도로 소통이 어려운 영화이다. <M>은 그의 전작들과 공유하는 점들이 많다. 예컨대 여전히 정통 내러티브를 배반하고 있고, 익숙하지만 그래서 더 생경한 이미지로 점철되어 있으며, 배우들의 연기는 과장되어 있고, 결말은 영문을 모르게 찝찝하다. <M>은 그래서 여전히 '이명세의' 영화이다. 문제는 '너무 이명세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 M은 감독의 이름의 머릿글자를 딴 것이 아닐까 하는 우습지만 어쩐지 설득력 있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M>은 무엇에 관한 영화인가? 영화에서 제공되는 단서는 모딜리아니, 모짜르트, 달(moon)의 머릿글자이다. 혹은 등장인물인 민우와 미미의 머릿글자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이 나눴던 달달콤하고 슬픈 첫사랑의 추억(memory)을 환기하기도 한다. 그래서 '당신이 슬퍼했으면 좋겠어'의 애도mourn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M>의 중심적인 분위기인 미스테리(mystrery)를 드러내기도 한다(<M>은 스릴러의 구조를 따라가지만 스릴러는 아니다. 끼워맞출 수 있는 현실적인 클루들을 제공해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분류한다면 이 영화는 미스테리물이다) 또, <M>은 몽환적인데, 어쩌면 M은 몽환적의 머릿글자일 수도 있다(drea'M' 처럼). 이 몽환은 그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민우의 환상인지 확실하게 보여주지 않은 채 애매모호하게(그렇다면 M은 '애매모호'의 M일까?) 끝이 난다. 그리고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거울(mirror)과 거울상(mirror image)들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종합해본다면,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정리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는 영화 Movie, 혹은 영화 만들기 Making Movie이다. (경희와 한 농담이지만, 강동원의 머리도 M이더라)

 <M>은 아련한 기억속의 첫사랑의 추억을 되짚는 영화인 동시에, 그 첫사랑의 추억을 하나의 소설(민우는 약혼녀인 은혜에게 '미미'는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의 제목이라고 말한다)로 만들어가는 작업을 형상화하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민우가 이 영화에서 한 일들을 분류해보면 1) 미미를 탐색하고, 만나고, 화해하는 일들, 특히 '뤼팽'에서의 일들, 2) 출판사 관계자와 만나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일, 3) 은혜, 그리고 장인과 만나며 현실에서의 사랑을 지켜가는 일로 나뉜다. 또 이 영화의 다른 주인공들인 미미와 은혜의 경우, 미미가 한 일은 1) 민우를 따라간 일, 2) 자신의 죽음에 관한 일을 기억해내는 일, 3) 우산을 든 남자에게 쫓긴 후 그를 따라가는 일의 세 가지이다. 은혜의 경우에는 유일하게 현실적인 캐릭터로, 민우를 의심하고 사랑하는 역할을 한다. 민우의 경우, '현실적인' 캐릭터인 은혜와 상호작용하는 3번 항목을 제외한 1번과 2번 항목의 경우, 영화의 어법은 더 없이 몽환적이어서 그것이 현실인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들고, 간간히 나오는 대사들도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궁금하게 만든다. 예를 들면, 환상의 공간 가운데 하나인 커피빈 골목의 도입부에서, 미미가 커피빈에 앉아 민우의 통화를 엿듣는 장면이 있는데, 민우는 그때 아버지와 통화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 미미와의 추억을 더듬는 장면에서 민우는 아버지의 죽음을 언급한다.

