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짜>에서 '발견한' 것은, 누구나 그렇겠지만 김혜수가 분한 정마담이라는 캐릭터다. 허영만의 원작에서 여자들은 언제나 스테레오타입이고, 영화에 나오는 화란과 미란 역시 그러하다. 원작의 정마담 역시 남성 캐릭터의 아니마 혹은 거울상에 불과한 평면적인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최동수가 그린 정마담은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라 할 만하고 김혜수의 연기는 그에 값한다. 사실 그간 김혜수가 과대평가되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감독의 전작에서 염정아가 그리했듯 이 영화에서 김혜수는 올곧이 빛난다. 돈가 삶의 먹고 먹히는 관계에서 망설이고 또 실수하고, 그리워하고 감복하는 그런 욕망의 변죽을 정마담이란 캐릭터는 잘 담아낸다. 아쉬운 건 시대감각의 결여다. 허영만의 원작들이 각각 당대의 시대상을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었던 데 반해 이 영화의 시대감각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이며, 그래서 오히려 조승우가 분한 김곤이 계속 스타일리쉬하게 살아간다는 결말은 뜨악하다못해 찝찝하다. 자본주의와 그것의 룰이 갖는 속성은 원래 그렇고 그런 것이고, 최소한의 합의(말하자면, 도박판의 원리가 그러하듯 '시장의 원리'에 대한 무정부적/비정치에의 합의) 사항만 지킨다면, 그것의 균열과 혁명의 가능성이란 승리하는 한 드러나지 않는다(이것은, 그 승리만큼의 패배가 있는 관계로, 정반대의 진술도 가능하다 - 패배하는 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처럼 말하는 것으로 들린다.

<천국의 피조물>에서 만난 케이트 윈슬렛 (멘데스) 은 굉장히 반가웠고 또 한편으로 당혹스러웠다. 케이트 윈슬렛이 <타이타닉>에서 열연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는 <반지의 제왕>에서 어떻게든 그녀를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곰곰 생각해봤는데 에오윈 역할을 케이트가 했다면 굉장했을 것 같다. 그녀는 자타 공인 반지 최강 전투력을 자랑하는 레골라스도 제법 애먹은 올리펀트를 칼 두자루로 박살내는가 하면, 그런 레골라스와 아라고른과 김리가 떠받들어 모시는 간달프가 벌벌 떠는 나즈굴의 수장 위치킹도 무찔렀다. 케이트가 에오윈을 했다면 왠지 더 잘 어울렸을 것 같다. ... 여튼, 정신병리에 대한 푸코의 진단, 즉 권력의 작동을 지식에 대한 포섭으로 설명하고, 그 지식권력에 발생하는 틈을 광기와 비합리라는 이름으로 재단하여 미시적인 암약을 이끈다는 일반적 설명을 그로테스크하게 시각화하고 있다고 묘사하면 적절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에 나오는 두 사람의 무성애적인(역시, 무성애적인 것은 곧 양성애적이기도 하다) 유착관계를 조직하는 팬터지는 팬터지에 대한 나의 묘한 집착을 추억하게 해서 뜻모르게 가슴이 아팠다.

<씨티 오브 갓>은, 무척 재미있는 영화였다. <콘스탄트 가드너> 보다 이 영화가 더 낫다는 생각을 했다. 남미적인 것..에 대해 여러모로 소외된 궁리(즉 남미의 현실에 대해 객관적이고 적확한 증거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에서 완전히 배제된 혼자만의 상상)해보는데, 아무래도 남미는 말 그대로 濫美인 것 같다. 말하자면 보들레르적인 미학적 주체가 칸트적인 인지적 주체를 완전히 압도하고 있는 동네인 것 같다. <씨티 오브 갓>에서 그 씨티 오브 갓, 은 안되는 게 없고 정치적 합의는 동네 개들 한테나 어울리는 것인 동네이다. 즉 '신'의 도시라는 역설적 표현 그대로, 신은 그저 '보시기에 아름답다'면 그만인 것. 신은 하늘에 계시고 모든 것은 지상에 우리와 함께 있나니, 나의 정치적 성찰성을 다시금 어루만지게 하는 타산지석이 된 것 같다. 주인공은 이래저래 착해 빠져서 계속 착한 놈이긴 한데, 경찰의 비리를 폭로하고 정치적 투쟁을 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에 대해서는 결국 눈감아 버린다. 그저 예술이 남지만, 그러나 그 예술은 어떤 정치적 태도도 견지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그 다음 만든 <콘스탄트 가드너>는? 나는 이런 낭만적 서사에는 위험한 독선, doxa적인 담론이 숨어있다고 느낀다. 물론 나도 그런 소설, 그런 영화를 만들 공산이 크고 그래서 더 마음이 쓰인다. 한편으로는 <트레인스포팅>같은 뻔뻔한 결말의 영화가 그립기도 하다. 그러나저러나.. 테리 길리엄은 브라질의 그러한 현실에서 저 슬픈 판타지 <브라질>을 만들었던 것일까. 보시기에 아름다우나 실은 속임당하고 죽어야 하는 비열한 땅, 그 달콤쌈싸름한 초콜렛.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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