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다른 애정으로 가꾸고 보듬는 그런 블로그가 아닌지라, 연말 결산 류의 글을 올리는 것이 조금은 우습기도 하다. 당장 지난 해의 글이 여기서 멀지가 않다. 한 해 동안 내가 쌓아올린 것이 많지가 않아서 그런가 싶다. 아홉수가 끼어있던 한 해가 애매하게 지나간다. 이천십년이 된다고 작은 것 하나도 단번에 달라지는 건 아니겠지만, 이제 어디서 나이를 물어보면 여덟이라고 이야기해야 한다는게 썩 기분 좋지는 않다는 게 찝찝하다.
문득 생각해보면 지난 몇해동안 참 속절없이 살았지 싶다. 이천삼년 꽃샘추위로 길 위에 살얼음이 진 어느날 아침, 신촌역에서 꾸역꾸역 학교쪽으로 기어오르다가 성산로를 가로지르는 횡단보도 앞에서 이상은의 <새>를 듣다가 별안간 나는 조금 슬퍼졌다. 수업을 듣는둥마는둥하고 돌아와서 휴학신청을 했다. 꽃이 지고 등을 타고 땀이 흐르는 계절까지, 여의도로 출퇴근하고 간간히 글을 쓰고 그림을 배우다가 여행을 갔다. 다시 기온이 내려갈 즈음에 결국 군대를 갔다. 대학에 와서 한 번도 학교 생활에 재미를 붙여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달리 다른 데 마음쓰고 열의를 다한 적도 없어서 참으로 낯뜨거운 삶을 살았다. 단 한 순간도 나는 어른스럽지 못했다. 그 나날들은 첫번째 종지였다.
제대 후 시작된 이십대 중반의 후반전도 양상이 개선되지 않았다. 삶에 미련이 없는 주제에 난 두려운 게 많아서 고슴도치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굴러다니기나 했다. 하여 여전히 학교는 재미가 없었다. 피디 따위가 되겠노라고 깨작거려봤지만, 지금의 결과가 말해주는 게 무엇인지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소설은 딱 한 편을 쓰다 말았다. 읽지 못한 채 쌓여있는 책들, 저급해가는 취향, 줄지 않는 체중, 꽉 찬 재떨이 등등. 이천구년은 지난 오년간의 미미미미 하는 삶을 느슨하게 반복한 한해였다. 두번째 휴학, 두번째 인턴, 두번째 복학, 두번째 구직(과 실패)과 더불어, 어른이 되고나서 두번째 이별을 받아들여야 했던 한 해가 되었다. 으스스했다. 덕분에 이젠 난 삶이 조금은 덜 두렵기도 하다. 잘 가라 이천구년. 네 덕분에 조금은 무던해진 것 같다.
하여 이틀 남은 이천구년 끝자락에 이것저것을 복기해본다. 길다면 길었을 연애의 끝자락이기도 하고, 길다고 밖에 할 수 없을 학부 생활의 끝자락이기도 하다. 가끔은 생각나지 않는 것이 있어서 손가락을 허벅지에 대고 옆으로 누운 8자를 그리며 초조해한다.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는, 눅눅하고 오래된 책장처럼 기억이 뻑뻑하다. 이제야 난 내가 누군지, 내가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바라고 있었는지 조금 더 솔직해지고 있는 것같다. 아직 관념적인 말들에 갇혀 있지만, 약간은 더 적나라한 말도 할 수 있지 싶다. 다 자란 수컷 짐승처럼 살지는 못해도, 어른 남자 사람으로 살고 싶다. 어른 남자 사람은 자기 욕망 앞에 당당한 존재다. 그리니 지금 내가 어떻게 살 생각이고 살아갈 것이며, 무엇을 바라는지에 대해서도 담담히 얘기하고 움직이는 인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덧붙여 아직 나는 젊다. 젊은 인간은 내일이 어떻게든 오늘과는 다르리라는 예감에 사로잡혀 또 한 걸음을 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다시 젊게 살련다.
