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과 소셜 네트워크, 마이크로 블로그와 같은 뉴미디어의 최신 버전을 둘러싼 정치권의 갈등을 반민주적인 국가기구의 통제와 고전적인 자유권 수호의 대립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많을 것이다. 그것이 정보 기술의 잇따른 진보와 그로 인해 도래할 새로운 합리적 공론장의 이념과 기술이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순간 적절한 규제 모형이 필요하다는 현실 인식을 오가는 건전한 논쟁으로 이어진다면 좋겠지만, 가만히 따져 보면 기분이 개운치 않다. 한국 언론이 지난 시절 경험한 언론통제의 역사와 민주화 이후 극적으로 쟁취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이념의 갈등이 인터넷 시대에도 여전히 반복되며 기형적인 형태로 인각되어 있는 인상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 사회는 여전히 체계 통합의 메커니즘과 사회 통합의 메커니즘이 서로 불화하며, 도구적 합리성의 전략적 행위와 의사소통 합리성을 통한 공론장 작동은 여전히 서로를 배반하고 있다.

인터넷과 뉴미디어가 바투 다가온 6월 지방 선거나 앞으로의 정치 이벤트들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서 예상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지만, 여전히 쉬운 일은 아니다. 선거 과정에 참여하는 주체의 성격에 따라, 때마다 다이내믹하게 제기되고 회자되는 이슈에 따라, 정부 규제나 시민사회의 조응에 따라, 또 기존의 주류 저널리즘이 인터넷에서 회자되는 메시지들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뉴미디어가 갖는 정치커뮤니케이션 도구로서의 역량이 위축될 수도 있고 극대화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영향이 민주주의에 긍정적일 수도, 또 부정적일 수도 있다. 인터넷이나 뉴미디어에 호의적인 주장들은 대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지방 선거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중요한 정치적 과정이다. 지방 선거는 민주주의의 위기, 민생의 위기, 국토와 생태의 위기, 도덕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의제를 상향식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인터넷을 이용한 다양한 의사소통 도구는, 지금껏 말해지지 않았던 것을 말할 수 있게 하는 계기를 열어준다, 중앙 정부와 미디어가 다루지 못하는 지방의 의제, 생활의 의제, 시민의 의제를 다루는 것은 오로지 시민에 의한 것이며 시민의 것이며 시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라고.

그런데 가만히 따져 보면, 인터넷과 뉴미디어에 대한 정쟁은 사실 그 파급력에 얽힌 정치적 이해관계에 대한 동상이몽으로 읽히기도 한다. 뉴미디어를 통해 누가 정치적인 이득을 얻는지의 문제로 요약되는 것이다. 보수 정당의 전통적인 지지층은 뉴미디어에 친숙하지 않으며, 뉴미디어에 친숙한 세대 혹은 계층은 진보 정당에 호의적일 수 있다는 사실은 여러 경험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2002년 우리 대선과 2008년 미국 대선을 보라). 우리네 정치권이 대표적인 마이크로 블로그인 트위터에 보내는 관심과 사뭇 상반된 반응도 그런 순진한 인식에서 크게 멀지 않을 것이다. 정치권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트위터가 갖고 있는 정치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의 매력(혹은 함정)이다. 트위터는 다른 컴퓨터 매개 커뮤니케이션 수단과 뚜렷하게 구별될 만큼 더 뛰어난 선전 도구이거나 동원 수단일 수 있다는 것이다. 트위터를 포함한 마이크로 블로그의의 특징은 보다 더 ‘유비쿼터스’하다는 것, 즉 시공간적 제약에서 더욱 더 자유롭다는 것과 더불어, 짧고 단순한 메시지가 빠르고 광범위하게 전파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트위터에 대한 정치권의 패러다임은 따라서, 강하고 짧은 메시지의 즉각적 반복을 통한 정치적 선전 기계, 혹은 폭넓은 확산능력을 통해 기회구조를 창출하는 정치적 동원 기계라는 시각인 듯하다. 전반적으로 트위터에 미지근한 여당의 입장에서 본다면 뉴미디어를 통한 자기 당의 정치 캠페인의 효과는 높지 않지만, 야당의 유권자들과 지지자들은 트위터의 동원 효과에 포섭될 확률이 높다. 반대로 트위터에 열정적인 정치인들은 트위터가 적은 거래비용으로 선전과 동원에 필요한 수단을 제공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패러다임이 공히 보여주듯, 트위터가 제공하는 의사소통 방식은 사실 뉴미디어와 네트워크사회에 대한 긍정적 이념형들이라 말할 수 있는 ‘참여 민주주의’ 혹은 ‘숙의 민주주의’ 등이 상정하는 공론장 모형과는 이질적이다. 다소 거칠게 말한다면, 마이크로 블로그는 집단 극화나 사이버 캐스케이드(cyber cascade)로 흐르는 기술적 유인 요소로 기능할 공산이 높다. 다량의 짧고 강렬한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파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 메시지들이 정치적 숙의에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다. 트위터에 대한 정치권의 접근은 의사소통 행위를 지향하고 있다기보다는 전략적 행위를 의도하는 것처럼 읽히며, 효율적인 메시지 생산 수단을 갖고 있는 쪽은 어디까지나 시민이 아니라 정치 거대 기업과 정치 정당이다. 특히 선거철처럼 정치권의 공방이 치열해지면 트위터를 통해 전해지는 정보의 범람은 오히려 역정보로 기능하게 되고, 흑색 선전과 네거티브 캠페인이 횡행할 여지가 높다. 정부의 트위터나 UCC에 대한 규제의 표면적인 근거 역시 여기에 있다.

물론 트위터에 대한 정부의 무차별적이고 일방적인 규제는 결과적으로 ‘시민사회적 공론장’의 자율적 규약에 심각한 훼손을 끼칠 여지가 있다. 네트워크의 규약은 중앙의 정보통제자가 없는 개방, 참여, 공유로 요약될 수 있으며, 이는 민주주의의 본질과도 다르지 않다. 개인이 공적 의제를 숙의하고 토론하기 위한 성찰적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서 인터넷과 뉴미디어 환경은 보다 자율적인 환경을 필요로 한다. 강제 없이 일치를 보는 논증적 토론의 합의 수립력이라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합리성에 대한 기본전제에서 볼 때, 뉴미디어 환경에 대한 규제는 최소화되어야 한다. 일반 시민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에 대한 일반화된 규제는 일차적으로 효율적이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규제가 완전히 철폐되고, 표현의 자유가 극대화된다고 해서 네티즌들의 정치적 숙의와 참여의 수준이 자연스럽게 향상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2002년 대선․2004년 총선과는 달리, 2007년 대선․2008년 총선에서는 인터넷의 정치적 영향력이 뚜렷하게 관찰되지 못했다. 이는 선거법 등이 정비 되면서 인터넷을 통한 정치적 의사 표현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었다는 점에 기인한 바도 있지만, 2007년과 2008년 당시 이슈가 경제 문제에 집중되면서 시민의 정치적 무관심이 만연했다는 점에 더 큰 방점이 찍힌다. 한편으로는 인터넷 정치 공론장의 지형이 대단히 정파적으로 변모했다는 사실도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트위터뿐만 아니라, 이미 사이버스페이스를 가득 매운 격문과 선전 슬로건들의 침략은 이미 우리의 인터넷 환경을 ‘공론장’이라기보다는 ‘전장’이라 부르게 만들고 있다.

시민사회가 정부의 반민주적 행태를 견제하기 위해 보여준 지난 2년간의 정치적 성숙도는 인상적이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일련의 정치적 집합 행동이 과연 유효했는가에 대해 긍정하기는 어려운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입에 쓴 말이지만, 우리 시민사회는 공공성에 대한 폭넓은 가치 합의와 상식에 입각한 의사 결정 과정은 결여한 채, 다만 해방 정치의 의제를 감정적으로 표출한 굿판을 벌였던 것은 아니었는가 하는 반성에 이르곤 한다. 정치적 무기력과 공론장의 진공 상태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 네트워크는 이번에도 자칫하면 무의미한 호명들만 반복하고 정보의 과부하만을 가중시킬 공산이 크다.

기술문명에 관한 인문사회과학의 문화적, 윤리적 판단은 그 기술이 가져온 사회의 변동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기술, 그리고 설명과 그에 따른 판단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기술문명의 발달은 그에 따르는 인간행위의 특정 양상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의식적 침략자로 기능한다. 트위터나 인터넷 역시 마찬가지이다. 규제나 규약은 권위적인 통제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정보의 효율적인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임시 방편적 지배(adhocracy)로 기능할 수도 있다. 참정권의 확대를 통해 자유권과 사회권의 확대를 예비하는 숙의 민주주의가 SNS와 마이크로블로그라는 기술적 요인만으로 결정된다는 것은 유토피아적인 발상을 버릴 필요가 있다. 결국 필요한 논의는 인터넷이 없던 시대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정밀하고 신중한 자세로 다양한 의견의 참조와 합의 수립을 위한 진정한 의미의 공론장 형성을 위해 필요한 것은 트위터를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가 아니라, 트위터를 할 때 필요한 최소한의 사회적 원칙과 의사 소통 수행 능력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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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신문 4월호에 기고
시ㅋ망ㅋ

* CCL 플러긴이 맛이 가서... 혹시나... 본 글의 저작권은 기본적으로 본인에게 있으나, 2차 저작권은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문국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냥 그렇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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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산 매거진 공채 전형 중이다. 포트폴리오 만드는 게 숙제로 나와서 만든 것들인데, 그냥 두기도 아깝고 해서 블로그 포스팅.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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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만만2>928일 방송을 끝으로 폐지됐다. 햇수로 6년만이다. 20071<야심만만 만 명에게 물었습니다> 종영 당시 ‘시즌 2’를 기약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 퇴장의 모양새는 퍽 쓸쓸해 보인다. <야심만만2>의 부진에는 외적인 이유도 크다. 동시간대에 공중파 방송3사가 모두 엇비슷한 토크쇼를 편성한 것도 그렇고, 경쟁프로그램인 <놀러와>가 전시간대 여왕님들의 선정에 힘입은 데 반해 이렇다 할 반사이익을 얻지 못한 점도 <야심만만2>의 불운이었다. 제작진은 올해 들어서만 4차례의 개편을 통해 어떻게든 활로를 모색했지만, 결과가 좋지 못했다.

