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매거진'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9.09.29 유재석은 강호동의 미래다
  2. 2009.09.29 Everyone else is doing it, so why can’t we?
  3. 2009.09.29 쇼핑 갔다 오십니까 1
  4. 2009.09.28 예뻐라, 강해라, 부디

   ** 두산 매거진 공채 전형 중이다. 포트폴리오 만드는 게 숙제로 나와서 만든 것들인데, 그냥 두기도 아깝고 해서 블로그 포스팅.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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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만만2>928일 방송을 끝으로 폐지됐다. 햇수로 6년만이다. 20071<야심만만 만 명에게 물었습니다> 종영 당시 ‘시즌 2’를 기약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 퇴장의 모양새는 퍽 쓸쓸해 보인다. <야심만만2>의 부진에는 외적인 이유도 크다. 동시간대에 공중파 방송3사가 모두 엇비슷한 토크쇼를 편성한 것도 그렇고, 경쟁프로그램인 <놀러와>가 전시간대 여왕님들의 선정에 힘입은 데 반해 이렇다 할 반사이익을 얻지 못한 점도 <야심만만2>의 불운이었다. 제작진은 올해 들어서만 4차례의 개편을 통해 어떻게든 활로를 모색했지만, 결과가 좋지 못했다.

MC였던 강호동은 그러나 바로 다음 주부터 새 프로그램에 출연한다. PD와 작가진은 다르지만, ‘강호동이 진행하는 집단 토크쇼’라는 얼개는 그대로다. 이를 두고 시청자들은 유재석의 <놀러와>가 강호동의 <야심만만>을 화요일로 쫓아냈다고 생각할 것이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비록 강호동이 월요일은 유재석에게 내주었을지 몰라도, 주말 2연전 (<무한도전><스타킹>, <12><패밀리가 떴다>)에서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진행중이다.

두 사람의 라이벌리는 대한민국 예능 프로그램을 즐기는 최고의 관전 포인트이다. 강호동은 강하고 유재석은 유하다. 강호동은 힘이 있고 유재석은 감싸 안는다. 강호동은 감정적이고 유재석은 상식적이다. 강호동의 찡그림은 애교스럽고 유재석의 찡그림은 애처롭다. 두 사람이 함께 했던 프로그램 <X>에서의 역할이 두 사람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두 팀으로 나눠 진행되는 게임쇼에서 유재석은 메인 진행자였고, 강호동은 ‘강팀장’ 역할을 했다. 유재석과 강호동이 나란히 출세한 <동거동락><천생연분>의 질감도 그렇다. 유재석은 출연진 사이에서 중립을 지켰고, 강호동은 출연진 사이의 관계에 직접 개입했다.

하지만 이러한 이항대립 끝에서 두 사람이 대등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현실에서는 강한 것이 유한 것을 이기지만, 예능 프로그램의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강호동은 2인자라는 인식이 강하다. 유재석은 ‘국민MC’고 강호동은 ‘AMC’. 왜 강호동은 유재석을 이기지 못할까?

강호동이 방송에서나 사석에서 늘 강조하는 말은 ‘진정성’이다. 숱한 악성 루머를 이겨낸 그는 스스로가 성실하고 진실된 사람이라는 뚝심에 가까운 자신감을 보여준다. 그의 이력이 그것을 방증한다. 씨름선수 시절 그는 압도적이었다. 운동선수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타고난 운동능력도 중요하겠지만, 피나는 노력과 연습이 없다면 1인자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폐쇄적인 방송가에서도 그는 살아남아 지금의 반열에 올랐다. <12>에서든 <스타킹>에서든 강호동은 언제나 진짜 강호동이다. 분장을 하고 진행하는 <무릎팍 도사>에서도 강호동은 늘 강호동이고 싶어 한다.

 

여기에 강호동이 반드시 피해야 할 함정이 있다. 강호동은 <무릎팍 도사>에서 안철수 대표와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강호동이 [아웃라이어]를 좋아한 것은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강호동은 유재석과는 달리 ‘승리자’의 이미지가 짙다. <X>에서도, <동거동락>에서도, <무한도전>에서도 유재석은 언제나 루저의 이미지를 고수한다. 유재석을 ‘국민MC’라고 불러도 ‘A급 연예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한 것은 그런 까닭이다. 강호동도 <12>에서 간혹 다른 출연진들에 의해 골탕을 먹지만, 제리에게 골탕을 먹는 톰이 실제로 제리보다 약해 보이는 것은 아니다.

