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6 세대에 관한 글을 쓰다가 생각나서, 아주 오래전 썼던 글(그러니까 영화가 개봉했던 2003년인가 2004년쯤)을 웹 어딘가에서 찾아내서 올려본다. <살인의 추억>은 386세대의 부채의식-망각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들은 대단히 놀랍다. 맑고 청명한 날, 아이들이 뛰어놀던 시골 마을의 하수도에 결박된 시체가 처박혀 있다. 누렇게 익어간 논밭과 흙내음이 묻어나는 시골길, 푸른 하늘과 동산의 능선. 그리고 제목이 그 가운데에 새겨진다. 이성과 계몽을 숭배했던 마지막 시절, 온갖 비이성이 판치던 그때 박두만(송강호 분)은 동네 양아치와 피해자의 주변인물을 데려다 놓고 조서를 쓴다. 곧 이어 이향숙의 시체가 발견된다. 짧은 커트분할의 몽타주인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에 이은, 이향숙의 시체를 둘러싼 롱테이크 시퀀스 역시 이 영화의 세심함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러나 일련의 장면들은 ‘우습다’. 이성의 숭배와 비이성의 현현(顯現)이 빚어낸 것이 당대이니, 우스운 것이 적확한 재현 방식이었으리라. 
 
 그러나 이 영화는 웃음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웃음 뒤에 찾아든 절망, 그 슬픔과 분노에 관한 영화이다. 등화관제를 통해 인위적인 암흑을 만들던 시대, 어두운 곳에서 새어드는 빛을 향해 불안한 눈빛을 쏘아보던 시대이다. 구석 자리를 좋아하며 면과 춘장을 따로 시키는, 그리고 ‘서류’를 믿는 서태윤(김상경 분)은 근대적이고 서구적인 도시 서울 사람(그래서 박두만은 그에게 ‘네가 FBI냐, 미국에나 가라’라고 말한다)인 우리의 분노이다. 객관적 자료와 이성적 추리를 신뢰하던 우리는 그것이 깨어져나가던 어느 순간,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던 것. 반면, 욕 잘하고 자칭 ‘무당눈깔’에다 ‘한국 형사는 발로 뛴다’라는 신조를 갖고 사는 박두만과 그의 파트너 조용구(김뢰하 분)는 전근대적(이것은 가치중립적 용어다), 향토적, 한국적인 비-서울인 우리의 슬픔이다. 그들은 이성을 신봉한 적은 없으나 (억압적, 왜곡적) 계몽의 객체였고, 서울-지배 체제의 이성적 억압에 자발적으로 뛰어들던 이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시대의 휘청거림에 다리를 절단하고, 수갑을 찬 용의자 박현규(박해일 분)에게 총을 쏘며 분노하는 서태윤을 막아들고는 그의 얼굴을 잡고 멍한 표정을 짓는다. ‘밥은 먹고 다니냐?’, ‘씨바 모르겠다, 가라’. 박두만이 박현규의 얼굴을 아귀에 쥐고 그렇게 말하던 순간, 우리는 지독하게, 섬뜩하리만치 슬프다.

 이 영화가 80년대를 재구성(recompose)하고 재현(represent)하는 방식은 새롭다. 영화가 사실상 80년대의 어떤 정치성의 연장에 대한 언급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성이 빚어낸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깨어졌으며, 자유와 해방의 이념을 이야기하는 시대는 갔다. 감독은 80년대로부터 빚진 것이 없는 모양이다. 같은 시기에 개봉한 <품행제로>나 <해적, 디스코왕 되다>처럼 80년대를 낭만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아니고, 박광수나 장선우의 영화처럼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담론에 대한 선언을 담고 있지도 않다. 보다 적확히 말한다면 <살인의 추억>은 이창동의 <박하사탕>과 대척을 이루는 동시에 같은 지점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박하사탕>은, 요약하면, 순수가 억압된 90년대 인간군상이 갖고 있는 80년대에 대한 낭만적 추억에 더하여, 인간을 억압한 거대구조와 사회적 모순에 반대하여 윤리적 거점의 마련을 모색하고 있는 영화이다. 그러나 <살인의 추억>은 80년대를 이명세 같은 방식을 통해 아름다운 시기로 말하고 있지도 않으며, 이창동처럼 윤리의 틀로서 이용하지도 않는다. 그가 80년대를 다루는 방식은 쿨(cool)하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 이 영화가 80년대의 정치적 정황에 대한 언급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오히려 다양한 양상의 억압으로 인해 느끼는 절망과 분노, 그리고 슬픔이라는 인생사의 원형을 다루고 있다. 80년대에 대한 부채 의식이나 윤리적 선언에 기대지 않았다는 것은 80년대 화성의 문제를 지금-여기의 문제로 바꿀 수 있으며 그 느낌을 치열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영화는 지명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도 않으며, 80년대적 소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대통령 환영인파나 등화관제, 혹은 시위진압과 같은 삽화로서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어떤 상황으로서 재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감독이 기억하여 재현하고 있는 80년대의 디테일은 대단히 놀라운 것이다. 사이렌이 울리고, 아이들은 시끄럽게 떠들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86년, 정치적으로 시절이 하 소상하던 서울의 겨울은 길고, 더럽고, 냄새나는 배설물을 만들어냈으며 거기에 화성의 연쇄 살인 사건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적 재현은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와 수미쌍관을 이루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의미의 현재성(혹은 동시대성)을 적절히 드러내고 있다. 처음 시체가 발견된 하수구에서 박두만은 언젠가 뻔한 얼굴의 남자(‘불특정다수’의 대표자)가 들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여,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영화의 티져 포스터가 던지는 화두는 비단 사건의 범인 혹은 범인들(복수의 범죄자의 가능성도 있으므로)에 대한 물음만이 아닐 것이다. 라디오에서는 비가 내리는 날 밤(자연적 억압)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가 흐르고 있으며, 사태를 진압할 경찰 인력은 부족하고(거시적 억압), 우리는 그 흔한 반목과 질시에 무기력했다(미시적 억압). 머지않아 또 하나의 시체가 발견되리라―그러던 때의 당신은 ‘지금’ 어디 있는가? 그때 우리는 그들을 잡지 못했다. 지금은 과연 다를 수 있는가?

 지난 80년대와의 관련성을 굳이 드러내지 않은 영화는 다시 말하면 오늘의 삶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쿨한 태도란 기실 체현(embodiment)의 가벼움이나 시대감각(fashion)에 대한 기민한 대응과 유의어가 아닌가. <살인의 추억>의 80년대의 이미지와 메타포들은 이념, 이성, 해방, 자유, 민주주의와 같은 거대 담론을 벗고 바라본 것들이다. 감독의 시선의 형편이란 형사를 그만두고 녹즙기 판매원이 된 2003년 오늘 박두만의 마지막 모습에 여실히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2003년, 박두만은 이미 타협한 자다. 중산층, 양복, 접대, 그리고 예금 통장, 그리고 가족주의라는 권위의 은밀한 질서 체계와 악수한 자다. 이미 일선에서 물러난 그의 무당눈깔은 이제 가장으로서의 권위의 무기이다. 다만 절망에 일그러졌던 우리의 모습과, 그 속에 숨어 있던 낯부끄러운 시대가 담담한 어조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은 그래서 기본적으로 후일담이다. 90년대 이후 우리가 맞부딪친 문제는 ‘무엇이 가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생활/생존할 것인가?’의 문제인 동시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였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인 동시에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자리에 대한 물음인 것이다.이 물음은 그러나 역사적 맥락을 상실한 사변적인 물음이 아니다. 우리는 생활세계와 체계의 긴장속에서 살지만, 그 틈으로 다른 세계로 나아가고 싶어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원형적 모습인 희망 아닌가―누군가가 희망은 오히려 절망의 유의어라고 했다. 추억 속에서 우리는 그것들을 발견하는 것.


ps. 연쇄살인을 다룬 영화로서 최근 알려진 대표작으로는 데이빗 핀쳐 David Fincher의 <세븐(Se7en)>이 첫손에 꼽히리라. 서태윤의 캐릭터는 사실상 핀쳐가 만든 윌리엄 서머셋의 원형으로부터 데이빗 밀즈의 원형으로 변화하는 어떤 현상이다. 그래서 그는 주연이 아니며,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 등장하지 않는다.
2ps. 첫 시퀀스에 등장하는 송강호를 따라하던 아이는, 글쎄, 처음엔 리바이벌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인가 했지만. 그냥 봉준호 개인적인 경험에 나온 소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 마치 보일러 김씨처럼.
3ps. '우울한 편지'가 담긴 유재하의 첫 앨범은 87년 상반기에 발매되었다. 86년 9월부터 강간이 시작되었다면, 그것 하나는 삐끗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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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보다보다 너무 구려서 오랜만에 포스팅.
난 원래 박찬욱을 좀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그건 박찬욱이란 개인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싫어하는.. 그런 것에 가깝다. 뭐 그러다보니 그의 영화도 딱히 좋아라하지는 않는다. 박찬욱의 영화, 그러니까 <올드보이>나 <JSA>는, 재미는 있었지만, 사실 '재기발랄'하다는 것 말고는 좀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고.. 뛰어난 원작과 훌륭한 각본가에 기대고 있는 <JSA>는 그렇다치더라도, 사실 그 복수 3부작들, 특히 걸작이라고들 하고 상까지 받은 <올드보이>의 (문학적인 측면에서) '주제의식'이란 게 거장의 그것만큼 치열한가? 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나만 그런가? DVD도 살만큼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하긴 하고, 사실 잘 찍긴 했지만.
찬욱이 횽아와 곧잘 비교되곤 하는 타란티노가 천의무봉의 스타일로 그 영화적 (무)내용을 압도하는 천재적인 성취를 이루는 반면(일테면 <킬빌1>, <데쓰프루프> 같은 근작들의 천재적인 리듬감각), 찬욱이 횽아에게는 그런 게 없다. 그저 '나좀영화잘하지?' 이런 젠체하는 것뿐. 사실 박찬욱이라는 개인이 싫다고 말한다면 그런 점들이 싫었는데(사실 이건 박찬욱 좋아한다고 말하는 팬덤들에게도 공히 느끼는 감정), 이번 영화가 딱 그렇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셋팅과 미장센이 전부 클리셰같고 그래서 전부 데자뷰같다고 한다면, 찬욱이횽아는 '그래 내가 원래 페스티쉬도 잘해' 이러고 말 것 같아서 그냥 진부하다고 해둬야겠다. 난 영화 보는 내내 정말 지루하고 따분하기 짝이 없더라.

영화는 크게 두어가지 이야기를 섞어 놓았는데, 하나는 뱀파이어 신부 얘기고, 하나는 콩가루 가족 얘기. 다른 하나는 그 두 가지 이야기를 엮는 연애담이다. 그러니까 사실 두 가지 이야기가 새끼줄처럼 꼬여 있다고 하는 게 맞는데, 그 매듭이 여간 엉성한게 아니다.
종교와 구원에 관한(,,이라고 하기엔, 좀 종교적인 색채가 상당히 엷거나 없다, <밀양>같은 그런게 절대 아니다)  주제는 신부(father)를 통해 다루고, 가족 삼각형과 욕망의 제문제는 콩가루 가족 쪽에서, 특히 엄마(mother), 그러니까 첫번째 대상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푸는데.. 이 얼개들의 순서가 뒤죽박죽이고 짜임새가 엉망이다(아마 감독이나, 팬덤에서는 이런 반응을 두고 '영화적 무지'라고 하겠지, 이상하게 박찬욱에 관해서는 그런 경우가 많다, 봉준호랄지 홍상수랄지 김지운한테는 안 그러면서). 굳이 해석점을 잡으면, 송강호는 눈이 먼(거세된) 아버지 신부 밑에서 자랐고, 이브의 유혹을 받았다가 뱀파여가 되서 신의 권능을 손에 얻는 듯하다가, 그러다가 아들에게 눈을 뜨게 해달라고 하는 아버지신부에게 실망을 좀 해 주시고, 그러다 결국 욕망(혹은 남근, phallus)을 얻게된 신부가 살인하고, 심지어 살부하고 설치다가 자살하는 이야기가 있을 거고.. 근데 이게 뭔가 전혀 엉뚱하게도 아버지의 보혈(이건 중의적인 의미가 있다, 세상에 그 눈먼 아버지가 죄사함을 주시고 보혈을 베푸시다니..그게 예수의 메타포로 기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근데 왜 죽이는 거야? 안티크라이스트야?)로 은사받은 뱀파이어가 된 송강호는, 결국 끝에 가서는 왜인지 모르게 선량하고 .. 다른 말로 빗금쳐진 혹은 억압된 그런 캐릭터가 되어 그렇고 그런 안전하고 보수적이고 (동시에 마초적인 남자 남자 남자) 이해하기 어렵고 재미마저 없는 얘기로 끝나고.
엄마와 딸 쪽 얘기로는, 엄마는 항상 부릅뜬 눈(혹은 사악한 눈)을 하고 있는 아버지적 어머니상이고, 근데 뭔가 전혀 엉뚱하게도 (시)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며 어머니의 시선을 탐하는 요사스런 여자가, 아까 그 신부를 만나서 섹스하고 죽어가는 얘긴데.. 크레딧 보니까 무슨 뭐 원작이 있는데, 이야기의 만듦새로는 콩가루 가족 얘기 쪽이 좀 더 만듦새가 좋은 걸로 봐서 그쪽이 원작일 공산이 크다(확인도 안 하고 이런 얘기 한다고 팬덤들은 뭐라고 할 거다-_-) 영화에 분명하게 표현은 안 되어 있는데-_-, 아마 원작은 어머니의 딸(이자 며느리)이, 자기는 딸이고 싶은데 며느리 대접밖에 못받아서 외간남자 끌어다가 마마보이인 오빠이자 남편을 죽이고 재가하는 그런 내용...이 아닐까. 뭐 여튼. 그 여자는 결국 (시)어머니의 '부릅뜬 눈' 앞에서 장렬히 전사(전사라고 표현해야 하는 이 엄청나게 웃긴 마지막 장면). 끝.

하여튼 이 문제작 <박쥐>는, 뱀파이어 혹은 스릴러 혹은 팬터지.. 등 장르 영화로서의 만듦새도 엉망이고(그러니까 사실 '삐끕 영화'라고 불러주기도 민망하다, 삐끕 영화의 미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다), 어느 한 장면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데가 없고, 대사들도 가오만 잡고 유머가 없고 의미도 없고, 매 장면마다 '아, 씨바 제발 다음 장면이 이런 것만은 아니기를' 하는 장면이 바로 다음 붙어 나온다(일테면.. 송강호와 옥삔양의 섹스 도중에 중간에 웃고 있는 신하균.....이건 좀....정말 돈내고 극장가서 이런 우스꽝스러운 그림은 보고 싶지 않았다). 대부분의 액션 장면은 동선이 어색했고. 처음으로 점프하는 장면의 경쾌함은 마음에 들었지만, 영화 가운데 유일하게 볼만한 장면으로 끝이 났다. 아.. 마지막 장면의 로케는 멋지더라, 우리나라에 그런 멋진 일출을 볼 수 있는 불모지가 있다니 싶던데, 그런데 주인공 투샷은 80년대 일본영화 풍이다. 혹은 나는 이와이 슈운지의 <피크닉>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슌지 쪽이 훨씬 뛰어나다. 뻔질나게 나오는 섹스씬은 박찬욱 본인의 사심이 들어갔던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로 민망하다. 옥삔양에 대한 성적 팬터지를 대국민적으로 광고하는 느낌? 극장에 앉아 섹스신 보면서 옆사람이랑 같이 보기 민망하다고 느낀 적은 처음일 정도로, 일본 (잘 못 만든) 핑크무비스럽다. 송강호의 성기노출장면이 논쟁이 되네 어쩌네 하는데, 확실히 불필요한 노출이다. 거기서 송강호가 일부러 성기를 좌중에게 내보인 것, 그리고 그것이 또 발기하지 않았다는 것, 뭐 이런 게 의미가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럴바에는 차라리 팬티를 벗지 않았던 편이 낫다. 송강호 곧휴를 보고 싶지도 않았고. -_- (황우슬혜는 대체 거기 왜 나온거야? 배우가 아깝...다는) 그러고보면 출연한 배우들의 면면은 훌륭한데, 몇몇 연기는 손발이 오그라든다. 신하균 웃는 표정은 왜 신하균이 계속 이런 역할밖에 못하나 알려주는 것 같아서 슬펐고, 송영창 같은 대배우를 불러다놓고 굳이 수퍼이고 분위기만 풍기는 것도 웃긴다. 오달수는 옥삔양과 러브러브씬하는 호사를 누렸지만 왜 나왔는지 알 수 없는 캐릭터로 연기했고... 그나마 연기 가운데에는 김해숙의 눈빛 연기가 볼만하다. 옥빈양? 미모는 눈부시지만, 싸이코 연기는 그냥 '유형'만 있다. 사실 한술 더떠 송강호에게는 '상황'만 있다. 송강호가 맡은 캐릭터에게는 '인물'은 커녕 유형도 없다. 당장 이브의 유혹에 빠지게 되는 '계기'도 없고, 옥삔양의 유혹을 받아들이게 된 '욕망'도 불분명하다.
음악도 혼자 앞서나가고, 특히 섹스신에서의 음악들은 어찌나 어색하던지.. 혼자 막 스트링이 장엄하게 울려주시는데.. 어휴. 음악 얘기 하니까, 이 영화 영어 제목이 '갈증'인 건 이해하지만, 굳이 그 할짝할짝 거리는 음향 일부러 강조 안해도, 익스트림 클로즈업한 그 혀, 움직이는 것만 봐도 충분히 느낌이 온다. 극장 시설로 듣는 할짝 사운드는 제법 듣기 괴로웠다. 류성희 미술도 이 영화에서는 불필요하게 튄다. '금자씨' 때도 좀 그랬던 거지만.. 올드보이에서는 간지라도 났지.. 대체 그 방에, 거기에 벽걸이 티비는 왜 걸어 놓은 것인지? 소니에서 협찬해줬으니까 일단 걸었나? 이런저런 소품 셋팅 얘기하니까 그것도 그래, 왜 하필 마작을 하고, 잘 안 알려진 전통가요(김해송인지 뭔지)를 듣고, 소주를 마시지 않고 보드카를 마시는 거야? (것도 보드카도 앱솔루트 안 마시고 꼭 러시아제 스미노픈지를 먹는다) 완전 허세 쩔어..

