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시절'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7.12.19 <우환>
  2. 2007.12.19 <싸늘한 편지>

<우환>

라이터 리 2007. 12. 19. 02:39

우환

#1. 쿠반 룸바 콜롬비아 Cuban Rhumba Colombia

세 잔째의 드래프트 비어를 비우자, 술이 식도 부근에서 멈추고 더 이상 흐르지 않는 듯했다. 우환은 터져 나올 듯한 기침을 참으며, 영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를 기억했다.

삼등석 증후군 때문인지, 땅을 밟은 우환은 숨이 막혀 왔다. 몸에는 열이 있었고, 점차 기침이 잦게 되자 우환은 처음으로 만난 현지인에게 지리를 물었다. 웨어 이즈 더 니어리스트 드럭 스토어? 기침을 섞은 서툰 발음을 더듬었지만, 진녹색 반소매 셔츠를 입고 있던 반백의 영국인은 오, 케미스숍, 하며 우환을 근처의 약국으로 이끌어 주었다. 주머니에는 그때 얻은 천식 때문에 늘 지니고 다니는 알약이 들어 있었다. 술과 함께 먹지 마시오. 겉에는 주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디제이는 힙합 비트의 드럼앤베이스를 몇 곡 틀더니 이내 음악을 바꾸었다. 살사? 아니다. 룸바 쪽이다. 룸바 리듬을 실은 훵키한 넘버였다. 우환은 네 잔째의 맥주를 받아들고 술렁이기 시작한 무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LSD를 하고 사탕을 빨며 레이브를 하던 백인들 몇몇이 흐느적거리며 한쪽으로 비켜나자, 이번엔 구석에서 하쉬시를 하던 검은 얼굴들이 탄탄한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가운데로 나서며 뽐내듯 어깨를 돌리거나 번갈아 킥을 하며 몸을 관능적으로 꼬곤 했다. 쿠바의 정통 룸바와는 다르게, 흑인 특유의 노린내나면서도 힘찬 동작. 왼발 오른발에 번갈아 가며 킥, 킥. 유연하면서도 절도 있게. 우환은 손을 휘젓기 시작하는 흑인들의 춤동작을 넋을 잃고 바라보듯 했다.

당신, 나와 만난 적이 있죠?

우환은 소리가 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음에 묻힐 법도 한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주변의 소음 사이를 비집고 우환의 귀 바로 옆에서 속삭여 왔다. 유학생 특유의 과장된 발음. 우환은 그녀를 아래위로 훑었다. 베이지색 셔츠와 검은색 바지 구석에는 루이 뷔똥의 로고가 수놓아져 있었고, 얼굴 화장에도 신경을 쓴 모습이었다.

그녀는 우환의 잔에 자신의 것을 부딪쳐 왔다. 중국인이에요? 우환은 고개를 저으며, 노, 코리안, 이라고 답했다. 아, 그래요, 나는 일본인이에요, 당신이 저 흑인을 보는 눈빛이 넋 나가 보여요, 우리 언젠가 만난 적이 있죠? 우환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여자는 바에서 술을 더 주문했다. 바카디로 주세요. 그녀는 쿠바의 럼을 담아 홀짝거렸다. 우환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녀는 헤프게 웃어 보였다. 저 흑인, 정말 근사하게 추죠. 쿠반 룸바인데, 쿠바 사람보다 쿠바 춤을 훨씬 잘 추잖아요. 그녀의 영어는 서툴었지만 문법은 틀린 데가 없었다.

그녀는 은근슬쩍 우환의 팔에 자신의 팔을 부딪쳐 왔다. 리듬에 맞춰 몸을 앞뒤로 흔들기도 했다.

#2. 좋든 싫든 내 조국이다 My country, right or wrong

그녀의 이름은 아사코였다. 일본어로서는 예쁜 이름이었지만, 한국어 식으로 읽으면 조자(朝子)가 된다는 생각이 들어 우환은 피식 웃었다. 기억을 되짚으니, 런던 근처의 유학생 상대 대학 예비 과정의 학원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우환이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처음 만났던 레이브 클럽에서 멀지 않은 아디다스의 이코노 숍에서였다. 우환이 한국에서 가져 온 운동화가 망가진 탓에 신기 편한 런닝 슈즈를 찾고 있을 때, 아사코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내가 골라 드릴까요, 하고 말을 걸어 왔다.

아, 그럴래요? 우환은 반갑다는 인사도 잊은 채 그녀의 조언을 부탁했다. 그녀는 두 종류의 신발을 골랐다. 우환은 그녀가 고른 신발이 일본풍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개중 평범해 보이는 쪽을 골랐다. 수퍼스타. 그것이 그 신발의 이름이었다. 우환이 사이즈를 고르고 계산을 하는 동안, 그녀는 그를 기다렸다. 마치 만날 것을 약속했던 사람 같았다.

둘은 함께 가게를 나왔다. 그녀는 우환의 팔을 잡으며, 내가 신발을 골라 주었으니 당신이 내 우산을 골라주어야 할 차례예요, 하고 말했다. 우환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산 하나를 고르는 것쯤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아사코는 시내를 거닐며 우산을 제외한 물건을 샀다. 커피하우스에 들려 우환에게 엔젤 푸드 케이크도 사 주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랄프 로렌의 숍에 들어서서야 우환에게 우산을 골라달라는 부탁을 했다. 우환은 멈칫 하다가, 체크무늬의 접는 우산을 골라주었다.

숍을 나선 아사코와 우환은 길을 재촉했다. 아사코는 우환의 팔을 안다시피 잡고서, 어디 가서 얘기 좀 해요, 하고 우환을 당겼다. 우환은 낯선, 혹은 이제 막 얼굴을 익힌 일본 여인과 흐린 하늘 밑을 걸었다. 간혹 기침이 나와 영국에서 산 손수건을 입으로 가져갔고, 그때마다 아사코는 측은한 얼굴로 우환의 눈을 보았다. 그녀는 하염없이 길을 걷다가 간혹 빗방울이 떨어질 듯한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고, 말린 허브 같은 은은한 몸 내음을 우환에게 맡게도 했다.