MC였던 강호동은 그러나 바로 다음 주부터 새 프로그램에 출연한다. PD와 작가진은 다르지만, ‘강호동이 진행하는 집단 토크쇼’라는 얼개는 그대로다. 이를 두고 시청자들은 유재석의 <놀러와>가 강호동의 <야심만만>을 화요일로 쫓아냈다고 생각할 것이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비록 강호동이 월요일은 유재석에게 내주었을지 몰라도, 주말 2연전 (<무한도전><스타킹>, <12><패밀리가 떴다>)에서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진행중이다.

두 사람의 라이벌리는 대한민국 예능 프로그램을 즐기는 최고의 관전 포인트이다. 강호동은 강하고 유재석은 유하다. 강호동은 힘이 있고 유재석은 감싸 안는다. 강호동은 감정적이고 유재석은 상식적이다. 강호동의 찡그림은 애교스럽고 유재석의 찡그림은 애처롭다. 두 사람이 함께 했던 프로그램 <X>에서의 역할이 두 사람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두 팀으로 나눠 진행되는 게임쇼에서 유재석은 메인 진행자였고, 강호동은 ‘강팀장’ 역할을 했다. 유재석과 강호동이 나란히 출세한 <동거동락><천생연분>의 질감도 그렇다. 유재석은 출연진 사이에서 중립을 지켰고, 강호동은 출연진 사이의 관계에 직접 개입했다.

하지만 이러한 이항대립 끝에서 두 사람이 대등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현실에서는 강한 것이 유한 것을 이기지만, 예능 프로그램의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강호동은 2인자라는 인식이 강하다. 유재석은 ‘국민MC’고 강호동은 ‘AMC’. 왜 강호동은 유재석을 이기지 못할까?

강호동이 방송에서나 사석에서 늘 강조하는 말은 ‘진정성’이다. 숱한 악성 루머를 이겨낸 그는 스스로가 성실하고 진실된 사람이라는 뚝심에 가까운 자신감을 보여준다. 그의 이력이 그것을 방증한다. 씨름선수 시절 그는 압도적이었다. 운동선수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타고난 운동능력도 중요하겠지만, 피나는 노력과 연습이 없다면 1인자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폐쇄적인 방송가에서도 그는 살아남아 지금의 반열에 올랐다. <12>에서든 <스타킹>에서든 강호동은 언제나 진짜 강호동이다. 분장을 하고 진행하는 <무릎팍 도사>에서도 강호동은 늘 강호동이고 싶어 한다.

 

여기에 강호동이 반드시 피해야 할 함정이 있다. 강호동은 <무릎팍 도사>에서 안철수 대표와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강호동이 [아웃라이어]를 좋아한 것은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강호동은 유재석과는 달리 ‘승리자’의 이미지가 짙다. <X>에서도, <동거동락>에서도, <무한도전>에서도 유재석은 언제나 루저의 이미지를 고수한다. 유재석을 ‘국민MC’라고 불러도 ‘A급 연예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한 것은 그런 까닭이다. 강호동도 <12>에서 간혹 다른 출연진들에 의해 골탕을 먹지만, 제리에게 골탕을 먹는 톰이 실제로 제리보다 약해 보이는 것은 아니다.

<야심만만2>에서의 강호동은 줄곧 그 진정성과 진솔함, 혹은 AMC로서 자신이 갖고 있는 ‘예능 노하우’ 내세웠다. <야심만만 2 : ..>에서의 강호동은 <12>에서의 ‘우두머리’ 강호동을 연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교도소가 등장하는 코미디 영화에서 죄수들이 나누는 대화는 크게 두 가지 양상으로 진행된다. 사회에 있을 때 누가 더 잘났는지, 누가 더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는지 허풍을 떨거나, 동병상련을 간직한 이들이 서로의 억울함을 듣고 공감하는 것이다. 그런데 강호동이 택한 것은 전자도 후자도 아니었다. 강호동은 수감실의 유일한 승리자로서 게스트들을 취조하는 수사관처럼 행동했다. 결국 코너 내내 강호동이 가장 자주 내뱉은 말은 ‘○○○ 죄수, 죄를 인정하십니까?’였다. 똑같이 감옥에 갇힌 사람들끼리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히 이상하다. 그에 대한 호불호가 엇갈리는 가운데, 강호동의 고자세를 불편해 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야심만만2>의 전신 <야심만만 만 명에게 물었습니다> 역시 ‘진정성주의자’ 강호동에게 잘 어울리는 토크쇼였다. 이 쇼는 근래 토크쇼의 대세가 된 소위 ‘솔직 토크’의 효시로 꼽힌다. <야심만만 만 명..>을 기점으로 토크쇼의 트렌드가 연예인의 사생활을 중심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강호동이 성공으로 이끈 또 다른 토크쇼 <무릎팍도사>는 일견 <야심만만 만 명..>과 달라 보이지만, ‘솔직 토크’ 성공 비결로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야심만만2>의 실패나 여타의 지리멸렬한 토크쇼에서 보듯, ‘솔직 토크’는 그 자체로 프로그램의 성공을 보장해주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야심만만 만 명..>은 실제로 설문조사를 통해 얻은 내용을 바탕으로 한 ‘공감’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고, <무릎팍 도사>는 마치 정신과 상담을 연상케 하는 ‘무당과의 ‘대화’라는 외피를 씌움으로써 따뜻한 느낌을 유지한다. <야심만만 만 명..>이나 <무릎팍 도사>를 볼 때 시청자들은 자연스레 게스트들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이때의 강호동은 게스트들을 윽박지르거나, 자신의 감정을 앞세우거나, 패거리의 우두머리로 군림하는 승리자 강호동이 아니라, 항상 게스트의 편이 되어주는 듬직한 보디가드가 되었다. 즉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공감(혹은 용서 내지 칭찬)받는다’는 정서가 이들 토크쇼의 기반이었다는 점이다. <야심만만 만 명..>는 본래 강호동이 중심이 된 토크쇼가 아니었다. 쇼의 성공에는 김제동이나 박수홍처럼 편안한 공감을 이끌어낼 줄 아는 모범생과 재담꾼의 역할이 컸다. <무릎팍 도사> 역시 강호동이 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건방진 도사’ 역할을 연기하는 유세윤이 ‘무릎팍 도사’ 강호동을 능가하는 ‘독한’ 기믹을 맡음으로써 강호동의 포지션을 재설정한 것이 프로그램의 성공 포인트다.

유재석은 유하고 강호동은 강하다. 텔레비전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청자들은, 유한 것이 강한 것을 이겼으면 좋겠다는 전복적인 욕망을 전유한다. 강호동의 새 프로그램 <강심장>은 스무명이 넘는 게스트가 정해진 주제에 따라 입담을 겨루고 방청객이 심사를 맞는 형식의 토크쇼다. 흡사 토크쇼판 <스타킹>처럼 보이기도 한다. 문제는 이 프로그램이, 승리를 위해서는 더 독한 이야기거리를 들고 나와야 한다는 점에 있다. 이때 강호동은 자신이 갖지 못한 유재석의 재능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시청자들이 가장 불편해할 모습은 분명 게스트들에게 ‘경쟁에서 승리할 것’을 강요하는 그의 모습일 것이다. 강호동은 자신이 분명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진솔한 이야기를 끌어낼 줄 안다는 사실을 <무릎팍 도사>를 통해 증명해 보였다. 그때 강호동이 발휘한 것은 그의 겉으로 드러나는 강함이 아니라, 내면의 강함이었다. 강호동이 유재석을 넘어서는 길은, 외유내강의 웃음을 선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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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만 가지고 그래?

-드래곤은 자신의 솔로 앨범 <Heartbreaker>에 제기된 표절 혐의를 두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더 큰 비난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대신 그는 앨범에 수록한 다른 노래에서 ‘예전에는 울기도 많이 울었네..(중략)..세상아 내 인생 물어내..(중략).. 살기 힘든 세상 나 하나로 위로가 되신다면’(<Gossip Man>)이라는 가사로 적잖이 섭섭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성난 사람들은 ‘우리나라는 뜨거운 냄비/눈 깜짝하면 식을 테지’(같은 곡)와 같은 가사를 물고 늘어진다

-드래곤 논쟁이 채 정리되지 않은 와중 또 다시 ‘건수’가 터졌다. 주인공은 제 33회 대학가요제 대상을 수상한 듀오이대 나온 여자’의 노래 <군계무학>이다. 의혹을 제기한 네티즌들은 이 노래가 리쌍의 <광대>, Nouvelle Vague<This is not a Love Song>, 언니네 이발관의 <가장 보통의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고 주장한다. 이 노래가 만약 작년에 출품되어 수상했다면,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중은 이미 ‘지-드래곤 학습효과’ 겪은 뒤였다. -드래곤의 음반에 별 반 개를 준 음악평론가 차우진의 표현대로라면 대상에 ‘모작의
혐의’가 있는 경우 ‘비평적 개입을 중단’하게 된다. ‘찝찝해서 평가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노래는 음악에 대해서 ‘알 만한 사람’들이 심사를 맡은 제법 공신력 있는 대회에서 대상을 탔다. 가요제의 연출을 맡은 프로듀서의 주장대로, 전문가 집단의 검증을 거쳤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대중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팀의 이름이나 줄곧 ‘개성’ 운운하는 가사가 적절한지 이야기하지 않고 표절에 관해 이야기한다.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에서 표절, 혹은 모방은 너무나 흔한 일이다. 한국의 대중음악 판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고, 대중의 원하는 멜로디는 수렴한다’는 식의 변명이 통하는 수상한 곳이다. 오히려 표절하거나 모방한 노래의 성공이 더욱 필연적인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취향은 결국 소비를 통해 학습되고 훈련된 결과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어떤 음악이 더 많이 혹은 더 널리 소비되는가의 문제는 사실상 그것의 독창적 성과와는 큰 관계를 갖지 않는다. 오히려 청자는 자신과 접한 외부 환경에서 널리 들려진 음악에 길들여지며, 강요된 선택지 안에서 가장 편안하게 들리는 음악을 선택하여 소비하게 되는 까닭이다.  