 다시 말하면, 1번과 2번에 해당하는 일들은 '미미'라는 제목의, '첫사랑'에 관한 '소설쓰기'에서 겪어야 했던 어떤 환상들의 편린들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모든 일은 상상적인 일들이고, 착란적인 일들이며, 그래서 소설이라는 상징계의 구조 안에 편입시키기 위한 노력들은 눈물겹다. 그래서 미미는 한편, 거울상, 혹은 자신의 상상계적인 오브제 쁘띠 아의 모상(mimi-cry)이기도 하고, 또 동시에 어머니(미미mimi-마미mommy)상을 환기하기도 한다(<M>은 정신분석학에서 언제나 상상계의 '첫번째 타자', 즉 어머니를 뜻하는 상징문자이기도 하다). 예컨대 푸로작을 처방받는 진단장면의 경우나 은혜의 아버지를 만나는 장면에서 상대의 대사를 '먼저' 맞받아치는 것은,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 민우의 상상속에서 혹은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며, 혹은 액자속을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는 장면 역시 그러하다. 더욱 노골적인 장면은, 선풍기로 인한 목소리의 왜곡을 보여주며 그것이 분명 '시점숏'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대화장면들의 경우, 그 시점이란 곧 다시금 민우의 시점임이 분명하며, 인물들간의 대화도 부조리하고(마치 꿈에서 그러하듯), 편집상 뒤 시퀀스 연결조차 되지 않는다. 더욱 재밌는 것은, 미미가 주체가 되는 장면들조차도 그것은 미미의 나레이션과 미미의 시점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민우의 시점에서 재현된 장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민우가 자신의 첫사랑을 기억해내는 장면은 미미가 민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는 장면이다. 따라서 미미는 자신의 기억속 응시의 주체인 동시에 기억속 모사의 주체이다. 혹은, 미미가 은혜를 만나는 장면에서 지하철이 지나가고 나면 어렴풋 미미가 사라지는 씬, 미미가 민우와 은혜가 귀가하여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 장면과 같은 경우에도 앞뒤가 맞지 않고, 미미는 정말 '생뚱맞게' 소환된다. 그러한 미미의 등장들은 민우의 상상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합하다.

 미미와 함께 소통하는 유일한 공간인 뤼팽 역시 현실적 공간으로 보기 어렵다. 미미가 저승사자를 따라 기억의 저편으로 가고 나서 뤼팽의 성냥갑을 찾아보지만, 은혜는 성냥갑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분명 은혜가 성냥갑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거는 장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은혜의 그 장면은 민우가 뤼팽으로 허겁지겁 가게 되는 그 장면 사이에 삽입되어 있다. 즉 그 장면은 뤼팽으로 향하면서 한 민우의 상상이다. 뤼팽은 거울상을 지나, 저승사자를 따라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허름한 골목에 있고, '상상의 세계'와 악수를 하고 들어가면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게 되어 있는 구조이다. 그리고 그 안은 무척 고급스럽고, 동시에, 창밖으로 야경을 볼 수 있다(한 마디로 말이 되지 않는다, 그곳은 분명 지하 깊숙한 곳이었는데?). 뤼팽의 바텐더는 민우가 그곳을 처음 찾은 날짜가 8월 20일이며,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자신의 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8월 20일에 민우가 누구와 왔는지는 기억할 수 없다고 한다. 민우에게 미미의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몸'은 기억하지만, 상징계적인 이성의 질서에서는 환기할 수 없는 어떤 것. 8월 20일은 민우가 미미와의 사랑을 확인한 그 날짜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던 것이고, 그 모든 것은 민우의 기억과 상상계의 교란들일 뿐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거기서 나누는 대화들이다. 일테면 민우가 미미에게 '잘 지냈어?' 라고 묻다가 갑자기 화를 내듯 이야기하는 장면의 연기 톤은 현실로 보기에는 너무 '웃기다'. 마찬가지로 커피빈 골목 역시 현실의 공간이기도 하고 기억의 공간이기도 하다. 민우가 길에 드러누워도 다들 아랑곳하지 않는 이유는 이 영화가 '스타일리쉬'해서가 아니라는 뜻이다.

 은혜와 함께 영화에서 또 다른 '현실적'인 캐릭터는 임원희가 분한 성우이다. 미미가 이드id, 은혜가 상징계의 에고ego의 반영이라면, 성우는 수퍼에고super-ego의 반영이라고 할 만하다. 성우의 직업은 경찰로, 경찰일 이유가 없음에도 경찰인 이유는 그가 히치콕이 즐겨 사용한 '수퍼에고'적인 인물이라는 점 밖에는 없어 보일 정도이다. 성우가 민우에게 하는 일은 1) 자신을 기억하느냐고 물은 것, 2) 미미는 죽었으며 왜 자꾸 이상한 생각을 하느냐고 닥달한 것 정도이다. 상상계적인 '몸' 기억(혹은 id의 욕망)의 재현과, 그것이 야기하는 에고와의 불협에 대한 수퍼에고의 반응은 그러한 것이니까.

