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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계> 포즈와 포즈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11. 13. 01:06

<색, 계> : 포즈(pose)와 포즈(pause)



 '색'과 '계'를 다른 언어를 빌어 쓴다면 아마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이 될 것이다. 현실원칙을 지키면 항상성의 원칙을 거스르지 않게 되는 대신, 둘 사이를 왕복하는 강박증에 걸린다. 쾌락원칙만을 앞세우면, 그것을 넘어선 '죽음'에 다다른다. 결론부터 말하면, 왕치아즈는 쾌락원칙을 넘어섰고('색'에 사로잡혔고) 이대장은 현실원칙을 지켰다('계'를 지켰다).<색, 계>는 아름답지만 슬프고 잔혹한 이야기이다. '색'과 '계'는 서로를 배반하는 듯 하지만, 한편으로 서로를 지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균형을 잡는 일은 어렵다. 특히 그것이 역사라는 무게 때문에 존재가 흔들려야 했던 시기라고 한다면.
 
 <색, 계>의 주인공인 왕치아즈는 홀로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 여대생이었다. 그가 홍콩에서 혼자 본 영화는 데이비드 린의 멜로 고전 <밀회(brief encounters)>다. 왕치아즈는 피난간 홍콩에서 학생극단에 참여해 배우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에 휘말려 그는 '막 부인'을 연기하게 되고, 극단에 참여하는 학생 전원은 극장에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투쟁'을 위한 연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왕치아즈의 그러한 행보는 <블랙북>의 레이첼이 저항군에 가담해 스파이 생활을 하게 될 때의 비장함과는 거리가 있다. 왕치아즈와 친구들은 소아적이다. 왕치아즈가 '연기'를 향유하게 된 장면을 떠올려보자. 항일을 내용으로 하는 연극에서 호연한 뒤 축하파티를 하고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2층버스에 오른다. 버스에서 왕치아즈는 희열에 찬 눈빛으로 창밖을 응시한다. 그때 왕치아즈의 응시는 어떤 응시인가? 아마도 어떤 '역사적인 의미'를 내면화할 때 느낄 수 있는 종류의 희열일 것이다. 비슷한 것을 찾자면 아마 종교적 귀의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왕치아즈는 아버지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막 부인을 연기하게 된 것은 따라서 그녀의 역사의식 때문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는 외재한 아버지의 응시에 의해 '포즈'를 취하는 것을 즐겼을 뿐이다. 라깡이 응시를 ‘나를 사진-찍는’ 행위라고 한 것과, 응시에 의한 모방에서 주체를 상정한 것을 떠올려 보라. 홍콩에서의 첫번째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고, 엉뚱하게도 끄나풀인 차오(이름이 기억이 안남-_-)를 우발적으로 살해하게 된 해프닝의 현장에서 그는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듯 비틀거리며 떠난다. 그때 그녀는 처음으로 성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 성관계가 이 '포즈'를 위한 준비라는 점에서 그녀는 그토록 적극적일 수 있었던 것이며, 더 이상 '포즈'를 취할 수 없기에 그녀는 흔들렸다고 하면 과언일까.

 상해로 돌아간 3년 후, 여전히 아버지는 자신을 돌보아 주지 않는다. 왕치아즈는 특별히 취할 포즈가 없다. 그래서 그녀는 일본어 수업을 듣는다. 왜냐면 일본어는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남근적 질서의 상징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녀는 광위민과 조우하고, 저항군에 가담할 것을 청탁받는다. 그녀가 저항군에 가담하게 된 것은 그녀의 연기 실력이 출중하기 때문이지, 그녀가 일본에 대해 특별한 정치-역사의식 혹은 동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거기에 가담한 데에는 절반 정도는 아버지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막 부인으로 변신하기 전 아버지에게 장문의 편지를 쓴 것은 의미가 크다.

 그리고 그녀는 이 대장과 사랑에 빠진다. 여러모로 비교가 되는 <블랙북>에서 레이첼이 문츠와 사랑에 빠진 이유는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전쟁의 참화로 인한 상처와 인간에 대한 믿음 때문이지만, 왕치아즈가 이 대장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그가 오로지 자신의 인생에서 '사랑하는 척 하도록 허락된' 남자이기 때문이다. 막 부인이 된 왕치아즈에게는 '사랑하는 척'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막 부인이 된 왕치아즈의 인생은 원래 '연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광위민의 애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 대신 '막 부인'으로 살기 전인 3년 전, 자신의 존재가 한없이 흔들렸던 그 시절에 왜 애정을 주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뿐이다.