이들 논란이 어떻게 끝날지 예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빈도와 심각성의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왕왕 있어 왔던 문화계 전반의 표절 논란도 늘 마무리가 석연치 않다. 마징가 Z와 태권V 시절부터 항상 그래왔던 ‘오래된 미래’다. 예컨대 ‘대중문화’라는 레토릭을 불편해 할 문학계의 사정도 썩 말끔하지 못하다. 1992년 출간된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작가세계 문학상을 수상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를 베낀 작품이라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이인화는 ‘페스티시(혼성모방)’ 기법을 논하며 혐의를 피해갔고, 심지어 다른 필명으로 자신의 작품을 직접 상찬하는 평론을 쓰는 희비극도 연출했지만 문학 교수직을 유지하고 있다. 중견소설가 신경숙도 대표작 [기차는 7시에 떠나네]<딸기밭>이 모작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고 올해 발표한 [엄마를 부탁해]는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양대 문학상을 석권한 소설가 권지예도 ‘시골의사’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칼럼니스트 박경철의 에세이와 연관되어 표절 시비가 일자, 인터넷에서 본 글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작품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해당 작품에 동인문학상을 준 심사위원회는 ‘표절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 그녀를 방어해 주었다. 지난해 발표된 조경란의 장편소설 [] 역시 심각한 표절 공방이 오갔다. 하지만 이렇다 할 결론 없이 사건은 잊혀갔다. 그녀 역시,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

  패션 산업에도 표절은 공공연한 영업 비밀이다. 수많은 인터넷 패션 관련 커뮤니티에서는 어느 브랜드의 어느 제품이 하이패션계의 어떤 제품을 카피했는지를 정확히 추적해낸다. 동대문에서 살 수 있는 옷가지부터 백화점에서 판매되는 고가브랜드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양상에는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어느 쪽이 조금 더 ‘비싼’ 원본을 택했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때에 따라서는 여러 브랜드에서 동일한 디자인의 제품이 나오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 그것이 카피인 줄 모르고 구입한다. 하지만 몇몇은 알아도 산다. 오히려 저렴한 가격에 ‘비싼 디자인’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기뻐한다. 그러니 기업에서는 더욱 대담하게 카피 제품을 찍어낸다.

이 무수한 표절 논란에서 왜 하필이-드래곤만 집중 포화를 받게 된 것일까? 일차적인 원인은 물론 뻔뻔함에 있을 수도 있다. -드래곤과 소속사 YG엔터테인먼트는 논란에 대해 장르적 특성상 음악 창작 과정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라며 샘플링이니 오마주니 하는 말들로 도망치며 모방의 흔적을 애써 말소하려 든 것은 사실이다. ‘실수였다’라는 사과는 용서해도 ‘오해다’라는 변명에는 발끈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인가?

임명직 고위 공직자들의 인사가 있을 때마다, 논문 표절도 위장 전입과 함께 단골 메뉴가 되었다. 2006년 김병준 교육부총리후보자의 경우 표절 의혹에 휘말려 하차했지만, 정권이 바뀐 뒤에는 수많은 입각 후보자들이 표절 의혹과 관계없이 인준이 되어가는 추세다. 간혹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이 표절 문제 때문은 아니다. 결국 표절 의혹은 결국 비난의 구실이었을 뿐이었다.

-드래곤에 대한 대중의 비난에는 공직자 후보들에 대한 정치적 공세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이러한 공격에 있어 표절은 만만한 핑계다. 워낙 만연한 일이다보니 털면 털리는 먼지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연예인에 대한 비난에는 별다른 부담과 수고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정의로운 인간이다’라는 식의 묘한 쾌감을 준다. 비윤리적인 행위를 통해 성공한 타인에 대한 양가감정, 즉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와 ‘아무리 그래도 그래서는 안 된다’라는 불편한 이중 잣대 가운데, 연예인에 대해서는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쉽다는 뜻이다. -드래곤을 비난하는 네티즌들은 그가 ‘천재 뮤지션을 자칭하더니 표절을 했다’ ‘풍기문란을 조장하는 티셔츠를 입을 때부터 알아보았다’ 등 악의적인 코멘트를 덧붙인다. 애당초 지-드래곤이 사회적 안녕을 저해하는 불순분자인 만큼, 표절 역시 비윤리적인 개인의 비윤리적인 행위라는 식으로 몰아붙인다. 반면 고위공직자후보자들의 위장전입과 논문표절은 왕후장상의 입신양명 필수 코스라는 식의 무의식이 작용한다. 동시에 그것을 비윤리적인 행위라고 비난하는 대신 ‘성공한 자들이 저지를 수밖에 없는 실수’ 쯤으로 생각해 버리고 만다.

  물론 문화계나 학계의 표절과 모방 관행을 옹호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분명 모작 자체는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말은 바로하자. 우리 모두 하고 있다. 그러니 지-드래곤만 잡으면 될 일이 아니다. -드래곤은 서로 충돌하는 욕망이 뒤엉킨 잇몸에 박힌 이빨일 뿐이다. 이 지리멸렬한 치통의 원인은 충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잇몸에 있다. 이빨을 뽑는다고 잇몸병이 낫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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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영화를 보고 왔다
. 영화 구경을 하러 갔다기보다는 극장 구경을 하고 왔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폭이 32m에 달하는 초대형 스크린은 과연 압도적인 스펙터클을 자랑했다. 지난 916일 개장한 멀티플렉스 체인 CGV의 새 상영관 ‘아트리움’ 이야기다.

더욱 압도적인 것은 상영관이 아니라, 상영관이 입점해 있는 대형 쇼핑몰 ‘타임스퀘어’다. 지하철 1호선 영등포역에서 CGV 영등포점까지 가는 길은 이 타임스퀘어를 가로지르는 것이 가장 가깝고도 멀다. CGV입점 매장 가운데 영등포역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소나기 효과(shower effect) 고려한 배치인 셈이다. 쇼핑몰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동안 둘러보게 되는 실내 풍광은 대단히 직관적이다. 공간의 중앙을 비운 아트리움 구조이기 때문이다.

흡사 성채나 다름없는 거대한 건축물인 타임스퀘어의 연면적은 약 37만㎡이다. 대단한 규모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기존 영업 중인 다른 ‘UELC(Urban Entertainment&Life Center)’의 크기도 만만치 않다. 시초 격이라 할 수 있는 삼성동 코엑스몰(호텔, 백화점 포함 총 29만㎡)이나 용산역 아이파크몰(28만㎡)도 광활한 것은 마찬가지다. 이들보다 비교적 작은 왕십리역 비트플렉스도 10만㎡에 달한다. 평범한 백화점의 2배다.

이들 거대 쇼핑몰은 공통적으로 유동인구가 많은 지하철역(혹은 기차역)을 끼고 있다. 이들 쇼핑몰뿐만 아니라, 서울시내 주요 지하철역은 대개 크고 작은 복합 쇼핑센터나 백화점이 연결되지 않은 경우를 찾기 어렵다. 이러한 역세권 상점은 대개 지하철을 일상생활을 일부로 영위하는 중간 계급을 겨냥한다. 교통시설과 상업시설을 연계하는 대대적인 토목공사의 궁극적인 목표는, 말할 것도 없이 일반 대중의 소비 진작이다.

사실 이러한 광경은 다분히 근대 일본의 것을 닮아 있다(이것이 우리의 근대가 일본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서울역의 갤러리아 백화점, 영등포역의 롯데백화점, 용산역의 아이파크백화점을 비롯해, 지방 도시 기차역마다 자리한 백화점들은 일본의 전통적 ‘터미널 데파트’와 비슷하다. 철도와 백화점은 근대화의 가장 대표적인 두 표상이며, 압축적인 근대화 과정을 통해 공고한 결합을 이룬 것이다. 산업사회 혹은 대중사회를 지탱해주었던 표준적 대량 생산과 소비 체제 형성 과정에서 철도가 혈관의 역할을 했다면 백화점은 허파였던 셈이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선 대형 쇼핑몰들을 두고 ‘근대적인 건축물’이라고 하는 것은 어딘지 이상해 보인다. 서구적 근대 세계에서는 생산을 위한 노동의 영역, 상품 거래를 위 한 시장의 영역, 심미적 쾌락을 위한 문화의 영역이 제법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 역시 마찬가지였다. 업무지구와 상업지구, 주거지구와 문화지구의 구획이 명확했다. 공단은 공단대로, 베드타운은 베드타운대로, 도심 상업지역은 상업지역대로 개발되었다.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종로3가나 충무로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단관 상영관을 찾아가야 했다.

티플렉스와 대형화된 쇼핑몰의 출현으로 서울의 풍경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강변역과 동서울터미널을 끼고 등장한 테크노마트와 CGV, 코엑스몰과 메가박스의 등장은 일상적인 쇼핑과 문화생활의 영역을 하나로 묶어 냈다. 대표적인 유통기업인 롯데가 영화 배급 사업을 벌였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UELC는 바야흐로 상업적 기능을 넘어, 도시 생활을 보다 폭넓게 창조해낸다. 쇼핑센터에 진열된 상품의 스펙타클과 스펙타클을 판매하는 문화산업의 교배는 새로운 공간과 제도, 환상의 세계를 낳았다. 비트플렉스의 조준래 대표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유학 시절 공부만 하지 않고 주말이면 도시 곳곳에 다니며 문화와 양식을 배웠다. 그때의 경험이 모두 비트플렉스를 구성하는 아이디어가 됐다. 비트플렉스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창작 예술품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물론 대형 자본이다. 말하자면 서울을 개발하고 관리하는 것은 서울시청이 아니라 거대 자본과 기업가다. 코엑스몰을 운영하는 코엑스는 한국무역협회에서 설립한 회사다. 아이파크몰과 타임스퀘어도 모두 거대 기업 자본이 집약된 결과물이다. 송파구 장지동 가든파이브의 실패는 상징적이다. 행정기관이 대형 상업시설을 직접 조성하고 관리하겠다는 발상은 시대착오적이었다. 가든파이브는 엄청난 물량의 TV광고를 통해 자신이 ‘대한민국 문화특구’임을 강조했다. ‘문화 특구’라니? 시장을 행정 구역으로 여기는 이 구호는 포스트모던한 쇼핑몰과 전근대적인 관리 행정을 결혼시키고자 했던 기묘한 시도의 방점이다. 가든파이브를 둘러싼 잡음은 입주가 약속되었던 청계천 상인들이 행정기관에 기대하는 정치적 공정성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조화는 늘 그렇듯 매끄럽지 못하다.

