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시르와 왈츠를> 재현의 윤리학
‘애니메이션’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것은 가능한 것인가? 이러한 질문을 지가 베르토프에게 한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다큐멘터리의 기본적인 규범은 사실성에 대한 천착에서 출발한다. 영화의 역사(혹은 영화를 다루는 이론이나 비평의 역사)를 통틀어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구분고자 하는 논쟁은 다분히 역사적이고 맥락적일 수 있지만, 배우가 없고 연기도 없으며, 간접적인 자연 배경이나 문학적인 플롯이 없는, 제작자의 직접적인 ‘경험’과 실재(real)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필름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다는 것은 사실상 모순적이다. 광학기술optics과 그것의 기술복제가 가능해진 이후, 사진과 영상의 ‘현실 효과’ 혹은 ‘실재 효과’는 영화의 강력한 힘이었다. 실재와 실재 간의 상동성의 증명이 다큐멘터리의 사실성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인 것이다. 즉 다큐멘터리 영화가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대상은―픽션 영화의 그것이 꿈(dream)이라면― 삶(life) 그 자체인 것이다.
<바시르와 왈츠를>(이하 <바시르>)은 기본적으로 증언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인물의 증언을 취합하고, 그 증언들 사이로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는 시퀀스를 삽입한다. 이러한 증언은 기본적으로 해리성 기억 상실을 겪는 주인공(이자 영화의 감독)인 아리의 상실된 기억을 메우는 데 일조하게 된다. 그러나 <바시르>는 영화의 형식에서부터 다큐멘터리의 규범을 거스른다. 비록 영화가 실제 촬영된 장면 위에 동화 작업을 덧씌운 로토스코핑 기법을 다수 차용하고 있기는 하지만(특히, 전형적인 증언 인터뷰 장면에서),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은 실재 혹은 삶의 재현이라는 다큐멘터리의 핵심을 완전히 위반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인 특징을 다큐멘터리 픽션 혹은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그것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다루고 있는 대상 혹은 이야기(discourse)가 픽션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큐멘터리 픽션 혹은 페이크 다큐멘터리와 구분되어야 한다.
<바시르>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사실성’의 질료를 명확히 하고 있다. 그것은 ‘꿈’ 혹은 ‘상상(imaginary)’이다. 즉 이 영화가 ‘재현’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마인드스케이프(mindscape)인 것이다.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는 어디론가 달려드는 스물여섯 마리의 사나운 개를 쫓는 역동적인 쇼트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퀀스는 영화의 첫 번째 증언자인 보아즈의 꿈 내용을 재현한 것이다. 뒤이어 영화는 보아즈와 아리의 대화 시퀀스로 이어진다. 보아즈는 자신의 꿈을 해석하며, 그 꿈의 기원이 된 레바논 전쟁의 일화를 들려준다. 영화는 이 일화를 재현한 씬을 삽입한다. 물론 이 모든 장면은 상상된 것이다. 레바논 전쟁을 직접 촬영하여 로토스코핑한 것이 아니다.
<바시르>는 심지어, 몇몇 ‘증언’ 시퀀스까지도 단순한 로토스코핑이 아닌 전면적인 팬터지 시퀀스로 구성되어 있다. 두 번째 증언자인 정신과 의사인 친구 오리 시반과의 대화 씬에서, 대화하는 두 사람의 배경은 완전한 허구이다. 시반은 아리에게, 기억의 비겁함에 대해 상기해 주는 일화를 들려준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찍은 9장의 실제 사진과 1장의 합성 사진을 보여준 뒤, 합성 사진에 대해 설명하라고 하면 많은 경우 사람들은 실제로 벌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서 ‘기억’해낸다는 것이다. 그러한 설명을 예화로 설명하는 팬터지 시퀀스를 보여주는 것이다. <바시르>의 형식적 긴장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과, 자꾸 망각의 전의식으로부터 끄집어내지는 것 사이의 긴장. 그것은 어떤 사실을 재현하는 방식의 윤리성의 문제로 요약할 수 있다.
