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재현에 관한 고민을 다루었다..라고 하면 의아해 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더러는 수긍할 것이다. "박진표 감독작품"이라는 타이틀 크레딧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극화한 사랑이야기 입니다"라는 점을 당당히 명시하며, 구체적인 인물과 구체적인 장소와 구체적인 시간을 들이댄다. 심지어 고증도 철저해서(두 주인공이 처음만나는 철도 건널목 옆 영화포스터 게시판에 걸린 색이 퍽 바랜 영화포스터는 <신라의 달밤>이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철저히 부순다. 소소한 사실적 재현은 그러나 실제로는 무용하기만 한데, 그것은 극중 김석중의 사연을 기사화하려는 여성지 기자들의 태도와 맞닿는다. 영화의 제목은 심지어 문제의 여성지 기사의 제목과 같다. 남의 실화를 이용해 제 밥벌이에 급급한 이기적인 극화의 동기를 보여주는 일이 스스로에게 짐이될 줄을 알면서도 감독은 왜 굳이 해당 시퀀스에 거의 사실상 제재적인 지위를 부여한 것일까. 영화가 온전히 서려면, 그것은 재현의 윤리적 지점을 영도에서 다시 시작하겠다는 일종의 고백적 제언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즉 그 시쿠너스는 자신의 재현이 거스르는 일단의 윤리적 문제들을 스스로 잘 알고 있음을 자인하는 것이다. 실제로 감독의 전작 <죽어도 좋아>는 사실상 재현 그 자체였으며, 재현이라는 형식적 실험과 인간의 보편적 사랑이라는 매력적인 소재를 꽤 적절히 조합시킨 실적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너는 내 운명>의 '재현'은 스스로의 윤리적 자인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적실치 못했다. 일단 정말 객쩍은 결말 탓이 첫째고, 둘째는 서사구조가 지나치게 상업적이고 탈-실화화된 탓이다. 황정민과 전도연이 연기한 인물들은 영화의 내재적인 자기완성도의 측면에서는 더할나위없는 호연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 과연 그들이 연기한 연애와 순정이 인물들을 둘러싼 매매춘과 보건의료정책, 농촌의 어두운 현실과 에이즈여성에 대한 차별 등을 관통하여 재현되고 있을까? 영화가 기대고 있는 유일한 정치적, 윤리적 진실은 전은하가 김석중과 결혼을 결심할 무렵 심수봉의 <사랑밖에 난 몰라>를 부르며 못내 서러워 울 때 느껴지는 울림 정도이다.
그러나 <사랑밖에 난 몰라>의 힘은 임순례가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써먹었고, 불가해한 사랑의 힘 운운은 송해성이 <파이란>에서 한 번 써먹었다. 그런데 이 두 이야기는 엄밀히 대단한 비극적 서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그들의 자기완결성 내에서 납득할만한 결론은 그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는 내 운명>의 경우에는 그 방점들이 치닫는 결말이 대단히 멋적다. 에이즈는 치료될 수 없고 그라목손은 치사율 100%의 맹독이지만, 그 비극의 끝은 끝내 제시되지 않으며 그저 가슴이 조금 뻐근해 보라는 듯 황급히 영화는 엔딩크레딧을 올린다. 죽음 없는 사랑이 사랑 없는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음을 필름의 길이는 외면한다. 이러한 결말 방식은 마치 결혼한 뒤의 비루한 일생을 언급하지 않는 트렌디 드라마의 결말과 비슷하다. 대부분의 나이브한 상상력을 가진 관객들은 이 영화로부터 자신의 상상력을 닫으며 영화를 기각할 것이며, 보다 치열한 상상력을 가진 이들은 다른 이유에서 또한 이 영화를 기각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이 영화는 실화를 재현한 영화가 "아니며", 결국 오로지 "극"만 남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HIV에 감염된 여자 복역수의 사랑이 남성적 관점에서 포착되어 재구된 그럴듯한 팬터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아시스> 같은 영화도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비난의 여지가 다분한 바가 사실이었고, 심지어 <파이란>도 욕먹는데 <너는 내 운명>은 ('실화를 재현했다'고 표방하는 바에!) 가련한 여인의 삶에서 여인의 삶을 쏙 빼버린 마냥 나긋나긋한 사랑 영화가 되었으니, 윤리적 정치적 예술적 타당성을 확보할 수 없게 되버린 까닭이다. 전언에 따르면 또한 실제의 사연은 그리 아름답지도 못했다 하니, 실화의 힘을 '써먹어' 보려 했던 감독의 의도에 물음표가 겹친다.
당겨 말해, 어떤 관점에서 <너는 내 운명>은 사랑에 관한 어떤 나쁜 영화일지도 모른다, 라고 하면 다소 미안하지만, 어쨌든 그러하다. 극의 줄거리(fabula)를 요약해보자, 다방레지를 하다가 에이즈에 걸린 여성을 순박하고 착한 농촌 노총각이 마침내 구원한다? 그렇게 다이어트시켜놓으면 뻔한 창녀컴플렉스 서사에 불과하다. 일관된 여성주의적인 관점에서 영화가 빛날뻔한 지점은 나문희가 연기한 석중 모의 시선들과 몇 마디 대사들 정도인데, 실은 서사구조 안에서 석중모는 그저 석중의 욕망을 욕망하는 하나의 투사체에 불과하며, 기실은 비겁에 가까운 하나의 맥거핀이거나 주동적 보조인물에 그친다.
이러한 결점들 가운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그렇다면 감독은 애당초 이 통속적이며 극-현실적이다 못해 초-실화적인 재구성이 여성지 기자들, 즉 '선수들'을 조롱하기 위핸 농담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에 따옴표를 치고 있을까? (충무로 제작자들을 '선수'라고 부르기 때문에, '선수 끼리..' 라는 말은 어쩐지 그러한 조롱조로도 들렸다면 과장된 감상일까) 만약 그러하다면 감독은 어째서 '박진표 감독작품'의 크레딧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이 모든 의문은 결국 감독 본인의 입으로 들어야하겠지만, 그렇다는 점은 결국 영화가 내재적인 자기완결성에 심각한 모순과 오류를 지니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