 강남 일대를 뒤덮은 주상복합건물과 더불어, 이러한 포스트모던 건축물들은 사회의 경계를 지운다. 우리는 거주하는 동시에 소비하고, 소비하는 동시에 사유해야 한다. 쇼핑몰과 주상복합건물에는 상층회로와 생존회로가 경계를 잃고 복잡하게 얽혀 있다. 타임스퀘어와 아이파크몰에는 수많은 하이패션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가 입점해 있다. 기존 영등포 상권에 명품에 속하는 브랜드라고는 버버리가 유일했다. 용산 아이파크몰은 용산 철거민 사망 사건 지역에서도 멀지도 않다. 이들 쇼핑몰에서 가까운 곳에는 여전히 집창촌이 있다.

 

도시의 공기는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고 했다. 인구 1천만의 거대도시 서울의 공기는 인간을 얼마나 자유롭게 하는가? 새롭게 등장한 UELC와 주상복합건물은 시민과 도시의 연결을 끊고 인간을 포스트모던 쇼핑객으로 환원시키고 있다. 여기에 시민성이나 인간성이라는 개념을 들이밀 여지가 없다. 공급자의 필요에 의해 정교하게 배치된 상점들 사이를 거니는 것은, 한가로운 산책이라기보다는 몽유에 가깝다. 이러한 스프롤링(sprawling)은 역세권 상점뿐만 아니라 기존의 번화가도 집어삼키고 있다. 홍대와 신사동에 들어선 ‘힙플레이스’들은 과연 문화적인 해방구인가? 삼청동과 가로수길은 커피를 마시며 친구를 만나 담소하는 생활영역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광객을 위한 일탈의 영역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서울에 산다는 것은 곧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을 뜻한다. 청담동의 상점 사이를 거닐기 위해서는 옷차림에 신경을 써야 한다. 입장료를 지불할 수단이 없다면 추방되는 소도이다.

  독재 시절 서울은 베를린 장벽과 포츠담 광장으로 대표되는 베를린과 비교되곤 했다. 한 나라의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내부 속의 외부’인 미군부대의 규모는 세계 최대였다. 개발 이후 서울은 강남, 분당, 일산을 위시한 관치 건설 사업으로 탄생된 개발도상국의 공룡도시였다. 90년대 서울은 출근길에 허리가 동강난 한강다리와 피크타임에 뜬금없이 무너진 백화점으로 기억되었다. 그리고 21세기 초입의 서울. 코엑스몰과 아이파크몰 타임스퀘어는 깃들 곳이 없는 막막한 성채다. 소설가 김훈의 표현대로, 지금 서울은 어느 누구의 고향도 아니다. 서울은 만인의 타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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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삶은 고생스럽다. 매 순간 아름다울 것을 강요받는다. 충분히 예쁜데도 더 예쁘게 꾸며야 한다. 여자는 시집가면 그만이라는 말은 전설이 됐다. 여성도 당연히 사회생활을 꾸려나갈 능력을 갖춰야 한다. ‘한국여자’ 사는 것은 더욱 힘들다.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억울하다고 말하는 순간, 더 많이 억울해 할 일이 생긴다. 성차에 따른 차별적 위계질서를 문제 삼고 실질적 평등을 요구하는 데에는, 다시 말해 ‘페미니스트’가 되는 일에는 더욱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물론 가시적인 생명의 위협에 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성은 차별 받는다’거나, ‘양성평등은 옳다’라고 입 밖에 내는 순간, 보이지 않는 낙인이 점차 새겨져 온다. 입에 담기도 민망한 말, ‘꼴통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도 달린다.

꼴통 페미니스트, 줄여서 ‘꼴펨’ 혹은 ‘꼴페미’라는 말은 공식적으로는 ‘금지된 말’이다.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 보면 무수한 웹페이지들이 쏟아져도 이 말을 사용한 제도권 매체의 기사는 검색되지 않는다. 하지만 제도권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다고 해서 ‘꼴펨’이라는 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어떤 맥락에서 사용하며 얼마만큼 모욕적이고 폭력적인 말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가끔은 생면부지의 불특정다수에게 그 말을 듣기도 한다.

인간을 구분하고 현상에 이름을 붙여 신조어를 만드는 일은 제도권 언론의 담당이었다. 사회과학자들의 관찰과 수사를 매체에서 수용하고 전파하면서 점차 일반 대중에게 퍼져나가는 것이 신조어의 일반적인 탄생 과정이었다. 그러나 인터넷은 언어시장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이제 사람들은 개념어가 필요할 때 저마다의 게토에서 제 입맛에 맞게 새로운 말을 만들어낸다. 근래에는 도리어 제도권 언론에서 직접 나서서 이들 신조어를 채집해 사회현상으로 인증하기도 한다. 이 ‘신조어의 길거리 캐스팅’에는 찝찝한 구석이 있다. 몇 개의 음절로 세상을 답파하는 것은 즐거울 수도 있지만, 우리가 듣곤 하는 대개의 말들은 편 가름과 다툼을 위해 태어난 것들이다. ‘-녀’ 끝났던 수많은 말들이 그렇다. ‘된장녀’라는 말은 어원도 쓰임새도 불분명하지만, ‘남자 등쳐 먹는 여자(gold digger)'부터 알파 걸(alpha girl)에 이르는 폭넓은 내포를 자랑하며 자본주의 시장에서 여성의 삶을 조롱하고 압박하고 있다. 숱한 인터넷 마녀 사냥의 과정에서 아스라진 수많은 ’-녀‘들을 여기서 더 언급하지 않겠다. ’토이남, ’초식남처럼 남자들을 겨냥한 말도 있다. 하필이면 모두 남성성을 결여한, 나약한 남성을 부정적으로 부를 때 쓰는 말들이다. 초식남의 여성명사는 ’건어물녀‘다. 불공평한 일이다. 왜 외로운 남자는 풀 먹는 온순함으로 설명되고, 외로운 여자는 말린 오징어에 비유되는 것인지.

최신조어 ‘꿀벅지’도 언어 시장에서 당당히 유통되고 있다. 블랙마켓의 자매품으로꿀덩이(+엉덩이)’라는 말도 있는 모양이지만, 아직 정식 출시되지는 않았다. 된장녀 논란 때에도 그 조어 과정이 미궁에 빠졌듯, 이 기묘한 신조어 역시 어원에 관한 가설들이 분분하다. 먹는 꿀인지, 돼지 울음소리인지, 아니면 ‘기분이 꿀꿀하다’고 할 때의 그 꿀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유력가설을 채택해 보려고 해도, 보행을 위한 인간의 신체와 식물이 만들어내는 단당류 혼합물을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 것일까? ‘꿀’은 모름지기 사과나 참외 같은 과일과 합쳐져야 하는 말이 아닐까.

‘꿀벅지’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대담해진 아이돌 걸그룹들의 패션이 있다. <소원을 말해봐>를 부른 소녀시대는 핫팬츠를 입고 연신 각선미를 뽐냈다. 브라운 아이드 걸스도 핫팬츠를 입고 거만한 스탠스로 허리를 흔들었다. 이 신조어의 소유권을 주장할 법한 유이가 속한 애프터스쿨의 옷차림은 보다 노골적이다. <diva>로 활동할 무렵 애프터스쿨 멤버들은 캘빈 클라인 언더웨어의 핫팬츠를 입었다. 패션에 무지한 남자들은 그 옷을 보며 자신들의 속옷을 떠올린다.

다리를 드러내는 패션 트렌드의 레퍼런스는 헐리웃 스타들이다. 비욘세와 시애라, 제니퍼 러브-휴잇이 그렇다. 그들과 한국 아이돌의 다리에 담긴 의미가 서로 온전히 같아 보이지 않는다. 비욘세나 제시카 알바도 출산 후 체중 문제로 고민에 빠진다지만, 그들이 각선미를 관리하기 위해 카복시 주사를 맞아가며 활동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씩 셀룰라이트가 드러나기도 하는 그 다리에 붙여줄 수 있는 레토릭은 ‘꿀벅지’라기 보다는 ‘건강미’ 쪽이다. 그들의 다리에는 어떤 반-미학과 성적 자유의 맥락까지 담겨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누군가의 다리를 보고 꿀벅지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을 인격에 덧칠하는 추문으로 사용하는 그때 그녀는 아름다운 신체 부위로서의 다리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그 다리가 된다. 결국 꿀벅지라는 말은 페티시즘의  욕망 외에는 딱히 담고 있는 것이 없는 가벼운 말이다. 성적인 욕망을 갖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성적인 욕망을 함부로 드러내고, 어떤 말로 대상을 가두려고 하는 것이 음험한 것이다.

유이가꿀벅지라는 별명에 기분이 나쁘지 않다’라고 해서, 그녀를 계속 꿀벅지라고 불러도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종류의 언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될 때 느껴지는 불쾌함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분명 사회적인 문제다. 가부장적 응시에 의해 분절적으로 포착된 다리를 고작 식품에 치환시키는 상상력의 과정 전반을 우리는 불쾌해 해야 한다.

패션은 분명 자기만족인 동시에, 사회적인 소통의 수단이다. 여성의 신체에 대한 아름다움이 내재적이고 본질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기준이 오로지 남성적인 응시, 남성의 미적 주체성과 결부되는 것만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스스로를 사진 찍는 행위인 ‘응시’ 벗어난 순수한 나르시시즘을 실천할 수는 없다. 순수한 나르시시즘이라고 한다면,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아무 것도 찍어 바르지 않고, 누구와도 만나지 않을 때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아름다운 여성이 외모 권력을 소유함으로써 파워우먼이 될 수 있을지라도, 보부아르가 말했듯 여성이 아름다운 외모를 원하고 자기애에 빠지는 것은 이 광폭한 남성지배 사회에서의 가녀린 생존전략일 뿐이다. 때에 따라서는 완벽해 보이는 변신도 있다. 만 레이의 모델이자 장 꼭또의 <어느 시인의 피>에 출연했던 리 밀러는 만 레이의 모델이었다. 만 레이에게서 사진을 배운 그녀는 <Vogue>의 종군기자로서 제 2차 세계대전 현장을 누볐다. 대상에서 주체로 완벽하게 변신한 것이다. 만년에는 사진을 그만두고, 요리의 여왕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나 리 밀러가 될 수는 없다.