- 올해의 사건 : 그들의 연애
: 어쩌면 나는 나의 연애가 끝났음을 올해의 사건, 이라고 말해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건 사건이라기보다는 그냥 그렇게 된 일에 가깝지 싶다. 다만 그저, 서로 간직하고 있는 약간의 비밀들을 나누며 서로의 어두운 눈 앞에 빛이 되기를 바랐던, 그래서 아주 잠깐 가장 눈부신 때를 함께 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한다. 우리는 어쩌면 서로 이렇게 될 것을 처음부터 알고 바라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 누구도 그립지 않아서 외롭지 않을 때까지 잠자코 있어볼 작정이다. 분별 없고 인내가 없어 성급한 판단이 있을줄로 안다. 넌 우리 사이에 대해 심상한 마음뿐이겠지만, 나는 아직 꼭 그렇지만은 않으니 말이다. 네가 이 글을 읽거든 나를 잘 단속해주렴. 알고 있겠지만 가끔씩 나는 내 두려움이 또 두려우니까.
이준희는 내가 열두살 때 만난 친구다. 이재승과 더불어 만나거나 했다. 막 사춘기에 접어들던 때에 만나 사귀었다. 덕분에 이런저런 삶의 변곡점들을 함께 해오며, 서로의 기질이나 취향과는 별 관계 없이 친교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생각해보면 이것도 일종의 삼각관계인지라 준희와 재승이 더 친하던 때도 있고, 혹은 나와 준희가, 나와 재승이 더 친하던 때도 있(었나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있다고 친)다. 하지만 어쨌든 셋은 만나면서 단 한 번도 서로 의심하거나 질책해 본 적이 없어서 좋은 친구다(혹은 좋은 친구이기에 그러지 않았는 것이 맞겠다).
이자해는 스무살 신입생 때 만났다. 이자해는 말하자면 인문대 동기의 허브였으니, 사실 나와 이자해가 가장 친해진 것은 요 며칠 사이일는지도 모르겠다. 김진우 등과 더불어 같은 학과에 진학하고 비슷한 것들을 배웠기에, 우리는 가끔 친구라기보다는 동지에 가깝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다.
쉽지만은 않은 시절이다. 하지만 힘내라고 하지 않겠다. 그냥 오래 신의를 잃지 말고 함께 하길 빈다. 덕분에 요즘 덜 외롭고 더 즐겁게 사는 것 같다.
그밖의 사건들? 연초에는 스브스에서 일을 했고, 여름 동안에는 어영부영 살았고, 가을에는 진로를 바꿨고, 겨울에는 술을 먹고 있다.
덧붙이자면.. 요사이 한명숙 전 총리 비리 의혹이나 유시민을 중심으로 한 국민참여당 창당 과정 등이 썩 개운치는 않다. 정치라는 게 늘 개싸움으로 흐르는 것이 생리인줄은 알면서도, 불과 반년밖에 지나지 않아 고인의 유지는 얄팍한 구호로만 남은 채 주변에 흙탕물이나 끼얹고 있는 꼴이 같잖다. 여당도 여당이지만, 진보정당들을 포함해 야당들의 하는 짓들도 기꺼운 데가 하나도 없다. 나는 노 대통령 재임 시절, 대통령으로서의 그를 썩 좋아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해했을 뿐이고, 절반 정도는 승복할 수 밖에 없을 따름이다. 그래도 다만 그가 죽음으로 지키고 싶었던 무언가가 있다면 다만 사랑이리라 믿었다, 사랑이란 말이 낯간지럽다면 진정성 정도로 해두자. 그가 대통령이 되던 순간은, 혹자는 후보단일화 따위의 이야기를 꺼내기도 하겠지만, 그 어떤 정치적 타협도 계산도 없이 온전한 정치가 가능하리라 생각하게 하는 어떤 아우라가 있었다. 결국 정치란 게 표싸움인 건 애진작에 알지만, 그 '표싸움'이라는 것의 본질은 곧, 투표 행위 따위로 치환될 수 없는 저마다의 진심과 열의의 표현인 것을 유시민 등이 잊지 않았으면 한다.