<야심만만2>에서의 강호동은 줄곧 그 진정성과 진솔함, 혹은 AMC로서 자신이 갖고 있는 ‘예능 노하우’ 내세웠다. <야심만만 2 : ..>에서의 강호동은 <12>에서의 ‘우두머리’ 강호동을 연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교도소가 등장하는 코미디 영화에서 죄수들이 나누는 대화는 크게 두 가지 양상으로 진행된다. 사회에 있을 때 누가 더 잘났는지, 누가 더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는지 허풍을 떨거나, 동병상련을 간직한 이들이 서로의 억울함을 듣고 공감하는 것이다. 그런데 강호동이 택한 것은 전자도 후자도 아니었다. 강호동은 수감실의 유일한 승리자로서 게스트들을 취조하는 수사관처럼 행동했다. 결국 코너 내내 강호동이 가장 자주 내뱉은 말은 ‘○○○ 죄수, 죄를 인정하십니까?’였다. 똑같이 감옥에 갇힌 사람들끼리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히 이상하다. 그에 대한 호불호가 엇갈리는 가운데, 강호동의 고자세를 불편해 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야심만만2>의 전신 <야심만만 만 명에게 물었습니다> 역시 ‘진정성주의자’ 강호동에게 잘 어울리는 토크쇼였다. 이 쇼는 근래 토크쇼의 대세가 된 소위 ‘솔직 토크’의 효시로 꼽힌다. <야심만만 만 명..>을 기점으로 토크쇼의 트렌드가 연예인의 사생활을 중심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강호동이 성공으로 이끈 또 다른 토크쇼 <무릎팍도사>는 일견 <야심만만 만 명..>과 달라 보이지만, ‘솔직 토크’ 성공 비결로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야심만만2>의 실패나 여타의 지리멸렬한 토크쇼에서 보듯, ‘솔직 토크’는 그 자체로 프로그램의 성공을 보장해주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야심만만 만 명..>은 실제로 설문조사를 통해 얻은 내용을 바탕으로 한 ‘공감’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고, <무릎팍 도사>는 마치 정신과 상담을 연상케 하는 ‘무당과의 ‘대화’라는 외피를 씌움으로써 따뜻한 느낌을 유지한다. <야심만만 만 명..>이나 <무릎팍 도사>를 볼 때 시청자들은 자연스레 게스트들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이때의 강호동은 게스트들을 윽박지르거나, 자신의 감정을 앞세우거나, 패거리의 우두머리로 군림하는 승리자 강호동이 아니라, 항상 게스트의 편이 되어주는 듬직한 보디가드가 되었다. 즉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공감(혹은 용서 내지 칭찬)받는다’는 정서가 이들 토크쇼의 기반이었다는 점이다. <야심만만 만 명..>는 본래 강호동이 중심이 된 토크쇼가 아니었다. 쇼의 성공에는 김제동이나 박수홍처럼 편안한 공감을 이끌어낼 줄 아는 모범생과 재담꾼의 역할이 컸다. <무릎팍 도사> 역시 강호동이 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건방진 도사’ 역할을 연기하는 유세윤이 ‘무릎팍 도사’ 강호동을 능가하는 ‘독한’ 기믹을 맡음으로써 강호동의 포지션을 재설정한 것이 프로그램의 성공 포인트다.

유재석은 유하고 강호동은 강하다. 텔레비전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청자들은, 유한 것이 강한 것을 이겼으면 좋겠다는 전복적인 욕망을 전유한다. 강호동의 새 프로그램 <강심장>은 스무명이 넘는 게스트가 정해진 주제에 따라 입담을 겨루고 방청객이 심사를 맞는 형식의 토크쇼다. 흡사 토크쇼판 <스타킹>처럼 보이기도 한다. 문제는 이 프로그램이, 승리를 위해서는 더 독한 이야기거리를 들고 나와야 한다는 점에 있다. 이때 강호동은 자신이 갖지 못한 유재석의 재능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시청자들이 가장 불편해할 모습은 분명 게스트들에게 ‘경쟁에서 승리할 것’을 강요하는 그의 모습일 것이다. 강호동은 자신이 분명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진솔한 이야기를 끌어낼 줄 안다는 사실을 <무릎팍 도사>를 통해 증명해 보였다. 그때 강호동이 발휘한 것은 그의 겉으로 드러나는 강함이 아니라, 내면의 강함이었다. 강호동이 유재석을 넘어서는 길은, 외유내강의 웃음을 선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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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만 가지고 그래?