<친절한 금자씨>는 그래도 시나리오가 잘 빠져서 그럭저럭 재밌게 봤는데,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볼 기회가 없어서 볼까말까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앞으로도 안 볼 것 같고. 박찬욱의 신작들이 나와도, 아마 입소문이 무지무지 좋지 않으면 돈 주고 볼 일은 없을 듯하다. (사실 오늘도 씨지비 포인트로 공짜로 보았으니 망정)

...사실 영화 이렇게 만들어 놔도 거장이니 작가니 대접받고, 앞으로도 께속 깐느 그랑프리 수상 감독으로 투자받고 관객들고 팬덤들 사이에서는 정신분석학적 해석 머시기(아마 김해숙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송강호옥삔양의 섹스씬 뭐 이런거 히치콕이나 린치에 비견시키고 이런 사람 꼭 있을듯)하면서 자화자찬할 거 같은데.. 그래 사실 나 그게 다 부러워서 그런거다. -_-


왠지 이렇게 써놓으면 찬욱이횽아 좋아하시는 분이 리플로 뭐라뭐라 써놓을 것 같은데

라고 써놓으면 악플은 면할 듯 싶네. 하하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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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것은 가능한 것인가? 이러한 질문을 지가 베르토프에게 한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다큐멘터리의 기본적인 규범은 사실성에 대한 천착에서 출발한다. 영화의 역사(혹은 영화를 다루는 이론이나 비평의 역사)를 통틀어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구분고자 하는 논쟁은 다분히 역사적이고 맥락적일 수 있지만, 배우가 없고 연기도 없으며, 간접적인 자연 배경이나 문학적인 플롯이 없는, 제작자의 직접적인 ‘경험’과 실재(real)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필름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다는 것은 사실상 모순적이다. 광학기술optics과 그것의 기술복제가 가능해진 이후, 사진과 영상의 ‘현실 효과’ 혹은 ‘실재 효과’는 영화의 강력한 힘이었다. 실재와 실재 간의 상동성의 증명이 다큐멘터리의 사실성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인 것이다. 즉 다큐멘터리 영화가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대상은―픽션 영화의 그것이 꿈(dream)이라면― 삶(life) 그 자체인 것이다.

<바시르와 왈츠를>(이하 <바시르>)은 기본적으로 증언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인물의 증언을 취합하고, 그 증언들 사이로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는 시퀀스를 삽입한다. 이러한 증언은 기본적으로 해리성 기억 상실을 겪는 주인공(이자 영화의 감독)인 아리의 상실된 기억을 메우는 데 일조하게 된다. 그러나 <바시르>는 영화의 형식에서부터 다큐멘터리의 규범을 거스른다. 비록 영화가 실제 촬영된 장면 위에 동화 작업을 덧씌운 로토스코핑 기법을 다수 차용하고 있기는 하지만(특히, 전형적인 증언 인터뷰 장면에서),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은 실재 혹은 삶의 재현이라는 다큐멘터리의 핵심을 완전히 위반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인 특징을 다큐멘터리 픽션 혹은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그것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다루고 있는 대상 혹은 이야기(discourse)가 픽션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큐멘터리 픽션 혹은 페이크 다큐멘터리와 구분되어야 한다.

<바시르>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사실성’의 질료를 명확히 하고 있다. 그것은 ‘꿈’ 혹은 ‘상상(imaginary)’이다. 즉 이 영화가 ‘재현’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마인드스케이프(mindscape)인 것이다.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는 어디론가 달려드는 스물여섯 마리의 사나운 개를 쫓는 역동적인 쇼트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퀀스는 영화의 첫 번째 증언자인 보아즈의 꿈 내용을 재현한 것이다. 뒤이어 영화는 보아즈와 아리의 대화 시퀀스로 이어진다. 보아즈는 자신의 꿈을 해석하며, 그 꿈의 기원이 된 레바논 전쟁의 일화를 들려준다. 영화는 이 일화를 재현한 씬을 삽입한다. 물론 이 모든 장면은 상상된 것이다. 레바논 전쟁을 직접 촬영하여 로토스코핑한 것이 아니다.

<바시르>는 심지어, 몇몇 ‘증언’ 시퀀스까지도 단순한 로토스코핑이 아닌 전면적인 팬터지 시퀀스로 구성되어 있다. 두 번째 증언자인 정신과 의사인 친구 오리 시반과의 대화 씬에서, 대화하는 두 사람의 배경은 완전한 허구이다. 시반은 아리에게, 기억의 비겁함에 대해 상기해 주는 일화를 들려준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찍은 9장의 실제 사진과 1장의 합성 사진을 보여준 뒤, 합성 사진에 대해 설명하라고 하면 많은 경우 사람들은 실제로 벌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서 ‘기억’해낸다는 것이다. 그러한 설명을 예화로 설명하는 팬터지 시퀀스를 보여주는 것이다. <바시르>의 형식적 긴장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과, 자꾸 망각의 전의식으로부터 끄집어내지는 것 사이의 긴장. 그것은 어떤 사실을 재현하는 방식의 윤리성의 문제로 요약할 수 있다.

아리 풀만은 미디어와 가진 인터뷰에서 ‘망각이야말로 그림의 재료이다’라고 말했다. 혹은, 리샤르 댕도는 다큐멘터리를 기억의 재구성으로 정의하였다. <바시르>의 모든 쇼트들은 사실상 아리의 ‘기억’을 재현하고 재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바시르>는 로토스코핑 뿐만 아니라 모든 애니메이션 기법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정당성을 갖게 한다. 즉 증언 자체와 증언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증언을 통해 ‘되살려진’ 기억과 상상의 이미지를 최대한 주관적(혹은 주체적)으로 재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바시르>의 강점이다.

애니메이션의 특징은 그것이 회화적이라는 데에 있다. 회화에서 출발한 애니메이션의 이미지들은 ‘보여지기’ 위한 방식으로 재현되는 것을 전제로 하며, 텍스트에서 암시하는 재현의 정치들은 언제나 응시(gaze)의 방식으로 결정된다. 즉 애니메이션의 이미지 메이킹은 욕망의 언어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규범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애니메이션의 쇼트들은 각각 응시의 외화를 표시하는 구체, 말하자면 오브제 쁘띠 아(objet petit a)의 물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예컨대 상업 애니메이션의 특징은 상상적인 이상, 완전히 통일되거나 거세의 공포가 없는 이상형으로서 존재한다. 이는 윤리적 고려가 없는 이상화된 선취(anticipation)다(예컨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미남미녀 등장인물을 보라). 이러한 응시와 재현의 체계는 간혹 이미 주어진 ‘빗금 친 대상’이 아니라, 자신이 상상한 이상적인 대상, 완전한 거울상을 창조하고 그것을 응시하고 모방된 것이다.

<바시르>에서 세 번에 걸쳐 제시되는 아리의 레바논 전쟁에 대한 불완전한 기억 시퀀스는 그러한 관점에서 대단히 갈등적이다. 아리는 어느 해안에서 전우들과 발가벗은 채 물속에서 떠 있다가, 하늘을 가득 매운 조명탄의 빛을 안고 해변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군복을 챙겨 입고, 도시로 들어서면 바시르의 초상 포스터가 붙어 있는 골목길이 나오고, 그 골목길을 지나면 아낙들이 울부짖으며 아리의 곁을 지나간다. 아리는 자신의 꿈속에서 제시되는 이 영상이 자신의 기억의 체계에서 배제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 영상에서 함께 등장하는 아리의 전우이자 세 번째 증언자인 카미 찬 역시 그 장면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영상은 레바논 전쟁에 대한 아리의 어떠한 가치나 신념, 태도를 증명하지는 못한다. 당초 그 영상은 꿈-이미지이며, 따라서 자아의 쾌락원칙 경제학에 의거해 검열과 조작에 의해 왜곡된 환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리는 이 장면의 객관적인 ‘진짜(real)’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 증언을 수집하고 자신의 기억을 올바른 방식으로 재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이 <바시르>가 기억을 재현하는 과정을 통해 체화해내고 있는 윤리성이다. 아리 풀만은 따라서 영화의 응시, 즉 자신의 기억을 촬영하는 행위의 체계로서의 ‘정직한 카메라’를 기어코 들이댄다. 카미가 자신을 촬영하고 싶다는 아리의 말에 ‘스케치는 되지만 카메라는 사양한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따라서 의미심장하다. 카미는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하고 싶어 하지 않으며, 실제로 다른 증언자들이 직접 출연한 것과 달리 대역 배우가 기용되어 촬영되기도 하였다.

보통 영화, 혹은 영상이 전쟁을 재현하는 방식들은 그 고통을 외화한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편향의 혐의를 지우기 어렵다. 수많은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들에서 제시되는 전쟁의 스펙타클은 차치하더라도, 전쟁의 풍경을 ‘객관적’으로 다룬다고 하는 저널리즘의 영역에서조차 전쟁의 풍경들은 미학적인 관점에서 제시되고 해석된다. 보들리야르의 급진적인 주장,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일갈은 재현의 사실성과는 별개로 대상을 이미지화하고 부화함으로써 그 추체험을 원체험으로부터 분리해버린다. <바시르>에서도 전쟁 광학기구의 재현 방식을 따라 전쟁을 묘사하는 쇼트들에 제시된다. 혹은, <바시르>에 등장하는 정신과의사 솔로몬은 병사들이 전쟁의 트라우마를 극복해내는 방법에 대해 증언하는데, 병사들은 전쟁에서 경험한 것들을 자신이 가상의 카메라를 통해 바라본 전쟁 영화의 한 장면으로 상상해 버리는 전략을 택한다는 것이다.

<바시르>의 초반부, 몇몇 증언의 재현이나 아리의 기억을 재현하는 시퀀스에서 레바논 전쟁을 묘사하고 재현하는 방식 역시 그러한 전환서사적인 클리셰로부터 멀지 않다. 예컨대 카미는 상륙작전을 위해 탑승했던 배 위에서 겪었던 환상적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카미는 배멀미를 견디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을 때, 자신이 물 속에서 걸어나온 한 여인의 품에 안겨 물 위를 떠돌며 자신이 타고 있던 배가 폭격당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것을 팬터지 시퀀스의 하나로 재현한다.

또 다른 증언자인 로니 다약의 증언 내용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로니는 전쟁 당시 처음 참전할 때의 기억을 ‘소풍’처럼 기억하고 있으며, 전차 위에 올라 사진을 찍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이를 강화한다. 전차가 습격당하고, 해변에 숨어 있다가 헤엄을 쳐서 부대로 복귀하는 도주 장면은 아리의 꿈이나 카미의 보트 환상과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로니는 바다 위에 떠다닌다. 이 장면의 바로 직전에 로니는 자신의 어머니와 자신의 유착 관계를 언급한다. 이러한 몽타주는 바다의 이미지는 자궁-양수의 그것과 이어지게 한다. (아리의 꿈에서 자신과 전우들이 벌거벗고 있었던 것이나, 카미의 환상에서 카미가 거대한 여인의 사타구니 위에서 물 위를 헤엄쳤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즉 거대한 물, 암전된 액체의 이미지는 죽음을 수용하는 물질인 동시에 생명을 잉태하는 물질이라는 양가적 속성을 가지며, 바슐라르가 말하는 존재가 삼투할 수 있는 심연으로 제시된다.

아리의 기억에서도 전쟁의 기억은 미학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카미와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올 때 기억해낸 장갑차에서의 총격 장면을 보자. 이 씬은 기본적으로 기관총을 난사하고 있는 장갑차는 소실점 너머에 있는 빛을 향해 도주하는 꽉 찬 프레임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마침내 당도한 광원지에서, 전사한 사체는 과도한 콘트라스트를 통해 눈부시게 빛난다.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분명 아리의 보이스-오버에 립싱크되어 있어서 그것이 전면적으로 아리의 기억임을 증명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빛의 사용은 분명 의도적으로 전쟁의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왜상 제시의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바시르>에서 빈번이 사용된 바흐의 하프시코드 협주곡이 사용된 장면의 경우에도 대부분 전쟁을 미학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레바논의 숲에서의 총격전 시퀀스가 그러한 예이다. 혹은 영화의 오리지널 스코어가 아닌 삽입곡의 경우(Cake의 <I Bombed Korea>를 개사한 <I Bombed Beirut>나 PIL의 <This Is Not Love Song>) 재현된 기억과의 모종의 충실도를 가지고 삽입되어 있다(등장인물들이 그 노래를 부르거나, 뮤직비디오가 등장하거나, 나이트클럽에서 연주되기도 한다). 이러한 삽입곡이 등장할 때 영화는 마치 뮤직비디오처럼 현란해진다.

영화의 제목이 된 ‘바시르와 왈츠를’ 추는 시퀀스를 전후하여, <바시르>는 그러한 재현의 왜상 제시 전략을 탈피한다. 아리는 바시르의 죽음을 전해 들은 직후 베이루트로 진격한다. 베이루트의 비행장에 들어섰을 때, 아리는 비행장에서 세상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여행을 온 것이라는 기분을 느낀다. 그러다가 문득 지금은 전쟁중이며, 자신은 참전중임을 깨닫고 풍경을 다시 둘러본다. 방금 전 멀쩡하게 이륙을 준비하고 있던 비행기들의 잔해가 보이고, 비행 스케줄표는 이미 오래전에 멈춰 있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아리는 베이루트 시가로 진격한다. 그리고 거기서 종군기자인 론 벤이샤이를 목격한다(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스튜디오 증언을 하는 증언자인 론 벤이샤이는 <바시르>가 다큐멘터리의 덕목을 갖게 하는 데 큰 공언을 하는 등장인물이다). 시가전에서 레바논군의 저격수에 의해 고전하고 있을 때, 영화의 증언자 중 한 사람인 프렌켈이 기관총을 들고 응전한다. 그리고 그때 쇼팽의 왈츠 음악이 흐른다. 카메라는 종군기자의 핸드-헬드처럼 프렌켈을 포착해낸다. 그리고 음악이 멈춘다. 역설과 아이러니로 가득한 이 장면 이후 <바시르>는 편재하던 팬터지를 거두어들이기 시작한다. 뒤이어 바로 베이루트의 참상을 제시하고, ‘바시르’라는 인물에 대해 스케치한 뒤 <바시르>는 다시 아리의 꿈-이미지에 집중한다.

친구 오리 시반은 아리의 꿈-이미지가 사브라-샤틸라의 학살과 연관이 있으며, 그것이 왜상으로 제시된 이유는 홀로코스트의 기억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아리는 마침내 자신의 전우가 아닌 사브라-샤틸라 학살 당시를 기억해내는 증언자 하라지를 만난다. 종군기자인 론 벤이샤이도 그중 한 사람이다. 이전까지 친구와 대화하는 장면이 술집이거나 친구의 집 등으로 설정되어 픽션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었던 데에 반해, 론 벤이샤이와 하라지의 증언은 스튜디오 인터뷰의 로토스코핑을 사용함으로써 증언 다큐멘터리의 객관적 진폭을 만들어낸다.

영화의 결말부는 이들의 증언에 따라, 사브라-샤틸라 학살의 전모를 전면적으로 재구성해내면서 아리의 꿈-이미지의 정체를 상세히 알려준다. 하늘을 가득 채운 조명탄은 아리가 직접 쏘아올린 것이다. 그리고 그 조명탄은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팔랑헤)가, 팔레스타인 포로를 학살하는 것을 돕는 역할을 했다. <바시르>는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내고, 아리의 꿈-이미지에서 만난 여인들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바로 이때 <바시르>는 실사로 전환된다. 지속적으로 흘러나오던 테마음악이 멈추고, 여인들의 절규가 현장음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한 사체의 초점 없는 눈빛을 담은 프리즈프레임을 보여준 뒤 암전하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아마도 벤이샤이에 의해 촬영되었을, 학살 현장을 담은 다큐멘터리 필름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1분이 채 되지 않는 이 시간의 임팩트는 매우 크다. 이 한 씬의 무게는 영화의 나머지 전체의 무게와 사실상 같다. 전쟁의 참혹함을 더할 나위 없이 미학적으로 왜곡했던 환상들을 경유하여 전쟁에 관한 기억의 실재를 만나게 하는 이러한 영상적인 대조는 매우 강력한 실험이자 대담한 고백이다.

