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시사상식

슬픈 봉기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5. 3. 02:59

 작년 대선 직전 20대 뉴라이트 집회를 보고난 뒤, 진보개혁성향의 20대의 정치세력화 가능성에 대해 상상한 적이 있다. 당시 바긔와 그 주변 세력들이 집권할 것은 명약관화했고, 어느새 계급론은 세대론으로 둔갑했으며, 하여 '88만원세대'가 당해의 키워드가 되었던 만큼.. 20대들이 일종의 군중이 되어 거리로 나오는 일이 있으리라 짐작, 혹은 희망했던 적이 있다. '뉴라이트'를 의식적으로 택하는 20대는 엄밀한 의미에서 20대일 수 없다. 그들은 젊음의 유일한 가치인 세상의 잘못을 고치고 변화시키려는 희망 대신 세상의 거대한 힘에 순응하고 물질을 탐하며 정의를 밀수하는 집단이다. 하여 그들은 신세대가 아니다. 그들은 이미 기성세대이다. 그러므로 나는 젊음이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할 수 있는 날이 있기를 기원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고, 명바기는 대통령이 되었으며 의회는 시정잡배들과 모리배와 사기꾼들로 가득 찼다. 사태는 예상보다 훨씬 더 암울하게 돌아가고 있다. 명바기는 고작 두 달을 집권했을 뿐인데, 그런데 너무나 많은 신호가 들려왔다. 대운하니 영어교육이니 하는 건 떡밥에 불과했고 그 밑으로 종부세 폐지, 상속세 폐지, 비정규직법안개정, 사학법재개정, 지방균형개발계획전면재검토, 법인세 감면추진, 노점상 전면단속, 출총제 폐지 확정, 금산분리 완화 확정, '노무현독트린' 전면재검토로 인한 대북관계경색, 그리고 소고기. 청와대 수석들과 내각은 명바기 정부가 '농민정부'인양 행세하고(나는 그들이 가진 것으로 밝혀진 농지가 이번 기회에 또 다시 가격이 오를 것이라 확신한다. 나는 이 나라 국민들의 근시안적 경험론과 이기주의에 질려버렸고, 세상은 그런 것이니까. 심지어 신정아가 살던 집값이 보도 이후 폭등한 것을 보라)  바긔가 한 일 중에 잘한 것이라고는 의료보험당연지정제 폐지를 재검토한 것뿐이고, 사실 그나마 2원화 운운이니 백지화라고 하기도 어렵다. 박근혜가 잘한 것이라고는 대운하정책에 반대한 것뿐이듯. '탄핵하자'는 내용의 현실성 없는 온라인 서명운동은 3주간 10만명을 모은뒤, 불과 최근 이틀만에 40만명을 더 모았다. 그 서명운동의 비현실성 탓에 수주 전에 그것을 보고는 웃고 말았지만,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든 자신의 분노와 불안을 표현하고 싶을 따름인듯하다.

 조심성없는 말들과 말들의 전쟁이 '3초 미디어'(성찰없는 quote들, 3초 분량의 그 편재하는 메시지들ubiquitous messages) 사이로 스며들고 있다. 정부는 그것을 괴담이라고 하고, 언제 사람이 100% 안전하게 살고 있느냐고 하고, 현 정부는 노무현 정권(공식 논평에서 '정권'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것이 정부 공보실에서 할 짓인가)의 설거지를 하고 있노라 하고, 이번만 봐주면 은혜를 갚겠다 한다. 나는 민족주의는 좋아하지 않으나 친일청산에 불쾌감을 표한다거나 실용주의 따위가 금과옥조인양하는 것도 우습다. 나는 경제학을 잘 모르지만 명바기가 나보다 더 모른다는 것은 안다. 그러한 와중에 인터넷 공간은 사실과 비사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공포와 혼란을 촉발시키고 있으며 따라서 모든 메시지와 모든 포스트는 격문이다. 나는 이 봉기가 반가운 한편으로 슬프다. 투쟁의 시절은 뜨겁고 감격스러워보이지만 사실상 언제나 그것은 슬픈 이야기이다. 나는 지난 80년대를 미화하려는 그 어떤 시도들에 대해 의심한다. 그 시절을 정말 치열하게 산 인간들은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없다. 그것이 객쩍게나마 승리한 기억이었고 성취한 기억이었을지 몰라도 그것은 분명 아픈 기억이고 반복되서는 안되는 역사이다. 나는 세상의 말들에서 격문이 아니라 연서를 보고 싶다. 자신이 타인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며, 타인의 삶이 더 나아지기를 바라며, 하여 더 좋은 삶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신뢰하는 가운데 전망이 생기는 것이고, 진보가 있다. 우리가 성취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상상이 가능한 시대를 살고 싶다. 투쟁하지 않아도 되고,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맞고 싶다. 그러나 세상은 사랑을 말할 때 죽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모든 섹스는 사치이며 모든 사랑은 공포다. 이러한 삶은 죽음의 유예이다.

 나는 한번도 스스로 운동권인 적이 없고 타인의 삶을 위해 내 삶을 포기한 적이 없다. 그것이 한없이 부끄러웁고 하여 오늘 밤에도 바람은 내 별을 스치고 생채기를 낸다. 나는 다만 또다른 별을 향해 손을 뻗어 그 별자리를 서툴게 매만져 본다. 손을 뻗어, 영웅을 만나고 싶다. 나는 부족하고 도량이 없으니, 다만 누군가 영웅이 나타났으면 하는 허황된 생각을 한다. 나는 위대한 독재자라면 민주주의를 버려도 좋다고 생각할만큼 이 현실에 속이 상한다. 그러고서는 또 어영부영 살아도 행복하고 싶을 따름이겠지. 그저 음악이나 듣고 술이나 마시며 헤헤 하겠지. 나는 이렇게 살아도 좋은 걸까. 그러나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서면 무엇이 달라지나. 나는 그저 진정한 철인 영웅들을 한번쯤 보고 싶다. 내가 아니라는 걸 아니, 내가 아니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