아리 풀만은 미디어와 가진 인터뷰에서 ‘망각이야말로 그림의 재료이다’라고 말했다. 혹은, 리샤르 댕도는 다큐멘터리를 기억의 재구성으로 정의하였다. <바시르>의 모든 쇼트들은 사실상 아리의 ‘기억’을 재현하고 재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바시르>는 로토스코핑 뿐만 아니라 모든 애니메이션 기법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정당성을 갖게 한다. 즉 증언 자체와 증언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증언을 통해 ‘되살려진’ 기억과 상상의 이미지를 최대한 주관적(혹은 주체적)으로 재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바시르>의 강점이다.
애니메이션의 특징은 그것이 회화적이라는 데에 있다. 회화에서 출발한 애니메이션의 이미지들은 ‘보여지기’ 위한 방식으로 재현되는 것을 전제로 하며, 텍스트에서 암시하는 재현의 정치들은 언제나 응시(gaze)의 방식으로 결정된다. 즉 애니메이션의 이미지 메이킹은 욕망의 언어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규범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애니메이션의 쇼트들은 각각 응시의 외화를 표시하는 구체, 말하자면 오브제 쁘띠 아(objet petit a)의 물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예컨대 상업 애니메이션의 특징은 상상적인 이상, 완전히 통일되거나 거세의 공포가 없는 이상형으로서 존재한다. 이는 윤리적 고려가 없는 이상화된 선취(anticipation)다(예컨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미남미녀 등장인물을 보라). 이러한 응시와 재현의 체계는 간혹 이미 주어진 ‘빗금 친 대상’이 아니라, 자신이 상상한 이상적인 대상, 완전한 거울상을 창조하고 그것을 응시하고 모방된 것이다.
<바시르>에서 세 번에 걸쳐 제시되는 아리의 레바논 전쟁에 대한 불완전한 기억 시퀀스는 그러한 관점에서 대단히 갈등적이다. 아리는 어느 해안에서 전우들과 발가벗은 채 물속에서 떠 있다가, 하늘을 가득 매운 조명탄의 빛을 안고 해변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군복을 챙겨 입고, 도시로 들어서면 바시르의 초상 포스터가 붙어 있는 골목길이 나오고, 그 골목길을 지나면 아낙들이 울부짖으며 아리의 곁을 지나간다. 아리는 자신의 꿈속에서 제시되는 이 영상이 자신의 기억의 체계에서 배제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 영상에서 함께 등장하는 아리의 전우이자 세 번째 증언자인 카미 찬 역시 그 장면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영상은 레바논 전쟁에 대한 아리의 어떠한 가치나 신념, 태도를 증명하지는 못한다. 당초 그 영상은 꿈-이미지이며, 따라서 자아의 쾌락원칙 경제학에 의거해 검열과 조작에 의해 왜곡된 환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리는 이 장면의 객관적인 ‘진짜(real)’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 증언을 수집하고 자신의 기억을 올바른 방식으로 재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이 <바시르>가 기억을 재현하는 과정을 통해 체화해내고 있는 윤리성이다. 아리 풀만은 따라서 영화의 응시, 즉 자신의 기억을 촬영하는 행위의 체계로서의 ‘정직한 카메라’를 기어코 들이댄다. 카미가 자신을 촬영하고 싶다는 아리의 말에 ‘스케치는 되지만 카메라는 사양한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따라서 의미심장하다. 카미는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하고 싶어 하지 않으며, 실제로 다른 증언자들이 직접 출연한 것과 달리 대역 배우가 기용되어 촬영되기도 하였다.
보통 영화, 혹은 영상이 전쟁을 재현하는 방식들은 그 고통을 외화한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편향의 혐의를 지우기 어렵다. 수많은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들에서 제시되는 전쟁의 스펙타클은 차치하더라도, 전쟁의 풍경을 ‘객관적’으로 다룬다고 하는 저널리즘의 영역에서조차 전쟁의 풍경들은 미학적인 관점에서 제시되고 해석된다. 보들리야르의 급진적인 주장,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일갈은 재현의 사실성과는 별개로 대상을 이미지화하고 부화함으로써 그 추체험을 원체험으로부터 분리해버린다. <바시르>에서도 전쟁 광학기구의 재현 방식을 따라 전쟁을 묘사하는 쇼트들에 제시된다. 혹은, <바시르>에 등장하는 정신과의사 솔로몬은 병사들이 전쟁의 트라우마를 극복해내는 방법에 대해 증언하는데, 병사들은 전쟁에서 경험한 것들을 자신이 가상의 카메라를 통해 바라본 전쟁 영화의 한 장면으로 상상해 버리는 전략을 택한다는 것이다.