- 올해의 영화 : <up>
픽사는 말하자면 영화예술에 있어서의 현대판 바우하우스인지도 모르겠다. 바우하우스에 클레, 몬드리안, 칸딘스키, 반 데어 로에 등이 있었다면 픽사에는 브래드 버드, 존 레스터, 앤드류 스탠튼 그리고 <Up>의 피트 닥터 등이 있는 셈이다. <Up>은 애니메이션으로서도 훌륭하지만, 영화의 초반부에 나오는 5분여의 한 씬은 영화사에서 길이 남을 센티멘트를 선사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가끔은 다시 봐도 눈물이 핑 돈다. 대사가 없는 센티멘털한 장면이라는 점에서 <Wall-E>의 초반부와도 비교할 수 있을 텐데, <Wall-E>의 쓸쓸함과 외로움, 적막함이 공시적이고 구체적인 감정이라면 <Up>의 그것은 보다 보편적인, 우리 인생의 '통시적 시간'에 대한 놀라운 통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 <똥파리>, <Gran Torino>, <Inglorious Bastards> 등을 재밌게 보았다. <에반게리온 : 파>, <District 9>, <Star Trek>도 재미 있었고. 언젠가 올해 본 영화들을 주욱 정리하고 몇 마디 코멘트라도 올리는 포스트를 올려볼까 싶다. 가장 최근에 본 영화는 <집행자>와 <호우시절>이었는데 두 편 모두 별로였고, 특히 <호우시절>은 <마더> <박쥐> <잘 알지도 못하면서> 등과 더불어 한국영화 평론/팬덤들이 좋아라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는 그렇고 그런 영화여서 기분이 삼삼하지 못했다. 참고로 올해 본 영화 중에 가장 구린 영화는 <박쥐>였다.
2009년 놓친 보고 싶은 영화 : <화이트 리본> <예언자> <허트 로커> <업 인 디 에어> <도쿄 소나타> <24 씨티> <와일드 그래스> <시리어스 맨> <낮술> <걸어도 걸어도>.
- 올해의 배우 : 클린트 이스트우드(<그랜 토리노>). 동림 할아버지의 마지막 주연작이 되지 않을까? 물론 알랭 래네도 아직 영화를 만들고 있으니, 이스트우드도 앞으로 몇년 더 영화연출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볼 수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자신의 영화적/정치적 유산을 상속해내고자 하는 어떤 비장한 선언처럼 읽히기도 하기에 아마 더 이상 직접 출연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 본다. 더군다나 곧 개봉한다는 그의 신작에는 그의 아들이 출연한다고 하니.. 더욱 그런 심증이 굳는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의 배우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 올해의 음반 : <Popular Songs> of Yo La Tengo
올 한 해는 음악적으로는 참 풍성했던 것 같다. 잘 챙겨서 듣지도 않았는데도 들을 게 많았다. 욜 라 텡고의 새 앨범에 관해선 지난 글로 대신함. 당시 쓴 글에 적은 별점으로는 손드레 레르케의 다섯개에 밀렸지만 이후 순위가 바뀌었다.
그 외의 후보로는 물론 매닉스, 도브스, 손드레레르케 등이 있지만 각설하고.. 가장 많이 들었던 앨범 중 하나는 리쌍의 6집이다. 한국 가요계에는 항상 언더와 오버의 애매한 경계에 있는 뮤지션들의 팬덤이 가장 솔리드해지는 기현상이 있는데, 리쌍은 어쩌면 좀 예외적인 듀오였다. 단적으로 힙합씬에서는 무브먼트에 디스를 자주 당하던 기억이 나고.. 히트곡도 꽤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에픽 하이인 것은 아니다. 이번 앨범은 참 적나라하고 솔직해서 마음에 든다. 젊은이의 삶을 그려내는 데 성공해서 기묘한 팬덤을 얻은 장기하와 얼굴들, 의 앨범이 좀 위선처럼 느껴지는 것에 매우 대조적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힙합 앨범이라고 할 이번 앨범에서 만날 수 있는 건 한국 팝-록씬의 최신 경향이었다. 가장 최근에 들었던 건 루씨드폴의 새 앨범인데, 전업 선언을 한 그가 왜 음악적으로 답보하고 있는 것일까 아쉬운 앨범이었다.