-드래곤은 자신의 솔로 앨범 <Heartbreaker>에 제기된 표절 혐의를 두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더 큰 비난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대신 그는 앨범에 수록한 다른 노래에서 ‘예전에는 울기도 많이 울었네..(중략)..세상아 내 인생 물어내..(중략).. 살기 힘든 세상 나 하나로 위로가 되신다면’(<Gossip Man>)이라는 가사로 적잖이 섭섭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성난 사람들은 ‘우리나라는 뜨거운 냄비/눈 깜짝하면 식을 테지’(같은 곡)와 같은 가사를 물고 늘어진다

-드래곤 논쟁이 채 정리되지 않은 와중 또 다시 ‘건수’가 터졌다. 주인공은 제 33회 대학가요제 대상을 수상한 듀오이대 나온 여자’의 노래 <군계무학>이다. 의혹을 제기한 네티즌들은 이 노래가 리쌍의 <광대>, Nouvelle Vague<This is not a Love Song>, 언니네 이발관의 <가장 보통의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고 주장한다. 이 노래가 만약 작년에 출품되어 수상했다면,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중은 이미 ‘지-드래곤 학습효과’ 겪은 뒤였다. -드래곤의 음반에 별 반 개를 준 음악평론가 차우진의 표현대로라면 대상에 ‘모작의
혐의’가 있는 경우 ‘비평적 개입을 중단’하게 된다. ‘찝찝해서 평가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노래는 음악에 대해서 ‘알 만한 사람’들이 심사를 맡은 제법 공신력 있는 대회에서 대상을 탔다. 가요제의 연출을 맡은 프로듀서의 주장대로, 전문가 집단의 검증을 거쳤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대중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팀의 이름이나 줄곧 ‘개성’ 운운하는 가사가 적절한지 이야기하지 않고 표절에 관해 이야기한다.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에서 표절, 혹은 모방은 너무나 흔한 일이다. 한국의 대중음악 판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고, 대중의 원하는 멜로디는 수렴한다’는 식의 변명이 통하는 수상한 곳이다. 오히려 표절하거나 모방한 노래의 성공이 더욱 필연적인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취향은 결국 소비를 통해 학습되고 훈련된 결과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어떤 음악이 더 많이 혹은 더 널리 소비되는가의 문제는 사실상 그것의 독창적 성과와는 큰 관계를 갖지 않는다. 오히려 청자는 자신과 접한 외부 환경에서 널리 들려진 음악에 길들여지며, 강요된 선택지 안에서 가장 편안하게 들리는 음악을 선택하여 소비하게 되는 까닭이다.  

이들 논란이 어떻게 끝날지 예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빈도와 심각성의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왕왕 있어 왔던 문화계 전반의 표절 논란도 늘 마무리가 석연치 않다. 마징가 Z와 태권V 시절부터 항상 그래왔던 ‘오래된 미래’다. 예컨대 ‘대중문화’라는 레토릭을 불편해 할 문학계의 사정도 썩 말끔하지 못하다. 1992년 출간된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작가세계 문학상을 수상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를 베낀 작품이라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이인화는 ‘페스티시(혼성모방)’ 기법을 논하며 혐의를 피해갔고, 심지어 다른 필명으로 자신의 작품을 직접 상찬하는 평론을 쓰는 희비극도 연출했지만 문학 교수직을 유지하고 있다. 중견소설가 신경숙도 대표작 [기차는 7시에 떠나네]<딸기밭>이 모작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고 올해 발표한 [엄마를 부탁해]는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양대 문학상을 석권한 소설가 권지예도 ‘시골의사’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칼럼니스트 박경철의 에세이와 연관되어 표절 시비가 일자, 인터넷에서 본 글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작품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해당 작품에 동인문학상을 준 심사위원회는 ‘표절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 그녀를 방어해 주었다. 지난해 발표된 조경란의 장편소설 [] 역시 심각한 표절 공방이 오갔다. 하지만 이렇다 할 결론 없이 사건은 잊혀갔다. 그녀 역시,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

