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중음악" 이라는 환상
조금은 도발적인 수사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 보자. 대중음악은 환상이다. 수사를 바꿔보자:'대중'음악은 존재하는가? 대중음악은 '대중을 위한', '대중에 의한', '대중의' 음악인가? 음악예술을 한껏 아우르고 그것을 다시 가르는 어떤 정의의 규칙에 의거해 대중음악의 개념을 정립하는 작업은 '대중'에 대한 접근 방식의 반복과 차이들만큼이나 애매모호한 지점에 있다. 나이브한 접근에서 출발하자.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음악이 대중음악이라면, 홍대 앞에서 활동하는 인디밴드 <몽구스>의 음악과 말러의 교향곡 중에 어느 쪽이 더 대중적인가?
대중음악을 구분하는 일반적 기준은 내재적인 '대중성', 즉 음악예술의 장르적 규약들 가운데 '대중적으로' 지지되는 음악들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보통 이러한 분류에 따르면 근대 이후 발생한 가요형식들에 의해 창작되고 불려지는 음악들을 전근대적, 다시 말해 고전적인 작곡법과 주법에 의해 연주되고 가창되는 음악들과 비교하여 지칭하게 되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전자가 '대중'음악이라면, 후자는 '엘리트'음악일까? 일반적으로 통용되곤 하는 이러한 분류는 기실 음악사적인 접근을 통한 통시적 구분에 따른 것이며, 따라서 이때의 구분은 '현대(contemporary)'음악과 '고전(classical)'음악의 구분의 지점으로서만 유효해야 한다.
'대중'이라는 용어에 착안하여, 음악의 내재적인 음악학적 성격을 배제하고 음악의 생산자 혹은 향유자의 의해 구분한다면, 당겨 말해 이제 '모든 음악은 대중음악'이다. 왜냐하면 구시대 귀족 패트런에 의해 후원되고 향유되던 음악과 시장과 거리의 악사(예컨대, 민가나 바로크 시대의 마이스터징거들의 노래)에 의해 불려지고 민중에 의해 향유되던 음악의 구분은 근대 시장질서의 형성 이후에는 사실상 소멸의 지경에 이르렀다. 곧 자본주의 시대의 모든 음악은 결국 균일한 소비자인 '대중'들이 생산과 소비라는 방식으로 향유하는 음악이며, 따라서 대중음악이란 대상은 항상 모호하다. 즉, 국가적 차원에서 탈-경제적으로 보호되고 관리되는 '문화적 유산', 예컨대 민속음악이나 고전적 '국악'을 제외한다면 모든 음악은 어떤 의미에서 언제나 대중음악이다.
과거 음악은 언제나 지금-여기라는 '현재성'에 준해 공연의 방식으로 향유되어야만 했지만, 축음기의 출현, 즉 음원의 저장과 복제 기술의 발명 이후 음악을 향유하는 방식은 현장에서의 작곡과 연주, 가창이 문제가 아니라 '음반'을 제작하고 그것을 유통하는 엄존하는 시장의 과정에 포섭되어 있다. 즉 음반을 기반으로 한 음원 시장과 그에 의해 파생되는 공연수익으로 대표되는 파생수익시장을 가진 하나의 체계적인 문화산업의 형식 내에서 문맥적으로 의미를 획득하는 내용으로서의 음악이 대중음악인 것이다. 즉 우리가 일컬어 '대중음악'이라고 부르는 음악들에 관한 일반적이고 체계적인 논의는 내재적인 접근 방식으로써 동시대 음악의 음악 예술(music art)적인 기준에 의한 논의와, 형식을 고려한 접근 방식으로써 음악 산업(music business)의 재화로서 판단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산업의 획일화
비슷한 맥락에서, 모든 '대중문화'를 논할 때 빠질 수밖에 없는 함정은 그것의 '작품성'과 '대중성'의 균열에서 비롯된다. 엄존하는 민주주의적 공리에 따르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거나 승인하는 가치는 올바르고 정당한 가치이며, 따라서 정치나 경제의 영역은 물론 문화의 영역에서 역시 해당 문화에 대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의 가치를 인정하는가 하는 문제가 가장 주요한 판단 기준일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시대에 가장 적극적인 인정과 승인의 표시는 그것에 대해 자신의 자본을 지불하는 행위로써 드러나며, 그것이 대중음악의 내용을 결정하고 형식의 외연을 넓히게 된다.