이윽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그녀의 아파트였다. 크게 넓지 않았으나, 우환이 한국인 교포의 집에서 하숙을 하는 것에 비하면 훨씬 나은 처지였다. 우환을 더욱 놀라게 했던 것은, 아파트가 다다미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여덟 장 정도의 크기, 잉글랜드의 한 복판에서 일본식의 방을 만난다……. 우환은 아파트의 문을 지나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지구 정 반대편으로 들어서는 듯했다.

아사코는 걸치고 있던 상의를 벗어 벽에 걸어 두었다.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은 첫날 보았던 루이 뷔똥의 최신 라인이 아니라, 어딘가 고풍스러워 보이는 핸드메이드의 튜닉이었다. 벌써 삼십 년도 지난 시절, 육십 년대 유럽 디자이너들이 반항적으로 괴려한 위치에 트임을 넣었던 종류의 것. 패션 사이클에서는 십 년이라는 시간조차 자욱한 먼지처럼 아득했다. 처음 영국에 왔을 때 아버지가 런던 킹스로드에서 사 주신 거예요. 향수를 자극한다나요. 우환이 그녀의 상의를 바라보자 그녀는 묻지 않은 말을 흩었다. 아버지는, 실은 양아버지인데요, 도쿄대학에서 십 년이 걸려 경제학 박사를 따낸 고집스런 사람이죠. 나는 아버지의 강요로 여기서 대학 가려고 대학 예비 코스 중이고요.

그녀는 우환을 이끌어 바닥에 앉히더니, 구석 냉장고에서 홍차를 꺼내왔다. 이런 데에서 혼자 살면 집값이 꽤 비쌀 것 같은데요. 우환이 묻자 아사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부담하기에는 집값이 비싸죠. 아버지가 다 내 주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아사코는 홍차를 마시며 오디오를 켜고 음악을 틀었다. 트라비스의 곡이었다. 그녀는 CD플레이어를 조작해 자기가 좋아한다는 노래를 들려주었다. 우환은 그 곡을 알았다. 한국에서 즐겨 들었던 노래였다. 첼로와 어쿠스틱 기타가 잘 어울리는, 왜 언제나 내 위로 비가 내릴까 하고 불평을 늘어놓는 브리티쉬, 아니 잉글리쉬 팝송.

나는 브리스틀 경영학과를 준비 중이에요. 아사코는 바닥에 무릎을 맞대고 앉아 있었다. 우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원서를 낸 학교였지만 합격할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사코는 이따금씩 홍차를 마시며 트라비스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작년 LSE 톱은 한국인이었다죠? ―네, 정확히 말하면 석사 과정이었죠. 우환은 아사코의 말에 대꾸를 하고 있는 자신이 적잖이 우스웠다. 매년 세계 유수 대학의 경제 경영학 과정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마는 기이한 민족의 우환. 하지만 경제망국의 나락에서 수년째 헤어나지 못하는, 5년 동안 100명이 넘는 장관을 갈아 치우는 조국의 우환. 그는 자신의 정정이 자존심이 아니라 자의식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아사코는 두 개의 빈 잔을 챙겨 주방으로 가져다 놓고 돌아오며 오디오를 껐다. 그녀는 돌아와 우환에게 조금 더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다시 만나고 싶었어요. 아사코는 싱긋 웃어 보였지만, 우환의 마음은 씁쓸했다. 그녀는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런던에 온지 이제 한 달도 안 되었지만, 그 클럽에 자주 갔어요, 잉글리쉬 친구를 얻으려고 했는데, 동양인을 만난 것은 당신이 처음이었죠.

그녀는 일어나 그에게 방안의 물건들을 소개했다. 새 친구에게 오랜 친구를 소개하듯, 다정하고 예의바른 태도였다. 책장과 화분을 제외하면 모두 일본에서 쓰던 물건이라고 했다. 그녀는 브리스틀 외에도 런던대학이나 옥스포드 같은 대학교에 입학 서류를 제출한 상태였으며, 불합격은 생각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방 한쪽에는 일본어와 영어로 된 책들이 빼곡 들어찬 책장이 기대고 있었고, 맞은편에는 오디오와 텔레비전, VCR 따위가 놓여 있었다. 옆으로는 수십 장의 CD가 유리문 뒤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바른편 저쪽으로 보이는 그녀의 주방엔 다기(茶器)를 비롯한 그릇들이 정연하게 놓였다.

책장 속의 제목들을 훑던 우환은 잠시 시선을 한 곳에 두었다. 그것은 무라카미 류의 소설 영역본이었다. 코인 로커 베이비즈. 한국에 있는 동안, 많지 않았지만 그의 소설을 읽은 적이 있었다. 우환은 방에 들어와 처음으로 아사코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무라카미 류를 좋아하나요?, 한국어로 읽은 적이 있는데 재미있었어요.

아사코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그 책을 꺼내 들었다. 나도 좋아해요. 무라카미상의 글은, 최근에는 읽지 않지만 좋아하는 게 많았죠. 그 중에서 코인 로커 베이비즈가 좋았는데, 런던의 서점에 가 보니 이 책이 있었어요. 아사코는 단지 반가운 마음에 그 책을 샀을 뿐, 아직 읽지 않은 듯했다. 그녀는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무라카미의 소설을 좋아한 덕분에 룸바 콜롬비아 같은 것도 알게 되었고, 바카디도 마시고요, 그를 만난 적도 있어요. ―그를 만난 적이 있어요? ―네, 옐로우라는 콘서트장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었죠, 그가 운영하는 무라카미즈라는 쿠바 음악 전문 레이블에서 콘서트를 하는 거였는데, 그 사람 굉장히 자기만족적이었어요.