<바시르>를 기억의 재현방식에 관한 윤리적 성찰을 담은 다큐멘터리 필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마지막 장면 때문이다. <바시르>의 증언자들은 하나같이 ‘기억은 우리를 가야할 곳에 가게 한다’고 말한다. 보아즈나 시반, 그리고 아리 풀만은 사브라-샤틸라가 마치 유태인이 죽어간 바르샤바와 같으며, 이스라엘군이 한 일이 나치와 같다고 순순히 인정한다. 비록 영화가 다루는 사건의 팩트에 관한 공방은 영화와 별개로 논쟁의 영역에 남아 있지만, 자신의 기억 속 왜상을 정돈하고 실재의 그것과 연결시키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모든 기억은 사실상 개인적이며, 엄밀한 의미에서 온전히 재현될 수 없다. 기억은 그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잊어버리면 사라진다. 그러나 ‘집단적인 교훈’은 존재한다. 바로 영화가 어떤 환상적 재현을 통하여 일종의 규약으로 남기는 바로 그것이다. 즉 영화가 재현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기억의 재현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집단적 약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인류가 보편적으로 중요시해야 할 어떤 중요한 사실에 대한 시각적 이미지의 결절이다. 애니메이션은 ‘쿨’하다. 애니메이션의 이미지는 환상적이어서, 사람의 마음에 보다 천착한다. 말하자면 <바시르>를 통해, 애니메이션-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은 검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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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의 영어 제목은 꽤 흥미로운데, <memories of matsuko>, 즉 '마츠코의 추억(기억)'이다. 영화는 마츠코의 조카(이름이 기억이 안나네-_-)가 죽은 마츠코의 집을 찾아가 마츠코 주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며 마츠코의 일생을 '전해듣는', 일종의 플래쉬백의 콜라쥬 형식을 취하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그 관찰자의 시점에서 진행될 때는 영화가 세피아톤으로 바뀌고, 오히려 플래쉬백 장면들에서는 총천연색이거나 뮤직비디오에서 보는 콘스라스트가 분명한 화려한 색감 따위가 등장한다. 더군다나 군데군데 삽입된 플래쉬백의 나래이터는 마츠코 자신일 때가 많으며, 심지어 플래쉬백 형식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대체 이게 누구의 플래쉬백이지?' 라고 여기게 되는 장면이 많다.  마침내 플래쉬백의 종점에 다다르면 '현재'의 장면에서 관찰자와 마츠코가 실대면을 하게 되는데, 이때는 세피아톤이 아니라 내추럴톤이다. 

 요컨대...영화는 어느 다른 등장인물의 시점에서 들려주는 플래쉬백의 전해 듣기가 아니라, 마츠코라는 유령의 기억들이 전면적으로 재현되고 있는..말하자면 마츠코라는 '유령눈'의 시점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심지어 마츠코의 시점숏과 시점숏의 역숏으로 끝맺음된다.
 
 ...개인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이 영화가 상당히 안티-페미니즘 적인 영화라는 점이다. 영화의 주제는 간략하게 요약하면, 일본 근대사에서 나타나는 가정/가족주의의 위기와 대상이자 주체로서의 여성성에 관한 제 문제이다. 마츠코는 항상 남성 응시에서 스스로의 여성성을 재구성하려 하고, 쉽게 얘기해서 남자의 사랑 없이는(그것이 아버지가 됐든 연인이 됐든 간에) 살아갈 수 없는, 수동적인 여성상의 전형이다. 

 일본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몇가지 키워드들(오일쇼크나 매매춘사업의 변화, 새 천황즉위, 경단3형제의 히트, 야쿠자, 그리고 소년 범죄)이 콜라주된 가운데 마츠코는 가족으로부터 밀려나, 안정적 사랑이 결핍된 불쌍한 여성으로 죽어간다. 문제는 이때 가끔 등장하는 마츠코 주변 '남자'들의 아주 불쾌한 일갈이다. 특히 마츠코의 가장 주요한 연인인 (역시 이름이 기억이 안난다. -_- 렌 이었나) 제자이자 야쿠자..는 마츠코가 어찌됐건 불가해한 사랑을 나눠주려고 했기 때문에 '신'과 같은 사랑을 한(뭐, 이거, 아가페?-_-) 사람이라고 칭송하고 주인공 역시 거기에 동의한다는 듯한 제스쳐를 한다. 그리고 마츠코가 마지막으로 동일시하는 대상은 아버지의 사랑을 담뿍 받았던 동생 쿠미다. 결국 여자에게는 아버지-남자의 사랑이 제일이고, 어쨌든 여자는 아버지-남자에게 아가페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바쳐야 하는 순정적이고 수동적인 대상으로서의 주체라는 것일까? 영화는 그런 점에서 상당히 균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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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계> : 포즈(pose)와 포즈(pause)



 '색'과 '계'를 다른 언어를 빌어 쓴다면 아마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이 될 것이다. 현실원칙을 지키면 항상성의 원칙을 거스르지 않게 되는 대신, 둘 사이를 왕복하는 강박증에 걸린다. 쾌락원칙만을 앞세우면, 그것을 넘어선 '죽음'에 다다른다. 결론부터 말하면, 왕치아즈는 쾌락원칙을 넘어섰고('색'에 사로잡혔고) 이대장은 현실원칙을 지켰다('계'를 지켰다).<색, 계>는 아름답지만 슬프고 잔혹한 이야기이다. '색'과 '계'는 서로를 배반하는 듯 하지만, 한편으로 서로를 지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균형을 잡는 일은 어렵다. 특히 그것이 역사라는 무게 때문에 존재가 흔들려야 했던 시기라고 한다면.
 
 <색, 계>의 주인공인 왕치아즈는 홀로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 여대생이었다. 그가 홍콩에서 혼자 본 영화는 데이비드 린의 멜로 고전 <밀회(brief encounters)>다. 왕치아즈는 피난간 홍콩에서 학생극단에 참여해 배우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에 휘말려 그는 '막 부인'을 연기하게 되고, 극단에 참여하는 학생 전원은 극장에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투쟁'을 위한 연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왕치아즈의 그러한 행보는 <블랙북>의 레이첼이 저항군에 가담해 스파이 생활을 하게 될 때의 비장함과는 거리가 있다. 왕치아즈와 친구들은 소아적이다. 왕치아즈가 '연기'를 향유하게 된 장면을 떠올려보자. 항일을 내용으로 하는 연극에서 호연한 뒤 축하파티를 하고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2층버스에 오른다. 버스에서 왕치아즈는 희열에 찬 눈빛으로 창밖을 응시한다. 그때 왕치아즈의 응시는 어떤 응시인가? 아마도 어떤 '역사적인 의미'를 내면화할 때 느낄 수 있는 종류의 희열일 것이다. 비슷한 것을 찾자면 아마 종교적 귀의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왕치아즈는 아버지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막 부인을 연기하게 된 것은 따라서 그녀의 역사의식 때문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는 외재한 아버지의 응시에 의해 '포즈'를 취하는 것을 즐겼을 뿐이다. 라깡이 응시를 ‘나를 사진-찍는’ 행위라고 한 것과, 응시에 의한 모방에서 주체를 상정한 것을 떠올려 보라. 홍콩에서의 첫번째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고, 엉뚱하게도 끄나풀인 차오(이름이 기억이 안남-_-)를 우발적으로 살해하게 된 해프닝의 현장에서 그는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듯 비틀거리며 떠난다. 그때 그녀는 처음으로 성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 성관계가 이 '포즈'를 위한 준비라는 점에서 그녀는 그토록 적극적일 수 있었던 것이며, 더 이상 '포즈'를 취할 수 없기에 그녀는 흔들렸다고 하면 과언일까.

 상해로 돌아간 3년 후, 여전히 아버지는 자신을 돌보아 주지 않는다. 왕치아즈는 특별히 취할 포즈가 없다. 그래서 그녀는 일본어 수업을 듣는다. 왜냐면 일본어는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남근적 질서의 상징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녀는 광위민과 조우하고, 저항군에 가담할 것을 청탁받는다. 그녀가 저항군에 가담하게 된 것은 그녀의 연기 실력이 출중하기 때문이지, 그녀가 일본에 대해 특별한 정치-역사의식 혹은 동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거기에 가담한 데에는 절반 정도는 아버지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막 부인으로 변신하기 전 아버지에게 장문의 편지를 쓴 것은 의미가 크다.

 그리고 그녀는 이 대장과 사랑에 빠진다. 여러모로 비교가 되는 <블랙북>에서 레이첼이 문츠와 사랑에 빠진 이유는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전쟁의 참화로 인한 상처와 인간에 대한 믿음 때문이지만, 왕치아즈가 이 대장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그가 오로지 자신의 인생에서 '사랑하는 척 하도록 허락된' 남자이기 때문이다. 막 부인이 된 왕치아즈에게는 '사랑하는 척'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막 부인이 된 왕치아즈의 인생은 원래 '연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광위민의 애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 대신 '막 부인'으로 살기 전인 3년 전, 자신의 존재가 한없이 흔들렸던 그 시절에 왜 애정을 주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뿐이다.

이의 우산안에 들어온 막부인-왕치아즈. 그의 상징질서(남근)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의미.


 그리고 마침내, 왕치아즈는 '막부인'으로서가 아니라 '왕치아즈'로서 이 대장을 사랑하기에 이른다. 이 대장과 왕치아즈의 정사는 처음에는 폭력적이었지만 이후에는 상호-관능적으로 바뀐다. 아마도 그때의 왕치아즈는 최초의 대상으로부터 자신의 욕망을 분리시켜내는 데에 성공함으로써 자아를 발견하고 확립하게 되는, 말하자면 빗금친 주체의 욕망의 대상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특히 이 대장과 일본인 조계지의 식당에서, 의미심장한 노래를 부르며 서로의 아픔을 확인하는 장면은 영화의 백미 가운데 하나다. 자신의 언어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 그 언어로 진정 소통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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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장면!


 하지만 현실적인 제약은 그의 쾌락원칙의 한계를 분명히 긋는다. 영화에 두번 잡히는 찻잔에 남은 립스틱 자욱은 이 비극의 종지와 같다. 마침내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색'을 욕망하게 된 왕치아즈는 그러나 '계'를 지키지 못한다. 이 대장은 그러나 자신의 '색'을 포기함으로써, '계'의 세계에 남음으로써 목숨을 부지한다. 대신 이 대장은 그녀가 머물던 자리에서 사랑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리고 자신의 '계'의 세계의 배우자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이미 자신은 진짜 욕망의 언어를 교환한 바 있으며, 그 어떤 말도 그에 값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잠시 멈추고 세상을 돌아보게 한다. 그 '사이(pause)', 경계를 풀고 세상을 바라본 순간 속수무책으로 들어오는, '색'의 비밀의 언어를 음미하면...어느새 세상은 죽음과 맞닿아 있고, 그래서 아름답고 슬픈, 순간적인 잔혹미에 압도당한다.

 
 <색, 계>는 역사적 사실의 무게를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 중일전쟁과 남경대학살과 같은 대사건의 흔적이 영화에 빈번히 제시된다. 그러나 <색, 계>는 또한 영화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색'은, 영화로서 남기고 싶은 인간의 어떤 쾌락에 대한 욕망들이고 '계'는 영화에 담길 역사의 흔적들이다. 그 사이의 쉼표는 정말 그 사이에 매달린 갈고리와 같다. 역사는 '계'의 세계에 남은 자들의 것이지만, 영화는 '색'을 추구한 사람들의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쩌면 <색, 계>는 왕치아즈가 본 두 편의 영화, <밀회>와 <의혹>에게서 세례를 받은 영화적 축복이다.

 한편.. 친일파 얘기를 이렇게 아름답게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인듯한 생각도 든다. 우리는 일제시대를 그리게 되면 프로파간다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여명의 눈동자> 정도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서울 1945>인가, 그 드라마가 제법 잘 만들었다는데..) 대만에서는 친일파 정리가 대충 끝났다던데, 그래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짧지 않은 영화가 내내 긴장과 매혹을 잃지 않는다. 음악도 매우 훌륭하고. 미술도 아름답고. 연기도 끝내준다. 아마 올해 최고의 아시아 영화의 영광은 <밀양>도 걸작이지만, 그래도 '영화'로서는, <색, 계>의 몫이 되지 않을까.

 올해 본 영화가운데 이영화와 비교될 수 있는 영화라면 <밀양>과 <블랙북> 정도이다. 아버지의 언어에서 방황하는 여성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밀양>의 인물과 닿고, 여성스파이 이야기의 파뷸라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블랙북>과 닿는다. 그러나 <블랙북>의 대찬 여성과는 여러모로 비교되는 건 사실이다. 폴 버호벤의 여성들은 뭔가 대찬데가 있지만, 이안의 여성들은 안쓰러울 때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처럼 그것을 미화하거나 환상적으로 그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혐의에서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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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이명세의 '페르조나'가 바뀌었다. 전작 <형사 duelist>를 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강동원은 송해성(<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과 이명세라는 극단을 오가며,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필모그래피에서만큼은) 성공적으로 쌓고 있다. 그간 이명세의 영화들의 '페르조나'란 송영창, 안성기, 박중훈이었고, 그의 영화들은 전작을 차기작이 새로이 참조하면서 구시대의 페르조나를 계승하거나 기각하거나 재해석하여 새로운 페르조나를 만들고 새로운 영화어법을 탐색해 왔다. 그렇다면 강동원은 그의 또다른 성공적인 페르조나인가?
 
 신작 <M>은 여러모로 당혹스러운 영화다. 개인적인 소회를 달자면, 이명세가 90년대 이후 르네상스를 맞은 한국 영화계에서도 여전히 '스타일리스트'임을 보여준 <인정사정 볼것 없다>의 기념비적인 성과가 얼마간은 그리울 정도로 소통이 어려운 영화이다. <M>은 그의 전작들과 공유하는 점들이 많다. 예컨대 여전히 정통 내러티브를 배반하고 있고, 익숙하지만 그래서 더 생경한 이미지로 점철되어 있으며, 배우들의 연기는 과장되어 있고, 결말은 영문을 모르게 찝찝하다. <M>은 그래서 여전히 '이명세의' 영화이다. 문제는 '너무 이명세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 M은 감독의 이름의 머릿글자를 딴 것이 아닐까 하는 우습지만 어쩐지 설득력 있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M>은 무엇에 관한 영화인가? 영화에서 제공되는 단서는 모딜리아니, 모짜르트, 달(moon)의 머릿글자이다. 혹은 등장인물인 민우와 미미의 머릿글자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이 나눴던 달달콤하고 슬픈 첫사랑의 추억(memory)을 환기하기도 한다. 그래서 '당신이 슬퍼했으면 좋겠어'의 애도mourn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M>의 중심적인 분위기인 미스테리(mystrery)를 드러내기도 한다(<M>은 스릴러의 구조를 따라가지만 스릴러는 아니다. 끼워맞출 수 있는 현실적인 클루들을 제공해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분류한다면 이 영화는 미스테리물이다) 또, <M>은 몽환적인데, 어쩌면 M은 몽환적의 머릿글자일 수도 있다(drea'M' 처럼). 이 몽환은 그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민우의 환상인지 확실하게 보여주지 않은 채 애매모호하게(그렇다면 M은 '애매모호'의 M일까?) 끝이 난다. 그리고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거울(mirror)과 거울상(mirror image)들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종합해본다면,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정리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는 영화 Movie, 혹은 영화 만들기 Making Movie이다. (경희와 한 농담이지만, 강동원의 머리도 M이더라)

 <M>은 아련한 기억속의 첫사랑의 추억을 되짚는 영화인 동시에, 그 첫사랑의 추억을 하나의 소설(민우는 약혼녀인 은혜에게 '미미'는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의 제목이라고 말한다)로 만들어가는 작업을 형상화하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민우가 이 영화에서 한 일들을 분류해보면 1) 미미를 탐색하고, 만나고, 화해하는 일들, 특히 '뤼팽'에서의 일들, 2) 출판사 관계자와 만나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일, 3) 은혜, 그리고 장인과 만나며 현실에서의 사랑을 지켜가는 일로 나뉜다. 또 이 영화의 다른 주인공들인 미미와 은혜의 경우, 미미가 한 일은 1) 민우를 따라간 일, 2) 자신의 죽음에 관한 일을 기억해내는 일, 3) 우산을 든 남자에게 쫓긴 후 그를 따라가는 일의 세 가지이다. 은혜의 경우에는 유일하게 현실적인 캐릭터로, 민우를 의심하고 사랑하는 역할을 한다. 민우의 경우, '현실적인' 캐릭터인 은혜와 상호작용하는 3번 항목을 제외한 1번과 2번 항목의 경우, 영화의 어법은 더 없이 몽환적이어서 그것이 현실인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들고, 간간히 나오는 대사들도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궁금하게 만든다. 예를 들면, 환상의 공간 가운데 하나인 커피빈 골목의 도입부에서, 미미가 커피빈에 앉아 민우의 통화를 엿듣는 장면이 있는데, 민우는 그때 아버지와 통화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 미미와의 추억을 더듬는 장면에서 민우는 아버지의 죽음을 언급한다.