이렇게 말하면 '작품성'과 '대중성'은 어떤 동일한 속성에 대한 다른 이름이어야 할 것 같지만, 그러나 일반적인 대중음악 담론 내에서 가끔 두 속성은 서로를 배반한다. 음악학적으로, 또 예술적으로 탁월함을 지닌 '좋은 음악'이 언제나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즉 음악의 '작품성'이 해당 음악의 본질적으로 선취된 속성인 것과는 달리, '대중성'은 음악 산업 내에서 그것이 소비되는 어떤 습관과 방식들의 작동에 의해 발생하는 속성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지불되는 돈', 즉 자본의 추동의 여부에 의해 대중음악은 자본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모습을 변용하고 청자들을 재생산한다.
자본주의 시대의 음악적 취향은 대개 외부에 의해 학습되고 훈련된 결과로서 존재하며, 따라서 어떤 음악이 더 많이 혹은 더 널리 소비되는가의 문제는 사실상 그것의 내재적인 속성과는 큰 관계를 갖지 않는다. 청자는 자신과 접한 외부 환경에서 널리 들려진 음악에 '길들여지며', 강요된 선택지 안에서 가장 편안하게 들리는 음악을 선택하여 소비하게 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필연적으로 자본의 독점을 초래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경제 논리에 의하면, 획일화는 사실상 언제나 필연적이다.
한국의 대중음악 시장은 90년대 초반을 전후해 국내에서 제작된 내수 시장의 규모가 수입된 구미 각국의 음악을 위주로 한 시장에 대해 우위에 서게 된다. 음악 산업의 축이 음원을 배급하는 배급사에서 음원과 가수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소위 연예 제작사들로 넘어간 것도 비슷한 시기부터이다. 특히 90년대 초반 프로듀서 김창환에 의해 제작되던 신승훈, 김건모 등의 대형가수들과 더불어 92년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소위 '가요 시장'의 규모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 시기를 전후해 음반시장을 좌우하는 시장의 주 소비층은 소위 '신세대', 즉 10대와 20대를 기반으로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대중음악은 단지 여가선용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신세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자기표현의 한 방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서태지는 '문화대통령'이었으며, 그가 도입한 새로운 음악장르들(힙합, 하우스, 얼터너티브 록)은 80년대까지 자리 잡고 있던 구세대적인 음악들, 예컨대 트롯이나 포크를 밀어냈다. 이후 등장한 < H.O.T >나 <젝스키스> 등 일군의 티니팝 그룹들은 소비자의 연령층을 보다 낮추는 한편, 90년대 가요 시장을 일련의 댄스음악들로 획일화시켰다.
대체적으로 시장의 규모가 커질수록 해당 산업이 생산해내는 재화는 규격화되며, 문화 상품 역시 같은 논리 아래 획일화의 경향은 문화 산업 내에 투입된 자본의 (근시안적) 합리성의 결과로서 발생하게 되는 일반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대중음악 시장의 획일화에 대한 우려는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가요 시장의 규모에 가려져 별 문제가 되지 않는 듯했다. 9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음반 시장의 규모는 4천억 원대에 이르렀고, 이는 미국, 영국, 일본 등 문화적인 선진국들 바로 다음 가는 수준이었다.
< 표-1 > 음반시장 규모의 변화
문제는 2000년대 이후 시장이 급변했다는 것이다. 20세기 음원 시장은 어디까지나 '음반' 시장이었는데, 라디오나 TV 등 대중 매체의 출현이 음악 산업을 위축시킬 것이라는 우려는 그러나 음원을 저장하고 재생할 수 있는 복제 기술의 지지가 어디까지나 음반을 매개로 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불식되었다. 그것이 음악 시장에 끼친 막대한 영향력과는 별개로, 라디오와 TV는 어디까지나 '음악 '시장' 내에서는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파생시장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등장한 이른바 '뉴미디어' 환경에서 음원은 보다 치밀하고 보다 용이하게 복제, 저장되기 시작했으며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MP3' 기술 규격이다. 라디오와 TV에서 제공되는 무료 음원들은 그 즉시 휘발되었지만, 인터넷 전용선을 타고 전송된 무료의 MP3는 복제된 뒤 저장되었으며, 이는 기존 음반 시장에 대단히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더 이상 음악을 음반을 구입하는 방식으로 향유하지 '않게' 된 것이다. 무료 음악은 라디오와 TV라는 거추장스러운 기술적 지원을 필요로 하지 않고, 시대의 구호인 '유비쿼터스'대로 '언제 어디서나' 무료로 들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90년대 후반 정점을 달린 한국의 음반 시장은 MP3의 출현과 초고속인터넷망의 보급 이후 그 규모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시장의 외연은 축소되었고 자본은 유연화되었다. 삼성경제연구소 고정민 수석연구원의 지적에 따르면, 해당 시장이 축소되고 그 구조가 조정되면 가장 먼저 소멸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한 자본의 주체, 경쟁력이 없는 회사이며 이는 '시장'의 질서 안에서 음악적 역량과는 별개로, 자본의 집적 이익을 누리지 못하는 군소 업체들이었다. 음악 '시장' 안에서 독점 자본의 출현이 가속화되었고, 이는 결국 음악 '예술'의 필연적인 획일화로 이어졌다. '살아남은' 몇 개 안 되는 연예기획사들은 예술적 동기가 아니라 이윤 동기로 음반을 제작해야 했으며, 따라서 시장 내에서 이윤 발생 메커니즘이 검증된 몇몇 장르에 편중한 음반을 제작, 판매해야 했던 것이다.