그 외에, 언급하지 않았던 좋았던 앨범들은.. 이소라 <7>, Placebo <Battle for the Sun>. Lily Allen <It's not me it's you>, Sonic Youth <the Eternal>
- 올해의 싱글 : 이소라 <track 3>(사랑은 언제나 그곳에)
전작(<눈썹달>)이 워낙 역작이었던지라, 그리고 <바람이 분다>의 잔상이 참 길게 간지라 이소라의 새 앨범을 듣는다는 것은, 그녀가 새 앨범을 만들었을 때의 각오나 용기를 약간이나마 나눠받아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소라는 어쩌면 힘을 모두 빼고 담담하게 이 앨범을 만들었지 싶다. 첫 트랙의 '참 쉬워 해봐'라고 하는 읊조리는 가사가 묘한 위로를 준다. 3번 트랙, 나는 '사랑은 언제나 그곳에'라고 기억하는 이 노래는 따라부르며 슬며시 웃게 되는 진솔한 '노래'였다.
그 외에.. 올해의 '소절'은 '그대를 사랑해 말럽'(카라 <허니>)..
덧붙여, 작년에 나왔지만 올해 들어서 좋았고, 그래서 적지 못했지만 <가장 보통의 존재>와 <앵콜요청금지>는 2000년대 인디 팝-록 씬의 가장 아름답게 조용한 음반이다.
- 올해의 책 : 이석원 <보통의 존재>
어쩌면 이석원의 이 책은 타블로나 구혜선의 소설, 배용준이나 배두나의 사진집 등과 묶여 그렇고 그런 별볼일 없는 책이라고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직 절반 조금 넘게 읽었을 뿐이지만.. 띠동갑인 이석원의 진솔한 책을 읽으면서 내 삶도 함께 되돌아본다. 사춘기에 <동경>과 <청승고백>을 듣던 나는 다시 <아름다운 것>을 듣고 있다. 아포리즘이라고 부르기엔 생각이 깊이가 좀 민망하고, 에세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덜 문학적인, 그냥 '공개일기'인 이 책은, 역시 띠동갑인 막내 삼춘과 유년기를 보냈고 천리안 '돼지띠 동호회'를 통해 사춘기를 보낸 내게 도착한 솔직한 서신 비슷한 느낌을 준다.
연애란? 그에 의하면, 누군가의 필요의 일부가 되는 것. 그러다가 경험의 일부가 되는 것. 나중에는 결론의 일부가 되는 것. 이란다.
그 외에.. <혁명을 팝니다>의 조지프 힉스가 쓴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최종렬의 <사회학의 문화적 전환> 등을 유의미하게 읽었다.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는 감동적인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안팎으로 뜻깊은 책이었다. 뉴레프트리뷰 한국어판 창간호도, 오래 붙잡았던 중요한 책이었다.
올해 나오지 않은 책 중에는.. 알랭 드 보통의 <불안>, 비비안 포레스테의 <경제적 공포> 따위를 읽으며 구직생활의 구질구질함을 견뎠다. 프랭크 런츠의 <먹히는 말>과 고경태의 <유혹하는 에디터>를 읽으며 진로를 수정했다. GQ의 통권 100호를 기념품처럼 책꽂이에 꽂아두었다.
올해의 책, 부문에 소설이 한 편도 없는 건.. 내가 정말 올해엔 소설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 정도를 제외하면 끝까지 읽은 소설책이 한 권도 없다.