그녀는 만지작거리던 책을 책장에 꼽고, CD 진열장을 뒤지더니 음악을 바꿨다. 하바나에서 열린 라틴 음악 축제 실황 공연이에요, 살사나 룸바 같은 것들요. 뜨거운 함성 소리가 섞여 있는, 전형적인 라이브 앨범이었지만 녹음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아사코는 바닥에 앉아 좌우로 몸을 흔들었다.

쿠바를 좋아하나요? ―네, 쿠바 음악이나, 쿠반 룸바 같은 것은 좋아요, 하지만 쿠바 자체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자유가 없는 나라니까요, 카스트로도 싫고요. 우환은 공연 실황 어딘가 갈급한 자유가 떠다니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연주는 춤을 추기에는 어려운 리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마음으로만 춤추는 음악을 했다.

아사코는 맘보를 추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하듯 읊조렸다. 하지만 쿠바보다 더 싫은 게 니혼이에요. 아사코는 우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재퍼니즈들은 룸바가 미국 춤인 줄 알아서 싫어요, 나는 소니의 캠코더는 좋아하지만, 가와사키 모터바이크나 미쯔비시의 가전 제품이나 혼다니 도요타 따위는 정말 싫어요, 간선제의 총리도 싫고, 도쿄대 출신 대장성 관료도 싫고, 야스쿠니도 싫어요, 고래 고기도 싫고, 니혼 특유의 모노노케도 싫고, 지금 천황이 백이십사대라고 우기는 것도 싫고, 롯본기도 싫고, 소녀취향의 호색한들도 싫고, 원조 교제도 싫어요, 외국의 고급 브랜드를 지독하게도 좋아하면서 제대로 표기도 못하는 일본어는 그 중에서 가장 싫어요.

그래도 당신의 나라는, 한때 우리를 식민지로 가졌잖아요. 우환은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지만 꾹 참아야 했다. 터져 나오는 기침을 참을 때처럼 목이 간질간질했지만, 스스로 과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벗어버린 30년도 더 된 듯한 튜닉처럼. 일본이 싫어요? 우환은 그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되묻는 것이 다였다.

네. 일본도 싫고, 아버지도 싫었어요. 아사코는 두 번째 문장이 과거형임을 강조하며 말했다. 싫었어요, 하고. 그녀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는 입양되었어요. 아사코의 말은 나직했다. 얘기했어요. ―나는 입양되었어요. ―얘기했어요.

아사코는 우환 쪽으로 다가와 우환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나는 세 살 때까지 고아원에 있었어요, 기억은 전혀 없지만, 내 아버지나 어머니 둘 중 한 쪽은 아마 재일 한인이었던 것 같아요, 정확히 말해준 적은 없지만, 그랬을 것 같아요, 고아원 원장이, 내 이름의 아사(朝)는 칸코쿠의 옛 이름에서 따온 거라고 했으니까요.

그녀는 몸을 밀어 우환에게 입을 맞춰 왔다. 라벤더 오일을 섞은 향수 냄새가 그녀의 몸을 타고 우환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오늘 밤에, 나랑 지낼래요? 우환은 입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아니요, 사양하겠어요. 아사코는 픽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요, 한국은 공자의 나라니까요, 죽음을 찬미하고 성에 탐닉하는 우리와는 다르지요.

아사코는 우환의 팔을 잡고 그의 어깨에 기댔다. 우환은 그녀를 밀쳐내지 않았다. 그녀는 혼잣말처럼, 엉킨 실을 풀어내듯 속삭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오키나와에서 꽤 큰 호텔을 가지고 있어요, 도쿄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따냈지만, 호텔은 물려받은 것이니까 자기 실력으로 해낸 것은 아니었겠지요, 요즘에는 전문 경영인을 불러 앉혔으니 하는 일도 없어요. 아사코는 노래가 끝나길 기다리는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cd 플레이어가 멈추자, 그녀는 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히토츠바시 경제학과를 나왔어요, 아버지의 강권이었죠. 사실 하고 싶었던 것은 동양 역사였어요, 오키나와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무라카미씨가 한국과 중국에 대하여 쓴 글을 읽고 일본사 교과서를 의심했었죠, 미군 부대도 영향을 끼쳤고요.

나는 아버지가 싫었어요. 아사코는 일어나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버지를 그리워했죠, 일본도요, 그래서 당신에게 접근했어요, 일본인이기를 바랬지만, 또 일본인을 만나는 것도 자신이 없었죠. 그래서 중국인이냐고 물었던 거예요. 참, 아버지의 사진도 있었어요. 그녀는 침을 삼키며 우환이 모르는 협주곡 cd를 꺼내 플레이어의 트레이에 걸었다. 처음에 런던에 같이 왔던 아버지가 그럴듯한 원룸형 아파트를 구해주었는데, 내가 다다미방으로 옮겨 온 거예요, 그런데 이사를 하면서 지갑을 잃어버렸어요, 거기에 사진이 들어 있었는데.

정말 그녀가 재일 교포의 딸일까? 두 시간이 지난 뒤, 우환은 아사코의 배웅을 받고 길을 나섰다. 우환은 입술에 남은 홍차향을 혀로 핥았다. 과연 그녀가 나의 동족일까? 계단을 내려오며, 그는 약간이나마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잉글랜드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 아닌가. 식민지를 가졌던 섬나라라고 해서 모두 영국인일 수는 없었고, 영국인이라고 해서 모두 잉글리쉬일 수는 없었으니까.

#3. 왜 언제나 내 위로 비가 내릴까 Why does it always rain on me

어디 다녀와요? 하숙집의 주인인 미세스 명이 물었다. 우환은 아사코라는 일본 여인을 만났노라고 말하려다, 의례적인 인사말임을 생각해내곤 목례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명 씨 부부의 집은 근처에서 찾기 힘든 단정한 단독주택으로, 처음 우환이 이 집에 들렀을 때 하루라도 빨리 입주하고픈 충동을 느낄 정도로 예쁘게 꾸며 놓은 곳이었다. 지은 지 이십 년이 채 되지 않은 빨간 벽돌집. 이렇다 할 정원은 없었지만 화단에는 영국 장미가 피어 있었다.

