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것

인터넷 늬우스에 관하여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2. 4. 01:03

  나폴레옹이 땡전뉴스를 보았더라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의 제국에 이런 게 있었더라면, 내가 워털루에서 패했다는 것을 비밀로 할 수 있었을 텐데!' 과거 우리가 경험했던 권위주의적인 미디어란 통제의 대상인 동시에 통제의 수단이었으며, 각종 물리적 경제적 폭압 아래 그 '온당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늘날 그 흔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소수의 족벌 언론사들은 그시절을 거쳐 탄생했다. 몇몇 언론사들에게는 독과점이 허용되었으며, 동시에 그들은 검찰수사를 받지 않았고, 국세청의 세무시찰 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 앞서 '경제적 폭압'은, 실제로는 동전의 양면이어서 족벌 언론사에게는 경제적 유인책으로 다가왔다. 기자들이 본봉에서보다 촌지에서 그 수입을 충당하던 시절이 있었다.

 '정치적인 민주화'는 '언론 시장의 개방'을 불러왔다. 매스미디어의 양적인 증가는 신문의 종수와 부수를 증가시켰고, 공중파 방송사의 자율성이 확대되었으며, SBS를 필두로 해 이후 각종 케이블 방송미디어들이 등장했다. 언론시장의 양적 확대는 언론사간의 과당경쟁을 부추겼으며, 다수의 언론사들이 시장에 참여하면서 시장역량을 초과하는 공급 조건을 완성시켰다. 경제성장과 시장확대는 특히 광고시장을 다변화시켰는데, 이러한 저변 확대는 언론시장의 총매출액은 증가시켰지만 각 언론사의 순익은 감소시키는 결과를 나았다. 요컨대, 신자유주의질서가 정착되면서 언론은 기업화되어야했고, 오늘날 미디어기업의 수익모델은 대부분 광고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언론들은 광고를 확보하기 위한 무브를 언론사의 기조로 삼았으며, 그들의 논조는 곧 자본의 논리에 의해 움직였다. 따라서 언론사들은 특정 세력에 아부하거나, 정치적으로 모호하거나 때로는 보수적인 입장을 '중립', '공정보도'라는 구호 아래 포섭시켜 왔다.

 포털사이트들의 속성 역시 이러한 시장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웹비즈니스의 비즈니스모델은 예나 지금이나 광고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 사람을 모으고, 정보를 분배하는 것이 포털의 주 기능이기 때문에, 그 속성상 저널리즘의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1980년대 말 민주화 이후 우리 나라의 미디어/저널리즘이 얻게 된 자율성은 전술한 대로 시장 논리의 타율성 아래 재편되어온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2000년대 이후 등장한 포털이 얻은 자율성은 곧 웹비즈니스 자본의 논리 아래 구성되고 작동되어온 약사라고 해야 한다. NHN의 주가가 폭등하고 주가총액이 10조원이 넘으며 그 대주주들은 50대 주식 부자 순위에 이름을 올리게 되는 것은 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사태를 읽어야 함을 뜻한다. 일부 정치 세력의 음모론적인 시각이라고 공박당할지 모를 주장이지만, 특히 이러한 자본 축적 과정은 국민의 정부 이후 웹포털들의 몇몇 편향된 정치 성향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사실상 웹포털은, 심지어 그 흔한 규제조차 받지 않았으며 도리어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대규모의 특혜와 지원을 받은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웹포털들이 기반하고 있는 IT인프라라는 것이 곧 국가가 도맡아 구축한 토건 환경이기 때문이고, 이에 힘입어 자립적 대기업화를 이룰 수 있었으며 안정적인 물적 토대와 거대한 부를 축적해 왔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사실상 웹포털은 정치권력이라는 잇몸에 돋아난 이빨 같은 존재라고 말해야 한다.