  패션 산업에도 표절은 공공연한 영업 비밀이다. 수많은 인터넷 패션 관련 커뮤니티에서는 어느 브랜드의 어느 제품이 하이패션계의 어떤 제품을 카피했는지를 정확히 추적해낸다. 동대문에서 살 수 있는 옷가지부터 백화점에서 판매되는 고가브랜드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양상에는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어느 쪽이 조금 더 ‘비싼’ 원본을 택했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때에 따라서는 여러 브랜드에서 동일한 디자인의 제품이 나오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 그것이 카피인 줄 모르고 구입한다. 하지만 몇몇은 알아도 산다. 오히려 저렴한 가격에 ‘비싼 디자인’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기뻐한다. 그러니 기업에서는 더욱 대담하게 카피 제품을 찍어낸다.

이 무수한 표절 논란에서 왜 하필이-드래곤만 집중 포화를 받게 된 것일까? 일차적인 원인은 물론 뻔뻔함에 있을 수도 있다. -드래곤과 소속사 YG엔터테인먼트는 논란에 대해 장르적 특성상 음악 창작 과정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라며 샘플링이니 오마주니 하는 말들로 도망치며 모방의 흔적을 애써 말소하려 든 것은 사실이다. ‘실수였다’라는 사과는 용서해도 ‘오해다’라는 변명에는 발끈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인가?

임명직 고위 공직자들의 인사가 있을 때마다, 논문 표절도 위장 전입과 함께 단골 메뉴가 되었다. 2006년 김병준 교육부총리후보자의 경우 표절 의혹에 휘말려 하차했지만, 정권이 바뀐 뒤에는 수많은 입각 후보자들이 표절 의혹과 관계없이 인준이 되어가는 추세다. 간혹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이 표절 문제 때문은 아니다. 결국 표절 의혹은 결국 비난의 구실이었을 뿐이었다.

-드래곤에 대한 대중의 비난에는 공직자 후보들에 대한 정치적 공세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이러한 공격에 있어 표절은 만만한 핑계다. 워낙 만연한 일이다보니 털면 털리는 먼지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연예인에 대한 비난에는 별다른 부담과 수고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정의로운 인간이다’라는 식의 묘한 쾌감을 준다. 비윤리적인 행위를 통해 성공한 타인에 대한 양가감정, 즉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와 ‘아무리 그래도 그래서는 안 된다’라는 불편한 이중 잣대 가운데, 연예인에 대해서는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쉽다는 뜻이다. -드래곤을 비난하는 네티즌들은 그가 ‘천재 뮤지션을 자칭하더니 표절을 했다’ ‘풍기문란을 조장하는 티셔츠를 입을 때부터 알아보았다’ 등 악의적인 코멘트를 덧붙인다. 애당초 지-드래곤이 사회적 안녕을 저해하는 불순분자인 만큼, 표절 역시 비윤리적인 개인의 비윤리적인 행위라는 식으로 몰아붙인다. 반면 고위공직자후보자들의 위장전입과 논문표절은 왕후장상의 입신양명 필수 코스라는 식의 무의식이 작용한다. 동시에 그것을 비윤리적인 행위라고 비난하는 대신 ‘성공한 자들이 저지를 수밖에 없는 실수’ 쯤으로 생각해 버리고 만다.

  물론 문화계나 학계의 표절과 모방 관행을 옹호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분명 모작 자체는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말은 바로하자. 우리 모두 하고 있다. 그러니 지-드래곤만 잡으면 될 일이 아니다. -드래곤은 서로 충돌하는 욕망이 뒤엉킨 잇몸에 박힌 이빨일 뿐이다. 이 지리멸렬한 치통의 원인은 충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잇몸에 있다. 이빨을 뽑는다고 잇몸병이 낫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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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영화를 보고 왔다
. 영화 구경을 하러 갔다기보다는 극장 구경을 하고 왔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폭이 32m에 달하는 초대형 스크린은 과연 압도적인 스펙터클을 자랑했다. 지난 916일 개장한 멀티플렉스 체인 CGV의 새 상영관 ‘아트리움’ 이야기다.