<바시르>의 초반부, 몇몇 증언의 재현이나 아리의 기억을 재현하는 시퀀스에서 레바논 전쟁을 묘사하고 재현하는 방식 역시 그러한 전환서사적인 클리셰로부터 멀지 않다. 예컨대 카미는 상륙작전을 위해 탑승했던 배 위에서 겪었던 환상적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카미는 배멀미를 견디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을 때, 자신이 물 속에서 걸어나온 한 여인의 품에 안겨 물 위를 떠돌며 자신이 타고 있던 배가 폭격당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것을 팬터지 시퀀스의 하나로 재현한다.
또 다른 증언자인 로니 다약의 증언 내용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로니는 전쟁 당시 처음 참전할 때의 기억을 ‘소풍’처럼 기억하고 있으며, 전차 위에 올라 사진을 찍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이를 강화한다. 전차가 습격당하고, 해변에 숨어 있다가 헤엄을 쳐서 부대로 복귀하는 도주 장면은 아리의 꿈이나 카미의 보트 환상과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로니는 바다 위에 떠다닌다. 이 장면의 바로 직전에 로니는 자신의 어머니와 자신의 유착 관계를 언급한다. 이러한 몽타주는 바다의 이미지는 자궁-양수의 그것과 이어지게 한다. (아리의 꿈에서 자신과 전우들이 벌거벗고 있었던 것이나, 카미의 환상에서 카미가 거대한 여인의 사타구니 위에서 물 위를 헤엄쳤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즉 거대한 물, 암전된 액체의 이미지는 죽음을 수용하는 물질인 동시에 생명을 잉태하는 물질이라는 양가적 속성을 가지며, 바슐라르가 말하는 존재가 삼투할 수 있는 심연으로 제시된다.
아리의 기억에서도 전쟁의 기억은 미학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카미와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올 때 기억해낸 장갑차에서의 총격 장면을 보자. 이 씬은 기본적으로 기관총을 난사하고 있는 장갑차는 소실점 너머에 있는 빛을 향해 도주하는 꽉 찬 프레임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마침내 당도한 광원지에서, 전사한 사체는 과도한 콘트라스트를 통해 눈부시게 빛난다.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분명 아리의 보이스-오버에 립싱크되어 있어서 그것이 전면적으로 아리의 기억임을 증명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빛의 사용은 분명 의도적으로 전쟁의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왜상 제시의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바시르>에서 빈번이 사용된 바흐의 하프시코드 협주곡이 사용된 장면의 경우에도 대부분 전쟁을 미학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레바논의 숲에서의 총격전 시퀀스가 그러한 예이다. 혹은 영화의 오리지널 스코어가 아닌 삽입곡의 경우(Cake의 <I Bombed Korea>를 개사한 <I Bombed Beirut>나 PIL의 <This Is Not Love Song>) 재현된 기억과의 모종의 충실도를 가지고 삽입되어 있다(등장인물들이 그 노래를 부르거나, 뮤직비디오가 등장하거나, 나이트클럽에서 연주되기도 한다). 이러한 삽입곡이 등장할 때 영화는 마치 뮤직비디오처럼 현란해진다.
영화의 제목이 된 ‘바시르와 왈츠를’ 추는 시퀀스를 전후하여, <바시르>는 그러한 재현의 왜상 제시 전략을 탈피한다. 아리는 바시르의 죽음을 전해 들은 직후 베이루트로 진격한다. 베이루트의 비행장에 들어섰을 때, 아리는 비행장에서 세상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여행을 온 것이라는 기분을 느낀다. 그러다가 문득 지금은 전쟁중이며, 자신은 참전중임을 깨닫고 풍경을 다시 둘러본다. 방금 전 멀쩡하게 이륙을 준비하고 있던 비행기들의 잔해가 보이고, 비행 스케줄표는 이미 오래전에 멈춰 있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아리는 베이루트 시가로 진격한다. 그리고 거기서 종군기자인 론 벤이샤이를 목격한다(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스튜디오 증언을 하는 증언자인 론 벤이샤이는 <바시르>가 다큐멘터리의 덕목을 갖게 하는 데 큰 공언을 하는 등장인물이다). 시가전에서 레바논군의 저격수에 의해 고전하고 있을 때, 영화의 증언자 중 한 사람인 프렌켈이 기관총을 들고 응전한다. 그리고 그때 쇼팽의 왈츠 음악이 흐른다. 카메라는 종군기자의 핸드-헬드처럼 프렌켈을 포착해낸다. 그리고 음악이 멈춘다. 역설과 아이러니로 가득한 이 장면 이후 <바시르>는 편재하던 팬터지를 거두어들이기 시작한다. 뒤이어 바로 베이루트의 참상을 제시하고, ‘바시르’라는 인물에 대해 스케치한 뒤 <바시르>는 다시 아리의 꿈-이미지에 집중한다.