매일 아침 여성들의 자존심은 뿌리부터 흔들린다. 세안을 하고 화장을 하고 입을 옷을 고르는 데 이르는 수많은 협상에서 대다수의 여성은 약자다. 여성들의 자존감이 꿈꾸는 이상향은 슬프리만치 한결같다. 마른 몸에 가슴은 커야 좋다. 경추와 척추는 곧고 당당해야 한다. 엉덩이와 다리에 탄력이 더해지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여성 신체의 미학이란 아직도 헬무트 뉴튼 사진의 피사체에서 조금도 발전하지 못했다. 신디 셔먼이 촬영한 레이 가와쿠보의 안티패션 미학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언캐니(uncanny)한 아방가르드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성들에게 패션이 중요한 이유는 여성이 본디 심미적인 존재여서가 아니다. 많은 여성에게 있어 패션 매거진은 자기 인적자본 확충의 매뉴얼로 기능한다. 패션을 논하는 미디어들은 나름대로 저마다의 미학과 인문학을 전달하려고 무던 애를 쓰지만, 취향과 품위가 온전히 소통된다는 말은 거짓말일 것이다. 패션에 매달리는 여성들을 다만 계속 염려해야 한다. 패션 매거진은 예뻐지려는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개별적 욕망들을 거짓되게 추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응원하고 도와준다고 말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대한민국의 남자들이 꿀벅지 따위의 말에 갇혀 살아야 하는 여성들에게 품는 성적 욕망을 책망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무쇠팔 무쇠다리’에게도, 똑같은 인격적 존중과 정치적 공정성을 갖추고 사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묻는 것이다. 튼튼한 무쇠 팔 무쇠다리는 꿀벅지보다 더 예쁜 것이다. 더 강한 것이다. 그러니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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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레옹이 땡전뉴스를 보았더라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의 제국에 이런 게 있었더라면, 내가 워털루에서 패했다는 것을 비밀로 할 수 있었을 텐데!' 과거 우리가 경험했던 권위주의적인 미디어란 통제의 대상인 동시에 통제의 수단이었으며, 각종 물리적 경제적 폭압 아래 그 '온당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늘날 그 흔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소수의 족벌 언론사들은 그시절을 거쳐 탄생했다. 몇몇 언론사들에게는 독과점이 허용되었으며, 동시에 그들은 검찰수사를 받지 않았고, 국세청의 세무시찰 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 앞서 '경제적 폭압'은, 실제로는 동전의 양면이어서 족벌 언론사에게는 경제적 유인책으로 다가왔다. 기자들이 본봉에서보다 촌지에서 그 수입을 충당하던 시절이 있었다.

 '정치적인 민주화'는 '언론 시장의 개방'을 불러왔다. 매스미디어의 양적인 증가는 신문의 종수와 부수를 증가시켰고, 공중파 방송사의 자율성이 확대되었으며, SBS를 필두로 해 이후 각종 케이블 방송미디어들이 등장했다. 언론시장의 양적 확대는 언론사간의 과당경쟁을 부추겼으며, 다수의 언론사들이 시장에 참여하면서 시장역량을 초과하는 공급 조건을 완성시켰다. 경제성장과 시장확대는 특히 광고시장을 다변화시켰는데, 이러한 저변 확대는 언론시장의 총매출액은 증가시켰지만 각 언론사의 순익은 감소시키는 결과를 나았다. 요컨대, 신자유주의질서가 정착되면서 언론은 기업화되어야했고, 오늘날 미디어기업의 수익모델은 대부분 광고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언론들은 광고를 확보하기 위한 무브를 언론사의 기조로 삼았으며, 그들의 논조는 곧 자본의 논리에 의해 움직였다. 따라서 언론사들은 특정 세력에 아부하거나, 정치적으로 모호하거나 때로는 보수적인 입장을 '중립', '공정보도'라는 구호 아래 포섭시켜 왔다.

 포털사이트들의 속성 역시 이러한 시장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웹비즈니스의 비즈니스모델은 예나 지금이나 광고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 사람을 모으고, 정보를 분배하는 것이 포털의 주 기능이기 때문에, 그 속성상 저널리즘의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1980년대 말 민주화 이후 우리 나라의 미디어/저널리즘이 얻게 된 자율성은 전술한 대로 시장 논리의 타율성 아래 재편되어온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2000년대 이후 등장한 포털이 얻은 자율성은 곧 웹비즈니스 자본의 논리 아래 구성되고 작동되어온 약사라고 해야 한다. NHN의 주가가 폭등하고 주가총액이 10조원이 넘으며 그 대주주들은 50대 주식 부자 순위에 이름을 올리게 되는 것은 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사태를 읽어야 함을 뜻한다. 일부 정치 세력의 음모론적인 시각이라고 공박당할지 모를 주장이지만, 특히 이러한 자본 축적 과정은 국민의 정부 이후 웹포털들의 몇몇 편향된 정치 성향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사실상 웹포털은, 심지어 그 흔한 규제조차 받지 않았으며 도리어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대규모의 특혜와 지원을 받은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웹포털들이 기반하고 있는 IT인프라라는 것이 곧 국가가 도맡아 구축한 토건 환경이기 때문이고, 이에 힘입어 자립적 대기업화를 이룰 수 있었으며 안정적인 물적 토대와 거대한 부를 축적해 왔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사실상 웹포털은 정치권력이라는 잇몸에 돋아난 이빨 같은 존재라고 말해야 한다.

 하여 그간 우리의 미디어가 정치권력으로부터 온전히 탈주해 왔는가를 묻는다면 그 대답은 무척 회의적이다. 정치권과 밀착되었으며 자본에 종속되었고 지배 이데올로기에 복무해 왔다. 특히 민주화 과정에서 일부 미디어들은 국민들이 치러야 했던 숭고한 희생에 조응하거나 길항하거나 혹은 그 공백에 침투해 왔다. 자조적으로 이름붙여진 우리의 정치 논평인 '시민 없는 시민사회'라는 말에서 그 '시민'의 공백에 사실상 몇몇 미디어들이 자신의 자리를 구축해 왔으며, 웹포털은 그 조류의 최전선에 있다. 그러한 가운데 웹포털은, 종종 이러한 '희망섞인 오해'의 대상이 되기를 스스로 희망하는데 : 이전의 일방적인 미디어들에 비해 쌍방향성, 비동시성, 축적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공유, 참여, 개방의 새로운 미디어 환경을 만들어내고 그 결과 온라인 저널리즘은 '미디어 공공영역'으로 기능할 것이다. 웹포털이 어떤 기사를 먼저 올리고 말고 하는 문제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좋은 말들이다. 하버마스의 주장을 떠올리게 하는 이러한 메커니즘은, 과연 웹 포털의 새로운 미디어 로직media logic이 자발적 결사체인 시민사회 공론장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온라인 저널리즘은 스스로를 기존의 미디어들과 비교한다면, 공론장의 형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가져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기존 저널리즘의 구태와는 상당히 다른 매체 환경을 제공하면서, 저널리즘의 형식과 내용 전반, 즉 미디어 로직을 대단히 새롭게 하고 있다. 취재 환경, 기사 구성 방식, 구독의 방식을 완전히 새롭게 했다...고 주장한다. 정말? 나는 그 덕분에 우리는 '카메라 출동' 대신 '고발 동영상'과 그 동영상에 나온 주인공들의 '싸이 주소'에 보다 관심을 갖게 되었을 뿐이 아닌가라고 자문하게 된다. 그게 아니라면, 온라인 저널의 대부분은 (특히 이름을 일일이 거열하기도 민망한 각종 B급 언론사들의) 막되먹은 기사들이다. 종이 신문에는 차마 싣지 못할, 실렸다고 해도 지하철 가판대에서 주말마다 주위의 눈치를 보며 읽어야 했던 류의 기사들을 이제는 은밀하게, 사실상 공공연히 읽을 수 있다. 굳이 이름붙인다면 미디어 시장의 오렌지 매매, 혹은 미디어 로직에서의 그레샴 법칙 정도일 것이다. 까닭은 요컨대 그런 연성 기사들이 '돈'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인터넷 뉴미디어의 본질적인 특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공유, 참여, 개방은 민주주의의 발전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제공된다. 정보의 중앙통제자가 없다는 점은 분명 참된 공론장의 형성에 매력적인 기반이 된다. 특히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증대한 정보에 대한 접근성, 속보성, 다양성은 분명 실보다 득이 많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단언컨대, 온라인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기대는 어디까지나 잠재적latent인 수준에서 발전하지 못했고, 다만 몇몇 커뮤니티와 몇몇 저널이 기존의 정치구조 혹은 체계에 대한 변화와 발맞추어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대다수의 나머지는? 우리는 그 대표적인 행태를 이미 잘 알고 있다. '온라인 낚시꾼'과 '마녀사냥'이다. 개인적인 수준에서 많은 경우 우리의 전기신호들은 허섭스레기나 다름없는 '떡밥'들이지 않나.
 
 DCinside의 악플놀이는 차라리 귀여웠다. '낚시'와 '지능형 안티'들이 지배하고 있는 리플과 트랙백이 온라인 여론이라면 나는 여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르디외의 말을 수정하여 여론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말하겠다. 그게 아니라면, 틸리 식의 군중동원이 프로이트를 만난 저 수많은 '일단 까고 보자'는 키보드워리어들과 만나야 한다. 토론 프로그램에서 말실수 한번 하면, 정지화상에 음성, 영상이 캡춰되고 합성되어 여기저기에 포스팅되며 가족사항과 학력, 싸이주소와 집주소까지 까발려진다. 디워 현상부터 '-녀' 시리즈에 대해 왜 우리는 적절한 논평을 그들앞에 대놓고 이야기할 용기를 잃을까. 아니, 거기에 왜 '용기'가 필요하단 말일까.