더욱 압도적인 것은 상영관이 아니라, 상영관이 입점해 있는 대형 쇼핑몰 ‘타임스퀘어’다. 지하철 1호선 영등포역에서 CGV 영등포점까지 가는 길은 이 타임스퀘어를 가로지르는 것이 가장 가깝고도 멀다. CGV입점 매장 가운데 영등포역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소나기 효과(shower effect) 고려한 배치인 셈이다. 쇼핑몰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동안 둘러보게 되는 실내 풍광은 대단히 직관적이다. 공간의 중앙을 비운 아트리움 구조이기 때문이다.

흡사 성채나 다름없는 거대한 건축물인 타임스퀘어의 연면적은 약 37만㎡이다. 대단한 규모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기존 영업 중인 다른 ‘UELC(Urban Entertainment&Life Center)’의 크기도 만만치 않다. 시초 격이라 할 수 있는 삼성동 코엑스몰(호텔, 백화점 포함 총 29만㎡)이나 용산역 아이파크몰(28만㎡)도 광활한 것은 마찬가지다. 이들보다 비교적 작은 왕십리역 비트플렉스도 10만㎡에 달한다. 평범한 백화점의 2배다.

이들 거대 쇼핑몰은 공통적으로 유동인구가 많은 지하철역(혹은 기차역)을 끼고 있다. 이들 쇼핑몰뿐만 아니라, 서울시내 주요 지하철역은 대개 크고 작은 복합 쇼핑센터나 백화점이 연결되지 않은 경우를 찾기 어렵다. 이러한 역세권 상점은 대개 지하철을 일상생활을 일부로 영위하는 중간 계급을 겨냥한다. 교통시설과 상업시설을 연계하는 대대적인 토목공사의 궁극적인 목표는, 말할 것도 없이 일반 대중의 소비 진작이다.

사실 이러한 광경은 다분히 근대 일본의 것을 닮아 있다(이것이 우리의 근대가 일본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서울역의 갤러리아 백화점, 영등포역의 롯데백화점, 용산역의 아이파크백화점을 비롯해, 지방 도시 기차역마다 자리한 백화점들은 일본의 전통적 ‘터미널 데파트’와 비슷하다. 철도와 백화점은 근대화의 가장 대표적인 두 표상이며, 압축적인 근대화 과정을 통해 공고한 결합을 이룬 것이다. 산업사회 혹은 대중사회를 지탱해주었던 표준적 대량 생산과 소비 체제 형성 과정에서 철도가 혈관의 역할을 했다면 백화점은 허파였던 셈이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선 대형 쇼핑몰들을 두고 ‘근대적인 건축물’이라고 하는 것은 어딘지 이상해 보인다. 서구적 근대 세계에서는 생산을 위한 노동의 영역, 상품 거래를 위 한 시장의 영역, 심미적 쾌락을 위한 문화의 영역이 제법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 역시 마찬가지였다. 업무지구와 상업지구, 주거지구와 문화지구의 구획이 명확했다. 공단은 공단대로, 베드타운은 베드타운대로, 도심 상업지역은 상업지역대로 개발되었다.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종로3가나 충무로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단관 상영관을 찾아가야 했다.

티플렉스와 대형화된 쇼핑몰의 출현으로 서울의 풍경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강변역과 동서울터미널을 끼고 등장한 테크노마트와 CGV, 코엑스몰과 메가박스의 등장은 일상적인 쇼핑과 문화생활의 영역을 하나로 묶어 냈다. 대표적인 유통기업인 롯데가 영화 배급 사업을 벌였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UELC는 바야흐로 상업적 기능을 넘어, 도시 생활을 보다 폭넓게 창조해낸다. 쇼핑센터에 진열된 상품의 스펙타클과 스펙타클을 판매하는 문화산업의 교배는 새로운 공간과 제도, 환상의 세계를 낳았다. 비트플렉스의 조준래 대표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유학 시절 공부만 하지 않고 주말이면 도시 곳곳에 다니며 문화와 양식을 배웠다. 그때의 경험이 모두 비트플렉스를 구성하는 아이디어가 됐다. 비트플렉스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창작 예술품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물론 대형 자본이다. 말하자면 서울을 개발하고 관리하는 것은 서울시청이 아니라 거대 자본과 기업가다. 코엑스몰을 운영하는 코엑스는 한국무역협회에서 설립한 회사다. 아이파크몰과 타임스퀘어도 모두 거대 기업 자본이 집약된 결과물이다. 송파구 장지동 가든파이브의 실패는 상징적이다. 행정기관이 대형 상업시설을 직접 조성하고 관리하겠다는 발상은 시대착오적이었다. 가든파이브는 엄청난 물량의 TV광고를 통해 자신이 ‘대한민국 문화특구’임을 강조했다. ‘문화 특구’라니? 시장을 행정 구역으로 여기는 이 구호는 포스트모던한 쇼핑몰과 전근대적인 관리 행정을 결혼시키고자 했던 기묘한 시도의 방점이다. 가든파이브를 둘러싼 잡음은 입주가 약속되었던 청계천 상인들이 행정기관에 기대하는 정치적 공정성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조화는 늘 그렇듯 매끄럽지 못하다.