#SG워너비와 그 주변
현재 한국 음악 시장 내에서 소위 '잘나가는' 연예기획사들의 대표주자들을 꼽자면 가수 <비>를 보유한 JYP엔터테인먼트, <세븐>, <휘성> 등을 제작한 YG기획과 엠보트, <보아>와 <신화> 등을 제작한 SM엔터테인먼트, < SG워너비 >를 제작한 GM기획 등이다.
< 표 > 2005년도 음반판매량 집계 (자료출처: (사)한국음악산업협회)
2006년 상반기까지 같은 시기 <이수영>(미드템포 발라드), <버즈>(록) 등의 음반들도 시장에서 선전했지만, < SG워너비 >, <김종국>, <비>, <세븐>, <휘성>, <빅마마>, <바이브> 등 시장을 주도한 음반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키워드는 '리듬 앤 블루스풍'의 음악들이다. <이수영>이나 <버즈> 등의 음반들이 90년대 인기를 끌었던 '전통적'인 대중음악 장르의 연장이라면, 이들 음악들은 마치 90년대를 주도했던 한국형 발라드나 하우스풍의 댄스에 비견할 만한 한국 음악 시장의 새로운 경향이라 할 수 있다.
음악전문웹진 'WEIV'에 필자로 참여하고 있는 김선민에 따르면(주석으로 인터뷰한 사실을 달 것), 이러한 경향의 저류에는 이전 시장과는 조금 다른 양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획일화의 정도가 지나치다는 것이다. 90년대를 주도했던 음악장르가 티니팝이나 하우스장르라고 할 수는 있지만, 당시의 대중음악 시장은 단순 계량적으로만 풍부했을 뿐만 아니라, 질적인 풍부함 역시 일정 수준 견지되고 있었다. 한국 대중 음악 시장을 폭발적으로 확대시키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서태지와 아이들>과 <듀스>의 앨범들은 상징적인 것을 넘어 기념비적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하우스, 랩뮤직, 데쓰메틀, 얼터너티브록 등 다양한 장르의 대중음악을 한국의 풍토에 성공적으로 이식시켰으며, <듀스>는 힙합과 펑크(funk) 등을 도입해 소위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상업적 웰메이드(well-made)의 전형을 마련했다. <노이즈><룰라> 등꾸준히 생산된 댄스뮤직과 별개로, <공일오비>나 이승환, <토이> 등으로 이어지는 일군의 음악제작자 집단은 성공적으로 가장 한국적인 가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현재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주목할만한 음악 예술적 신안은 그 사례를 찾기 어렵다. 2005년 한해 <윈디 시티>(애시드-펑크), <클래지콰이>, (이상 라운지 뮤직), <스윗 소로우>(보컬) 등의 앨범이 평단의 지지를 받았지만 상업적 성공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또 음악적 성취에 대한 평가 역시 의견이 엇갈렸다. 대신 상업적인 검증을 마친 장르들, 즉 기존의 발라드나 하우스풍의 댄스음반, 그리고 '알앤비풍의' 노래들이 시장을 장악했다. 여기에는 앞서 말한 음반 시장의 구조 변화의 영향이 크다. 음반 판매를 통한 수익모델의 이윤이 저하되는 한편 디지털 콘텐츠의 판매가 늘면서, 음원을 다각도로 활용, 판매할 수 있는 자본과 기술이 집적된 회사의 역할이 중요해졌으며 이는 음반 시장의 수익 분배 구조의 중심이 음악을 창작하는 뮤지션 대신 전체 컨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프로듀서나 회사로 옮겨 간 것과 관계가 깊다. 새로운 장르가 개척되고 독창적인 음반을 만들기 위해서는 상업적 모험과 시행착오가 있어야 하지만, 음악의 창작에 대한 주도권이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한 회사에 있는 한 그것이 수행되기는 어렵다.