방으로 들어온 우환은 입고 있었던 반소매 티셔츠를 갈아입었다. 아직도 아사코의 방에 떠돌던 향이 남아 있었다. 옷 정리를 마치고는 천식 약을 먹고, 새로 사온 신발의 끈을 매기 시작했다. 하얀색 끈을 신발 구멍에 넣고 빼며 답답한 마음에 창 밖을 보았지만, 그저 마찬가지로 답답한 하늘이 낮게 깔렸다. 오늘도 이따금 안개비가 내렸는지 창에는 비의 지문이 남아 있었다.

집주인인 닥터 명은 킹스 칼리지에 출강을 하는 한국 출신의 초빙 교수였고, 미세스 명은 한국계 영국인이었다. 그들은 닥터 명이 영국으로 유학을 왔을 때 연애를 통해 결혼을 했다고 한다. 부부의 아들은 메사추세츠로 유학을 해 거기에서 살고 있었고, 우환이 쓰고 있는 방은 그 아들이 쓰던 방이었다. 아들의 이름은 케빈이었던 듯, 방 구석구석에 칼로 새긴 KEVIN♡JULIE 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우환은 손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그리니치 표준시로 오후 10시 20분. 그렇다면 서울은 날짜가 바뀐 아침 7시쯤, 아사코의 오키나와도……. 우환은 전화기를 들고 콜렉트콜 번호를 눌러 서울의 집에 전화를 했다. 신호가 가더니, 이내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는 일곱 시에 출근을 하곤 했고, 어머니는 아마도 아침상을 정리하고 있던 중이었으리라.

그래, 우환이냐, 영국은 괜찮니, 그래도 좋은 집주인을 만나서 다행이다, 전화 좀 자주 하지 그러니……. 어머니는 이것저것을 떠들었지만, 끝내 아버지의 회사가 어렵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머니, 여기서도 다 알 수 있답니다, 인터넷이라는 게 있거든요, 노조 파업과 사업장 폐쇄가 한 달 넘게 이어지면, 그 회사 여차 하면 망합니다.

어머니는 아직도 우환을 어린아이처럼 여겼다. 그럴 법도 했다. 아직 대학 입학도 하지 않았고, 병역도 거치지 않았으니까. 우환에게 있어 대학이란 성년 의례나 다름없었다. 부모님은 어른으로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대학 입학 이후로 보류했다. 아르바이트를 해 돈을 벌게 하지도 않았고, 선거 날에는 과외 선생을 불러 죽어라 공부만 시켰다. 건강 문제로 병역이 면제되었지만, 그 면제된 시간만큼 고통은 더해 왔다. 최소한 제대라도 했다면 그것으로 성년 의례를 대신할 수 있었다. 우환은 어른이 되어 하고 싶은 일, 얻고 싶은 권리가 꼭 하나 있었다.

아버지에 대하여 반항할 수 있는 권리.

전화를 끊은 그는 침대에 앉아 아사코를 떠올렸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히토츠바시를 졸업하고 브리스틀 혹은 런던의 대학교에 유학을 온 아사코라는 여자. 그 아버지가 너무나 싫었지만, 결국 그리워해야만 했던 한국인의 피가 섞였을지도 모르는 일본인. 우환은 그녀가 함께 자자고 했을 때 거부했던 것을 후회했다. 일종의 시기심이었다. 자신이 수험 생활에 중독된 것처럼 재수, 삼수, 사수를 거듭하는 동안 첫 번째 일류 경제 대학을 졸업하고 두 번째 대학에 다니러 혼자 런던으로 온 여자. 그런 주제에 그 싫다는 아버지를 거부하지도 않고 도리어 애인처럼 그리워하는 딸.

처음 우환을 영국으로 보내자고 주장한 것은 어머니였다. 한국에서 우환은 그야 말로 구제 불능의 상태였다. 대한민국의 대입 시험인 수능시험이란 믿을 수 있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시험일 마다 우환은 무슨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어딘가 문제가 생겼다. 감기, 고열, 몸살, 두통, 복통, 장염. 이들 중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이 그를 괴롭혔다. 시험 시간에 머리가 아파 책상 위에 엎드려 있던 적도 두 번이나 있었다. 한 번은 점심 도시락을 잃어버리고 밥을 먹지 못해 탈진해 4교시 시험을 치르지 못하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 영국에서는 평소 실력도 잘 봐 준다니까, 거기 가서 학원 몇 개 다니고 입학시험 잘 치르면 더 잘 갈 수 있을 게야, 고등학교 내신 성적은 나쁘지 않잖니.

어머니 보다 더 답답했던 것은 우환 자신이었다. 아들의 대학 입시 실패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럼 내년에는 더 비싼 과외 선생을 붙여 줘야겠구나, 하는 말뿐이었던 매정한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자면 번듯한 대학에 입학해야 했다. 최소한 아버지가 졸업한 대학 보다는 입학 점수가 더 높은 명문 학교의 학생이 되어야 했다.

그래야 아버지의 회사에 대항해 운동을 해도 구치소에 가지 않고 풀려날 수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동기들 중, 일류대 다니던 녀석과 지방대 다니던 녀석이 똑같이 데모를 했어도 일류대 다니던 놈은 석방되고 지방대 다니던 놈은 구속되었던 것을 우환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숙박업체나 의류업체, 유통업체, 제조업체 할 것 없이 강경 스트라이크는 비일비재했고, 아버지의 회사도 그랬다. 보수 언론에서는 노동자들이 경제 위기를 도외시한 채 단순히 월급을 더 받기 위해 일으킨 소요라고 매도했지만, 물론 그러한 내부 노동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 농성하고 있는 많은 노조원들은 언제나 권력의 희생양이 되어 매를 맞거나 성희롱을 당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무도 모르는 어딘가에서 조선족 혹은 동남아 출신의 가난한 이들은 심지어 토막 살해되고 있었다. 경제 망국의 산업의 효율성 제고를 위한 빌어먹을 가장 국지적이고 가장 현실적인 방법들. 세계 유수 경제대학에서 언제나 수석을 도맡아도, 산업 효율성 제고의 공익은 모두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정작 한국에서는 그런 방법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처음 김포공항의 국제선 청사에서 가족들의 배웅을 받을 때에도 우환은 결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아버지 덕분에 병역까지 면제된 특권층 자제의 도피 유학이라는 딱지도 내심 거슬렸지만 그보다 그를 가로막았던 것은, 영국에서는 아버지와 투쟁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끊고서야 우환은 밖에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런던에서는 수도 없이 보는 비였지만,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난 뒤라 더욱 우울해 보였다. 이곳은 비가 그렇게 많이 내리는데 검은 밤하늘은 왜 한 번도 맑지 않은 것일까? 왜 자꾸 내 위로만 비가 내리는 것 같을까? 우환은 아버지의 회사가 망하고, 입학 허가를 받은 채 등록금이 없어 한국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억울한 생각도 했다.