 다시 말하면, 1번과 2번에 해당하는 일들은 '미미'라는 제목의, '첫사랑'에 관한 '소설쓰기'에서 겪어야 했던 어떤 환상들의 편린들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모든 일은 상상적인 일들이고, 착란적인 일들이며, 그래서 소설이라는 상징계의 구조 안에 편입시키기 위한 노력들은 눈물겹다. 그래서 미미는 한편, 거울상, 혹은 자신의 상상계적인 오브제 쁘띠 아의 모상(mimi-cry)이기도 하고, 또 동시에 어머니(미미mimi-마미mommy)상을 환기하기도 한다(<M>은 정신분석학에서 언제나 상상계의 '첫번째 타자', 즉 어머니를 뜻하는 상징문자이기도 하다). 예컨대 푸로작을 처방받는 진단장면의 경우나 은혜의 아버지를 만나는 장면에서 상대의 대사를 '먼저' 맞받아치는 것은,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 민우의 상상속에서 혹은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며, 혹은 액자속을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는 장면 역시 그러하다. 더욱 노골적인 장면은, 선풍기로 인한 목소리의 왜곡을 보여주며 그것이 분명 '시점숏'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대화장면들의 경우, 그 시점이란 곧 다시금 민우의 시점임이 분명하며, 인물들간의 대화도 부조리하고(마치 꿈에서 그러하듯), 편집상 뒤 시퀀스 연결조차 되지 않는다. 더욱 재밌는 것은, 미미가 주체가 되는 장면들조차도 그것은 미미의 나레이션과 미미의 시점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민우의 시점에서 재현된 장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민우가 자신의 첫사랑을 기억해내는 장면은 미미가 민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는 장면이다. 따라서 미미는 자신의 기억속 응시의 주체인 동시에 기억속 모사의 주체이다. 혹은, 미미가 은혜를 만나는 장면에서 지하철이 지나가고 나면 어렴풋 미미가 사라지는 씬, 미미가 민우와 은혜가 귀가하여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 장면과 같은 경우에도 앞뒤가 맞지 않고, 미미는 정말 '생뚱맞게' 소환된다. 그러한 미미의 등장들은 민우의 상상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합하다.

 미미와 함께 소통하는 유일한 공간인 뤼팽 역시 현실적 공간으로 보기 어렵다. 미미가 저승사자를 따라 기억의 저편으로 가고 나서 뤼팽의 성냥갑을 찾아보지만, 은혜는 성냥갑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분명 은혜가 성냥갑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거는 장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은혜의 그 장면은 민우가 뤼팽으로 허겁지겁 가게 되는 그 장면 사이에 삽입되어 있다. 즉 그 장면은 뤼팽으로 향하면서 한 민우의 상상이다. 뤼팽은 거울상을 지나, 저승사자를 따라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허름한 골목에 있고, '상상의 세계'와 악수를 하고 들어가면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게 되어 있는 구조이다. 그리고 그 안은 무척 고급스럽고, 동시에, 창밖으로 야경을 볼 수 있다(한 마디로 말이 되지 않는다, 그곳은 분명 지하 깊숙한 곳이었는데?). 뤼팽의 바텐더는 민우가 그곳을 처음 찾은 날짜가 8월 20일이며,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자신의 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8월 20일에 민우가 누구와 왔는지는 기억할 수 없다고 한다. 민우에게 미미의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몸'은 기억하지만, 상징계적인 이성의 질서에서는 환기할 수 없는 어떤 것. 8월 20일은 민우가 미미와의 사랑을 확인한 그 날짜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던 것이고, 그 모든 것은 민우의 기억과 상상계의 교란들일 뿐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거기서 나누는 대화들이다. 일테면 민우가 미미에게 '잘 지냈어?' 라고 묻다가 갑자기 화를 내듯 이야기하는 장면의 연기 톤은 현실로 보기에는 너무 '웃기다'. 마찬가지로 커피빈 골목 역시 현실의 공간이기도 하고 기억의 공간이기도 하다. 민우가 길에 드러누워도 다들 아랑곳하지 않는 이유는 이 영화가 '스타일리쉬'해서가 아니라는 뜻이다.

 은혜와 함께 영화에서 또 다른 '현실적'인 캐릭터는 임원희가 분한 성우이다. 미미가 이드id, 은혜가 상징계의 에고ego의 반영이라면, 성우는 수퍼에고super-ego의 반영이라고 할 만하다. 성우의 직업은 경찰로, 경찰일 이유가 없음에도 경찰인 이유는 그가 히치콕이 즐겨 사용한 '수퍼에고'적인 인물이라는 점 밖에는 없어 보일 정도이다. 성우가 민우에게 하는 일은 1) 자신을 기억하느냐고 물은 것, 2) 미미는 죽었으며 왜 자꾸 이상한 생각을 하느냐고 닥달한 것 정도이다. 상상계적인 '몸' 기억(혹은 id의 욕망)의 재현과, 그것이 야기하는 에고와의 불협에 대한 수퍼에고의 반응은 그러한 것이니까.

 본론으로 돌아와서 정리한다면, 따라서 이 영화는 그의 '영화', 혹은 '영화 만들기'에 관한 영화로 귀결된다. 영화란 곧 상상적인 기억들의 재현이고, 소설쓰기는 그것을 상징적인 질서로 조직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것을 '상상'적인 수준에서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오히려, 영화에서 끊임없이 조잘대는 그 '나레이션'에 가깝다. 영화의 나레이션은 영화의 도서들을 협찬한 문학과지성사의 채호기 사장이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채호기는 시인이기도 하다. 영화의 컨티뉴어티 스타일도 서사적인 것이 아니라, 환영의 촉수들이 넘나드는 분절, 환영, 편린들일 뿐 서사장르의 상징적 질서와는 거리가 멀다.

 이렇게까지 궁리를 하고 나니, 이 영화는 나름의 소통의 가능성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반적인 관객들이 과연, 강동원과 공효진과 이언희?가 나오는 영화에서 기대한 것이 이런 것이었을까 싶은 생각도 들고. 예술 영화라고 보기도 어렵고. 근본주의적인 표현주의에 기댄 영화도 아니고. 영화 사조를 이끌만한 시각적 혁명을 선도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사실 반신반의하고 있다. 사실 이명세에 관한 재미있는 루머인, 워쇼스키가 그를 좋아했다..와 같은 말들에 대한 반응들이 '반신반의'인 것처럼. 그러나 확실히 해 둘 것은, 워쇼스키가 차용했다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크로스카운터 씬은 <내일의 조>의 한 장면이 오리지널이다.

 그러나 한 가지 짚고 싶은 것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PPL들은 과연 그가 자본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하는 점이다. 먹물기질이라고 얘기할 지 모르지만, 이 영화의 '스타일'을 구성하는 많은 것들은 자본주의적인 라벨링에 의해 가능해지고 있다. 대리석이 깔려 있는 최고급 인테리어의 아파트와 b&o 오디오 같은 소품들, 고급위스키들, 고액권의 수표, '금보다 비싼' 다금바리(라는 생선을 나는 듣도보도 못했다-_-)..와 같은 것들이다. 강동원이 입은 론커스텀 수트나 커피빈이나 마일드세븐 같은 건 일상적이기 때문에 애교 수준이지만. 하여 어쩌면 영화는 이명세가 '영화감독'으로서 성공하며 얻은 부와 명예에 관한 자기반성을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명세의 출세작 <첫사랑>과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 관한 어떤 변명 같은 것. <첫사랑>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왠지 부럽기도 하고. 흥.

 
ps. 영화를 같이 본 경희에게, '영화 읽는 법'의 힌트를 한 가지 준다면... '대체 이 씬은 누구의 기억을 재현하고 있는 씬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 꽤 의미있다고 생각해. 일테면, 그 미용실 장면에서 미미가 후딱 옷을 갈아 입고(거기서 어떻게 그렇게 빨리 옷을 갈아입느냐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자전거를 타고 가서 석양이 내리고 밤하늘에 별이 빛날 때까지 서로를 바라보고 있고(시간의 흐름같은 것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듯이), '먼저 들어가'라고 자꾸 반복하고 마지막 '놀란듯한 표정'의 클로즈업은 미미만 나오는 것(현실이 아니며, 이 기억은 민우의 눈에 비친 바로 그 모습이 중요하다는 듯이)은 그 장면이 오로지 민우의 시점에서 재해석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 그 씬의 경우에는 해석이 쉬우니까 예를 든 거고. 가장 난해한 경우에는 저승사자-_-와 미미의 관계, 혹은 은혜가 지하철에서 미미를 만나는 장면 같은 경우인데, 그런 장면들조차도 실은, 미미가 민우의 상상적인 인물에 불과하다면 그 장면들 역시 민우의 기억이 소극적으로 삽입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중첩된 나레이션이나, 은혜의 꿈 조차도 사실은 민우의 기억일 수도 있다는 거지. 민우가 '먼저 대사를 치는' 기이한 장면들, 액자 속 액자가 왔다리갔다리 하는 장면들도 그냥 장난이 아니란 거고.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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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사정 볼 것 없다
Nowhere to hide

난 이명세를 몰랐다. 그가 “한국의 스타일리스트” 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경위도 몰랐고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그의 대표작이란 것도 몰랐다. 안성기나 송영창이 그의 페르조나인 것도, 그의 영화엔 언제나 비와 눈이 내리는 것도 몰랐다. 결국 이 영화를 볼 때, 난 이 영화에 관한 그 어떤 사정도 모르고 볼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 영화는 지독하게 사실적이다. 구구절절 자세하게 풀어나가는 내러티브가 없다. 혹자는 이 점을 이 영화의 단점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장점은 오히려 그러한 “리얼리스틱” 내러티브의 부재이다. 악역인 성민(안성기 분)이 주연(최지우 분)을 어떻게 만나서 어떤 사랑을 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감독은 인물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키지 않는다. 이것이 이른바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하이퍼 리얼리즘”의 소산이다.

영화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영구란 캐릭터의 등장은 실은 영화의 어조를 과장법으로 이끈다. 멜빵바지에 알록달록 티셔츠를 입고 껄렁거리며 가스총을 쏴대는 형사는 우리가 형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반적 스키마를 완전히 깨어 버린다. 이것은 비단 영구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 등장하는 모든 형사는 실은 조폭보다 더 조폭답다. 경찰계의 내면을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은 “어쩜 저렇게 비인간적일 수 있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모습이 어찌 그리 사실적이고 인간적일 수 있을까. 어째서 그런 데에서 짙은 “사람 냄새”가 풍길까.

영화를 보면서 나는 이창동의 “초록 물고기”를 떠올렸다. 난 그 영화를 무척 좋아한다. 느와르 장르의 치부를 슬쩍슬쩍 피해가며 “성, 그거 기억나?” 라며 눈물흘리는 막둥이를 연기했던 한석규의 모습은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장면보다 인간다웠다.

물론 이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초록 물고기”와 완전히 다른 어법을 가지고 있다. 현란한 화면과 감성이 배제된 연기는 이 영화의 비교 대상을 헐리웃 액션 영화로 돌리게 할 정도이다.

하지만 성민을 쫓는 영구의 대사, “세상에서 가장 좇같은게 형사고, 그 중에서 제일 좇같은게 강력반이다” “판단은 판사가 하고, 치료는 의사가 하고, 용서는 목사가 하고, 형사는 무조건 잡으면 되는 거야” 하는 이 대사들은 이 영화가 하부 구조를 이루고 있는 삶과 삶들의 영화라는 것을 말해준다.

달도 참 밝은 밤 영구의 동생이 영구에게 주는 장갑같은, 그리고 그 장갑으로 던지며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기분”을 씻는 눈송이 같은, 그리고 다시 들어보는 “해뜰날”같은, 그리고 “holiday"같은 희망이 넘치는 인간의 삶이 숨쉬는 영화가 되고 만 것이다.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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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이 우리에게 다시금 ‘등장’한 것은 9․11과 이후 촉발된 미국의 ‘대테러 전쟁’의 전장으로서였다. 탈레반 정권과 이슬람원리주의, 제국주의 미국의 군사 개입과 지리멸렬하게 진행되고 있는 공화정 수립 난항 등을 보도하는 외신으로부터,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을 상시적인 비상사태의 어떤 현장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다큐멘터리 <행복의 적들>은, 이 세계사적인 비극의 현장에서 우리가 단지 ‘부르카를 쓴 여성’의 이미지 정도로 산발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아프가니스탄 여성에게 주어진 비운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비장한 투쟁을 조용히 조망하고 있다. 다큐멘터리의 어조는 비교적 정적이며, 정치 상황이나 여성 문제의 실태에 대한 동적이고 분석적인 접근 대신 말라라이 조야라는 한 여성 운동가의 조심스러우면서 또 담대한 일상을 차근차근 따라간다. 아프가니스탄 제헌의회 의원이었던 말라라이 조야가 제헌 의회에서 규탄 연설을 벌이다가 퇴장당하고, 이후 아프가니스탄 공화정 수립을 위한 의회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고 첫 활동을 시작하기까지의 며칠간을 추적한 이 영화는, 선거 운동을 하는 조야의 모습과 더불어 의원으로서의 활동, 선거 토론회 참여 등 그가 벌인 정치 활동을 조망한 것은 물론 그의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차별, 위협에 대한 항거, 그에 대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결연한 지지 등을 두루 담아낸다. 따라서 이 필름은 한편으로 ‘정치 다큐멘터리’인 동시에 정치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그래서 영화는 말라라이 조야가 ‘불온한’ 목소리를 내면서 맞닥뜨려야 하는 위협으로부터 도주할 때의 아픔이나 부당한 현실을 규탄하면서도 스스로가 처한 인간적인 괴로움에 눈물 흘리는 모습을 묵묵히 전달하며, 우리는 그에게 정치적으로는 물론, 인간적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영화는 어떤 식으로 말해 다분히 여성적이다. 지지자들의 방문은 물론 친구와 대화하고 생활하는 일상을 담은 장면들도 많고, 그 과정에서 ‘정치가’인 말라라이 조야의 ‘인간’으로서의 감정선을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는 왜 ‘말라라이 조야’가 없을까. 그것은 여성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지 않거나, 아니면 무언가 다른 방식으로 ‘한국의 말라라이 조야’를 억압하는 기제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일견, 일정정도 민주화가 진전되어 있으며 가능한 사회 운동의 조건이 성숙한 것처럼 보인다. 설혹 말라라이 조야와 같은 정치적 견해를 피력한다하더라도, 그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직면해야 하는 생명의 위협에 견줄만한 반동적인 저항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사회에서나, 그 사회의 맥락에서 ‘소수자’로 분류되는 개인 혹은 집단이 어떤 정치적인 갈등을 표출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넓은 의미에서) 억압의 대상이 된다. ‘지금-여기’ 한국 사회에서, 성차에 따른 차별적 위계질서에 의문을 품고 실질적인 평등에 관한 기획과 제안을 실천하려는 소위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사회적 시각은 예나 지금이나 사실 곱지 않다. 이미 표면적으로 ‘민주화’가 되고도 강산이 두 번 변했고, 사회는 시시각각 ‘국제화’를 넘어 ‘세계화’의 구호를 내걸며 ‘만민 평등’이니 ‘천부 인권’이니 하는 말을 옛것으로 치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주는 일반적인 인상은 ‘극단적’, 혹은 조금 양보해 ‘급진적’이라는 데에 그친다. (대신 미디어는 ‘알파걸’ ‘수퍼우먼’ ‘콘트라섹슈얼’ 따위의, 상업적 의도가 다분한 이디엄을 등록한다) 물론 한국 사회에서 그 어떤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주의주장을 제안하고 실천하는 여성주의 운동가들이라 하더라도, 말라라이 조야가 겪어야 할 가시적인 생명의 위협에 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양성평등은 옳다’라고 말하는 쉽고 습관적인 언술 이면에 깔린 반동적인 남성중심사회는, 여성주의자 혹은 여성주의 운동의 주장을 전사회적인 아젠다로 등록하는 아량 대신 그것을 다른 어떤 은밀한 방식으로 억압하고 포섭하고 있다. 즉 다시 말해 현재 우리 사회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처럼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처벌과 규제(강간과 죽음과 같은) 대신, 그와 조응하는 영향력(resonance)을 지닌 또 다른 종류의 처벌과 규제의 기제가 존재한다. 예컨대 ‘페미니스트들과는 같이 일해서는 안된다’, ‘페미니시트들과는 인간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페미니스트들은 정치활동을 해서는 안된다’와 같은 이른바 ‘사회적 사장’의 담론들이 ‘공공연한 비밀’로 공기 중에 유포되어 있다. 말하자면 방법론적으로 보다 ‘세련된’, 즉 근대 서구적 가치관에 크게 위배되지 않는 사회적 처벌이 가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른바 ‘보편 인권’이 신장되고 더 이상 여성에 대한 물리적 억압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지 않을까 하는 우울한 전망을 하게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라헬라라는 10대 초반의 어린 소녀는, 늙은 지방 유지이자 마약상이자 군벌(warlord)인 쉬린 칸이라는 남자에게 강제로 ‘결혼당할’ 상황에 처해 있었다. 영화는 라헬라와 라헬라 가족의 목소리는 물론, 쉬린 칸의 목소리도 들려준다. 그는 라헬라를 흔히 상상하듯 어떤 성적 착취의 대상으로 독점하기 위해 그를 셋째 아내로 맞아들이려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제의를 올렸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해야 하는 것이 아프가니스탄의 문화이다’ 라고 말한다. 그가 결혼을 굳이 고집하는 이유는 그가 탐욕스럽고 동물적인 악의 화신이어서가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의 어떤 문화적 맥락에서 그 결혼이 자신은 물론 가족의 위신과 명예와 신앙을 위한 ‘정당한’ 행위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맥락에서 필연적 악으로 규정되는 행위조차 ‘그들’의 맥락에서는 우연적인 선일 수 있는 것이며, 이는 아렌트가 지적한 ‘악의 일반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해당 사회가 갖고 있는 ‘이미 주어진 대타자’, 혹은 차별의 논리를 봉합하고 지탱하는 ‘이데올로기’, 혹은 그 질서의 지식이 의지하는 ‘담론 권력’에 숨은 차별의 논리일 것이다.