 하여 그간 우리의 미디어가 정치권력으로부터 온전히 탈주해 왔는가를 묻는다면 그 대답은 무척 회의적이다. 정치권과 밀착되었으며 자본에 종속되었고 지배 이데올로기에 복무해 왔다. 특히 민주화 과정에서 일부 미디어들은 국민들이 치러야 했던 숭고한 희생에 조응하거나 길항하거나 혹은 그 공백에 침투해 왔다. 자조적으로 이름붙여진 우리의 정치 논평인 '시민 없는 시민사회'라는 말에서 그 '시민'의 공백에 사실상 몇몇 미디어들이 자신의 자리를 구축해 왔으며, 웹포털은 그 조류의 최전선에 있다. 그러한 가운데 웹포털은, 종종 이러한 '희망섞인 오해'의 대상이 되기를 스스로 희망하는데 : 이전의 일방적인 미디어들에 비해 쌍방향성, 비동시성, 축적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공유, 참여, 개방의 새로운 미디어 환경을 만들어내고 그 결과 온라인 저널리즘은 '미디어 공공영역'으로 기능할 것이다. 웹포털이 어떤 기사를 먼저 올리고 말고 하는 문제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좋은 말들이다. 하버마스의 주장을 떠올리게 하는 이러한 메커니즘은, 과연 웹 포털의 새로운 미디어 로직media logic이 자발적 결사체인 시민사회 공론장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온라인 저널리즘은 스스로를 기존의 미디어들과 비교한다면, 공론장의 형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가져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기존 저널리즘의 구태와는 상당히 다른 매체 환경을 제공하면서, 저널리즘의 형식과 내용 전반, 즉 미디어 로직을 대단히 새롭게 하고 있다. 취재 환경, 기사 구성 방식, 구독의 방식을 완전히 새롭게 했다...고 주장한다. 정말? 나는 그 덕분에 우리는 '카메라 출동' 대신 '고발 동영상'과 그 동영상에 나온 주인공들의 '싸이 주소'에 보다 관심을 갖게 되었을 뿐이 아닌가라고 자문하게 된다. 그게 아니라면, 온라인 저널의 대부분은 (특히 이름을 일일이 거열하기도 민망한 각종 B급 언론사들의) 막되먹은 기사들이다. 종이 신문에는 차마 싣지 못할, 실렸다고 해도 지하철 가판대에서 주말마다 주위의 눈치를 보며 읽어야 했던 류의 기사들을 이제는 은밀하게, 사실상 공공연히 읽을 수 있다. 굳이 이름붙인다면 미디어 시장의 오렌지 매매, 혹은 미디어 로직에서의 그레샴 법칙 정도일 것이다. 까닭은 요컨대 그런 연성 기사들이 '돈'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인터넷 뉴미디어의 본질적인 특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공유, 참여, 개방은 민주주의의 발전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제공된다. 정보의 중앙통제자가 없다는 점은 분명 참된 공론장의 형성에 매력적인 기반이 된다. 특히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증대한 정보에 대한 접근성, 속보성, 다양성은 분명 실보다 득이 많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단언컨대, 온라인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기대는 어디까지나 잠재적latent인 수준에서 발전하지 못했고, 다만 몇몇 커뮤니티와 몇몇 저널이 기존의 정치구조 혹은 체계에 대한 변화와 발맞추어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대다수의 나머지는? 우리는 그 대표적인 행태를 이미 잘 알고 있다. '온라인 낚시꾼'과 '마녀사냥'이다. 개인적인 수준에서 많은 경우 우리의 전기신호들은 허섭스레기나 다름없는 '떡밥'들이지 않나.
 
 DCinside의 악플놀이는 차라리 귀여웠다. '낚시'와 '지능형 안티'들이 지배하고 있는 리플과 트랙백이 온라인 여론이라면 나는 여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르디외의 말을 수정하여 여론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말하겠다. 그게 아니라면, 틸리 식의 군중동원이 프로이트를 만난 저 수많은 '일단 까고 보자'는 키보드워리어들과 만나야 한다. 토론 프로그램에서 말실수 한번 하면, 정지화상에 음성, 영상이 캡춰되고 합성되어 여기저기에 포스팅되며 가족사항과 학력, 싸이주소와 집주소까지 까발려진다. 디워 현상부터 '-녀' 시리즈에 대해 왜 우리는 적절한 논평을 그들앞에 대놓고 이야기할 용기를 잃을까. 아니, 거기에 왜 '용기'가 필요하단 말일까.