우환은 침대에 누워 조용히 비가 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가만히 웃었다. 영국은 비오는 소리도 고상하구나.

#4. 영국병 The British Disease

아사코는 댄스 플로어에서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었다. 팔을 쳐들고, 가슴을 내밀고, 허리를 움직이면서 최대한 섹시하게. 아사코는 외로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고향의 많은 것들이 그리울 테니까. 외로운 이에게 성적인 매력은 무기이다. 선택 당할 수 있는 권리이자,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을 수 있는 무기. 우환은 그녀가 남기고 간 바카디를 마시며 그녀를 응시했다.

음악이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이 되자 아사코는 우환이 있는 쪽으로 돌아와 남긴 술을 마셨다. 아까 누가 말을 걸던데, 누구였어요? 우환이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스코티쉬인 것 같아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나는 잉글리쉬가 좋아요, 옥스포드 영어를 발음하니까요, 미국식 영어를 배워서 가끔은 못 알아들을 때도 있지만. 한국인인 우환도 마찬가지였지만, 일본인들은 특히 영어에 콤플렉스가 있어 스코티쉬나 웰쉬, 아이리쉬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사코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영국에 처음 왔을 때, 커피하우스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잇츠 홋, 홋, 하는 말이 무언가 한참을 고민했었어요. 알고 봤더니 잇츠 핫, 으로 배워 왔던 거였어요. 자기 경험담을 신나게 늘어놓던 아사코는 하이네켄 한 병을 더 시켜 주둥이를 물고 단숨에 반병을 비우더니, 음악이 시작되자 병을 우환에게 맡기고 다시 댄스 플로어로 다갔다. 그녀가 좋아하는 라틴음악이었다. 우환은 그런 종류의 음악, 특히 살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춤을 잘 추지 못하는 처지였고, 살사는 특히 더 어려웠다.

아사코와 그녀의 아파트에서 헤어진 후 우환은 한동안 그 레이브 클럽에 가지 않았다. 원래 레이브 같은 것에는 취미가 없었던 그였지만, 아사코를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우환은 시내 대형 서점들에 들려 한국 소설의 영역본을 찾아 다녔다. 두 시간을 뒤지다가 찾지 못해 점원에게 물어볼까 생각했지만 무슨 까닭인지 끝까지 스스로 찾아보았다.

이문열, 조세희, 이청준, 박완서, 김영하……. 세 시간 반만에 우환은 몇몇 소설가의 영역본들을 찾아내고는 마치 금광을 찾은 듯이 웃었다. 하루키의 책은 잘 보이는 곳에 진열되어 있었지만 우환은 짐짓 잊으려 애썼다. 우환은 조세희의 책을 사서 방 안 책꽂이에 꽂아 놓고 나서야 그 레이브 클럽에 아사코를 만나러 갈 수 있었다.

폴로 진의 옷을 입고 춤을 추던 아사코에게 영국인 하나가 접근해 왔다. 아사코는 고개를 돌리고 그 남자에게 흘겨보듯 눈길을 보냈다. 그 남자는 아사코에게 접근해 대뜸 손을 그녀의 허리에 올렸다. 네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아, 하는 표정으로 그는 아사코와 어울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사코의 엉덩이가 그의 몸에 닿는 것을 보며 우환은 남은 하이네켄을 비웠다. 남자는 상기된 얼굴로 아사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에는 사탕이 물려 있었다. 그들이 사탕을 물고 있는 것은 혀를 깨물지 않기 위해서야, LSD나 엑스를 하면 자칫하면 혀를 깨물 수도 있으니까. 우환이 영국에 오기 전 홍대에서 만난 친구가, 사탕을 물고 있던 양키를 가리키며 가르쳐 준 것이 있었다.

음악이 바뀌자, 아사코는 그 영국인과 함께 우환이 있는 쪽으로 돌아왔다. 영국인은 일행이 있는 것에 언짢은 표정이었지만, 아사코가 그냥 친구예요, 하고 설명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었다. 우환이 자신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는 하이네켄 세 병을 주문했다.

아사코는 우환의 귀에 대고 말했다. 이 사람은 이름이 켄이래요, 일본 이름 같아요. 켄이라는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 비밀이 있어요? 그는 유창한 런던 사투리를 구사했다. 우환과 아사코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환은 학원에서,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앞에서 귀엣말 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배웠다.

하이네켄을 마시며 켄은, 자기는 소니의 워크맨이 갖고 싶은데 너무 비싼 것 같다며 아사코에게 싸게 구할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다. 아니요, 영국에서 사는 게 일본에서 사는 것보다 크게 비싸지 않아요, 운송료를 합치면 오히려 영국에서 사는 게 좋아요. 켄은 퍽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어 아사코의 몸을 더듬었다. 그는 숨을 할딱이며,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입에 넣었다. 그는 우환과 아사코에게 사탕을 내밀었지만, 받는 사람은 없었다.