실제로 보편인권의 개념 역시, ‘천부 인권’이라는 말처럼 인간의 발생과 더불어 하늘에서부터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발명’되고 ‘발견’되어 발생하였으며, 그것이 전파되는 과정 아래서 전 인류사적인 진보의 공감대를 형성해왔던 것을 상기해야 한다. 즉 말라라이 조야의 투쟁 전략 저편에는, 아프가니스탄의 성차별적인 문화를 악으로 규정할만한 안정적인 근거에 대한 고려가 존재해야 한다. 뿌리 깊은 관습의 오류를 고발하고, 그와는 다른 진보적인 인류애를 가질 것을 권유하는 ‘설득’은 어느 지점으로부터 출발하여 어떻게 도착할 것인가?


세계적으로 보편인권이나 여성주의가 정치적인 협상의 대상이 된 것은 양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맥락에서 살펴본다면, 특히 여권신장에 관한 신사회 운동은 민주화 선결이라는 거대담론에 가려 1990년대 이후에나 활성화된 것이 사실이다. 거칠게 말하면, 파시즘의 시대의 종언과 더불어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여성의 권리에 관한 문제 의식이 도착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뿌리 깊은 성차별적 담론으로부터 여성주의 담론이 해방될 여지는 무척이나 요원해 보인다. 더군다나 외삽적으로 주어진 ‘민주주의적’ 제도의 외피는 어쩌면 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아프가니스탄 사회에 ‘제도적 민주주의’는 존재하되, 그 제도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이성적 능력은 결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내용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성숙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성립된 형식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오히려 현재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슬람 근본주의와 합작, 기존 정치세력으로 하여금 파시즘을 공고히 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시각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따라서 조야의 투쟁은 일면 ‘여성’을 위한 것이지만, 나아가 민중(혹은 민족) 전체를 위한 것이다.


앞서 우리는 영화는 ‘여성적’이라고 논의했다. 그러나 이 논의는 결론에 이르러 수정되어야 했다. 우리가 영화를 보고 여성적이라고 했던 지점에서, 우리는 오랜 시간 가려져 있어서 이야기되지 못했던 것을 ‘여성’의 이야기로 ‘치부’하고, 그것이 기존의 (가부장적) 질서 아래 어쩌면 별 것 아니고, 어쩌면 열등하고, 어쩌면 시시하고, 어쩌면 미미한 이야기라고 생각한 탓에 그것을 ‘여성적’이라고, 함부로 말했던 것이다. 말라라이 조야의 이야기는 ‘여성’의 이야기이기에 앞서, 상처받은 인간과 인류의 이야기이다. 여성주의는 ‘남성우월주의’에 맞서 ‘여성우월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닌 휴머니즘이기 때문이다. 조야는 선거운동을 하며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에게 ‘나를 뽑아달는 게 아니라, 여성을 존중하고 부패한 군벌 세력과 타협하지 않는 사람을 뽑아달라’고 말한다. 관객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 말라라이 조야는 ‘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내 목숨을 가져갈 수 있지만, 내 목소리를 가져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프가니스탄 여성과 민중의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했다. 조금 낡은 언명을 빌자면, ‘여성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억압받는 여성, 억압받는 인간을 위해 담대히 맞서 싸우는 사람의 존재를 만나며, 우리는 ‘인간성의 살아있음’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감동을 얻었다. 우리는 작든 크든 그에게 연대와 지지를 보내고 싶다는 데에 기꺼이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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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재현에 관한 고민을 다루었다..라고 하면 의아해 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더러는 수긍할 것이다. "박진표 감독작품"이라는 타이틀 크레딧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극화한 사랑이야기 입니다"라는 점을 당당히 명시하며, 구체적인 인물과 구체적인 장소와 구체적인 시간을 들이댄다. 심지어 고증도 철저해서(두 주인공이 처음만나는 철도 건널목 옆 영화포스터 게시판에 걸린 색이 퍽 바랜 영화포스터는 <신라의 달밤>이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철저히 부순다. 소소한 사실적 재현은 그러나 실제로는 무용하기만 한데, 그것은 극중 김석중의 사연을 기사화하려는 여성지 기자들의 태도와 맞닿는다. 영화의 제목은 심지어 문제의 여성지 기사의 제목과 같다. 남의 실화를 이용해 제 밥벌이에 급급한 이기적인 극화의 동기를 보여주는 일이 스스로에게 짐이될 줄을 알면서도 감독은 왜 굳이 해당 시퀀스에 거의 사실상 제재적인 지위를 부여한 것일까. 영화가 온전히 서려면, 그것은 재현의 윤리적 지점을 영도에서 다시 시작하겠다는 일종의 고백적 제언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즉 그 시쿠너스는 자신의 재현이 거스르는 일단의 윤리적 문제들을 스스로 잘 알고 있음을 자인하는 것이다. 실제로 감독의 전작 <죽어도 좋아>는 사실상 재현 그 자체였으며, 재현이라는 형식적 실험과 인간의 보편적 사랑이라는 매력적인 소재를 꽤 적절히 조합시킨 실적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너는 내 운명>의 '재현'은 스스로의 윤리적 자인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적실치 못했다. 일단 정말 객쩍은 결말 탓이 첫째고, 둘째는 서사구조가 지나치게 상업적이고 탈-실화화된 탓이다. 황정민과 전도연이 연기한 인물들은 영화의 내재적인 자기완성도의 측면에서는 더할나위없는 호연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 과연 그들이 연기한 연애와 순정이 인물들을 둘러싼 매매춘과 보건의료정책, 농촌의 어두운 현실과 에이즈여성에 대한 차별 등을 관통하여 재현되고 있을까? 영화가 기대고 있는 유일한 정치적, 윤리적 진실은 전은하가 김석중과 결혼을 결심할 무렵 심수봉의 <사랑밖에 난 몰라>를 부르며 못내 서러워 울 때 느껴지는 울림 정도이다.

그러나 <사랑밖에 난 몰라>의 힘은 임순례가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써먹었고, 불가해한 사랑의 힘 운운은 송해성이 <파이란>에서 한 번 써먹었다. 그런데 이 두 이야기는 엄밀히 대단한 비극적 서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그들의 자기완결성 내에서 납득할만한 결론은 그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는 내 운명>의 경우에는 그 방점들이 치닫는 결말이 대단히 멋적다. 에이즈는 치료될 수 없고 그라목손은 치사율 100%의 맹독이지만, 그 비극의 끝은 끝내 제시되지 않으며 그저 가슴이 조금 뻐근해 보라는 듯 황급히 영화는 엔딩크레딧을 올린다. 죽음 없는 사랑이 사랑 없는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음을 필름의 길이는 외면한다. 이러한 결말 방식은 마치 결혼한 뒤의 비루한 일생을 언급하지 않는 트렌디 드라마의 결말과 비슷하다. 대부분의 나이브한 상상력을 가진 관객들은 이 영화로부터 자신의 상상력을 닫으며 영화를 기각할 것이며, 보다 치열한 상상력을 가진 이들은 다른 이유에서 또한 이 영화를 기각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이 영화는 실화를 재현한 영화가 "아니며", 결국 오로지 "극"만 남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HIV에 감염된 여자 복역수의 사랑이 남성적 관점에서 포착되어 재구된 그럴듯한 팬터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아시스> 같은 영화도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비난의 여지가 다분한 바가 사실이었고, 심지어 <파이란>도 욕먹는데 <너는 내 운명>은 ('실화를 재현했다'고 표방하는 바에!) 가련한 여인의 삶에서 여인의 삶을 쏙 빼버린 마냥 나긋나긋한 사랑 영화가 되었으니, 윤리적 정치적 예술적 타당성을 확보할 수 없게 되버린 까닭이다. 전언에 따르면 또한 실제의 사연은 그리 아름답지도 못했다 하니, 실화의 힘을 '써먹어' 보려 했던 감독의 의도에 물음표가 겹친다.

당겨 말해, 어떤 관점에서 <너는 내 운명>은 사랑에 관한 어떤 나쁜 영화일지도 모른다, 라고 하면 다소 미안하지만, 어쨌든 그러하다. 극의 줄거리(fabula)를 요약해보자, 다방레지를 하다가 에이즈에 걸린 여성을 순박하고 착한 농촌 노총각이 마침내 구원한다? 그렇게 다이어트시켜놓으면 뻔한 창녀컴플렉스 서사에 불과하다. 일관된 여성주의적인 관점에서 영화가 빛날뻔한 지점은 나문희가 연기한 석중 모의 시선들과 몇 마디 대사들 정도인데, 실은 서사구조 안에서 석중모는 그저 석중의 욕망을 욕망하는 하나의 투사체에 불과하며, 기실은 비겁에 가까운 하나의 맥거핀이거나 주동적 보조인물에 그친다.

이러한 결점들 가운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그렇다면 감독은 애당초 이 통속적이며 극-현실적이다 못해 초-실화적인 재구성이 여성지 기자들, 즉 '선수들'을 조롱하기 위핸 농담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에 따옴표를 치고 있을까? (충무로 제작자들을 '선수'라고 부르기 때문에, '선수 끼리..' 라는 말은 어쩐지 그러한 조롱조로도 들렸다면 과장된 감상일까) 만약 그러하다면 감독은 어째서 '박진표 감독작품'의 크레딧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이 모든 의문은 결국 감독 본인의 입으로 들어야하겠지만, 그렇다는 점은 결국 영화가 내재적인 자기완결성에 심각한 모순과 오류를 지니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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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제목 『the power of one』, 즉 ‘한 사람의 힘’은 영화의 마지막 컷에 장황하게 적혀 있는, 영화의 주제인 ‘인종주의에 대한 반대의 많은 힘(power of many)’을 이끌기 위해 필요한 개인의 결단을 촉구하는 일종의 호명이라고도 볼 수 있다. 듀마의 제의를 받고 결심에 이르는 PK가 바라본 것은 ‘한 방울의 물방울이 폭포가 되는’ 자연의 모습이며, 영화의 주장대로라면 그렇게 그들은 이 마을 저 마을로 옮겨 다니며 흑인들을 계몽할 것이다.
10년이 다된 영화 『the power of one』을 보는 일은 솔직히 말하면 고역이었다. 영화를 본다는 입장에서 이 영화에서 마음을 움직인 것은 한스 짐머의 음악뿐이었다. 그나마의 음악도 아프리카의 토속음악에서 느껴지는 어떤 낯선 정취에 대한 접근일 뿐인데, 그것은 마치 한스 짐머의 또 다른 스코어 『the lion king』에서 얻었던 감동과 비슷하다. ‘야만’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은 한편 ‘야생’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와 이어지는데, 소위 ‘월드 뮤직’을 듣는 것은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주류 음악이 봉착한 한계를 타개하기 위해 마련된 일종의 소재주의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여하간, 영화에서 등장하는 인종주의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저 유명한 나찌즘이고 다른 하나는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이다. 하나는 첫 번째 백인에 대한 두 번째 백인의, 또 다른 하나는 두 번째 백인에 대한 흑인의 분리주의인데, 영화에 따르면 영국인은 두 번째 백인의 자리에 위치한다. 영국인 소년 PK는 남아공에 살고 있는 영국인 농장주의 아들로, 어렸을 적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가세가 기울었으며, 까닭을 알 수 없게 어렸을 때부터 흑인들의 삶을 동정하고 이해한다. 그를 가르친 독일인 선인장 교수 Doc 역시 흑인들을 보살피고 이해하는 아량 많은 독일인이고, 나찌즘의 내부적 피해자이다. 그는 자신의 보호자 Doc과 함께 수용소에서 지내며 흑인 죄수 Geel Piet에게 권투를 배우며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사립 학교에 입학하여 장학생으로 Oxford에 입학한다. 그의 ‘파트너’가 되는 Maria는 민족당 지도자의 딸인데, PK를 만난 것만으로 흑인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을 이겨내는 것은 물론 심지어 흑인을 위한 야학 활동을 하다가 목숨까지 잃는다. 불우한 환경에 비해 너무 많은 특권을 가진, 가능할 수 있는 모든 특권을 가진 PK는 듀마와 함께 흑인들을 위한 인권 운동에 뛰어든다.
백인2가 백인1이 가하는 탄압을 견디고, 백인1 중에서 백인2를 이해하는 이와 유대를 한다. 흑인은 백인2가 가하는 탄압을 견디고, 흑인을 이해하는 백인2와 유대를 한다. 하여 흑인은 백인2와 손을 잡고 백인1에 항거하는데 그 과정이 아주 감동적이다. 이처럼 밑도 끝도 없이 생성된 현실적 갈등이 해결되는 과정은 1992년의 남아공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들(만델라의 복귀와 아파르트헤이트의 폐지, 반인종주의의 세계적인 공감대 형성)에 대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으로 인식되는, 백인들에 의한 백인들을 위한 백인들의 '흑인에 대한 응시'를 담아내고 있는 것. 정말 멋쩍은 해피엔딩이다.
이러한 논리의 흐름은 결국 백인 남성중심인 기존의 논리의 피상적 반성에 그친다. 백인-식민자라는 제국주의적 성격과 획일적인 인종주의에 틈을 내밀며 반성을 촉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처럼 확고한 기성-정체성을 가진 주체를 내세우는 흐름은 계급, 인종, 문화 등등 여러 관점에서 갈라지게 되는 대상들에 대한 경험주의라는 한계에 머물러 있다. 제 3세계의 억압 경험을 중시한다는 사실은, 결국 그 경험의 주체가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만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즉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로부터 교묘하게 지배받고 착취당했던 편에 서서 그러한 억압 지배 체제를 비난하는 것처럼 보이는 영화는 사실 획일적이고 단순한 민족분리주의, 원리주의, 국수주의안에서 애매모호한 다양성의 인정을 중시한다.
서구중심으로 시작된 탈식민주의·반제국주의 기획의 주요한 통찰과 해석은 타자에 대한 자신과의 경계를 은폐하는 일이였다. 소위 다문화사회 논리는 각 주체들의 차이들을 인정하는 경험론에서 비롯된 것인데, 인종과 문화의 다중적이고 복수적인 차이들을 존중하는 동시에 그들 간의 ‘다름’이 ‘다름’이 아니라 ‘같음’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인종’ 대신 ‘인종성(ethnicity)', '정치(politics)’에서 ‘문화(culture)’로 그 논의의 대상을 바꾼다. 이 영화(파워 오브 원)는 'one'이라는 애매모호한 말로 각자의 분명한 경계를 지우고 각개의 인간들이 같음을 호소하며 개개 문화의 동등한 상호작용을 강조한다. 그러나 실은 변화나 개선의 역량은 제국주의 서사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가운데, 제국주의 세력의 중심문화가 허용하는 선 안에서 반주변, 주변의 문화를 인정하는 시혜를 베푼다는 식의 이야기에 그친다. 제국주의적-다문화주의의 맹점은 그런 무분별함에 있다.
사족, 애당초 자본주의가 태생시킨 제국주의적 침략은 제 3세계의 주체들 뿐만 아니라 제 1세계의 사회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스피박Spibak이 주장한 바대로, 푸코나 사이드는 제 1세계 주체가 제 3세계의 주체들에게 타자의 굴레를 지움으로써 스스로의 주체성을 파생시켰다는 점은 간파하지만 실은 실제로 각 세계들의 경제구조나 정치적인 억압을 분석한 것은 아니었다. (여담이지만 제 1세계/제 3세계라는 구분자체가 서구 중심으로 진행된 식민주의·제국주의적 위계질서이며, 나아가 모든 인종과 민족을 관통하는 전 지구적인 사고 체계(globality)를 강조한다) 스피박이 도입한 하위주체sub-altern 개념은 생산 중심의 자본주의 체계에서 사실상 그 중심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를 포괄하는 동시에 인종, 성, 문화적으로 주변부에 속하는 사람을 아우를 수 있는 개념이다. 무리가 있는 주장일지 모르겠지만 일반적 소시민 역시 subaltern에 포함시킬 수 있으며, 자본의 논리에 착취당하는, 즉 자본의 논리에 저항성을 띄(어야 하)는 주체를 개념화한 것이다. 스피박은 그람시가 간과한 하위주체의 젠더화와 ‘말하기’, ‘문화적 재현’에 결부된 문제를 부각시킨다. ‘하위주체가 말할 수 있는가?’라는 부정적 의문 속에는 담론을 생산하고 문화기술지를 작성하는 사람 자체가 그 사회에서 특권을 누려온 남성이라는 점(PK의 경우)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특권적 남성의 시각에 가려진 여성 하위주체(다소 나이브한 주장이지만 여기서 여성은 sex로서의 female이 아니라, 발언권을 얻지 못하는, 즉 female-gendered의 대다수 subaltern을 상정한다. 제국주의 시절 아프리카를 ‘처녀지’라고 불렀던 것을 상기하라)의 모든 경험과 인식은 실제로 통용될 수 있는 담론의 장에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다.
스피박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subaltern의 자기부정이나 subaltern의 해체를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결국 제1 세계 지식인이 제 3세계 주체를 represent한다고 할 때 범하게 되는 오류를 Spibak 스스로도 범하지 않도록, 지식인과 subaltern 간의 괴리를 철저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PK가 흑인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그들의 rainmaker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PK가 나아가 계급적인 차이를 부각시키고(Piet나 Dumar를 하인으로 부른 것이 그것이라면 할 말 없다) 그들 스스로의 충돌 지점을 극명하고 첨예하게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다소 좌파-관념적인 언술이겠지만, 실제로 남아공에서는 흑인들이 각개의 정치적 집단성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물론 그 경우에도 민족 국가의 개념과 feamle-gendered subaltern간의 충돌에 대한 문제 의식은 유효하겠지만).