 강남 일대를 뒤덮은 주상복합건물과 더불어, 이러한 포스트모던 건축물들은 사회의 경계를 지운다. 우리는 거주하는 동시에 소비하고, 소비하는 동시에 사유해야 한다. 쇼핑몰과 주상복합건물에는 상층회로와 생존회로가 경계를 잃고 복잡하게 얽혀 있다. 타임스퀘어와 아이파크몰에는 수많은 하이패션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가 입점해 있다. 기존 영등포 상권에 명품에 속하는 브랜드라고는 버버리가 유일했다. 용산 아이파크몰은 용산 철거민 사망 사건 지역에서도 멀지도 않다. 이들 쇼핑몰에서 가까운 곳에는 여전히 집창촌이 있다.

 

도시의 공기는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고 했다. 인구 1천만의 거대도시 서울의 공기는 인간을 얼마나 자유롭게 하는가? 새롭게 등장한 UELC와 주상복합건물은 시민과 도시의 연결을 끊고 인간을 포스트모던 쇼핑객으로 환원시키고 있다. 여기에 시민성이나 인간성이라는 개념을 들이밀 여지가 없다. 공급자의 필요에 의해 정교하게 배치된 상점들 사이를 거니는 것은, 한가로운 산책이라기보다는 몽유에 가깝다. 이러한 스프롤링(sprawling)은 역세권 상점뿐만 아니라 기존의 번화가도 집어삼키고 있다. 홍대와 신사동에 들어선 ‘힙플레이스’들은 과연 문화적인 해방구인가? 삼청동과 가로수길은 커피를 마시며 친구를 만나 담소하는 생활영역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광객을 위한 일탈의 영역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서울에 산다는 것은 곧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을 뜻한다. 청담동의 상점 사이를 거닐기 위해서는 옷차림에 신경을 써야 한다. 입장료를 지불할 수단이 없다면 추방되는 소도이다.

  독재 시절 서울은 베를린 장벽과 포츠담 광장으로 대표되는 베를린과 비교되곤 했다. 한 나라의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내부 속의 외부’인 미군부대의 규모는 세계 최대였다. 개발 이후 서울은 강남, 분당, 일산을 위시한 관치 건설 사업으로 탄생된 개발도상국의 공룡도시였다. 90년대 서울은 출근길에 허리가 동강난 한강다리와 피크타임에 뜬금없이 무너진 백화점으로 기억되었다. 그리고 21세기 초입의 서울. 코엑스몰과 아이파크몰 타임스퀘어는 깃들 곳이 없는 막막한 성채다. 소설가 김훈의 표현대로, 지금 서울은 어느 누구의 고향도 아니다. 서울은 만인의 타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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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삶은 고생스럽다. 매 순간 아름다울 것을 강요받는다. 충분히 예쁜데도 더 예쁘게 꾸며야 한다. 여자는 시집가면 그만이라는 말은 전설이 됐다. 여성도 당연히 사회생활을 꾸려나갈 능력을 갖춰야 한다. ‘한국여자’ 사는 것은 더욱 힘들다.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억울하다고 말하는 순간, 더 많이 억울해 할 일이 생긴다. 성차에 따른 차별적 위계질서를 문제 삼고 실질적 평등을 요구하는 데에는, 다시 말해 ‘페미니스트’가 되는 일에는 더욱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물론 가시적인 생명의 위협에 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성은 차별 받는다’거나, ‘양성평등은 옳다’라고 입 밖에 내는 순간, 보이지 않는 낙인이 점차 새겨져 온다. 입에 담기도 민망한 말, ‘꼴통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도 달린다.