 시각을 바꾼다면 별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뉴미디어가 도래하기 이전 아젠다 셋팅은 소수의 미디어권력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여론의 생산자는 저 찌질하기 짝이없는 키보드워리어보다도 확실히 훨씬 비열한 놈들이었다고 말해야 한다. 미디어기업의 데스크와 게이트키퍼들이 자신의 자본 논리에 입각해 만들어낸 여론이라는 것이 키보드워리어가 만들어내는 여론에 비해 더 값어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키보드워리어가, WTO 농성장에서 할복하거나 오늘도 청와대나 구청 앞에서 무언가를 뒤집어 쓰고 시위하거나 굶어가며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상영회를 하는 소수의 사람들과 같은 아젠다 세터일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면 키보드 워리어들의 담화는 수고롭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인터넷시대의 문화가 수고로운 것에 대한 보답이 없기에 활력을 얻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MP3 파일을 쉽게 주고받는 것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수고에 똥을 칠하는 것이고, 영화를 다운받는 것은 연봉 800만원에 자신의 꿈을 거는 영화인 지망생들의 식도에 염산을 붓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수고로운 것에 대해 정당한 보답을 할 수 없으며, 수고롭지 않음에도 소구할 거리가 있는 것에 몰려드는 것에는 그 행위의 저편에 있는 (광고) 자본이 쉽게 증식할 수 있는 고루한 환경만을 제공할 뿐이라고 느낀다. 그게 바로 알맹이 없는 '포스트모던문화'의 확산이다. (사족을 붙이자면 나는 포스트모던이 혐오스럽다, 나는 아마 근대주의자인 듯하다)

 정리하여 현재와 같은 인터넷 환경에서는 공론장이라는 것인 온당히 존재할 수 없다. 공론장이 형성하는 '여론'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이며, 그 소수의 수고로움을 우리는 감당해 주지 않는다. 따라서 이미 형성되고 동원된 미디어 로직은 언제나 그 안에 숨은, 공고한 이해 관계들이 체계를 이룬 채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의견'을 듣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서로 각각 꿈꾸며 검열된 언어를 교환할 뿐이다.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그 소수의 논리 정연한 의견들은 대부분 '스크롤의 압박' '식자연'으로 치부되고 담론으로 형성되지 않으며, 그져 '헐'과 '우왕ㅋ굳ㅋ'만이 유의미하다.

 그렇다면 하버마스는 틀린 것인가? 나는 그러나 누군가 이 글이 전반적으로 취하고 있는 냉소주의와 허무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한다면, 그 지적이 백 번 옳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이 취하고 있는 태도를 일종의 포즈, 수사, 과장, 위악이라고 읽어주길 바란다) 강제 없이 일치를 보는 논증적 토론의 합의 수립력의 형성이라는 하버마스의 기본전제는 뉴미디어 환경의 제공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문제를 사유할 능력이 있는 소위 지식인들이 새로운 민주주의를 구축하고 완성하는 첨병이 되어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며 그러기를 희망한다. 진짜 가치가 있는 뉴스가 온라인환경에서 재생산되고 존중받으며 사회적 공론화의 과정을 거치려면 보다 적극적이고 부지런한 참여가 있어야 한다. 광증에 가까운 행태를 보이는 키보드워리어가 아니라, 다양한 경험과 치열한 사유로 얻은 아젠다를 교환하는 진정한 의미의 오피니언 리더가 필요하다고 본다. '시민 없는 시민사회'라는 자조가 바뀌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하단 말일까? 앞서 이야기했듯이, 수고로운 것의 가치를 인정하는 건강한 마음을 모두가 공유하려면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나는 아직 답을 구하지 못했다.  


ps.
 인수위의 전횡들, 예컨대 '영어 몰입 교육' 따위의 황당한 정책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한다. 어느 조사에 따르면 '동의한다'가 50%, '동의하지 않는다'가 35%이다. 나는 이것이 자신이 이해관계를 갖지 않는 문제에 대한 대다수의 '무관심'한 태도를 방증한다고 생각한다. 이 정책은 황당하기 이를데 없는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동의한다'라는 애매모호한 답변을 유도함으로써 조선일보에서 지난 2주간 4번의 헤드라인을 통해 영어교육이 좋은 것이라는 '이미지'를 전달받는 것으로 갈음한 이에 관한 훈육된 감수성을 별 생각없이 표출한 것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나와 상관없는 문제는 '논의'들이 이루어지는 기왕의 공론장들, 즉 언론들에 의해 이러쿵저러쿵 결론된 것들이 대신 이야기해준다. 어차피 다 그런 거아닌가. 내 꿈은 상업영화들이 대신 꾸어주는 것이고 내 합리적 판단은 언론사가 대신해주는 것이다. 그것에 관해 정보를 수집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려는 시도는 너무 많은 비용을 요구하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더 '합리적 판단'이기 때문이다. 무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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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ll fighting it

내가 쓴 것 2008. 2. 4. 00:49


 오늘날 소위 ‘미국 정신’의 기초는 메이플라워와 독립 전쟁의 역사에서 시작된 것일까? 아니면 인디언과의 전쟁과 골드 러쉬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핍박받은 청교도들이 자신의 윤리와 생존을 지키기 위해 대양을 건너온 것은 얼핏 들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들은 시간이 지나 금맥을 찾아 서쪽으로 떠나고, 마차와 권총, 보안관과 범죄자들을 만들어냈다. 어느 쪽이든 '파이오니어'이고 '프론티어'인 것은 사실이겠지만, 둘이 다름은 자명한 일이다. 다른 방식으로 질문해 보자. 인간 세사의 귀결은 윤리와 생존의 문제로일까, 아니면 황금의 문제로일까? 그리고 덧붙여, 죽어간 신대륙 원주민들의 목숨은 어느 담론의 렘마로 희생되었나?

 먹고 사는 문제, 거기에 얽힌 불평등은 인류의 역사와 같다. 당장 지금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정치 폭동을 보자, 그 권력을 잡은 자들이 좌파이든 우파이든 간에 결국 민중들은 굶고 그래서 소요와 봉기가 일어난다. 불평등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 온 것이며, 다만 그 방식은 시대에 따라 변용했을 뿐이다. 고대 노예제로부터 현재의 보통 선거에까지, 이러한 문제들은 다만 인류 문명사에 있어서 ‘차이의 차이’로 항존해 왔다. 다만 기술 문명의 발달, 정신 문화의 변화에 따라 불평등을 생산하는 기제가 끊임없이 다변화했던 것 뿐이다. 예컨대 고대에는 타고난 힘이, 중세에는 혈통이, 현재에 이르러서는 유전자에 따른 경제적 능력이 한 개인의 태생적 우월함을 설명하는 각기 다른 ‘문명적 양상의 반영’일 따름이다.

 소위 지식 정보 사회, 포스트모던 문화의 시기, 유목하는 주체의 시기, 시장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에서 이러한 격차는 새롭지 않으나 새롭게 제기되어야 할 문제이다. 이제 모든 사회문제는 민주적으로 '위험'하기 때문이다. 특히 ‘로그인’하여 시공간의 경계를 무너뜨린, 정보적으로 평등한 사람들(대중이든, 다중이든, 어중떠중이든)이 만들어내는 정보-평등한 집단무의식, 공동체의식의 왜상들은 보다 치열한 독해를 요구한다. 고도의 정보통신 기술이 결정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류의 집단 지성/행위의 특징은 (테크노크랏이 그러하듯) ‘한 개인의 윤리성’의 불가능성을 증폭시킨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많은 경우 첨단기술일수록 그것은 더더욱 ‘자연스럽게도’ 윤리성과 성찰성의 가능성을 줄이는 방향으로 진행하는듯한 인상은 나만의 것일까. 기술문명의 발달은 그에 따르는 인간행위의 특정 양상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의식적 침략자이기 때문이다.

 테크놀로지의 성과는 ‘오늘’에 이르러,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빠르게 시장에 안착하여 대중화되고 일상화되며 자연시된다. 인터넷시대의 특징은 그것이 ‘네트워크’간의 연결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사실상 우리는 새로운, 더욱 외로운 ‘개인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 접속창구인 ‘퍼스널’ 컴퓨터와 모바일은 일상생활에서 개별적인 사용자들을 파편화시킨다(서로 마주 앉아 각기 다른 컴퓨터로 인터넷에 접속하고 있는 커피숍의 풍경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인터넷에 접속하면 우리는 때때로 사람들과 대화하고 공존하며 소통하는 것까지만, 그러나 가끔씩 그것은 착각이었으며 인터넷과 모바일은 간혹 ‘퍼스널 미디어 센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 미디어로부터 전달되는 메시지를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항상 공존, 융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기술문명에 관한 인문사회과학의 문화적, 윤리적 판단은 그 기술이 가져온 사회의 변동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기술, 그리고 설명과 그에 따른 판단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인터넷의 사회사를 얘기할 때, 우리가 간혹 우왕좌왕하곤 하는 것은, 80년대 인터넷서비스제공자들이 처음 인터넷을 도입하기 시작했을 때, 인터넷-미디어라는 테크놀로지가 일상 생활화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인문사회과학의 공론장에서 충분한 담론을 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테크놀로지가 현재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학자의 그러한 반문은 무능에 대한 소치일지도 모른다. 테크놀로지가 현재를 어떻게 변화시킬지를, 인터넷 사업자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알고 있었던 것일까? 테크놀로지의 자연화, 일상화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제시될 것이고, 그에 따른 더욱 많은 문제들을 야기한다. 우리는 기계들과 함께 ‘진화’해야 할까, 아니면 잠시 지체해야 할까? 선택하기 나름이겠고, 그러나 또한 선택하기 쉽지 않은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더욱 부지런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비약적인 발달은 이제 ‘공간’의 문제를 시간의 문제로 바꿔버린다. 산업시대의 정치가 증기기관과 가속페달의 공간의 압착속에서 가속화되었다면, 이제 우리는 시간과 싸워야 한다. 인터넷은 절대속도로 움직인다. 인터넷 신대륙의 골드러시의 속도는 예전보다 빠르다. 인터넷이 어떻게 영토화되고, 그것이 어떻게 가시화되는지, 그리고 그 시공간의 압착, 혹은 시공간의 무화가 어떤 슬럼과 어떤 엔트로피를 만들어내는지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와 싸워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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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학기에 썼던 레폿을 시리즈로 묶어 리비전하는 것으로 밀렸던 블로그 포스팅을 재개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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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음악" 이라는 환상

조금은 도발적인 수사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 보자. 대중음악은 환상이다. 수사를 바꿔보자:'대중'음악은 존재하는가? 대중음악은 '대중을 위한', '대중에 의한', '대중의' 음악인가? 음악예술을 한껏 아우르고 그것을 다시 가르는 어떤 정의의 규칙에 의거해 대중음악의 개념을 정립하는 작업은 '대중'에 대한 접근 방식의 반복과 차이들만큼이나 애매모호한 지점에 있다. 나이브한 접근에서 출발하자.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음악이 대중음악이라면, 홍대 앞에서 활동하는 인디밴드 <몽구스>의 음악과 말러의 교향곡 중에 어느 쪽이 더 대중적인가?