이의 우산안에 들어온 막부인-왕치아즈. 그의 상징질서(남근)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의미.


 그리고 마침내, 왕치아즈는 '막부인'으로서가 아니라 '왕치아즈'로서 이 대장을 사랑하기에 이른다. 이 대장과 왕치아즈의 정사는 처음에는 폭력적이었지만 이후에는 상호-관능적으로 바뀐다. 아마도 그때의 왕치아즈는 최초의 대상으로부터 자신의 욕망을 분리시켜내는 데에 성공함으로써 자아를 발견하고 확립하게 되는, 말하자면 빗금친 주체의 욕망의 대상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특히 이 대장과 일본인 조계지의 식당에서, 의미심장한 노래를 부르며 서로의 아픔을 확인하는 장면은 영화의 백미 가운데 하나다. 자신의 언어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 그 언어로 진정 소통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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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장면!


 하지만 현실적인 제약은 그의 쾌락원칙의 한계를 분명히 긋는다. 영화에 두번 잡히는 찻잔에 남은 립스틱 자욱은 이 비극의 종지와 같다. 마침내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색'을 욕망하게 된 왕치아즈는 그러나 '계'를 지키지 못한다. 이 대장은 그러나 자신의 '색'을 포기함으로써, '계'의 세계에 남음으로써 목숨을 부지한다. 대신 이 대장은 그녀가 머물던 자리에서 사랑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리고 자신의 '계'의 세계의 배우자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이미 자신은 진짜 욕망의 언어를 교환한 바 있으며, 그 어떤 말도 그에 값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잠시 멈추고 세상을 돌아보게 한다. 그 '사이(pause)', 경계를 풀고 세상을 바라본 순간 속수무책으로 들어오는, '색'의 비밀의 언어를 음미하면...어느새 세상은 죽음과 맞닿아 있고, 그래서 아름답고 슬픈, 순간적인 잔혹미에 압도당한다.

 
 <색, 계>는 역사적 사실의 무게를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 중일전쟁과 남경대학살과 같은 대사건의 흔적이 영화에 빈번히 제시된다. 그러나 <색, 계>는 또한 영화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색'은, 영화로서 남기고 싶은 인간의 어떤 쾌락에 대한 욕망들이고 '계'는 영화에 담길 역사의 흔적들이다. 그 사이의 쉼표는 정말 그 사이에 매달린 갈고리와 같다. 역사는 '계'의 세계에 남은 자들의 것이지만, 영화는 '색'을 추구한 사람들의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쩌면 <색, 계>는 왕치아즈가 본 두 편의 영화, <밀회>와 <의혹>에게서 세례를 받은 영화적 축복이다.

 한편.. 친일파 얘기를 이렇게 아름답게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인듯한 생각도 든다. 우리는 일제시대를 그리게 되면 프로파간다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여명의 눈동자> 정도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서울 1945>인가, 그 드라마가 제법 잘 만들었다는데..) 대만에서는 친일파 정리가 대충 끝났다던데, 그래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짧지 않은 영화가 내내 긴장과 매혹을 잃지 않는다. 음악도 매우 훌륭하고. 미술도 아름답고. 연기도 끝내준다. 아마 올해 최고의 아시아 영화의 영광은 <밀양>도 걸작이지만, 그래도 '영화'로서는, <색, 계>의 몫이 되지 않을까.

 올해 본 영화가운데 이영화와 비교될 수 있는 영화라면 <밀양>과 <블랙북> 정도이다. 아버지의 언어에서 방황하는 여성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밀양>의 인물과 닿고, 여성스파이 이야기의 파뷸라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블랙북>과 닿는다. 그러나 <블랙북>의 대찬 여성과는 여러모로 비교되는 건 사실이다. 폴 버호벤의 여성들은 뭔가 대찬데가 있지만, 이안의 여성들은 안쓰러울 때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처럼 그것을 미화하거나 환상적으로 그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혐의에서 벗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