친구 오리 시반은 아리의 꿈-이미지가 사브라-샤틸라의 학살과 연관이 있으며, 그것이 왜상으로 제시된 이유는 홀로코스트의 기억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아리는 마침내 자신의 전우가 아닌 사브라-샤틸라 학살 당시를 기억해내는 증언자 하라지를 만난다. 종군기자인 론 벤이샤이도 그중 한 사람이다. 이전까지 친구와 대화하는 장면이 술집이거나 친구의 집 등으로 설정되어 픽션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었던 데에 반해, 론 벤이샤이와 하라지의 증언은 스튜디오 인터뷰의 로토스코핑을 사용함으로써 증언 다큐멘터리의 객관적 진폭을 만들어낸다.
영화의 결말부는 이들의 증언에 따라, 사브라-샤틸라 학살의 전모를 전면적으로 재구성해내면서 아리의 꿈-이미지의 정체를 상세히 알려준다. 하늘을 가득 채운 조명탄은 아리가 직접 쏘아올린 것이다. 그리고 그 조명탄은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팔랑헤)가, 팔레스타인 포로를 학살하는 것을 돕는 역할을 했다. <바시르>는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내고, 아리의 꿈-이미지에서 만난 여인들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바로 이때 <바시르>는 실사로 전환된다. 지속적으로 흘러나오던 테마음악이 멈추고, 여인들의 절규가 현장음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한 사체의 초점 없는 눈빛을 담은 프리즈프레임을 보여준 뒤 암전하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아마도 벤이샤이에 의해 촬영되었을, 학살 현장을 담은 다큐멘터리 필름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1분이 채 되지 않는 이 시간의 임팩트는 매우 크다. 이 한 씬의 무게는 영화의 나머지 전체의 무게와 사실상 같다. 전쟁의 참혹함을 더할 나위 없이 미학적으로 왜곡했던 환상들을 경유하여 전쟁에 관한 기억의 실재를 만나게 하는 이러한 영상적인 대조는 매우 강력한 실험이자 대담한 고백이다.
<바시르>를 기억의 재현방식에 관한 윤리적 성찰을 담은 다큐멘터리 필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마지막 장면 때문이다. <바시르>의 증언자들은 하나같이 ‘기억은 우리를 가야할 곳에 가게 한다’고 말한다. 보아즈나 시반, 그리고 아리 풀만은 사브라-샤틸라가 마치 유태인이 죽어간 바르샤바와 같으며, 이스라엘군이 한 일이 나치와 같다고 순순히 인정한다. 비록 영화가 다루는 사건의 팩트에 관한 공방은 영화와 별개로 논쟁의 영역에 남아 있지만, 자신의 기억 속 왜상을 정돈하고 실재의 그것과 연결시키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모든 기억은 사실상 개인적이며, 엄밀한 의미에서 온전히 재현될 수 없다. 기억은 그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잊어버리면 사라진다. 그러나 ‘집단적인 교훈’은 존재한다. 바로 영화가 어떤 환상적 재현을 통하여 일종의 규약으로 남기는 바로 그것이다. 즉 영화가 재현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기억의 재현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집단적 약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인류가 보편적으로 중요시해야 할 어떤 중요한 사실에 대한 시각적 이미지의 결절이다. 애니메이션은 ‘쿨’하다. 애니메이션의 이미지는 환상적이어서, 사람의 마음에 보다 천착한다. 말하자면 <바시르>를 통해, 애니메이션-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은 검증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