대중음악을 구분하는 일반적 기준은 내재적인 '대중성', 즉 음악예술의 장르적 규약들 가운데 '대중적으로' 지지되는 음악들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보통 이러한 분류에 따르면 근대 이후 발생한 가요형식들에 의해 창작되고 불려지는 음악들을 전근대적, 다시 말해 고전적인 작곡법과 주법에 의해 연주되고 가창되는 음악들과 비교하여 지칭하게 되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전자가 '대중'음악이라면, 후자는 '엘리트'음악일까? 일반적으로 통용되곤 하는 이러한 분류는 기실 음악사적인 접근을 통한 통시적 구분에 따른 것이며, 따라서 이때의 구분은 '현대(contemporary)'음악과 '고전(classical)'음악의 구분의 지점으로서만 유효해야 한다.

'대중'이라는 용어에 착안하여, 음악의 내재적인 음악학적 성격을 배제하고 음악의 생산자 혹은 향유자의 의해 구분한다면, 당겨 말해 이제 '모든 음악은 대중음악'이다. 왜냐하면 구시대 귀족 패트런에 의해 후원되고 향유되던 음악과 시장과 거리의 악사(예컨대, 민가나 바로크 시대의 마이스터징거들의 노래)에 의해 불려지고 민중에 의해 향유되던 음악의 구분은 근대 시장질서의 형성 이후에는 사실상 소멸의 지경에 이르렀다. 곧 자본주의 시대의 모든 음악은 결국 균일한 소비자인 '대중'들이 생산과 소비라는 방식으로 향유하는 음악이며, 따라서 대중음악이란 대상은 항상 모호하다. 즉, 국가적 차원에서 탈-경제적으로 보호되고 관리되는 '문화적 유산', 예컨대 민속음악이나 고전적 '국악'을 제외한다면 모든 음악은 어떤 의미에서 언제나 대중음악이다.

과거 음악은 언제나 지금-여기라는 '현재성'에 준해 공연의 방식으로 향유되어야만 했지만, 축음기의 출현, 즉 음원의 저장과 복제 기술의 발명 이후 음악을 향유하는 방식은 현장에서의 작곡과 연주, 가창이 문제가 아니라 '음반'을 제작하고 그것을 유통하는 엄존하는 시장의 과정에 포섭되어 있다. 즉 음반을 기반으로 한 음원 시장과 그에 의해 파생되는 공연수익으로 대표되는 파생수익시장을 가진 하나의 체계적인 문화산업의 형식 내에서 문맥적으로 의미를 획득하는 내용으로서의 음악이 대중음악인 것이다. 즉 우리가 일컬어 '대중음악'이라고 부르는 음악들에 관한 일반적이고 체계적인 논의는 내재적인 접근 방식으로써 동시대 음악의 음악 예술(music art)적인 기준에 의한 논의와, 형식을 고려한 접근 방식으로써 음악 산업(music business)의 재화로서 판단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산업의 획일화

비슷한 맥락에서, 모든 '대중문화'를 논할 때 빠질 수밖에 없는 함정은 그것의 '작품성'과 '대중성'의 균열에서 비롯된다. 엄존하는 민주주의적 공리에 따르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거나 승인하는 가치는 올바르고 정당한 가치이며, 따라서 정치나 경제의 영역은 물론 문화의 영역에서 역시 해당 문화에 대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의 가치를 인정하는가 하는 문제가 가장 주요한 판단 기준일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시대에 가장 적극적인 인정과 승인의 표시는 그것에 대해 자신의 자본을 지불하는 행위로써 드러나며, 그것이 대중음악의 내용을 결정하고 형식의 외연을 넓히게 된다.

이렇게 말하면 '작품성'과 '대중성'은 어떤 동일한 속성에 대한 다른 이름이어야 할 것 같지만, 그러나 일반적인 대중음악 담론 내에서 가끔 두 속성은 서로를 배반한다. 음악학적으로, 또 예술적으로 탁월함을 지닌 '좋은 음악'이 언제나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즉 음악의 '작품성'이 해당 음악의 본질적으로 선취된 속성인 것과는 달리, '대중성'은 음악 산업 내에서 그것이 소비되는 어떤 습관과 방식들의 작동에 의해 발생하는 속성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지불되는 돈', 즉 자본의 추동의 여부에 의해 대중음악은 자본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모습을 변용하고 청자들을 재생산한다.

자본주의 시대의 음악적 취향은 대개 외부에 의해 학습되고 훈련된 결과로서 존재하며, 따라서 어떤 음악이 더 많이 혹은 더 널리 소비되는가의 문제는 사실상 그것의 내재적인 속성과는 큰 관계를 갖지 않는다. 청자는 자신과 접한 외부 환경에서 널리 들려진 음악에 '길들여지며', 강요된 선택지 안에서 가장 편안하게 들리는 음악을 선택하여 소비하게 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필연적으로 자본의 독점을 초래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경제 논리에 의하면, 획일화는 사실상 언제나 필연적이다.

한국의 대중음악 시장은 90년대 초반을 전후해 국내에서 제작된 내수 시장의 규모가 수입된 구미 각국의 음악을 위주로 한 시장에 대해 우위에 서게 된다. 음악 산업의 축이 음원을 배급하는 배급사에서 음원과 가수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소위 연예 제작사들로 넘어간 것도 비슷한 시기부터이다. 특히 90년대 초반 프로듀서 김창환에 의해 제작되던 신승훈, 김건모 등의 대형가수들과 더불어 92년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소위 '가요 시장'의 규모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 시기를 전후해 음반시장을 좌우하는 시장의 주 소비층은 소위 '신세대', 즉 10대와 20대를 기반으로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대중음악은 단지 여가선용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신세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자기표현의 한 방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서태지는 '문화대통령'이었으며, 그가 도입한 새로운 음악장르들(힙합, 하우스, 얼터너티브 록)은 80년대까지 자리 잡고 있던 구세대적인 음악들, 예컨대 트롯이나 포크를 밀어냈다. 이후 등장한 < H.O.T >나 <젝스키스> 등 일군의 티니팝 그룹들은 소비자의 연령층을 보다 낮추는 한편, 90년대 가요 시장을 일련의 댄스음악들로 획일화시켰다.

대체적으로 시장의 규모가 커질수록 해당 산업이 생산해내는 재화는 규격화되며, 문화 상품 역시 같은 논리 아래 획일화의 경향은 문화 산업 내에 투입된 자본의 (근시안적) 합리성의 결과로서 발생하게 되는 일반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대중음악 시장의 획일화에 대한 우려는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가요 시장의 규모에 가려져 별 문제가 되지 않는 듯했다. 9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음반 시장의 규모는 4천억 원대에 이르렀고, 이는 미국, 영국, 일본 등 문화적인 선진국들 바로 다음 가는 수준이었다.


< 표-1 > 음반시장 규모의 변화


문제는 2000년대 이후 시장이 급변했다는 것이다. 20세기 음원 시장은 어디까지나 '음반' 시장이었는데, 라디오나 TV 등 대중 매체의 출현이 음악 산업을 위축시킬 것이라는 우려는 그러나 음원을 저장하고 재생할 수 있는 복제 기술의 지지가 어디까지나 음반을 매개로 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불식되었다. 그것이 음악 시장에 끼친 막대한 영향력과는 별개로, 라디오와 TV는 어디까지나 '음악 '시장' 내에서는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파생시장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등장한 이른바 '뉴미디어' 환경에서 음원은 보다 치밀하고 보다 용이하게 복제, 저장되기 시작했으며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MP3' 기술 규격이다. 라디오와 TV에서 제공되는 무료 음원들은 그 즉시 휘발되었지만, 인터넷 전용선을 타고 전송된 무료의 MP3는 복제된 뒤 저장되었으며, 이는 기존 음반 시장에 대단히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더 이상 음악을 음반을 구입하는 방식으로 향유하지 '않게' 된 것이다. 무료 음악은 라디오와 TV라는 거추장스러운 기술적 지원을 필요로 하지 않고, 시대의 구호인 '유비쿼터스'대로 '언제 어디서나' 무료로 들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90년대 후반 정점을 달린 한국의 음반 시장은 MP3의 출현과 초고속인터넷망의 보급 이후 그 규모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시장의 외연은 축소되었고 자본은 유연화되었다. 삼성경제연구소 고정민 수석연구원의 지적에 따르면, 해당 시장이 축소되고 그 구조가 조정되면 가장 먼저 소멸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한 자본의 주체, 경쟁력이 없는 회사이며 이는 '시장'의 질서 안에서 음악적 역량과는 별개로, 자본의 집적 이익을 누리지 못하는 군소 업체들이었다. 음악 '시장' 안에서 독점 자본의 출현이 가속화되었고, 이는 결국 음악 '예술'의 필연적인 획일화로 이어졌다. '살아남은' 몇 개 안 되는 연예기획사들은 예술적 동기가 아니라 이윤 동기로 음반을 제작해야 했으며, 따라서 시장 내에서 이윤 발생 메커니즘이 검증된 몇몇 장르에 편중한 음반을 제작, 판매해야 했던 것이다.


#SG워너비와 그 주변

현재 한국 음악 시장 내에서 소위 '잘나가는' 연예기획사들의 대표주자들을 꼽자면 가수 <비>를 보유한 JYP엔터테인먼트, <세븐>, <휘성> 등을 제작한 YG기획과 엠보트, <보아>와 <신화> 등을 제작한 SM엔터테인먼트, < SG워너비 >를 제작한 GM기획 등이다.


< 표 > 2005년도 음반판매량 집계 (자료출처: (사)한국음악산업협회)

2006년 상반기까지 같은 시기 <이수영>(미드템포 발라드), <버즈>(록) 등의 음반들도 시장에서 선전했지만, < SG워너비 >, <김종국>, <비>, <세븐>, <휘성>, <빅마마>, <바이브> 등 시장을 주도한 음반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키워드는 '리듬 앤 블루스풍'의 음악들이다. <이수영>이나 <버즈> 등의 음반들이 90년대 인기를 끌었던 '전통적'인 대중음악 장르의 연장이라면, 이들 음악들은 마치 90년대를 주도했던 한국형 발라드나 하우스풍의 댄스에 비견할 만한 한국 음악 시장의 새로운 경향이라 할 수 있다.