내년에는 딴 건 둘째치고 책이나 좀 더 진득하게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항상 여러개의 책을 동시에 읽는 버릇이 있는데, 그러다보니 읽은 책들의 사유가 좀처럼 일관되게 깊지가 않다. 소설책들도 다시 읽어야겠다. 내 삶의 우울은 어쩌면, 내 생각이 계속 '이야기'로부터 멀어져 있어서 그런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짧은 삶이었지만, 최근 몇년간 이야기로부터 떨어져지낸 시간들은 꽤 지리멸렬했지 싶다.
다만 올해의 시. 자조적으로 요새 '나는 하루 하루 똥만드는 기계일 뿐이지' 따위 이야기를 하고 다녔는데, 사실 이 시 덕분에 생각난 자학 개그였다.
">">">">변기를 닦다
똥이 튀어 변기를 닦았다
나의 윤리
불혹이 넘어 겨우 찾은
생활의 윤리
내 방황의 뿌리가 여기였는가?
그 이후로는
소변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고
경솔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고
가난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고
돈을 성욕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고
바람 속을 걸어본다
엿새째 이어지는 설사를 나는
논어를 공부하듯
복음서를 공부하듯 엄숙히
내면에 들여본다
지린 속것도 몰래 헹구어 내놓고는
윤리를 생각한다
윤리의 무늬를 지우고
윤리가 감춘 죄를 생각한다
설사에 대해서
불현듯 고장난 장에 깃든
사랑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슬비는 새벽 내내 처마 끝에 모여들어 한방울씩 떨어진다
- 올해의 방송 : <남녀탐구생활>(<롤러코스터>) (TVN) (이성수김경훈 연출, 김기호김지수 대본), <지붕 뚫고 하이킥>(초록뱀, MBC) (김병욱 연출, 이영철, 이소정 각본)
올 초에 스브스에서 일하며, 시사교양이 아니라 예능쪽으로 생각을 바꾸고 나서 이런저런 예능 프로들을 많이 보았다. 틈틈이 챙겨보는 <빅뱅이론>같은 시트콤이나, 몰아서 본 옛날 미드 <스투디오 60>도 좋았다. 연초엔 온스타일의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가 재미있었고, 최근엔 QTV <예스 셰프>도 즐겨 봤다. 사실 리얼리티-서바이벌 쇼는 중간만 가도 다 재밌는 것 같다. 그런고로 <수퍼스타 K>의 '리얼리티'나 <디 에디터스>의 '리얼리티'가 서로 다른 것을 재현하고 있음에도 어쨌든 그 광폭한 스펙트럼 사이에서 재미의 길을 잃지 않는다.
그런데 진짜 '리얼리티'는 사실 <남녀탐구생활>에서 재현되고 있기도 하다. 혹자는 <남녀..>를 두고 '예능판 홍상수'라고 이름붙이기도 했는데,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말이다. <남녀..>와 홍상수 영화는 모두 인생의 최저점들, 일테면 치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고 일테면 위선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들을 툭툭 건드리며 독설 아닌 독설을 내뱉는다. 홍상수 영화와 <남녀..>가 다른 점은,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들의 '우리'는 일군의 위선-지식인들에 한정되는 측면이 있고, <남녀..>는 갑남을녀 모두를 포괄하는 보편적인 힘이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홍상수 영화가 자기애라면, <남녀..>는 이미 대상애의 성숙한 시선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홍상수 영화를 보면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지만, <남녀..>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한편으로 타인에 대해 눈길을 건네게 된다. '남자 여자 몰라요 여자도 남자 몰라요' 라는 '선언'이 따라서 짤막한 꽁트가 끝나면 '남자는 그렇단 말이지? 여자는 그렇단 말이지?'라는 조응으로 끝난다는 건 정말이지 신기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지붕 뚫고 하이킥>은 전작 <거침없이 하이킥>과 거의 같은 이야기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 훨씬 더 드라이하다. 따라서 조금 덜 재밌지만 조금 더 진지하다. 김병욱 시트콤은 예전부터 중산층-부르주아의 경계에 있는, 가부장이 확실한 확대가족 안에 있는 소소한 균열들을 통해 에피소드를 만들고 욕망을 변주하는 데 능했다. 학교나 회사 등의 공간을 지능적으로 쌓아올린다는 점도, 시트-콤을 가장 시트-콤답게 만드는 김병욱 사단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그런데 전작이 사춘기 청소년들의 시선, 즉 민호-유미-범의 삼각관계를 기축으로 쌓아올린, 스릴러에서 출발하여 일종의 비의적인 성장드라마로 이어진 데에 반해, 후속작은 세경 자매와 이순재 가족/김자옥 하숙집이라는 계급갈등적인 측면이 부각된, 일종의 심리드라마라는 데에 차이가 있다. 이제 막 반환점을 돈 이 시트콤이 어떤 식으로 끝맺음될지 모르겠지만.. <하이킥> 시리즈는 대한민국의 '표준적 욕망'을 가장 잘 투영하고 있는, 증후적인 텍스트인 동시에 치유하는 텍스트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그 어떤 소설이나 영화도 해내지 못한 걸 이 TV쇼가 해내고 있는 셈이다.