사족, John G. Avildsen은 Rocky 시리즈를 연출했고, 각본 Robert M. Kamen은 Luc Besson의 『the fifth element』를 공동 집필했다. 과연 그렇겠다. 또 하나 사족, 일본인이 일본 군인이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에게 탄압당한 뒤 태평양 수용소에 갇힌 한국인을 이해한다는 영화가 만들어질까 두렵다. 『반딧불의 묘(火垂るの墓)』같은 영화를 보건대 나오지 않으리란 법도 없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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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짜>에서 '발견한' 것은, 누구나 그렇겠지만 김혜수가 분한 정마담이라는 캐릭터다. 허영만의 원작에서 여자들은 언제나 스테레오타입이고, 영화에 나오는 화란과 미란 역시 그러하다. 원작의 정마담 역시 남성 캐릭터의 아니마 혹은 거울상에 불과한 평면적인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최동수가 그린 정마담은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라 할 만하고 김혜수의 연기는 그에 값한다. 사실 그간 김혜수가 과대평가되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감독의 전작에서 염정아가 그리했듯 이 영화에서 김혜수는 올곧이 빛난다. 돈가 삶의 먹고 먹히는 관계에서 망설이고 또 실수하고, 그리워하고 감복하는 그런 욕망의 변죽을 정마담이란 캐릭터는 잘 담아낸다. 아쉬운 건 시대감각의 결여다. 허영만의 원작들이 각각 당대의 시대상을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었던 데 반해 이 영화의 시대감각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이며, 그래서 오히려 조승우가 분한 김곤이 계속 스타일리쉬하게 살아간다는 결말은 뜨악하다못해 찝찝하다. 자본주의와 그것의 룰이 갖는 속성은 원래 그렇고 그런 것이고, 최소한의 합의(말하자면, 도박판의 원리가 그러하듯 '시장의 원리'에 대한 무정부적/비정치에의 합의) 사항만 지킨다면, 그것의 균열과 혁명의 가능성이란 승리하는 한 드러나지 않는다(이것은, 그 승리만큼의 패배가 있는 관계로, 정반대의 진술도 가능하다 - 패배하는 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처럼 말하는 것으로 들린다.

<천국의 피조물>에서 만난 케이트 윈슬렛 (멘데스) 은 굉장히 반가웠고 또 한편으로 당혹스러웠다. 케이트 윈슬렛이 <타이타닉>에서 열연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는 <반지의 제왕>에서 어떻게든 그녀를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곰곰 생각해봤는데 에오윈 역할을 케이트가 했다면 굉장했을 것 같다. 그녀는 자타 공인 반지 최강 전투력을 자랑하는 레골라스도 제법 애먹은 올리펀트를 칼 두자루로 박살내는가 하면, 그런 레골라스와 아라고른과 김리가 떠받들어 모시는 간달프가 벌벌 떠는 나즈굴의 수장 위치킹도 무찔렀다. 케이트가 에오윈을 했다면 왠지 더 잘 어울렸을 것 같다. ... 여튼, 정신병리에 대한 푸코의 진단, 즉 권력의 작동을 지식에 대한 포섭으로 설명하고, 그 지식권력에 발생하는 틈을 광기와 비합리라는 이름으로 재단하여 미시적인 암약을 이끈다는 일반적 설명을 그로테스크하게 시각화하고 있다고 묘사하면 적절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에 나오는 두 사람의 무성애적인(역시, 무성애적인 것은 곧 양성애적이기도 하다) 유착관계를 조직하는 팬터지는 팬터지에 대한 나의 묘한 집착을 추억하게 해서 뜻모르게 가슴이 아팠다.

<씨티 오브 갓>은, 무척 재미있는 영화였다. <콘스탄트 가드너> 보다 이 영화가 더 낫다는 생각을 했다. 남미적인 것..에 대해 여러모로 소외된 궁리(즉 남미의 현실에 대해 객관적이고 적확한 증거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에서 완전히 배제된 혼자만의 상상)해보는데, 아무래도 남미는 말 그대로 濫美인 것 같다. 말하자면 보들레르적인 미학적 주체가 칸트적인 인지적 주체를 완전히 압도하고 있는 동네인 것 같다. <씨티 오브 갓>에서 그 씨티 오브 갓, 은 안되는 게 없고 정치적 합의는 동네 개들 한테나 어울리는 것인 동네이다. 즉 '신'의 도시라는 역설적 표현 그대로, 신은 그저 '보시기에 아름답다'면 그만인 것. 신은 하늘에 계시고 모든 것은 지상에 우리와 함께 있나니, 나의 정치적 성찰성을 다시금 어루만지게 하는 타산지석이 된 것 같다. 주인공은 이래저래 착해 빠져서 계속 착한 놈이긴 한데, 경찰의 비리를 폭로하고 정치적 투쟁을 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에 대해서는 결국 눈감아 버린다. 그저 예술이 남지만, 그러나 그 예술은 어떤 정치적 태도도 견지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그 다음 만든 <콘스탄트 가드너>는? 나는 이런 낭만적 서사에는 위험한 독선, doxa적인 담론이 숨어있다고 느낀다. 물론 나도 그런 소설, 그런 영화를 만들 공산이 크고 그래서 더 마음이 쓰인다. 한편으로는 <트레인스포팅>같은 뻔뻔한 결말의 영화가 그립기도 하다. 그러나저러나.. 테리 길리엄은 브라질의 그러한 현실에서 저 슬픈 판타지 <브라질>을 만들었던 것일까. 보시기에 아름다우나 실은 속임당하고 죽어야 하는 비열한 땅, 그 달콤쌈싸름한 초콜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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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3>는 단순한 오락 영화로 읽기에도 상당히 허술한 구석이 많다. 악당들도 매력이 없어졌고, 피터 파커의 흐느적거리는 모습에서 성장통 따위를 느끼기엔 그는 너무 강하다.

나는 이 영화를 오히려.. 헐리웃-민주당 구도의 유머러스한 정치적 알레고리로 읽고 싶다. 익히 알려진대로, 피터파커는 '미국'이고 스파이더맨은 '미국의 이상형'이다(젠장, 수퍼맨도 그렇지만 옷이 아주 성조기다. 심지어 이 영화의 한 숏은 화면 가득한 성조기를 등지고 등장하는 스파이더맨을 잠깐 포착한다). 메리제인은 보헤미안이지만 그저 평범한 미국적 소시민이다. 스파이더맨의 전작들의 적들, 그러니까 그린고블린과 닥.옥 군수산업, 공화당 지지자들이었고 스파이더맨은 그들을 저지한다(스파이더맨은 다른 수퍼히어로 무비와는 크게 다르게 절대 '총'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단히 가족주의적이고, 환경친화적이다. 여하간 여러모로 민주당적이다).

3편의 적 '샌드맨'과 '베놈'은? 생긴것부터 딱 떠오르는 게 있지 않을까? 간단히 말하면 이라크다. 미국/미국인의 당면 현안 최대 과제는 이라크다. 샌드맨은 이라크의 외연이고 베놈은 이라크에 있는 석유의 알레고리이다. 군수산업의 후계자 해리는 여전히 스파이더맨-피터파커를 못잡아 먹어 안달이다. 샌드맨+베놈이 스파이더맨을 괴롭힌다. 스파이더맨은 해리에게 도움을 청하고 해리는 거기에 개입했다가 된통 당하고 결국 죽는다. 스파이더맨은 베놈은 죽이는데 성공하지만, 샌드맨과는 화해를 한다. 그리고 해리의 장례식. 달리 말하자면, 이라크 문제가 미국을 괴롭힌다. 미국은 공화당적인 접근을 했지만 그건 그닥 옳지 않다. 석유 문제는 잊고, 이라크와 화해를 하자. 그리고 공화당의 장례식. 아주 명료하고 유쾌한 알레고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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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Marie-Atoinette



그냥 간단 감상.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지만, 사실 스포일할 만한 아이템이 없는 영화다.
영화 속 마리 앙뚜아네뜨의 실제 나이는 14살부터 38살까지였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영화의 마리는 27살 키어스틴 던스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점이 이 영화의 전부인 것 같다. 말하자면.. 18세기 중반부터 프랑스 혁명기에 이르는, 조금은 순진무구했고 많이 멍청했던 왕 루이 16세의 아내의 삶을 재현하는 방식은 '네버랜드'적이다. 우리는 이런 캐릭터를 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는데.. 마틴 스코시즈의 <순수의 시대>에서 위노나 라이더가 그랬다. 위노나 라이더는 이 영화에서 아주 어렸을 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를 연기하지만, 20대 중반의 위노나의 모습이 처음부터 끝까지 재현된다. 이건 분장의 실패가 아니다. 의도적인 그 '순수함', 혹은 '무고함', 혹은 '무지'의 재현이다.

여기서 잠깐 네이버는 마리앙뚜아네뜨를 무어라고 설명하는가..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로 빈에서 출생하였다. 1770년 14세 때 정략결혼으로 1774년 왕비가 되었다. 베르사유 궁전의 트리아농관(館)에서 살았으며, 사교·관극(觀劇)·수렵·미술·음악 등의 모임에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내어 작은 요정(妖精)이라고 불렸다. 검소한 국왕 루이 16세와는 대조를 이루어 ‘적자부인(赤字夫人)’이라는 빈축을 사기도 하였으며, 1785년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은 그녀의 명성에 상처를 입혔다.

또, 그녀는 스웨덴의 미남 무관 페르센을 비롯하여 몇 사람의 연인이 있었다.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혁명은 그녀의 일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왕과 그 일족은 1789년 10월 6일 파리의 왕궁으로 연행되어 1792년 8월 10일까지 시민의 감시 아래 불안한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 사이 그녀는 퇴영적(退嬰的 새로운 일에 좀처럼 손대기를 꺼려하여 나서지 아니하고 망설이는, 또는 그런 것.)이며 선량한 루이 16세를 격려하기도 하고, 왕가의 안녕을 위해 미라보 매수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나, 1792년 8월 10일의 시민봉기로 그녀는 탕플탑(塔)에 유폐되고, 국고를 낭비한 죄와 오스트리아와 공모하여 반혁명을 시도하였다는 죄명으로 1793년 10월 16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녀에게는 왕과의 사이에 4명의 자녀가 있었으나, 장녀 마리 테레즈만이 성인이 되어 훗날 당글렘 공비(公妃)가 되었으며, 차남 루이 17세는 1795년 이후 생사 불명이 되었다.


..라고 되어 있으나, 영화적으로 재현된 사실에는 어떤 정치적 디테일은 소위 '거세'되어 있다. 일테면.. 마리의 혁명 당시 가장 긍정적인 이미지의 클리셰란 것은 파리 시민들에게 큰절을 하는 모습 정도일텐데, 영화는 그 장면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만약 그 장면에 연출적 기교를 넣는다면 파리시민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뒤 그 시민의 시점숏에서 마리를 포착하는 역숏을 넣을 것이다..이런 식의 연출기법은 철저히 배제되어있다) 대신 이 영화는 매우 거친 스타일로 '궁정 스타일'을 재현한다. 특히 지루하게 역사적 사실들을 재현하다가 그것을 멈추게 되는 계기(즉 정치적인 의도들에 대한 압박을 '울어냄'으로써 지우게 되는,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마리 혼자 남겨지는 세 개의 분할숏들)부터 영화는 다소 '팬터지'적으로 흐른다. 그리고 영화는 그때부터 마리-던스트-코풀라의 욕망을 따라간다. 말하자면 그때부터 영화는 시대극에서 벗어나 소녀취향의 '예쁜 것들'을 재현하는 한없는 가벼움(혹은 키치)으로 치닫는다. 영화에서 시점숏은 딱 네번나오는데, 모두 마리의 것으로 정원에서의 산책 장면이나 오페라장면, 페르젠백을 바라보는 장면, 아이를 보는 장면 정도이며 이는 마리의 욕망의 대상들이다. 플래쉬백 내지는 팬터지 시퀀스 역시 마리의 것으로 딱 한 번(페르젠 백을 그리는 모습) 나온다. 나머지는 '대부'에서나 볼 법한 평이한 숏들의 연속이다. 영화적으로 보면 무척 '순수한' 형식이다. 왜? 프랜시스 포드의 딸 소피아 코풀라가 제 입맛대로 선택할 수 있는 마리 캐릭터의 재현의 방식이 어떤 것이었을까 하고 생각하다보면 조금 당연한 사실이다.. 어쩌면 '어른'이 된 마리 앙뚜아네뜨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삭제하고 보여주지 않는 것, 베르사이으의 정원에 작별을 고하는 마지막 장면의 센티멘털리즘은 어쩌면 스코시즈의 캐릭터들이 그랬듯.. 진정한 의미에서의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유아적이고 도착적인 세계관의 긍정이 아닐까. 말하자면 나르시시즘이고, 혹은 퇴행이거나..

뭐 어쨌든 예쁜 게 많은 영화다. 성공적이지 못한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리고 아무리 영화가 방방 뜨는 분위기라고는 해도 자막을 그딴식으로 만들었다간 다음부터 번역일 하기 힘들텐데 용기는 가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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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영화보기와 책읽기 2007. 11. 6. 01:52
밀양
Secret Sunshine




요약하여, 이 영화는 인간의 가족과 언어, 그리고 욕망에 관한 대단한 수작, 나아가 걸작이다. 장면 하나하나의 밀도가 대단히 높다. 해석을 위한 책 한 권을 적어도 될 정도로 튼튼하다. 장면장면이 놀랍다.

공부하는 기분으로 또 인간 삶이 어떤 것인가 하는 느낌으로 '장인'의 터치가 무엇인가 하는 느낌으로 한번씩 볼 것을 강권함.


스포일러..가 될 짧은 감상을 간단히 몇 개만 적자면,


* 다른 평자들이 어떻게 얘기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 영화에 그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 신애(전도연)의 죽은 남편이라는 지배기표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영화에 나오는 몇몇 '주저하는 시선'들은 어쩌면 영화적 관습에서가 아니라, 바로 그 부재한 가부장의 관음증적인 시선을 관통하여 재현되어 있다. 이창동의 영화는 가끔 메일쇼비닉의 혐의를 받고는 하는데, 그러나 내 생각에 이창동을 그런 류의 안티페미니즘으로 읽기 보다는, 다소 계몽적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각설하고.. 예컨대 신애가 죽은 아이를 만나는 장면이나, 신애가 약국 장로를 만나 바닥에 누웠을 때 카메라를 똑바로 보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신애가 카메라를 향해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죽은 남편의 응시에 대한 도전이다. (한편 신애가 단지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미디엄숏으로 잡을 때에 그것은 희열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영화의 제목이자 영화의 공간으로 설정되는 '밀양', '숨은 볕', 그것은 보이지 않는 응시의 저편에 있는 어떤 태양이다. '숨은 볕'이란 말은 한편으로 무척 따뜻하게 들리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삶의 보이지 않는 부분(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응시의 저편)에 무언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지만, 그것에 도달하는 순간은 죽음, 신비주의, 종교 같은 것들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환상을 가로질러 그것을 본다. 표준말을 하는 신애가 자신을 위한 기도회를 훼방놓고 종찬(송강호)를 만나서 사투리를 지껄인 뒤 그의 공격성에 놀라 도망가며 무어라 무어라 욕을 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밥상에서 숟가락으로 머리를 때리고.. 색골같은 새끼.. 하는데, 그런 캐릭터는 영화 내에서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죽은 남편에 대한 양가적 욕망의 웅얼거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신애는 언제나 '포즈'를 취하며 산다. 유괴의 원인이 된 것은 신애가 돈이 많은 듯한 '포즈'를 취한 것 때문이다. 응시는 늘 포즈를 만들어낸다. 사진가의 모델이 포즈를 취하는 것처럼. 그러나 사진가가 죽고 나서도 모델은 포즈를 취한다. 남편이 죽고 남편의 고향에 돌아온 아내와 아들처럼.

* 신애가 아들을 죽인 범인(이름이 기억이 안ㄴ남-_-)을 '용서'하겠다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겠다고 마음먹고 찾아갔을 때 이미 그는 자신의 하나님을 찾고 용서받았노라고 말한다. 아마도 영화의 모티베이션이 된 장면은 바로 여기일 것이고, 아마 원작 소설 역시 이 부분에 주안점을 두고 쓰여졌을 가능성이 높다.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교회를 다녀본 사람은 알겠지만...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나를 통해 이루어져야 의미가 있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그 하고많은 사역과 은사 가운데 내가 가장 흥미있어 하는 건 '방언기도'이다.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 바로 '언어'이다(요한복음에서 신은 로고스라고 했다, 로고스는 곧 말씀이다). 가끔 부흥회나 기도회 같은 것을 가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말로 마구 떠들며 눈물흘린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마음이 편해졌다는 둥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입었다는 둥 하는 이야기를 한다. 무척 도착적이고, 나아가 대단히 착란적인 치유 방식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면화하고(다시 말해 부재했던 가부장의 남근을 자신의 몸에 새기고), 자신의 남근을 거세했던 자를 그 세계에 편입시킴으로써, 자신의 양가적 욕망(남근이 되고 싶은 욕망 혹은 남근을 살해하고 싶어하는 욕망,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죽은 남편의 불성실함(동생이 증언해주는)을 인정하고 그를 기각하고 싶은 욕망)의 배회를 끝내고 싶어했지만 그러나 이미 그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그에게도 있음, 즉 남근이 자신의 의지를 먼저 관철시키고 있음에 반동적이고 수동적일 수 밖에 없는 여성은 '실어증'적으로 변하고 종교에 대해 반목한다. 죽은 아들의 녹음된 목소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아들을 죽인 자가 가르쳐준 말이다. '아버지의 말'의 무서움, 그 강박성을 영화는 집요하게 표현하고 있다.  