현재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새로 제안된 장르들은 새롭지도, 또 특별히 독창적이지도 않다. 대부분의 음악 장르들은 음악 선진국, 즉 미국이나 영국 시장의 그것을 수입한 것에 다름 아니며, 그것은 우리 음악 산업이 취해 온 일반적인 행태였다. 예컨대 <비>나 <세븐>은 현재 미국 시장에서 가장 각광받는 영미의 팝 가수 어셔(Usher)나 크렉 데이비드(Craig David)에 그대로 대입되고, <보아>나 <이효리>의 음악은 미국의 인기 여가수 브리트니 스피어스(Britney Spears)의 음반을 만든 프로듀서 넵튠스(The Neptunes)의 스타일 그대로이다. 한겨레신문의 다음 기사를 보자.
NYT, 비 공연 혹독한 평가
[한겨레신문] 2006년 02월 05일(일) 오후 07:02
가수 비가 지난 2~3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벌인 공연에 대해 현지 언론들은 '90년대 팝을 보는 것 같다'는 식의 비판적인 평가를 내놨다. 하지만 문화상품으로서 비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는 의견도 있었다.
<뉴욕타임스>는 4일 "무대에서 공연하는 그를 보는 것은 한국말로 더빙된 오래된 <엠티브이>(미국의 음악전문물 채널)의 비디오를 보는 것 같았다"며 "아시아의 슈퍼스타인 한국인 팝 가수 비는 미국 정복에 나섰으나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평가했다.
기사는 "비는 멋진 댄서이자 상당한 실력을 갖춘 가수"라면서도 "그의 공연은 마이클 잭슨을 비롯해 미국 안 여러 유명가수들을 흉내내고 있을 뿐 독창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또 "비의 미국 안 활동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그의 프로듀서인
박진영이 최신 영어 히트곡을 모방하려고 여러 가지 방안을 짜는 순간 미국의 팝이 그를 앞질러 나가게 되는 점"이라고 덧붙였다. 타블로이드판 <뉴욕데일리뉴스> 인터넷판에서 수석 팝음악 비평가 짐 파버도 "저스틴 팀버레이크, 어셔의 90년대 인기곡과 비슷했다"고 평가했다. (후략)
김소민, 김도형 기자(aip209@hani.co.kr)
한편 < SG워너비 >나 <김종국>의 '리듬앤블루스풍' 미디엄템포 발라드들은 2000년(확실하지 않다, 확인 요망) 발매된 <브라운 아이즈>의 음반 <벌써 일년>과, 박효신의 보컬에 토대를 두고 있다. 리듬앤블루스나 네오소울의 미디엄템포 비트를 기반으로 기승전결의 가요형식과 한국적인 멜로디를 얹는 작곡법에, 어느 부분을 들어도 장중하고 압도적인 보컬 스타일을 보여준다. 이러한 스타일의 노래들은 특히 음원시장 환경이 음반중심에서 디지털 콘텐츠 중심으로 넘어간 것과 깊은 관계를 지닌다.
SG워너비의 앨범을 만드는데 공헌한 박근태, 류재현, 김도훈, 조영수 등의 작곡가들은 이어 < V.O.S >, < MtoM >, <먼데이키즈>, <레몬 트리>, <씨야>, <가비앤제이> 등 비슷비슷한 느낌의 앨범을 만들었는데, 이들 음악들의 공통점은 기존 발라드와는 달리 비트가 강하고 템포가 빨라 리듬감이 뛰어나며 식별이 빠른 후크(hook)가 강박적이리만큼 반복된다. 이들의 음악들의 수익은 음반 판매에 기반해 있지 않으며, 인터넷 웹 사이트의 BGM이나 휴대전화의 통화 연결음이나 벨소리 등 디지털 컨텐츠 수익을 노리고 제작되며, 한 곡 한 곡의 러닝타임은 보통 4분을 넘지 않는다.