스브스 작가 윤 모 누나가 한, 나의 유머질에 대한 지적질. 놀랍게도 이 말은 올 한해 나의 모든 행동에 꼬리표로 달려도 손색이 없을 훌륭한 반문이 되었다. 이런 놀라운 일이.. 참고로 저 문장은 끊어읽기와 악센트가 중요하다. 영어로 옮기면 what did you do? 가 아니라 did you do something? 이므로.. 거기에 맞게 읽어야 한다. 여튼 [정규뭐한거니?] 라고 한달음에 읽는 것이 아니라, [뭐/한거니이?(끝을 올려준다)] 라고 읽는 것이 올바른 사용법이다.
올해의 성취 : 딱히 없다
사실 딱히 성취가 없었던 것은 새롭지 않은 일이나 당혹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래도 올해는 이것저것 느낀 게 많았다. 방송국 생활을 좀 엿보면서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고, 재밌는 경험이기도 했고. 구직 활동하면서 내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게 뭔지도 알았다. 김훈선생에 이어 이충걸편집장을 만났으니, 이제 윤대녕선생(선생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긴 한데)과 제임스딘브랫필드(좀 어렵나)만 만나면 내 빠심은 참으로 충만할텐데.
올해의 별명 : 똥 만드는 기계 shitting machine
요새는 스스로를 댕규라고 부르는 게 편해졌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뎡규나 렁규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뎡규보다는 렁규가 더 좋은데 왠지는 잘 모르겠다. 뎡이니 뎐이니 하는 말이 됴선시대 말이라 그른가부다. 일전에 모르는 사람들과 떠난 일박이일 술파티(;)에서 그들은 내가 피디를 지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계속 이피디, 라고 불렀던 적이 있는데.. 이봐요 지금 날 놀리는 겁니까? 하고 정색이라도 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그냥 맘대로들 하시오 하고 넘어갔던 적이 있다. 군대 있을 때 장군과 안형이 이작가라고 부를 땐 안 그랬는데 말이지.
똥 만드는 기계, 는 이준희와 통화하다가 불현듯 생각난 것. 요새 술을 많이 먹어서 장이 좀 좋지 않다보니 좀 그르타. 먹고 나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곧 똥이 되고 마는 거지. 인생은 채워지지 않는 거대한 구멍을 채우려는 헛손질에 다름아닐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게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지.
올해의 유머 : 대한늬우스
앞으로 다시는 이런 희비극도 없을 것이다. 사건 일지는 다음과 같다.
1) 대한늬우스는 4대강 사업에 대한 국정 홍보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이를 최초 보도한 중앙일보는 대한늬우스가 대통령의 직접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적시(관련기사)했는데, 이준희인턴기자(;)의 이 보도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다.
2) 다른 신문들은 중앙의 이 기사를 받아서 '대한늬우스는 MB 아이디어'라며 인용보도. 이어 여론이 좋지 않자, 출연했던 연예인이 '그런 건줄 몰라뜸' 하며 '공식 사과'를 하기에 이른다(관련 기사). 청와대도 다시 한 번 '오해다'드립(관련 기사)으로, 이 아이디어가 대통령의 것이 아니라고 밝힌다.