우환은 아사코의 팔을 잡아끌어 귀에 대고 말했다. 아사코, 켄이라는 사람, 드럭을 한 것 같아요, 당신과는 어울리지 않아요, 당신은 자유를 좋아하지만 드럭은 하지 않잖아요. 우환은 말을 마친 뒤 쿨럭 기침을 했다. 주머니 속에 약이 있다. 웨어 이즈 더 니어리스트 드럭 스토어? 영국에서는 약국을 드럭 스토어라고 하지 않았다.

다시 음악은 바뀌었다. 자정이 지나자 댄스 플로어에는 사람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켄은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처럼 비트에 맞춰 몸을 앞뒤로 흔들며 계속해서 할딱거렸다. 점점 약기운이 오르는 모양이었다. 이따금 그는 아사코의 다리 사이로 손을 넣었다. 아사코는 얼굴을 찡그렸다.

우환이 켄의 팔을 당기자 켄은 불쾌한 듯 우환을 쳐다보았다. 뭐가 문제인데? 아니, 아무 것도요. 아무 것도 아닌데 왜 내 몸에 손을 대는데?, 아까는 귓속말도 하더니. 우환은 얼굴에 냉소가 떠올랐다. 미안, 잉글리쉬에게 귓속말은 결례라는 것을 깜빡했군요. 켄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당신네 일본이란 나라는 혼자 있을 때에는 굉장히 소심하지만, 둘 이상만 모이면 언제나 탐욕스러워지지. 켄은 사탕을 입에서 굴리며 비아냥거렸다. 아사코도 표정이 변했지만, 대꾸한 쪽은 우환이었다. 탐욕이라면 영국인들이 더하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일본인이 아닙니다. 우환의 대꾸에 아사코는 걱정스럽게 우환의 팔을 잡았다. 켄은 입에 사탕을 하나 더 집어넣으며 우환의 옷을 잡고 끌어내었다.

밖은 비가 오고 있었다. 우환이 런던에 온 지 한 달 가까이 지났지만, 오늘처럼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는 처음이었다. 켄이 우환을 끌고 건물 밖으로 나오자, 켄의 친구인 듯한 몇몇이 그들을 따라 나왔다. 한 명은 닥터 마틴 부츠를 신고 머리를 삭발했고, 다른 하나는 리바이스 블루진에 오아시스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LSD와 술로 몸이 달은 런던 청년들은 찬 비를 맞더니 몸을 모로 틀었다.

뭐가 문제입니까? 우환이 묻자 켄은 우습다는 듯 주먹을 날려 우환의 얼굴을 가격했다. 우환은 몸이 휘청했지만 넘어지지 않았다. 이내 닥터 마틴 부츠를 신은 쪽이 우환의 양어깨를 잡자, 리바이스 블루진이 우환의 배를 가격했다. 우환은 헉, 하고 허리를 꺾었다.

도운트 두 댓, 도운트 두 댓. 아사코가 우환이 고른 우산을 쓰고 나와 소리를 질렀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 병역을 마치지 않은 게 이런 데서 드러나는 건가, 우환은 런던의 청년들에게 계속 얻어맞으며 자조했다. 이게 바로 글램과 펑크를 태동시킨 나라의 힘이구나, 록큰롤 밴드의 콘서트에 삼십만 명 씩 모여드는 나라의 에너지가 이런 거구나.

한참을 흠씬 두들겨대던 켄과 친구들은 기분이 풀렸는지 곧 클럽으로 돌아갔다. 비는 계속해서 쏟아졌고, 우환은 얼굴에 묻은 피를 빗물에 닦았다. 아사코는 조심스레 다가와 울먹이며 우환을 힘없이 안았다. 조금 있으면 구급차가 올 거예요, 많이 아프죠?, 미안해요.

우환은 계속 빗물에 얼굴을 씻었다. 웃는 듯, 혹은 우는듯했다. 아사코, 내 말을 들어줄 수 있어요? 입술이 부어 있었지만 우환의 발음은 명료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환은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 아사코, 영국병이 뭔 줄 알아요? 아사코, 영국병 말이에요, 그래요, 마가렛 대처, 그녀가 그랬죠. 네, 철의 여인, 영국병을 몰아낸 저 위대한 수상 말이에요, 국가 경쟁력을 저해하는 엉터리 사회 보장 제도를 없애고, 과감한 산업 구조 조정으로 수많은 폐광촌들을 양산해 냄으로써 대영 왕국의 산업 효율성을 제고한 장본인 말이에요.

아사코는 우환을 부축해서 건물 아래로 비를 피하러 갔다. 우환이 잠시 말을 멈추자 아사코가 손수건으로 우환의 얼굴을 문질러 주었다. 우환은 쿨럭 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영국병 말이죠, 영국병이 그런 게 아니더라구요, 아사코, 내 말을 듣고 있는 거죠?, 진짜 영국병은 계급적 사회적 모순이래요, 그래서 통렬한 저항을 해야 하고, 지독한 패배주의로 무장해야 하고, 그래서 닥터 마틴 부츠를 신고 펑크마인드를 가져야 한다고 그래요.

그럼 아까 그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인가요? 아사코가 물었다. 네? ―아까 그 사람들도 그런 부류냐고요. 우환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아까 그치들, 런던 사투리를 유창하게 쓰는 그 친구들은 그냥 흉내내는 녀석들일 뿐이죠.

우환은 한국에 있을 때 영국병이라고 하면 광우병이나 구제역을 생각했다. 그 두 가지 병이 다 마가렛 대처 시절의 산물이었다. 영국에 도착했을 때 가장 처음 겪은 영국병은 천식이었다, 지금까지도 고생하고 있는. 아사코를 만나고 나서 얻은 영국병은 언어 콤플렉스였다. 그녀도 결국 무료 영어 선생을 구하기 위해 헌팅에 나섰다가 LSD를 한 런던 보이들에게 몸을 맡길 뻔한 것이니까.