꼴통 페미니스트, 줄여서 ‘꼴펨’ 혹은 ‘꼴페미’라는 말은 공식적으로는 ‘금지된 말’이다.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 보면 무수한 웹페이지들이 쏟아져도 이 말을 사용한 제도권 매체의 기사는 검색되지 않는다. 하지만 제도권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다고 해서 ‘꼴펨’이라는 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어떤 맥락에서 사용하며 얼마만큼 모욕적이고 폭력적인 말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가끔은 생면부지의 불특정다수에게 그 말을 듣기도 한다.

인간을 구분하고 현상에 이름을 붙여 신조어를 만드는 일은 제도권 언론의 담당이었다. 사회과학자들의 관찰과 수사를 매체에서 수용하고 전파하면서 점차 일반 대중에게 퍼져나가는 것이 신조어의 일반적인 탄생 과정이었다. 그러나 인터넷은 언어시장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이제 사람들은 개념어가 필요할 때 저마다의 게토에서 제 입맛에 맞게 새로운 말을 만들어낸다. 근래에는 도리어 제도권 언론에서 직접 나서서 이들 신조어를 채집해 사회현상으로 인증하기도 한다. 이 ‘신조어의 길거리 캐스팅’에는 찝찝한 구석이 있다. 몇 개의 음절로 세상을 답파하는 것은 즐거울 수도 있지만, 우리가 듣곤 하는 대개의 말들은 편 가름과 다툼을 위해 태어난 것들이다. ‘-녀’ 끝났던 수많은 말들이 그렇다. ‘된장녀’라는 말은 어원도 쓰임새도 불분명하지만, ‘남자 등쳐 먹는 여자(gold digger)'부터 알파 걸(alpha girl)에 이르는 폭넓은 내포를 자랑하며 자본주의 시장에서 여성의 삶을 조롱하고 압박하고 있다. 숱한 인터넷 마녀 사냥의 과정에서 아스라진 수많은 ’-녀‘들을 여기서 더 언급하지 않겠다. ’토이남, ’초식남처럼 남자들을 겨냥한 말도 있다. 하필이면 모두 남성성을 결여한, 나약한 남성을 부정적으로 부를 때 쓰는 말들이다. 초식남의 여성명사는 ’건어물녀‘다. 불공평한 일이다. 왜 외로운 남자는 풀 먹는 온순함으로 설명되고, 외로운 여자는 말린 오징어에 비유되는 것인지.

최신조어 ‘꿀벅지’도 언어 시장에서 당당히 유통되고 있다. 블랙마켓의 자매품으로꿀덩이(+엉덩이)’라는 말도 있는 모양이지만, 아직 정식 출시되지는 않았다. 된장녀 논란 때에도 그 조어 과정이 미궁에 빠졌듯, 이 기묘한 신조어 역시 어원에 관한 가설들이 분분하다. 먹는 꿀인지, 돼지 울음소리인지, 아니면 ‘기분이 꿀꿀하다’고 할 때의 그 꿀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유력가설을 채택해 보려고 해도, 보행을 위한 인간의 신체와 식물이 만들어내는 단당류 혼합물을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 것일까? ‘꿀’은 모름지기 사과나 참외 같은 과일과 합쳐져야 하는 말이 아닐까.

‘꿀벅지’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대담해진 아이돌 걸그룹들의 패션이 있다. <소원을 말해봐>를 부른 소녀시대는 핫팬츠를 입고 연신 각선미를 뽐냈다. 브라운 아이드 걸스도 핫팬츠를 입고 거만한 스탠스로 허리를 흔들었다. 이 신조어의 소유권을 주장할 법한 유이가 속한 애프터스쿨의 옷차림은 보다 노골적이다. <diva>로 활동할 무렵 애프터스쿨 멤버들은 캘빈 클라인 언더웨어의 핫팬츠를 입었다. 패션에 무지한 남자들은 그 옷을 보며 자신들의 속옷을 떠올린다.