 시각을 바꾼다면 별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뉴미디어가 도래하기 이전 아젠다 셋팅은 소수의 미디어권력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여론의 생산자는 저 찌질하기 짝이없는 키보드워리어보다도 확실히 훨씬 비열한 놈들이었다고 말해야 한다. 미디어기업의 데스크와 게이트키퍼들이 자신의 자본 논리에 입각해 만들어낸 여론이라는 것이 키보드워리어가 만들어내는 여론에 비해 더 값어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키보드워리어가, WTO 농성장에서 할복하거나 오늘도 청와대나 구청 앞에서 무언가를 뒤집어 쓰고 시위하거나 굶어가며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상영회를 하는 소수의 사람들과 같은 아젠다 세터일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면 키보드 워리어들의 담화는 수고롭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인터넷시대의 문화가 수고로운 것에 대한 보답이 없기에 활력을 얻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MP3 파일을 쉽게 주고받는 것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수고에 똥을 칠하는 것이고, 영화를 다운받는 것은 연봉 800만원에 자신의 꿈을 거는 영화인 지망생들의 식도에 염산을 붓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수고로운 것에 대해 정당한 보답을 할 수 없으며, 수고롭지 않음에도 소구할 거리가 있는 것에 몰려드는 것에는 그 행위의 저편에 있는 (광고) 자본이 쉽게 증식할 수 있는 고루한 환경만을 제공할 뿐이라고 느낀다. 그게 바로 알맹이 없는 '포스트모던문화'의 확산이다. (사족을 붙이자면 나는 포스트모던이 혐오스럽다, 나는 아마 근대주의자인 듯하다)

 정리하여 현재와 같은 인터넷 환경에서는 공론장이라는 것인 온당히 존재할 수 없다. 공론장이 형성하는 '여론'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이며, 그 소수의 수고로움을 우리는 감당해 주지 않는다. 따라서 이미 형성되고 동원된 미디어 로직은 언제나 그 안에 숨은, 공고한 이해 관계들이 체계를 이룬 채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의견'을 듣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서로 각각 꿈꾸며 검열된 언어를 교환할 뿐이다.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그 소수의 논리 정연한 의견들은 대부분 '스크롤의 압박' '식자연'으로 치부되고 담론으로 형성되지 않으며, 그져 '헐'과 '우왕ㅋ굳ㅋ'만이 유의미하다.

 그렇다면 하버마스는 틀린 것인가? 나는 그러나 누군가 이 글이 전반적으로 취하고 있는 냉소주의와 허무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한다면, 그 지적이 백 번 옳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이 취하고 있는 태도를 일종의 포즈, 수사, 과장, 위악이라고 읽어주길 바란다) 강제 없이 일치를 보는 논증적 토론의 합의 수립력의 형성이라는 하버마스의 기본전제는 뉴미디어 환경의 제공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문제를 사유할 능력이 있는 소위 지식인들이 새로운 민주주의를 구축하고 완성하는 첨병이 되어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며 그러기를 희망한다. 진짜 가치가 있는 뉴스가 온라인환경에서 재생산되고 존중받으며 사회적 공론화의 과정을 거치려면 보다 적극적이고 부지런한 참여가 있어야 한다. 광증에 가까운 행태를 보이는 키보드워리어가 아니라, 다양한 경험과 치열한 사유로 얻은 아젠다를 교환하는 진정한 의미의 오피니언 리더가 필요하다고 본다. '시민 없는 시민사회'라는 자조가 바뀌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하단 말일까? 앞서 이야기했듯이, 수고로운 것의 가치를 인정하는 건강한 마음을 모두가 공유하려면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나는 아직 답을 구하지 못했다.  


ps.
 인수위의 전횡들, 예컨대 '영어 몰입 교육' 따위의 황당한 정책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한다. 어느 조사에 따르면 '동의한다'가 50%, '동의하지 않는다'가 35%이다. 나는 이것이 자신이 이해관계를 갖지 않는 문제에 대한 대다수의 '무관심'한 태도를 방증한다고 생각한다. 이 정책은 황당하기 이를데 없는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동의한다'라는 애매모호한 답변을 유도함으로써 조선일보에서 지난 2주간 4번의 헤드라인을 통해 영어교육이 좋은 것이라는 '이미지'를 전달받는 것으로 갈음한 이에 관한 훈육된 감수성을 별 생각없이 표출한 것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나와 상관없는 문제는 '논의'들이 이루어지는 기왕의 공론장들, 즉 언론들에 의해 이러쿵저러쿵 결론된 것들이 대신 이야기해준다. 어차피 다 그런 거아닌가. 내 꿈은 상업영화들이 대신 꾸어주는 것이고 내 합리적 판단은 언론사가 대신해주는 것이다. 그것에 관해 정보를 수집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려는 시도는 너무 많은 비용을 요구하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더 '합리적 판단'이기 때문이다. 무서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