아사코가 우환을 바라보자, 우환은 이내 씩 웃으며 물었다. 우리가 사실 각자의 나라, 서울이나 오키나와에서 영국에 오기 전에 무엇을 생각했나요? 런던의 지독한 안개? 툭하면 내리는 비? 축구의 종주국? 티 타임? 신사의 예절과 전통을 중시하는 나라? 셰익스피어, 죠지 오웰, 그리고 톨킨에 이르는 그 고상한 브리티쉬 잉글리쉬? 캐나다와 호주를 위시한 영연방의 맹주국으로서의 위엄? 여왕, 왕세자, 그리고 다이애나 왕세자비에다 브리트니 스피어스까지 끼여든 왕실의 리얼 드라마요? 엠아이식스와 제임스 본드, 근위병의 나라? 북아일랜드의 끊임없는, 그리고 끝없는 내전? 리복과 캉골과 닥터 마틴 부츠?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질문 공세에 아사코도 웃고 말았다. 그 웃음 덕에 맺혀 있던 눈물이 흘러버렸다.

멀리 앰뷸런스의 불빛이 보였다. 우환은 아사코의 어깨에 기댔다. 아사코, 류나 하루키의 소설에 나오죠, 전공투 말예요, 한국에서는 노동 운동이 아직도 과격하게 일어나고 있어요, 아사코, 아사코는 칼 마르크스나 그람시가 뭔지도 모르고 노동운동이 무엇인지 모르죠? 루이 뷔똥의 옷을 입고 발리의 구두를 신고 영국이라면 버버리와 닥스의 코트가 좋아 하고 생각하죠? 우리 나라 사람도 다들 그래요. 버버리에서 할인행사라도 하면 사람이 미어터지죠. 아사코, 아사코는 스코티쉬가 싫다고 했지만, 나는 런던 보이보다 차라리 스코티쉬가 좋아요. 그들의 지독한 사투리는 굉장히 알아듣기 힘들지만, 나는 그들이 좋아요. 광부들이여, 단결하라. 끊임없는 시위는 경제적인 능력을 빼앗긴 이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이었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인 죽음은 사회적 죽음이에요. 그, 죽음으로 이르는 병이 진정한 의미의 영국병이라는 거죠.

우환은 말을 멈추었다. 하고픈 말이 있었지만 웅얼거리고 말았다. 나는 아버지가 싫었어요, 아사코, 당신이 당신의 아버지를 싫어하는 만큼. 그런데 여기 와서 생각해 보니, 어쩐지 아버지를 용서해야만 할 것 같아요. 왜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아버지이기 때문인가요. 노동당의 나라에 오면 무언가 달라질 줄 알았는데. 저기 저 거리를 씻고 있는 빗물이, 마르크스의 무덤이 있는 런던의 이 빗물이 언젠가 한국에도 내리겠지, 한국에서도 노동당이 생기겠지 기대했는데.

무서워요. 때리지 마세요. 월급 명세서를 보여 주세요. 우리도 사람이에요. 앰뷸런스에서 우환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무참히 깨뜨린, 아버지의 공장에 일하던 동남아 노동자들의 한국어 교본에 적혀 있던 예문을 떠올랐다. 우환은 영국인 구조대원의 파란 눈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무서워요. 때리지 마세요. 합격 통지서를 보여 주세요. 우리도 사람이에요. 우리도 사람이에요, 잘난 영국 신사님.

#5. 비가 돌다 (지평선을 향해) The Rain Rolls (toward the horizon)

아사코가 병원에 와서 보여 준 것은 우환의 앞으로 배달되어 온 대학으로부터의 통지서였다. 닥터 명의 집에서 찾아 온 모양이었다. 우환, 축하해요, 합격이에요. 우환은 통지서를 받아들며 아사코에게 물었다. 당신은요?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떨어졌어요, 일본으로 돌아갈 생각이에요. 우환은 그녀에게 더를 묻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우환이 잠들기를 기다렸다. 날이 저물고, 사위가 고요해지자 그녀는 가방에서 또 다른 봉투와 열쇠를 꺼내 우환의 머리맡에 두고는, 펜과 메모지를 꺼내 들었다. 이우환에게, 미세스 명에게 들었어요. 집안 사정이 좋지 않다면서요. 이건 내 아파트 열쇠예요. 거기서 지내다가, 기숙사에 들어가요. 어차피 집세가 그때까지 선불되어 있거든요. 필요한 서류는 옷장에 있어요. 옷장에 엔화가 얼마 있을 텐데, 환전해서 필요한 데에 쓰세요.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그녀는 잠들어 있는 우환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그곳을 떠났다.

잠시 후 깨어난 우환은 아사코의 메모를 읽은 뒤, 그녀가 남긴 편지 봉투를 뜯었다. 안에는 비행기 표 두 장과 어머니로부터의 서신이 들어 있었다. 우환은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어머니의 글을 읽었다. 아버지의 회사가 어렵단다, 생활비 마련이 어려우니까 한국으로 돌아오렴. 우환은 황급히 집에 전화하려 했지만, 서울은 지금 새벽 3시임을 기억해냈다.

우환은 끝내 집에 전화하지 않았다. 퇴원 후 우환은 바로 아사코의 아파트로 향했다. 그녀는 이미 일본으로 떠난 듯했다. 옷장에는 그녀가 그 때 입었던 고풍스러운 튜닉과, 피가 묻어 있는 하얀색 티셔츠, 그리고 아디다스의 수퍼스타 운동화가 새 것으로 하나 더 들어 있었다. 한 켠에 있는 수트 케이스를 열자, 한 학기 분의 등록금도 충당하고 남을 엔화가 들어 있었다.

우환은 빈 방에 앉아 잠시 고민했지만,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서울에는 장학금을 받았다고 사정을 설명했고, 어머니는 기뻐했다. 그녀의 다다미방은 처음 사용하기에는 불편했지만, 이내 익숙해질 수 있었다. 아파트는 템즈 강 하류 쪽에 있었고, 창 밖으로 가끔 흰 갈매기도 보였다.