3) 결국 대한늬우스는 유인촌 장관의 작품인 것으로 대충 정리되며.. 유 장관은 직접 '이건 개그임'이라고 고백하기에 이른다(관련 기사). 첨엔 바긔가 틀러라면 완장촌은 괴벨스쯤 된다고 봤는데, 가만 보면 괴벨스는 시중이 아저씨였고 완장촌은 괴벨스가 부리던 많은 딴따라 중의 하나에 불과한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준다.
그 외의 웃긴 말들? 난 YS가 DJ의 병상에서 했던 말이 또 정말 환장하게 웃겼다. DJ를 찾아간 그는 세브란스 병원 입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화해했다고 봐도 좋다'라고 대답했다(관련 기사). DJ와 YS는 이날 서로 만나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 뒤에도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관련 기사). 그러니까 화해한 것은 사실 YS와 DJ가 아니라 상도동과 동교동이었던 셈인데.. 각각 생물학적인 삶과 정치적인 삶이 다 해 가는 두 전직 대통령의 이 객쩍은 화해는 한국 현대사의 떨떠름한 한 결정적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올해의 여행지 : 해운대
뉴스에서 '올해도 바캉스 인파가 조낸 많지롱' 하는 단골 리포트에서 늘 배경 그림이 되곤 하는 해운대에 대한 선입견이 강했던 인간으로서.. 사람 많은 바가지 물가 피서지인 해운대는 아마도 결코 찾지 않으리라는 이상한 결심을 하고 있었더랬다. 처음으로 해운대에 갔던 건 2004년 여름인데, 당시 준희와 재승과 나는 모두 싱글남으로서 '비키니 미녀'를 쟁취하겠다는 소박하지만 원대한 꿈을 안고 해운대에 입성하였으나 입구에서 30분간 앉아 있다가 돌아나온 경험이 있다.
올해 다시 찾은 해운대. 여름의 끝물이어서 한산해서였는지도 모르겠지만.. 인간들이 나만 빼놓고 이 좋은 데서 쳐놀았다고 생각하니 몹시 분해지는 것이 아닌가! 난 진지하게 해운대 근처에서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올해의 관심사 : 카라
솔직히 말하자면 연예인 스캔들에는 관심이 좀 있는 편이었지만(그런 점에서 최근 접한 JJH 커플의 결혼설 쫌 충격임), 아이돌 가수에게까지 관심이 뻗어나갈거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으나..
뭐 아직 앨범을 산 것도 아니고.. 빠돌이가 된 건 아니지만.. 뭐.. 그렇다고... 학교빡세 쉐키쉐키
올해의 전자제품 : 알칠이
아버지는 내가 지난 번 카메라를 분실한 뒤 내 돈으로 새로 사온 것임을 까맣게 모르고 계신다. 덕분에 내 속도 까맣게 타버렸었지..... 그러던 차에, 우리집 첫번째 디에세레랄이었던 알백이가 익사하는 대형 참사가 벌어졌다. 백이십만원이나 들여서 샀던 건데..... 아버지는 어느날부터인가 디카 중고장터 매복쟁이가 되어 계시더니, 갑자기 알칠이 바디를 물어오셨다. 확실히 사진이 잘 나오긴 한다. 렌즈는 삼만원 짜리 번들이를 쓰다가, 막내삼춘이 초보용 줌렌즈인 시그마70-300 아포DG마크로를 사준 덕에 재미나게 풀사진을 찍으러 다니신다. 뭐 나도 덕분에 중급 엔트리 바디 유저 행세를 할 수 있게 되었다. ..