* 다시 말해 종교는 크리스테바식으로 말하면 사랑의 과정이고, 신애도 교회다니는 것을 '연애하는 것 같아요' 라고 말한다.  영화에서 신애는 종종 아프다. 과호흡을 겪기도 하고 (특히!) 생리통을 겪기도 한다. 구토 장면도 몇 번 있고 손목을 긋는다. 그러나 신애는 다급히 거리로 나와 '살려주세요' 라고 말한다. 인간 유기체를 이끌어가는 것은 언제나 항상성의 본능이지만, 상실의 아픔으로 인한 정신적 외상, 그 아픈-존재는 항상 사랑을 갈구한다. 사랑의 언어, 전이와 역전이의 과정..이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치료'이다. 그러나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 '밀양'적인 어떤 '응시'의 대상(달리 표현한다면, 성화나 소위 '찬양'의 너머에 있는 실재한다고 믿어지는 어떤 신)의 내투사와 자기 안의 조응(resonance)에서 그 언어를 구획하며, 대단히 도착적이고 퇴행적이다. (히스테리 환자가 종교를 통해 안식을 얻는 과정은 따라서 대개 퇴행적이고 여성적이다, 어째서 종교집단의 지도자들은 대개 남성이며 그 신도들은 여성이 많은지 생각해 보라, 부재하거나 만족스럽지 못한 가부장을 대신하여 상징계적인 남근적 언어에 대한 도착성을 강화하는 수단으로서의 종교...프로이트의 '토템과 터부'를 생각해 보라) 이에 관해 재밌는 장면이 여럿 있는데, 신애가 과호흡으로 가슴이 답답했을 때 기도회에 참석해 막힌 울음을 터뜨렸을 때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아마도 몇몇 '음표들'과 간헐적인 리듬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신애는 그것을 언어로 풀어낸다(기도하거나 성경구절을 읊거나). 그러나 그 종교가 실패했을 때, 신애는 가던 길에 야외 집회를 하고 있는 곳의 PA에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를 튼다. 그리고는 예배당에서 소리내서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혹은 배신감을 느끼는 듯한 표정으로 손을 의자에 마구 내려치며 리듬을 만든다. 신애의 마음을 털어놓게 했던 것은 리듬이나 분절, 촉수와 같은 환영, 자궁과같은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짝을 이루는 장면은 종찬이 카센타에서 혼자 가라오케를 틀어놓고 노래를 부를 때의 음악으로 가득찬 공간이다. 그것은 바다속으로 들어간 듯한 환상을 연상시킨다. 종찬이 줄곧 어머니와 통화하며 어머니에게 친근하게 대하고 있지 못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편 신애가 끝내 종찬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듯하면서도,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거울을 든 종찬 앞에 다소곳이 않는 것은 종찬이 어머니와 분리된 사람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죽은 남편이 도착적인 사람('색골')인데 반해, 신애가 밀양 사투리를 써가며 섹스하고 싶지 않냐고 유혹해도 '정신차리세요'(절대 그는 '하나님이 보고 있어요'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이나 검열 때문이 아니라, 아니라 신애의 입장을 헤아린다)라고 말했던 것을 높이 샀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신애가 거울속에서 본 것은 아마 죽은 남편이었을 것이고, 그리고 머리카락을 잘라내는데, 그 머리카락을 따라 시선은 그 마당의 숨어 있던 볕에 가서 멈춘다. 남편은 말하자면 메두사였고, 종찬이 들고 있는 거울은 이지스 방패이며, 신애의 가위는 페르세우스의 칼이기 때문에 그 시선으로부터 신애는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그 거울, 그 응시의 바로 저편에는 죽은 남편의 유령 대신 종찬이 서 있을 것이다. 이창동 영화의 계몽적 윤리성 운운은 아마 이 '숨은 볕'으로 자신의 시선을 늘어뜨리고 겸양을 떠는 것으로 변명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게 내 의견이다.

근데 딴얘긴데.. 신촌역지나다닐 때마다 본 포스터(우산들고 있는 송강호가 코가 빨개질 때까지 주저앉아 울고있는 전도연의 뒤에 서서 어쩔줄 모르는 표정을 보여주며 '이런 사랑도 있습니다' 써 있는)에 나온 그런 장면은 당최 안나오던데.. 영화 홍보사들은 대체 영화를 보고 홍보물을 만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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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디악
Zodiac



이 <조디악>을 포함한 데이빗 핀쳐의 전 작품들은 국내 개봉시 번역제목을 달지 않는다. 굳이 센슈얼한 한국어 제목(일테면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따위의)을 달지 않는 것은 감독의 '이름값'이 주는 신뢰감 덕분이다. 그냥 웃자고 하는 소리지만, 핀쳐는 헐리우드 주류 상업 영화 감독들과 비교한다면 샤말란(<식스센스><언브레이커블><싸인><레이디인더워터>...)과 마이클 베이(<아마겟돈><더 록><콘 에어><트랜스포머><아일랜드>...<나쁜녀석들>시리즈는 제외-_-)의 중간쯤에 있고, 마이클 만(<히트><콜래트럴><마이애미 바이스>..)과는 비교되며 거스 반 산트(<아이다호><굿윌헌팅><엘리펀트><라스트데이즈>..)와는 대조적이'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서설이 길었고 앞으로도 좀 길텐데-_- 비교적 '금지된' 축에 속하는 필모그래피들인 <에일리언 3>과 <게임>에서부터, <세븐>, <파이트 클럽>, <패닉 룸> 등의 일련의 작품들에 붙여지는 수식어들은 대개 '스타일리쉬' 쪽이고, 혹자는 반문하겠지만 그 '스타일'에 비해 작품의 어떤 영화적이거나 혹은 문학적인 '깊이', 나아가 '완성도'에는 어느 정도 물음표가 달려 왔던 것도 사실이다. <세븐>의 음산한 분위기, '이 사회는 무언가 잘못되어있다'라는 메시지를 살리는 것은 간지나는 편집과 미장센, 그리고 상당 부분은 나인인치네일스 트렌트 레즈너가 담당한 음악에 빚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일견 폄하해서 말하자면 '핀쳐의 영화들은 (그의 촬영감독인) 다리우스 콘쥐의 영화'라고도 말할 수도 있었다. 마치 대니 보일의 <비치>가 콘쥐의 촬영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영화인것처럼 말이다. <패닉 룸>이 전작에 비해 평가를 덜 받는 건 콘쥐가 중간에 콘래드 홀로 교체되었다는 사실 때문으로 생각했다. 물론 <세븐>, 그리고 <파이트 클럽>과 같은 영화는 (콘쥐가 촬영했지만, 마르크 카로의 미술과 장 피에르 주네의 연출이 더욱 빛나는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의 경우에서처럼) 핀쳐의 '연출력'이 승리한 사례이기도 했다. 그러나 핀쳐에게 '진실'을 요구하는 것은 조금 무리한 요구였던 것 같고, 나는 그는 그래서 그를 그의 영화적 선배들인 브라이언 드 팔머, 올리버 스톤, 조나단 드미 같은 감독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는 것은 고사하고 동년배인 퀜틴 타란티노나 스티븐 소더버그, 리처드 링클레이터보다 아랫줄로 보고 있었던 것도 사실임을 고백한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말한다면 <조디악>을 보고 곰곰 생각해보건대 그 생각은 이제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 타란티노의 <재키 브라운>, 소더버그의 <트래픽>, 링클레이터의 <웨이킹 라이프> 같은 영화들을 봤을 때의 느낌이랄까.

긴 서설과 짧은 본론. <조디악>의 작업 당시 프로젝트이름은 <크로니클스>였다. 이는 극중 등장하는 주인공들(제이크 질렌할과 로버트 다우니가 연기한 그레이스미스와 에이브리)이 일하고 있는 신문사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이 영화의 형식('연대기적 구성')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 영화는 집요하게 지금의 시퀀스가 언제 어디서 벌어졌는지를 다큐멘터리처럼 표시한다. 따라서 이 영화의 추보라는 것은 하나의 시퀀스에 제시된 하나의 시공간적 배경의 디테일들이다. 따라서 스릴러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교차편집이나 플래쉬백 따위는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 영화는 장르적으로 스릴러가 아니기도 하다. 장르적 스릴러란 곧 정해진 결말을 향해 지연된 퍼즐들이 짜맞추어지는 순간 도파민의 분출과 더불어 아드레날린이 솟는 그런 장르적 쾌감을 목표로 하는 영화들을 얘기할텐데, <조디악>은 그런게 없다. 오히려 <조디악>에 비한다면 <콘스탄트 가드너>가 더 스릴러스럽다. <조디악>의 서스펜스를 구성하는 것은 온통 맥거핀들이다. 하지만 히치콕이 즐겨 사용한 맥거핀이 말 그대로 맥거핀인 반면, <조디악>에서는 그 맥거핀이야 말로 영화의 본질인 것 처럼 보인다. 인생이란 원래 항상 감질나는 것이다. 실제 살인사건들의 범인이 잡히는 과정은 영화에서처럼 서스펜스도 없고 스릴러스럽지도 않으며, <나쁜 녀석들>이나 <히트>, <세븐>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예컨대 <인정사정 볼것없다>라든지 <살인의 추억>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조디악 킬러'의 살인수법이나, 경찰과의 두뇌싸움 운운은 보고 있으면 정말이지 '찌질'할 정도로 유치하다. 그렇지만 범인이 잡히지는 않는다. 실제로도 잡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실 그런건 다 찌질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목격하고 인식하고 증언하고, 영화화되고 그 영화를 보고 하는 일은 항상 다 맥거핀이고, 그것만이 사실은 영화가 담지할 수 있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결국 영화적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그레이스미스가 신문삽화를 그만두고 발로 뛰는 사건 수사에 뛰어들고 자신이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를 찾아가 노려보고 책을 내고....했던 일을 다시 영화로 만들고, 연대기적으로 재현하고.. 등등의 일에서 값을 할 뿐, 그것을 어찌 윤색하고 짜맞추고, 관객과 게임하고 하는 일을 버리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핀처는 방법론적으로는 히치콕을 따르고 있지만, 주제상으로는 고다르 등에 닿는다. 맥거핀의 향연이야 말로 영화적 진실인 것이다. 여기에 이 영화의 진정한 미덕이 있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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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
billy elliot

영화는 매우 차분한 ‘영국적 어조’를 답습하고 있다. 마이크 리 혹은 샘 멘더스 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국 출신의 감독들이 연극적인 차분함과 비정상적인 캐릭터의 등장은 그대로이고, 브라스드 오프나 풀 몬티의 경쾌한 유머도 고스란히 살아 있다. t-rex의 70년대 음악들―cosmic dancer와 children in revolution 들은 70년대 글램과 펑크가 태동하기 전의 에너지를 간직한 록큰롤 사운드로, 매우 훌륭하다.

영화의 배경은 10여년 남짓 전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가 집권할 당시이다. 극중의 지명이 생소해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 스코틀랜드 쪽이라고 생각되는 곳이며, 폐광촌이다. 지독한 영국식 영어, 잘 들리지 않는 어휘들은 아마 스코티시가 아닐까 하고 어림짐작해보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마거릿 대처는 삼성의 기업 이미지 캠페인에서 등장한 바대로, 공권력의 향유자나 경제권자 등 소위 사회지도층(혹은 기득권층)에게 ‘철의 여인’ 혹은 ‘영국병을 몰아낸 위대한 수상’으로 추앙받는다. 국가경쟁력을 저해하는 잘못된 사회보장제도를 바로잡았으며 과감한 구조조정으로 사회의 산업 효율성을 제고한 장본인이다.

하지만 사회의 밑바닥, 여러분이 잘 알 영화 ‘타이타닉’의 3등석 손님 내지는 맨 아래 석탄을 삽으로 밀어넣든 현대판 노잡이 노예들과 같은 신세인 노동자나 그에 준하는 서민들에게 있어서 그는 ‘함께 섹스를 해도 오르가즘은커녕 구역질만 날(트레인스포팅에서 인용)’ 여인이며, 마녀의 현신이다.

클래쉬, 섹스 피스톨즈 등 계급적 사회적 모순에 대한 통렬한 저항과 패배주의로 무장한 펑크마인드의 밴드에서 시작하여, 최근의 매닉 스트리트 프리쳐즈나 스미스, 오아시스, 버브, 그리고 춤바왐바 등에 이르러 일관되게 얘기되고 있는 소위 계급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은, 여전히 답답한 희망으로, 또 광우병과 구제역이 상징해 버리는 진정한 의미의 영국병(british disease)의 의미를, 이 영화는 재정의한다. 산업 효율성, 국가 경쟁력의 저하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의 사회적 죽음으로 인한 ‘틈’을 막는 행위가 그 자신의 질서를 파괴한다는 식의 논리이다.

광부들이여, 단결하라(miners, strike now). 끊임없는 시위는 경제적인 능력을 빼앗긴 이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인 죽음은 사회적 죽음을 의미한다. 돈을 뺴앗긴 현대인은 왜소하며 그 왜소함은 기존 사회와의 틈을 만든다. 그 틈을 매우기 위하여―아들의 교육을 위하여, 혹은 슬프디 슬픈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하여 아내의 패물을 전당포에 맡기거나 땔감으로 쓰기 위해 피아노를 망치로 내려쳐야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영국병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껏 영국에 대해서 갖고 있던 이미지는 무엇일까. 축구와 홍차, 신사의 예절과 전통을 중시하는 나라. 셰익스피어와 죠지 오웰, 그리고 톨킨에 이르는 지독한, 그리고 고상한 브리티쉬 잉글리쉬. 캐나다와 호주를 위시한 영연방의 맹주국. 여왕과 왕세자, 다이애나 ex-프린세스브라이드의 리얼 드라마가 펼쳐지는 곳. 엠아이식스와 007 제임스 본드, 그리고 근위병의 나라. 북아일랜드와의 끊임없는, 그리고 끝없는 내전.

트레인스포팅을 단순한 트렌디 뮤지컬 버디 무비로 이해하거나, 브라스드 오프 풀 몬티 등을 단순한 드라마 혹은 코메디로 이해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특히 영화를 향유할만큼 생활에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고교생이라면, 칼 맑스가 뭔지도 모르고 노동운동이 무엇인지 모를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발리 구두와 구찌의 선글래스, 루이 뷔똥의 색을 맨 채 ‘영국이라면 버버리와 닥스의 코트가 좋아’ 라고 생각하는 국소적 의미의 ‘한국병 환자’ 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저 문장과 저 단어에는 따옴표가 필요했다)

하지만 우리네 현실도 많이 다르지 않다. 가깝게는 롯데 호텔과 이랜드 노조의 파업,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 농성하고 있는 대우차 노조의 사람들은 공권력의 희생양이 되어가고 있으며 성희롱을 당하고 있다.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에서는 조선족 혹은 동남아 출신의 가난한 이들이 몰매를 맞고 있거나 심지어 토막살해되고 있다. 우리 산업의 효율성 제고를 위한 빌어먹을 가장 국지적이고 가장 현실적인 방법들이다.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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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란
Failan

이 영화가 상영되던 같은 기간의 한국 영화는 대단한 선전 중이었다. 유오성 장동건을 앞세운 곽경택 감독의 “친구”는 전전년도와 전년도의 최고 흥행작들인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의 흥행기록을 경신할 기세였고(몇 달이 지난 지금 결국 경신을 했으며, 800만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박신양이 오랜만에 출연한 영화 ‘인디언 서머’도 배급사 시네마 서비스의 위력으로 일찌감치 손익 분기점을 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영화, ‘파이란’은, 사실 대단한 흥행 성적을 거둘 줄 알았다. 주류 평단(메이저 일간지)의 집중적인 지원 사격, 네티즌들의 칭찬 일색의 입소문은 개봉 전부터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감에 불을 질렀고, (정우성 - 장지이 만큼은 아니겠지만) 최민식 - 장백지의 인터내셔널 캐스팅도 눈에 띄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영화는 흥행에 있어 그리 좋은 실적을 거두지 못했고, 곧 간판을 내렸다. 이 영화를 대단히 만족스럽게 보았던 나로서는 개인적으로 굉장한 불만이었다. 영화관에서 되도록 울지 않는 나는 이강재(최민식 분)의 꺽꺽거리는 울음소리에 나를 잊고 울 수밖에 없었고, 파이란(장백지 분)의 유골이 강재의 방, 강재의 식은 몸 옆에 흩어지던 마지막 장면이 주던 충격적인 안타까움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나는 영화 감상문을 쓸 수도 없었다. 글로 적기에는 영화가 주는 감흥이 너무 강렬했다. 그러나 어쨌든 흥행에 실패했다.