다리를 드러내는 패션 트렌드의 레퍼런스는 헐리웃 스타들이다. 비욘세와 시애라, 제니퍼 러브-휴잇이 그렇다. 그들과 한국 아이돌의 다리에 담긴 의미가 서로 온전히 같아 보이지 않는다. 비욘세나 제시카 알바도 출산 후 체중 문제로 고민에 빠진다지만, 그들이 각선미를 관리하기 위해 카복시 주사를 맞아가며 활동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씩 셀룰라이트가 드러나기도 하는 그 다리에 붙여줄 수 있는 레토릭은 ‘꿀벅지’라기 보다는 ‘건강미’ 쪽이다. 그들의 다리에는 어떤 반-미학과 성적 자유의 맥락까지 담겨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누군가의 다리를 보고 꿀벅지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을 인격에 덧칠하는 추문으로 사용하는 그때 그녀는 아름다운 신체 부위로서의 다리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그 다리가 된다. 결국 꿀벅지라는 말은 페티시즘의  욕망 외에는 딱히 담고 있는 것이 없는 가벼운 말이다. 성적인 욕망을 갖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성적인 욕망을 함부로 드러내고, 어떤 말로 대상을 가두려고 하는 것이 음험한 것이다.

유이가꿀벅지라는 별명에 기분이 나쁘지 않다’라고 해서, 그녀를 계속 꿀벅지라고 불러도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종류의 언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될 때 느껴지는 불쾌함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분명 사회적인 문제다. 가부장적 응시에 의해 분절적으로 포착된 다리를 고작 식품에 치환시키는 상상력의 과정 전반을 우리는 불쾌해 해야 한다.

패션은 분명 자기만족인 동시에, 사회적인 소통의 수단이다. 여성의 신체에 대한 아름다움이 내재적이고 본질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기준이 오로지 남성적인 응시, 남성의 미적 주체성과 결부되는 것만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스스로를 사진 찍는 행위인 ‘응시’ 벗어난 순수한 나르시시즘을 실천할 수는 없다. 순수한 나르시시즘이라고 한다면,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아무 것도 찍어 바르지 않고, 누구와도 만나지 않을 때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아름다운 여성이 외모 권력을 소유함으로써 파워우먼이 될 수 있을지라도, 보부아르가 말했듯 여성이 아름다운 외모를 원하고 자기애에 빠지는 것은 이 광폭한 남성지배 사회에서의 가녀린 생존전략일 뿐이다. 때에 따라서는 완벽해 보이는 변신도 있다. 만 레이의 모델이자 장 꼭또의 <어느 시인의 피>에 출연했던 리 밀러는 만 레이의 모델이었다. 만 레이에게서 사진을 배운 그녀는 <Vogue>의 종군기자로서 제 2차 세계대전 현장을 누볐다. 대상에서 주체로 완벽하게 변신한 것이다. 만년에는 사진을 그만두고, 요리의 여왕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나 리 밀러가 될 수는 없다.

매일 아침 여성들의 자존심은 뿌리부터 흔들린다. 세안을 하고 화장을 하고 입을 옷을 고르는 데 이르는 수많은 협상에서 대다수의 여성은 약자다. 여성들의 자존감이 꿈꾸는 이상향은 슬프리만치 한결같다. 마른 몸에 가슴은 커야 좋다. 경추와 척추는 곧고 당당해야 한다. 엉덩이와 다리에 탄력이 더해지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여성 신체의 미학이란 아직도 헬무트 뉴튼 사진의 피사체에서 조금도 발전하지 못했다. 신디 셔먼이 촬영한 레이 가와쿠보의 안티패션 미학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언캐니(uncanny)한 아방가르드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성들에게 패션이 중요한 이유는 여성이 본디 심미적인 존재여서가 아니다. 많은 여성에게 있어 패션 매거진은 자기 인적자본 확충의 매뉴얼로 기능한다. 패션을 논하는 미디어들은 나름대로 저마다의 미학과 인문학을 전달하려고 무던 애를 쓰지만, 취향과 품위가 온전히 소통된다는 말은 거짓말일 것이다. 패션에 매달리는 여성들을 다만 계속 염려해야 한다. 패션 매거진은 예뻐지려는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개별적 욕망들을 거짓되게 추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응원하고 도와준다고 말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대한민국의 남자들이 꿀벅지 따위의 말에 갇혀 살아야 하는 여성들에게 품는 성적 욕망을 책망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무쇠팔 무쇠다리’에게도, 똑같은 인격적 존중과 정치적 공정성을 갖추고 사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묻는 것이다. 튼튼한 무쇠 팔 무쇠다리는 꿀벅지보다 더 예쁜 것이다. 더 강한 것이다. 그러니 부디.

Posted by toto le he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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