음악전문웹진 'WEIV'에 필자로 참여하고 있는 김선민에 따르면(주석으로 인터뷰한 사실을 달 것), 이러한 경향의 저류에는 이전 시장과는 조금 다른 양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획일화의 정도가 지나치다는 것이다. 90년대를 주도했던 음악장르가 티니팝이나 하우스장르라고 할 수는 있지만, 당시의 대중음악 시장은 단순 계량적으로만 풍부했을 뿐만 아니라, 질적인 풍부함 역시 일정 수준 견지되고 있었다. 한국 대중 음악 시장을 폭발적으로 확대시키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서태지와 아이들>과 <듀스>의 앨범들은 상징적인 것을 넘어 기념비적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하우스, 랩뮤직, 데쓰메틀, 얼터너티브록 등 다양한 장르의 대중음악을 한국의 풍토에 성공적으로 이식시켰으며, <듀스>는 힙합과 펑크(funk) 등을 도입해 소위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상업적 웰메이드(well-made)의 전형을 마련했다. <노이즈><룰라> 등꾸준히 생산된 댄스뮤직과 별개로, <공일오비>나 이승환, <토이> 등으로 이어지는 일군의 음악제작자 집단은 성공적으로 가장 한국적인 가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현재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주목할만한 음악 예술적 신안은 그 사례를 찾기 어렵다. 2005년 한해 <윈디 시티>(애시드-펑크), <클래지콰이>, (이상 라운지 뮤직), <스윗 소로우>(보컬) 등의 앨범이 평단의 지지를 받았지만 상업적 성공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또 음악적 성취에 대한 평가 역시 의견이 엇갈렸다. 대신 상업적인 검증을 마친 장르들, 즉 기존의 발라드나 하우스풍의 댄스음반, 그리고 '알앤비풍의' 노래들이 시장을 장악했다. 여기에는 앞서 말한 음반 시장의 구조 변화의 영향이 크다. 음반 판매를 통한 수익모델의 이윤이 저하되는 한편 디지털 콘텐츠의 판매가 늘면서, 음원을 다각도로 활용, 판매할 수 있는 자본과 기술이 집적된 회사의 역할이 중요해졌으며 이는 음반 시장의 수익 분배 구조의 중심이 음악을 창작하는 뮤지션 대신 전체 컨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프로듀서나 회사로 옮겨 간 것과 관계가 깊다. 새로운 장르가 개척되고 독창적인 음반을 만들기 위해서는 상업적 모험과 시행착오가 있어야 하지만, 음악의 창작에 대한 주도권이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한 회사에 있는 한 그것이 수행되기는 어렵다.

현재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새로 제안된 장르들은 새롭지도, 또 특별히 독창적이지도 않다. 대부분의 음악 장르들은 음악 선진국, 즉 미국이나 영국 시장의 그것을 수입한 것에 다름 아니며, 그것은 우리 음악 산업이 취해 온 일반적인 행태였다. 예컨대 <비>나 <세븐>은 현재 미국 시장에서 가장 각광받는 영미의 팝 가수 어셔(Usher)나 크렉 데이비드(Craig David)에 그대로 대입되고, <보아>나 <이효리>의 음악은 미국의 인기 여가수 브리트니 스피어스(Britney Spears)의 음반을 만든 프로듀서 넵튠스(The Neptunes)의 스타일 그대로이다. 한겨레신문의 다음 기사를 보자.

NYT, 비 공연 혹독한 평가
[한겨레신문] 2006년 02월 05일(일) 오후 07:02
가수 비가 지난 2~3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벌인 공연에 대해 현지 언론들은 '90년대 팝을 보는 것 같다'는 식의 비판적인 평가를 내놨다. 하지만 문화상품으로서 비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는 의견도 있었다.
<뉴욕타임스>는 4일 "무대에서 공연하는 그를 보는 것은 한국말로 더빙된 오래된 <엠티브이>(미국의 음악전문물 채널)의 비디오를 보는 것 같았다"며 "아시아의 슈퍼스타인 한국인 팝 가수 비는 미국 정복에 나섰으나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평가했다.
기사는 "비는 멋진 댄서이자 상당한 실력을 갖춘 가수"라면서도 "그의 공연은 마이클 잭슨을 비롯해 미국 안 여러 유명가수들을 흉내내고 있을 뿐 독창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또 "비의 미국 안 활동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그의 프로듀서인
박진영이 최신 영어 히트곡을 모방하려고 여러 가지 방안을 짜는 순간 미국의 팝이 그를 앞질러 나가게 되는 점"이라고 덧붙였다. 타블로이드판 <뉴욕데일리뉴스> 인터넷판에서 수석 팝음악 비평가 짐 파버도 "저스틴 팀버레이크, 어셔의 90년대 인기곡과 비슷했다"고 평가했다. (후략)
김소민, 김도형 기자(aip209@hani.co.kr)

한편 < SG워너비 >나 <김종국>의 '리듬앤블루스풍' 미디엄템포 발라드들은 2000년(확실하지 않다, 확인 요망) 발매된 <브라운 아이즈>의 음반 <벌써 일년>과, 박효신의 보컬에 토대를 두고 있다. 리듬앤블루스나 네오소울의 미디엄템포 비트를 기반으로 기승전결의 가요형식과 한국적인 멜로디를 얹는 작곡법에, 어느 부분을 들어도 장중하고 압도적인 보컬 스타일을 보여준다. 이러한 스타일의 노래들은 특히 음원시장 환경이 음반중심에서 디지털 콘텐츠 중심으로 넘어간 것과 깊은 관계를 지닌다.

SG워너비의 앨범을 만드는데 공헌한 박근태, 류재현, 김도훈, 조영수 등의 작곡가들은 이어 < V.O.S >, < MtoM >, <먼데이키즈>, <레몬 트리>, <씨야>, <가비앤제이> 등 비슷비슷한 느낌의 앨범을 만들었는데, 이들 음악들의 공통점은 기존 발라드와는 달리 비트가 강하고 템포가 빨라 리듬감이 뛰어나며 식별이 빠른 후크(hook)가 강박적이리만큼 반복된다. 이들의 음악들의 수익은 음반 판매에 기반해 있지 않으며, 인터넷 웹 사이트의 BGM이나 휴대전화의 통화 연결음이나 벨소리 등 디지털 컨텐츠 수익을 노리고 제작되며, 한 곡 한 곡의 러닝타임은 보통 4분을 넘지 않는다.


#대안을 위하여
대중음악 전반에 만연한 획일화 경향의 가장 큰 문제점은, 말 그대로 다양성이 없다는 것 그 자체이다. 한 문화의 생명력은 종종 지배문화에 대한 하위문화(sub-culture)의 영역에서 담보받기도 한다. SG워너비 스타일의 생명력은, 재화의 한계효용이 체감하듯 체감할 것이며 어느 순간 소진될 것은 지난 시절의 경험에 비추어 당연한 결과다. 현재 세계적인 주류장르로 자리매김한 힙합이나 리듬 앤 블루스 등의 흑인음악 역시 태생은 하위문화에서 출발했다. 이들 흑인음악은 로큰롤이나 컨트리 등의 영역과 공존하며 시장에 활력을 제공했고 현재에까지 이르렀다. 최근 출현한 대표적인 하위문화로서의 음악 장르는 전자음악을 기반으로 한 일렉트로니카였고, 2000년대의 최신 팝 조류는 상당 부분 일렉트로니카적 성향에 기반해 창작되고 있다.

그룹 윈디시티와 펑카프릭 부스터에서 활동한 임지훈은 현재 대중음악 시장의 다양성과 활력이 떨어지는 이유를 음원 시장의 수익이 일차적으로 음원을 제작하는 뮤지션이 아니라, 그 음원을 활용하는 기술을 지닌 대형회사에게로 배분되는 기형적 시장 구조에서 그 문제점을 찾는다. 즉 가시적 이윤이 담보된 프로듀서 시스템에서, 음악 예술적으로 독창적인 음반을 만들어낼 수 있는 진지한 음악인이 음반을 만들 수 있는 기회는 극히 제한적이다. 음반을 판매하여 수익을 올려야 하는 신진 음악인들은 홍대 앞으로 대표되는 독립적인 음반 제작사를 통해 데뷔해야 하지만, 이를 통해 올릴 수 있는 수익은 음반 시장 규모의 전체적인 몰락과 관계 해 매우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다. 또 음악 시장의 수익 대부분이 디지털 컨텐츠 시장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그 수익들이 '뮤지션'들의 소통과 음악 창작 활동을 위한 투자로 이어지지 못하고, 다시 음원 '활용'을 위한 비용으로 환원된다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이는 정리하면 대중음악 시장 내에서 MP3와 디지털 컨텐츠라는 혁명적 테크놀로지가 자본의 지배적인 속성과 시장의 이윤에 대한 근시안적인 합리성에 의해 기형적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처음의 논의로 돌아가 보자. 대중음악은 '대중을 위한, 대중에 의한, 대중의' 문화여야 하며, 대중음악은 대중의 문화적 취향과 관계하여 발생하고 향유되어야 한다. 즉 대중음악 영역에서 사회적 다양성이 합의되고 음악 생산자와 소비자가 유대하고 연대할 수 있는 커뮤니티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작업이 선취되어야 할 것이다. 90년대 후반 가요 시장의 폭발적인 발전과 더불어 나타났던 대안적 움직임은 홍대 앞에서 활동하던 독립적인 뮤지션(소위 '인디' 뮤지션)들이 연대한 커뮤니티들이었다.

자본의 질서로부터 자유롭다는 의미에서 '독립' 뮤지션임을 천명했던 음악인들과 그들을 위해 자신의 주머니 돈을 기꺼이 지불했던 청중들의 연대에서 음악의 다양성은 잠깐이나마 빛을 발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현재 주류 음악으로 자리 잡은 힙합뮤지션들 가운데에서는 이 하위 문화적이고 대안문화적인 '홍대 앞 인디 바닥'에서 출발한 사례가 많으며, 대표적인 음반 제작사 YG엔터테인먼트도 절반 정도는 이 인디 씬에서 음악적 역량을 수혈 받았다.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갖고 있는 혁명적인 기능성이 그 테크놀로지가 적용되는 사회적 맥락인 자본의 지배와 이윤 추구의 합리성에 연관할 것이 아니라, '대중'이 갖고 있는 본연의 긍정적 의미에 결부될 때 '대중음악'에 대한 이상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접근을 가능케 한다는 뜻이다. 음원을 '언제 어디서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현재의 음원 환경은 거대 자본뿐만 아니라, 대중음악에 대한 진정성을 간직한 음악인과 청중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적은 비용으로도 자신의 음악을 들려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음악인들과 적은 수고로도 그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청중간의 대안 문화적 커뮤니티를 위한 공감대를 기반으로 상업적인 지배에 침해당한 '대중'의 민주성을 복권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앞서의 논의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음악 예술'적 성격과 그것의 '작품성'을 보듬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그를 위한 체제의 지원이 필요한 때이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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