얼마 지나고 나서 나는 더 우스운 일을 접했다. 어느 제품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한 유제품 회사의 커피 광고로, 영화의 제목이나 대사를 이용해 오던 시리즈 물이었다. (여담이지만 그 시리즈 물 중 ‘만화방’ 편은 통신 유머 게시판에서 꽤 오랜 기간 회자되던 작품이었다, 저작권료는 냈나 몰라) 거기서 여자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해도 되겠습니까?’ 맙소사! 나는 그 대사를 듣는 순간 실소와 더불어 냉소가 떠올랐다.

문제의 대사는 파이란이 죽어 가는 병석에서 ‘법적’ 남편인 강재에게 보내는 편지에 적힌 한 문장이었다. 전문을 기억할 수 없지만 그 부분은 이렇다. ‘강재 씨, 그 중에서 당신이 가장 친절합니다. ……강재 씨, 나는 죽습니다. 사랑해도 되겠습니까? 강재 씨를 사랑해도 되겠습니까……?’

파이란은 중국 하층민 출신이었고, 일자리를 찾아 한국에 왔으며 친지는 외국으로 가 홀홀 단신 의탁할 곳이 없던 여자였다. 그녀는 ‘희망 직업 소개소’에 들려 일자리를 수소문했고, 거기서 위장 결혼 상대로 이강재를 만났다. 아니, 만나지는 않았다, 다만 사진을 보았다. 사진 속의 그는 어색하고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직업 소개소에 연관된 한 폭력 조직에 의해 해안 어느 마을에 팔려 갔고, 새로 도착한 자신의 보금자리의 첫날 밤 녹물이 섞인 수돗물을 대야에 받으며 섧게 울었다. 그녀의 삶은 철저히 기구했다.

그런데 그녀는 말했다.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곳 사람들은 모두 친절합니다, 나에게 잘해 줍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당신이 가장 친절합니다’ 라고 말했다. 나는 처음엔, 그 부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누가 친절하다는 것일까? 자신을 거기까지 데려다 준 말숙한 깡패? 사투리가 구수한 세탁소 아주머니? 유일하게 언어 소통이 되었던 그 마을의 직업 소개소 소장? 병석에 누웠을 때 그에게 친절한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강재는 깡패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우유부단했다. 수금하러 간 구멍 가게에서는 옛 친분 때문에 모질게 굴지도 못하고, 후배와 싸움을 벌이다 얻어 맞아 ‘친구이자 오야붕’인 보스에게 ‘좇나게’ 얻어 맞는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 보스가 일으킨 살인 사건을 대신 뒤집어 쓰려 하고 있었다. 단지 고향집에 통통 고깃배 하나를 보내기 위해서 십 년을 ‘빵’에 들어갈 결정을 내리고 마는 인간이었다. 술에 취해 기분좋게 비틀거리며 ‘내가 들어간다 이 새끼야’ 하고 큰소리치던 그는 ‘돈은 줄거지?’ 라고 물으며 한없이 약해진다. 약해진 몸의 비틀거림은 넘어짐으로 이어졌다. 그는 늘 자기가 ‘호구’냐고 되묻고, ‘호구’라고 자답했다.

그들은 부부였다. 잠자리는커녕,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부부. 파이란은 그런 강재를 위해 칫솔을 두 개 사 두었고, 강재는 오줌을 누던 싱크대 앞에서 칫솔질을 하다 아내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영영 그녀가 산 칫솔은 써 보지도 못한 채. 그녀의 장례를 위해 차에 몸을 싣고, 사진을 통해 그녀의 얼굴을 보고, 편지를 읽고 하는 동안 그는 죽은 아내를 사랑하게 되었고, 경찰서에서 사망 확인을 하는 순간 ‘뭐가 이렇게 간단해요?’ 라고 흥분하며 자신의 참담함을 확인했다. 당신이 가장 친절합니다, 라는 파이란의 말을 곱씹으며, ‘좇나 친절해서 친구 대신 감방 가는 병신같은 머저리’ 라고 자조했다. 파이란은 그런 그를 죽기 전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나고 싶었고, 그래서 찾아간 인천에서 그녀는 경찰에 연행되는 남편의 모습을 보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죽어가며 물었다, ‘사랑해도 되겠습니까?’.

예쁘고, ‘사랑스러운 것’을 사랑하는 일은 너무나 쉽다. 나에게 이익이 되고, 함께 있으면 우월해지는 느낌을 얻는 것들을 사랑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시중 다른 캔커피보다 비싼 커피를 마시며 ‘사랑해도 되겠습니까?’ 라고 묻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그 커피는 다른 커피보다 부드럽고 맛있으며, 들고 있으면 패션 소품 같은 느낌까지 주니까. 그러나 파이란의 사랑은 다르다. 솔직한 말이지만, 그녀에게 진정 ‘친절한 사람’은 없었다. 국제 관계 힘의 논리 따위를 안 가지고 와도, 그녀는 분명 우리 사회의 가장 음지에서 가장 핍박받는 여자였다. 그녀를 죽음으로 몬 병은 직업 소개소 소장 발가락 무좀만도 못하게 여겨질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것을 사랑했다. 모두가 친절하다고 했다. 강재는 단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할 인생이었으나 그녀를 만나 처음으로 ‘당신이 가장 친절하다’ 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송장이 되어 있었다. 자신을 사랑해주던 여자가 아니라 해도, 어찌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까? 하물며 그녀의 남편이라면?

그녀의 죽음처럼 부숴지는 파도를 바라보며 강재는 꺽꺽거리며 울었다. 결코 소리내서 울지 않았다. 자신은 울 자격이 없다는 자격지심을 느꼈으리라. 그러한,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나눠 주었던, 줄 사랑이 많았으되 사랑이 방법이 허락되지 않았던 여자의 죽음을, 자신은 슬퍼할 자격이 없었으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는, 친구 대신 감방에 가느니 떳떳하고 솔직하게, 아내를 사별한 남편으로서 사랑을 실천하며 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유골도, 그도 결국 그 지저분한 방을 벗어나지 못한 채 끝이 났다. 그런데, 시중 가격의 두 배인 커피 음료를 선전하며, 뭐, 사랑해도 되겠냐고?

엘리트 영화 평론가 동국대 모 교수는 이 영화를 두고 ‘백치미가 필요했던 남성 환타지 영화’ 라고 평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페미니즘 논쟁에 굉장한 의아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영화를 두고 남성 팬터지라고 평한 것에 기가 차고 말았다. 그녀는 특권층이고, 단 한 번도 강재나 파이란의 삶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도 절실히 몸으로 이해할 수는 없으되, 그러나 이 영화를 남성 팬터지라고 말할 만큼 철저하게 허위 의식으로 무장하지는 않았다. 나는 다만, 파이란의 사랑에 내 사랑이 부딪쳐 깨져나가는 모습에 슬펐고, 그래서 어떤 삶을 살아야할지 고민을 했고, 가끔 울먹거림을 삼키기도 했다.

같은 깡패 영화인데, 이렇듯 잘 만들어진, 또 좋은 얘기를 하는 영화는 금새 간판을 내리고, 분명한 살인자에 우정 같지도 않은 우정을 내세우며 제목을 ‘친구’ 랍시고 다는 영화에는 팔백만이 몰리는 사회 풍조는 정말 우습지도 않다. 정부는 북한에 대해 감싸 안기를 하기 전에 국내 노동자들의 처우 환경이나 제대로 해 놓아야 할텐데 하는 말도 이제는 지겹다. 정말 제대로 되 가는 일은 하나도 없다.

ps. 한 가지 제대로 되가는 일이 있는 것 같다;‘번지 점프를 하다’의 재개봉에 이어 이 영화도 곧 재개봉한다고 한다. 모쪼록 많은 관객이 이 영화를 보고, 최소한 나만큼 느껴 왔으면 좋겠다. 부자들이 갑자기 자선 사업을 한다거나 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착취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8월 22일자로 추가)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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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부탁해
Take Care of My Cat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의 부탁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나는 너무 편히 살아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몰입이 어려웠던 것도 분명하며, 해서 다른 얘기를 먼저 할 수밖에 없겠다. 그러나 영화 외적인 이야기부터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슬프다. 게다가 ‘친구’, ‘신라의 달밤’은 전초전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거기에 일종의 심각성을 더한다. 텍스트를 벗어나 이런 유의 험담을 늘어놓는 것은 감상문을 쓰는 입장에서는 올바른 선택 사항이 아닌 줄 알지만, 이 영화는 텍스트를 해체하는 이야기가 필요한 것 같기에 서두를 이렇게 꾸민다. 그런데 더 이상 할 말이 없음은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더 잘 알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를 본 것은 재개봉 때다. 그리고 굉장히 운이 좋았는데, 이 영화의 주연의 한 사람인 이요원 씨가 영화관에 인사차 들렀다. (개인적으로 그녀를 좋아했는데, 실제로 보니 키가 크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녀 역시 ‘조폭 마누라’와 노골적으로 언급하며 ‘이 영화 별로 안 어려워요, 생각 없이 보셔도 재미있을 거예요’ 라고 말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생각을 아니 하려 해도 아니 할 수가 없다.

영화에는 다섯 명의 스무 살 ‘여자애’들이 등장한다. 스무 살, 소비의 사회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막연한 환상 비슷한 무언가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박명천과 임은경 덕분에?), 막상 스무 살을 불과 2주 앞둔 나에게는 그 나이가 그리 고맙지만은 않다. 십대 시절의 연장이자 연속적인 한 지점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혹 다른 의미를 가져다 붙인다면 국민국가의 시민으로서 사회적인 몇 가지 의무와 몇 가지 권리를 부여받게 되는 시기라는 것 정도이다.

앞서 ‘여자애’란 말에 따옴표가 사용된 이유를 해명하자. 일단 그녀들이 어른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이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어떤 사회적 관념을 거친 의미에서 그녀들은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다. 물론 직장인 생활을 하고 있는 혜주(이요원 분)가 있지만, 그녀들은 대학에 가지 않았으며(따라서 졸업하지 못하며) 사회적으로 자기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일종의 통과 의례를 거치지 못했기 때문에 어른이 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특히 어른이 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아이는 태희(배두나 분)다. 장애자인 시인 소년을 위해 타이프라이터를 두드리는 그녀의 순수성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은 분명 여성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감독은 정재은 씨로, 국립 예술 종합학교 영상원 출신 여자 감독이다. (아마 그녀는 임순례, 이정향 등과 함께 일군의 돋보이는 여성 감독의 하나로 기억될 것이 분명하다) 그녀가 느껴 왔을 생의 감정 편린들, 이를테면 기쁨과 슬픔, 설렘, 외로움, 시기나 질투, 성취감, 열등감, 동경과 소망 등이 등장 인물들에게 분배되어 열거되어 있다. (태희는 조금 예외다)

여기까지 말한다면, 이 영화는 흔한 ‘성장 영화’의 흔한 배경들과 합치한다. 더구나 혜주의 부모는 이혼했고(게다가 언니는 설명 없이 어디론가 떠난다), 지영(옥지영 분)은 부모 없이 판자 집에서 살며(그나마 무너지고 만다), 쌍둥이 비류와 온조(인천을 염두에 두고 지은 이름인 듯;이은실 이은주 분-그들의 말대로 누가 언니인지는 잘 모르겠음)는 화교 조부모를 두었으며 그 부모의 행방은 알 수 없고, 태희는 사춘기적 면모를 보이며 독립심이 강하다. 이러한 설정은 이 영화를 ‘눈물’, ‘바이 준’, 혹은 ‘트레인스포팅’이나 ‘디스 보이즈 라이프’ 같은 일군의 ‘청춘 성장 영화’ 유에 비견되게 한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리얼리즘을 말하는 ‘눈물’이나 ‘나쁜 영화’에 비한다면 이 영화는 하이퍼-리얼리즘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하나로 모아지는 드라마적인 내러티브가 없다. 다시 말해 줄거리를 요약할 수 없고, 그래서 인물에 집중하게 된다. 이 지점이 ‘리얼리즘의 심화(深化)’의 제 일단계다. 인물을 검토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교복을 입었던 ‘우리’에서 사복을 입는 ‘나’로, 일종의 개인화 과정을 거친 인물들은 극적이지 않다. 코믹한 성격의 쌍둥이 자매조차 현실적이다. 부모의 이혼 앞에 꿋꿋한 혜주는 그 중에서 가장 현실적이다. 갚지도 못할 돈을 빌려 소리까지 컬러인 핸드폰을 사고 마는 지영의 텍스타일도 현실적이다. 물론 캐릭터의 역할들이 ‘분배된’ 느낌이 들지만, 어쨌든 여기에서 심화의 제 이단계가 발견된다.

문제는 태희다. 사실 태희의 캐릭터는 이상의 세 명이 비하면 이상적이기까지 하다. 태희의 가정은 현실적이지만 태희 스스로는 비현실적이다. 조부모를 잃고 방황하는 지영을 처음부터 끝까지 도와주는 것은 다름 아닌 태희이다. 자유를 갈망하며, 가족 사진에서 자신을 도려내고 옷가지와 몇 권의 책을 들고 지영과 함께 어디론가 떠나는 영화의 결말은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그 비현실성이 오히려 현실적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코울필드가 동생을 지켜주기 위해 가출을 포기하는 의외의 결말이 소설을 명작으로 만들 듯, 모든 현실적 욕망의 어긋난 편린들을 치유하는 캐릭터의 비현실성은 그래서 아름답고, 오히려 ‘태희’가 내 마음속, 혹은 내 주위에 있을 것 같은 희망을 준다.

그래서 이 영화에게 나의 스무 살을 부탁할까 생각해 보기도 하는 것이다. 텍스타일을 공부하며 ‘균형된’ 삶을 바랐던 지영도, ‘저부가가치 인간’임에 쓸쓸해 하는 혜주도, 하루하루 삶을 치열하게 살았던 비류와 온조도. 그 고양이도.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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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권하는 사회

와이키키 브라더스
Waikiki Brothers


“우리 중에 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놈 너밖에 없잖아. 그렇게 하고 싶어하던 음악 하고 사니까 행복하냐구… 진짜루 궁금해서 그래… 행복하니?”

‘빽 없는’ 공무원이 감사에서 시범 케이스로 걸려 해직되었다. 그는 고교 시절 함께 했던 스쿨밴드의 보컬이자, 현재는 각종 향락업소에 출장 반주를 나가는 친구를 불쑥 찾아가 술잔을 기울인다. 그는 친구에게 행복하냐고 묻는다. 군소 지방자치단체의 건축과 하급 공무원이었던 그는, 제가 하고 싶었던 것을 하는 친구에게 행복하냐고 묻는다. 설의법이란 대개 그 반대의 대답에 대한 강조의 수사지만, 그 물음은 오히려 정말 궁금해서 묻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농담처럼 죽어 버린다.

이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부분은 여기다. 지극히 사실적인 영화가 갑작스레 우연적으로 느껴진 부분이며, 차가운 직언만 일삼던 영화의 어조가 거짓말처럼 들리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부분은 영화의 진실성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감독의 질문이 관객에게 내면화되는 과정과 연관을 가진다. 사실 영화에서 이러한 어법은 상투적이다. 이창동 감독은 ‘박하사탕’에서 ‘삶은 아름답다’ 라고 자답하고, 질문하는(순서에 유의) 과정을 통해 삶에 관한 질문(그 대답이 아니라)을 관객의 가슴에 내면화한 바 있다.

성우(이얼 분)는 무어라고 답했을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혹 대답했더라도, 영화는 그의 대답을 보여주지 않았다. 살펴본다면, 그의 밴드 생활은 치열하며, 치열한 이상으로 처절하다. 단적으로, 그는 발가벗겨진다―가라오케에서 벌어지는 일화는 영화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주요 장면이다. “귀하신 사장님들이 벗는데, 밴드 주제에 안 벗어?” 즐기기 위해 뱃가죽을 드러내는 이에게 원치 않은 발가벗김을 당하는 것은 일종의 강간에 다름 아니다.

성우와 같은 소시민이 불가항력에 대처하는 방법은 무얼까?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소주를 마신다. 취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우직한 드러머(여담이지만 이 영화에는 밴드의 포지션에 대한 선입견이 인물에 반영되어 있다) 강수는 대마초에 손을 대지만, 어쨌든 기본이 되는 것은 소주다. 성공하는 사람은 도피를 목적으로 술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따라서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술을 마심이 소시민 그들의 허물은 결코 아니다. 까닭은, 그것이 불가항력이며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 어려움이다.

도어즈(맞는지 모르겠음)를 들으며, 자신의 가늘고 긴 생애를 한탄하는 알코올 중독자인 선생을 보며 성우는 아마도 자신의 삶을 가늠해 보았을 것이다. 그것을 참기 힘들어 고향을 떠난다. 도피라는 점에서, 술을 마시는 행위와 범주는 다르지만 목적은 같다. 그리고 첫사랑 인희를 만난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나는 바다 앞에서 ‘사랑밖에 난 몰라’를 부른다. 오늘은 갑갑하지만, 내일은 당신 때문에 행복하기를 기대하면서. 믿을 것은 사람뿐이니까.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데 술만큼 좋은 게 없다던가… 이래저래 술 권하는 사회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 연주를 하는 성우는 웃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희망을 말한다. 희망이 보이니까, 살아갈 거야, 라고 말한다. 여기까지 말한다면, 영화의 임팩트는 다분히 답답하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영화의 힘은, 거짓말 같은 서사가 간결하고 사실적인 가운데 조용한 힘을 발휘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이런 것을 두고 진실하다고 하는 것 같다.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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