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기와 책읽기

나의 스무 살을 부탁해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11. 6. 01:37

고양이를 부탁해
Take Care of My Cat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의 부탁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나는 너무 편히 살아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몰입이 어려웠던 것도 분명하며, 해서 다른 얘기를 먼저 할 수밖에 없겠다. 그러나 영화 외적인 이야기부터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슬프다. 게다가 ‘친구’, ‘신라의 달밤’은 전초전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거기에 일종의 심각성을 더한다. 텍스트를 벗어나 이런 유의 험담을 늘어놓는 것은 감상문을 쓰는 입장에서는 올바른 선택 사항이 아닌 줄 알지만, 이 영화는 텍스트를 해체하는 이야기가 필요한 것 같기에 서두를 이렇게 꾸민다. 그런데 더 이상 할 말이 없음은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더 잘 알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를 본 것은 재개봉 때다. 그리고 굉장히 운이 좋았는데, 이 영화의 주연의 한 사람인 이요원 씨가 영화관에 인사차 들렀다. (개인적으로 그녀를 좋아했는데, 실제로 보니 키가 크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녀 역시 ‘조폭 마누라’와 노골적으로 언급하며 ‘이 영화 별로 안 어려워요, 생각 없이 보셔도 재미있을 거예요’ 라고 말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생각을 아니 하려 해도 아니 할 수가 없다.

영화에는 다섯 명의 스무 살 ‘여자애’들이 등장한다. 스무 살, 소비의 사회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막연한 환상 비슷한 무언가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박명천과 임은경 덕분에?), 막상 스무 살을 불과 2주 앞둔 나에게는 그 나이가 그리 고맙지만은 않다. 십대 시절의 연장이자 연속적인 한 지점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혹 다른 의미를 가져다 붙인다면 국민국가의 시민으로서 사회적인 몇 가지 의무와 몇 가지 권리를 부여받게 되는 시기라는 것 정도이다.

앞서 ‘여자애’란 말에 따옴표가 사용된 이유를 해명하자. 일단 그녀들이 어른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이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어떤 사회적 관념을 거친 의미에서 그녀들은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다. 물론 직장인 생활을 하고 있는 혜주(이요원 분)가 있지만, 그녀들은 대학에 가지 않았으며(따라서 졸업하지 못하며) 사회적으로 자기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일종의 통과 의례를 거치지 못했기 때문에 어른이 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특히 어른이 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아이는 태희(배두나 분)다. 장애자인 시인 소년을 위해 타이프라이터를 두드리는 그녀의 순수성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은 분명 여성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감독은 정재은 씨로, 국립 예술 종합학교 영상원 출신 여자 감독이다. (아마 그녀는 임순례, 이정향 등과 함께 일군의 돋보이는 여성 감독의 하나로 기억될 것이 분명하다) 그녀가 느껴 왔을 생의 감정 편린들, 이를테면 기쁨과 슬픔, 설렘, 외로움, 시기나 질투, 성취감, 열등감, 동경과 소망 등이 등장 인물들에게 분배되어 열거되어 있다. (태희는 조금 예외다)

여기까지 말한다면, 이 영화는 흔한 ‘성장 영화’의 흔한 배경들과 합치한다. 더구나 혜주의 부모는 이혼했고(게다가 언니는 설명 없이 어디론가 떠난다), 지영(옥지영 분)은 부모 없이 판자 집에서 살며(그나마 무너지고 만다), 쌍둥이 비류와 온조(인천을 염두에 두고 지은 이름인 듯;이은실 이은주 분-그들의 말대로 누가 언니인지는 잘 모르겠음)는 화교 조부모를 두었으며 그 부모의 행방은 알 수 없고, 태희는 사춘기적 면모를 보이며 독립심이 강하다. 이러한 설정은 이 영화를 ‘눈물’, ‘바이 준’, 혹은 ‘트레인스포팅’이나 ‘디스 보이즈 라이프’ 같은 일군의 ‘청춘 성장 영화’ 유에 비견되게 한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리얼리즘을 말하는 ‘눈물’이나 ‘나쁜 영화’에 비한다면 이 영화는 하이퍼-리얼리즘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하나로 모아지는 드라마적인 내러티브가 없다. 다시 말해 줄거리를 요약할 수 없고, 그래서 인물에 집중하게 된다. 이 지점이 ‘리얼리즘의 심화(深化)’의 제 일단계다. 인물을 검토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교복을 입었던 ‘우리’에서 사복을 입는 ‘나’로, 일종의 개인화 과정을 거친 인물들은 극적이지 않다. 코믹한 성격의 쌍둥이 자매조차 현실적이다. 부모의 이혼 앞에 꿋꿋한 혜주는 그 중에서 가장 현실적이다. 갚지도 못할 돈을 빌려 소리까지 컬러인 핸드폰을 사고 마는 지영의 텍스타일도 현실적이다. 물론 캐릭터의 역할들이 ‘분배된’ 느낌이 들지만, 어쨌든 여기에서 심화의 제 이단계가 발견된다.

문제는 태희다. 사실 태희의 캐릭터는 이상의 세 명이 비하면 이상적이기까지 하다. 태희의 가정은 현실적이지만 태희 스스로는 비현실적이다. 조부모를 잃고 방황하는 지영을 처음부터 끝까지 도와주는 것은 다름 아닌 태희이다. 자유를 갈망하며, 가족 사진에서 자신을 도려내고 옷가지와 몇 권의 책을 들고 지영과 함께 어디론가 떠나는 영화의 결말은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그 비현실성이 오히려 현실적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코울필드가 동생을 지켜주기 위해 가출을 포기하는 의외의 결말이 소설을 명작으로 만들 듯, 모든 현실적 욕망의 어긋난 편린들을 치유하는 캐릭터의 비현실성은 그래서 아름답고, 오히려 ‘태희’가 내 마음속, 혹은 내 주위에 있을 것 같은 희망을 준다.

그래서 이 영화에게 나의 스무 살을 부탁할까 생각해 보기도 하는 것이다. 텍스타일을 공부하며 ‘균형된’ 삶을 바랐던 지영도, ‘저부가가치 인간’임에 쓸쓸해 하는 혜주도, 하루하루 삶을 치열하게 살았던 비류와 온조도. 그 고양이도.

(2001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