 본론으로 돌아와서 정리한다면, 따라서 이 영화는 그의 '영화', 혹은 '영화 만들기'에 관한 영화로 귀결된다. 영화란 곧 상상적인 기억들의 재현이고, 소설쓰기는 그것을 상징적인 질서로 조직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것을 '상상'적인 수준에서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오히려, 영화에서 끊임없이 조잘대는 그 '나레이션'에 가깝다. 영화의 나레이션은 영화의 도서들을 협찬한 문학과지성사의 채호기 사장이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채호기는 시인이기도 하다. 영화의 컨티뉴어티 스타일도 서사적인 것이 아니라, 환영의 촉수들이 넘나드는 분절, 환영, 편린들일 뿐 서사장르의 상징적 질서와는 거리가 멀다.

 이렇게까지 궁리를 하고 나니, 이 영화는 나름의 소통의 가능성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반적인 관객들이 과연, 강동원과 공효진과 이언희?가 나오는 영화에서 기대한 것이 이런 것이었을까 싶은 생각도 들고. 예술 영화라고 보기도 어렵고. 근본주의적인 표현주의에 기댄 영화도 아니고. 영화 사조를 이끌만한 시각적 혁명을 선도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사실 반신반의하고 있다. 사실 이명세에 관한 재미있는 루머인, 워쇼스키가 그를 좋아했다..와 같은 말들에 대한 반응들이 '반신반의'인 것처럼. 그러나 확실히 해 둘 것은, 워쇼스키가 차용했다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크로스카운터 씬은 <내일의 조>의 한 장면이 오리지널이다.

 그러나 한 가지 짚고 싶은 것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PPL들은 과연 그가 자본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하는 점이다. 먹물기질이라고 얘기할 지 모르지만, 이 영화의 '스타일'을 구성하는 많은 것들은 자본주의적인 라벨링에 의해 가능해지고 있다. 대리석이 깔려 있는 최고급 인테리어의 아파트와 b&o 오디오 같은 소품들, 고급위스키들, 고액권의 수표, '금보다 비싼' 다금바리(라는 생선을 나는 듣도보도 못했다-_-)..와 같은 것들이다. 강동원이 입은 론커스텀 수트나 커피빈이나 마일드세븐 같은 건 일상적이기 때문에 애교 수준이지만. 하여 어쩌면 영화는 이명세가 '영화감독'으로서 성공하며 얻은 부와 명예에 관한 자기반성을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명세의 출세작 <첫사랑>과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 관한 어떤 변명 같은 것. <첫사랑>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왠지 부럽기도 하고. 흥.

 
ps. 영화를 같이 본 경희에게, '영화 읽는 법'의 힌트를 한 가지 준다면... '대체 이 씬은 누구의 기억을 재현하고 있는 씬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 꽤 의미있다고 생각해. 일테면, 그 미용실 장면에서 미미가 후딱 옷을 갈아 입고(거기서 어떻게 그렇게 빨리 옷을 갈아입느냐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자전거를 타고 가서 석양이 내리고 밤하늘에 별이 빛날 때까지 서로를 바라보고 있고(시간의 흐름같은 것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듯이), '먼저 들어가'라고 자꾸 반복하고 마지막 '놀란듯한 표정'의 클로즈업은 미미만 나오는 것(현실이 아니며, 이 기억은 민우의 눈에 비친 바로 그 모습이 중요하다는 듯이)은 그 장면이 오로지 민우의 시점에서 재해석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 그 씬의 경우에는 해석이 쉬우니까 예를 든 거고. 가장 난해한 경우에는 저승사자-_-와 미미의 관계, 혹은 은혜가 지하철에서 미미를 만나는 장면 같은 경우인데, 그런 장면들조차도 실은, 미미가 민우의 상상적인 인물에 불과하다면 그 장면들 역시 민우의 기억이 소극적으로 삽입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중첩된 나레이션이나, 은혜의 꿈 조차도 사실은 민우의 기억일 수도 있다는 거지. 민우가 '먼저 대사를 치는' 기이한 장면들, 액자 속 액자가 왔다리갔다리 하는 장면들도 그냥 장난이 아니란 거고.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