올해의 패션 : 리바이스 511&양복
리바이스가 북미에서 파는 청바지들, 그러니까 일명 '미판리바'는 찌질이들의 옷이라는 게 인넷 빠숑피플들의 중론인듯싶다. 가격이 싼만큼 원단도 구려서 살에 닿는 느낌도 좋지 않은 데다가 잘 늘어난다. 염색도 잘 빠진다. 그래도 어쨌든 싸고 모양이 나쁘지 않다. 남들 다 입는다는 디젤이니 디앤지니 하는 사치를 부릴 처지가 못되어서 하는 소린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리바이스는 청바지계의 클래식 아닌가? 레비스트로스도 올해 타계했고(..). 신도림 지하상가에서 시중가의 2배를 주고 처음 샀던 미판리바의 511, 을 그 뒤로 두 벌이나 더 사서 입고 있다. 그냥 그렇다고.
면접을 보기 위해 양복을 샀다. 몸에 꼭 맞게 줄였다. 넥타이도 사고 구두도 샀다. 예전부터 한번 양복으로 말끔히 차려 입어보고 싶었는데, 뭔가 숙원을 해소한 느낌이다.
선덕여왕은, 그냥 보지 못했다. 딱히 재미가 없다거나 훌륭하지 못한 드라마라는 생각은 안 한다. 그런데 어쨌든 '선덕여왕'의 무언가를 보여주지는 못한 것 같다. 조기종영하긴 했지만 '탐나는도다' 쪽이 더 신선했던 것 같다. 근데 이거 쓰면서 곰곰 생각해보니, 송지나 각본의 <남자 이야기>를 거의 다 보긴 했었다. -_- 흠 다들 재밌었다고 하는데 난 그것도 상당히 별로였다. 소녀시대는 <gee>는 그냥 듣기 좋다고 생각했지만 <소원을 말해봐>에선 좀 너무한다 싶더라. 뭔가 나경원을 보는 듯한 느낌? -_-
올해의 남들은 다 별로라던데 난 좋았던 : 플러시보, <아>(애프터스쿨)
플러시보 새 앨범에 대한 평가는 좀 짠 듯한데, 레코딩이 좀 덜 헤비한 느낌은 있지만 그래도 <meds> 때만큼은 괜찮은 것 같다. 최소한 <sleeping with the ghost> 수준은 아닌 거지. 그래도 이처럼 한결같이 꾸준한 밴드도 찾기 어려운 거 아닌가? 모토롤라 광고 때문에 뜬금없이 <ashtray heart>가 뜨긴 했지만, 사실 이 앨범에서 제일 좋은 노래는 <kitty litter>였던 것 같다. 애프터스쿨의 <Ah!>는 용감한 형제 작품인데, 용형의 장기가 사실 디스코/일렉트로니카를 빙자한 뽕짝인 데 반해 이 노래만큼은 뭔가 제대로 댄서블한, 사운드 배열이 흠잡을 데가 없는 노래다. 뽕끼가 없어서 차트에서는 선전하지 못했고, 대신 멜로디가 유치한 <디바>로 뜨긴 했지만.. 그러니까 브아걸의 <L.O.V.E>와 <어쩌다>하고도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
내년의 소원 : 데뷔
무엇이 됐든, 데뷔하는 게 목표다. 그러니까 직장인이 되든 대학원생이 되든. 기자로 데뷔하든, 작가로 데뷔하든, 학자로 데뷔하든. 그러니까 진짜 어른이 되는게 목표라는 말이다.
일단 결산 끗!
글을 쓰면서 :
제대로 못 들어봤던 올해의 앨범 후보작들을 몇 개 들어보았다. 이모젠 힙은 프루프루 때가 더 좋았던 것 같다. Phoenix는 복고밴드가 되어버렸는데, 그 복고라는게 정말 '볼프강 아마데우스' 급은 아니지만서도 훌륭한 수준인 것만은 사실이다. XX는 욜라텡고나 소닉유스같은 뉴욕인디록의 느슨한 팝버전 같다. 어쩌면 욜라텡고가 <팝송>이라는 제목의 앨범 안에 이런 노래를 만들어 넣었어야 하는것 아니었나 싶은 그런 노래. 앤틀러스는 왜 뛰어나다고 하는지는 알겠는데 딱히 내 취향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