#대안을 위하여
대중음악 전반에 만연한 획일화 경향의 가장 큰 문제점은, 말 그대로 다양성이 없다는 것 그 자체이다. 한 문화의 생명력은 종종 지배문화에 대한 하위문화(sub-culture)의 영역에서 담보받기도 한다. SG워너비 스타일의 생명력은, 재화의 한계효용이 체감하듯 체감할 것이며 어느 순간 소진될 것은 지난 시절의 경험에 비추어 당연한 결과다. 현재 세계적인 주류장르로 자리매김한 힙합이나 리듬 앤 블루스 등의 흑인음악 역시 태생은 하위문화에서 출발했다. 이들 흑인음악은 로큰롤이나 컨트리 등의 영역과 공존하며 시장에 활력을 제공했고 현재에까지 이르렀다. 최근 출현한 대표적인 하위문화로서의 음악 장르는 전자음악을 기반으로 한 일렉트로니카였고, 2000년대의 최신 팝 조류는 상당 부분 일렉트로니카적 성향에 기반해 창작되고 있다.
그룹 윈디시티와 펑카프릭 부스터에서 활동한 임지훈은 현재 대중음악 시장의 다양성과 활력이 떨어지는 이유를 음원 시장의 수익이 일차적으로 음원을 제작하는 뮤지션이 아니라, 그 음원을 활용하는 기술을 지닌 대형회사에게로 배분되는 기형적 시장 구조에서 그 문제점을 찾는다. 즉 가시적 이윤이 담보된 프로듀서 시스템에서, 음악 예술적으로 독창적인 음반을 만들어낼 수 있는 진지한 음악인이 음반을 만들 수 있는 기회는 극히 제한적이다. 음반을 판매하여 수익을 올려야 하는 신진 음악인들은 홍대 앞으로 대표되는 독립적인 음반 제작사를 통해 데뷔해야 하지만, 이를 통해 올릴 수 있는 수익은 음반 시장 규모의 전체적인 몰락과 관계 해 매우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다. 또 음악 시장의 수익 대부분이 디지털 컨텐츠 시장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그 수익들이 '뮤지션'들의 소통과 음악 창작 활동을 위한 투자로 이어지지 못하고, 다시 음원 '활용'을 위한 비용으로 환원된다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이는 정리하면 대중음악 시장 내에서 MP3와 디지털 컨텐츠라는 혁명적 테크놀로지가 자본의 지배적인 속성과 시장의 이윤에 대한 근시안적인 합리성에 의해 기형적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처음의 논의로 돌아가 보자. 대중음악은 '대중을 위한, 대중에 의한, 대중의' 문화여야 하며, 대중음악은 대중의 문화적 취향과 관계하여 발생하고 향유되어야 한다. 즉 대중음악 영역에서 사회적 다양성이 합의되고 음악 생산자와 소비자가 유대하고 연대할 수 있는 커뮤니티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작업이 선취되어야 할 것이다. 90년대 후반 가요 시장의 폭발적인 발전과 더불어 나타났던 대안적 움직임은 홍대 앞에서 활동하던 독립적인 뮤지션(소위 '인디' 뮤지션)들이 연대한 커뮤니티들이었다.
자본의 질서로부터 자유롭다는 의미에서 '독립' 뮤지션임을 천명했던 음악인들과 그들을 위해 자신의 주머니 돈을 기꺼이 지불했던 청중들의 연대에서 음악의 다양성은 잠깐이나마 빛을 발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현재 주류 음악으로 자리 잡은 힙합뮤지션들 가운데에서는 이 하위 문화적이고 대안문화적인 '홍대 앞 인디 바닥'에서 출발한 사례가 많으며, 대표적인 음반 제작사 YG엔터테인먼트도 절반 정도는 이 인디 씬에서 음악적 역량을 수혈 받았다.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갖고 있는 혁명적인 기능성이 그 테크놀로지가 적용되는 사회적 맥락인 자본의 지배와 이윤 추구의 합리성에 연관할 것이 아니라, '대중'이 갖고 있는 본연의 긍정적 의미에 결부될 때 '대중음악'에 대한 이상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접근을 가능케 한다는 뜻이다. 음원을 '언제 어디서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현재의 음원 환경은 거대 자본뿐만 아니라, 대중음악에 대한 진정성을 간직한 음악인과 청중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적은 비용으로도 자신의 음악을 들려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음악인들과 적은 수고로도 그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청중간의 대안 문화적 커뮤니티를 위한 공감대를 기반으로 상업적인 지배에 침해당한 '대중'의 민주성을 복권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앞서의 논의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음악 예술'적 성격과 그것의 '작품성'을 보듬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그를 위한 체제의 지원이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