며칠 후 우환은 아파트에서 나와 브리스틀 대학의 기숙사에 입소했다. 한 달 정도가 지난 뒤, 유학생을 위한 예비 과정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 일본으로부터 한국어로 쓴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이우환에게

안녕하세요. 나는 아사꼬입니다. 더운 여름에 몸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십니까?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여기는 장마 기간입니다.

요즘 한국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우환 덕분에 한국에 더욱 흥미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또 한국어도 배우고 싶었습니다. 아직 서툴지만 연습 중입니다. 두 달 후에 한국의 대학으로 입학 신청을 할 것입니다. 역사 전공입니다. 고려대학교가 될 것 같습니다.

우환이 이 편지를 받을 수 있을까요? Bristol 대학교로 보냅니다. 우환은 영국에서 잘 해내고 있습니까? Bristol에 합격했으니 이제 진짜 대학생입니다. 우환은 우환이 바라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우환이 듣는다면 매우 재미있어할 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사꼬가 정원에 서서 비 내리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빗물과 같이 내린 것이 있었습니다. 아사꼬의 발 밑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England에서 잃었던 아버지의 사진이었습니다. 물은 순환한다는 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England로부터 jet stream을 타고 일본까지 실려온 것 같았습니다.

Jet stream에 같이 실려온 것은 아버지의 사진뿐만 아니라 아사꼬가 영국에서 얻었던 일본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사꼬는 비가 내리는 안에서 일본에 대한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환의 한국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언젠가 우환이 한국에 돌아오면 나를 찾으십시오. 아사꼬는 한국의 학교에 다니고 있을 것입니다. 한국에 가게 되면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7月. 朝子.

fin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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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협회 주최 전국 고교생 문예 현상 공모 우수상 -_- 을 받았음
상장 한 장 날아오더라.....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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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늘한 편지>

라이터 리 2007. 12. 19. 02:37

싸늘한 편지
true, dilemma

덜컹거리는 소리는 작위적이다. 역을 출발한 전철은 누군가에 의하 조금씩 빨라지고, 석양에 지는 창틀의 그림자는 점점 현란한 영상을 그린다.

조금씩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한 오후의 전철에 앉아 아픈 다리를 문질러 보지만, 아무래도 나아지진 않는다. 어쩐지 오늘은 전철 안의 사람들, 다들 안색이 좋아. 민주는 안고 있던 숄더백을 끌어당기며 중얼거린다. 하루가 저물어가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낯익은 석양.

전철은 이내 다음 역에 도착했다. 아……, 벌써 한 바퀴를 돌아온 거구나. 민주는 몸을 틀어 정차한 역이 어딘지를 확인하고는,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 쪽을 힐끗 쳐다보며 다시 자리로 뭄을 묻는다.

저쪽 맞은 편에 앉은 앳된 얼굴의 청년이 궁금하다. 플라타너스의 낙엽 빛깔 같은 옷을 입은 그 청년도, 꽤 오래전부터 이 전철에서 내리지 않고 있다. 민주는 조심스레 그를 관찰한다.

이제 갓 스물을 넘었을까. 아니, 어쩌면 아직 고등학생인지도 모른다. 아무렇게나 기른 듯한 머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베이지색 모자를 눌러쓰고, 초콜릿 색의 무늬가 있는 니트 차림. 팔짱을 낀 채 귀에는 이어폰을 꼽고서 무언가를 듣는. 가끔씩 손이나 발도 까딱거렸고 그것으로 그 청년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안다.

어느새 두 정거장을 지나친다. 민주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다. 아, 벌써 5시네……. 민주는 배가 고파져서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문 쪽으로 가 다음 역이 어디인지를 확인한 민주는, 그 청년은 무얼 하고 있는지를 돌아 본다. 청년은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자세로 음악을 들으며, 허공을 향해 무책임해 보이는 시선을 던지고 있다.

민주는 일어나 숄더백을 고쳐 맨다. 이윽고 민주가 앉아 있던 자리의 옆에 섰던 사람이 머뭇거리다 그 자리를 차지한다. 안내방송을 들으며 민주는 시계를 본다. 아직, 1분도 지나지 않았다.

청년은 민주 쪽을 응시하고 있다. 인기척을 느낀 민주도, 청년의 발 쪽에 시선을 주었다가, 천천히 눈을 든다. 민주와 눈이 마주친 청년은, 옆에 뉘어 두었던 가방을 들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민주 쪽으로 다가와서는 그 앞에 섰다. 그리고는, 자그맣지만 또박또박한 말씨로 민주에게 묻는다.

저어, 오늘 특별히 할 일 있는 거 아니죠? 예? 음, 실례지만, 남자 친구 많아요? 아, 그냥. 친구는 좀, 있어요.

주위 사람들이 그들을 흘끔 쳐다보고, 민주는 시선을 의식한 듯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본다. 청년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민주에게로 조금 더 다가가 말한다. 무책임하고, 뻔뻔스럽게.

그럼, 하나쯤 늘린다고 표나지 않겠네요? 눌러쓴 모자의 깃을 쓰다듬으며 청년은 피식 웃는다. 곧 전철이 천천히 멈추고, 얼마 안 있어 문이 열린다. 민주는 당황스럽다.

같이 내려도 되죠? 청년은 어깨에 들었던 가방을 똑바로 고치고는, 민주의 손목을 잡고 문이 닫히기 직전 열차를 나온다. 민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청년을 본다. 뻔뻔스러운 미소. 가만 보니 이 남자는, 청년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리고, 푸르지 않다. 그저, 소년(少年).

그때가 민주와 규승이 처음 만난 때였다. 그들은 그렇게, 통속적인 연극처럼 서로를 알게 되었다.

퀴퀴한 냄세 속에서 민주는, 무릎을 꿇은 채 바닥을 닦고 있었다. 손에 들려진 걸레는 이미 새까맣게 변했고, 청바지의 무릎팍도 흐릿한 얼룩이 생겼다.

변두리 지역의 볼품없는 소극장이었지만, 상영하는 작품은 늘 그럴듯했다. 셰익스피어의 고전이나 브레히트를 올리기도 했고, 요즘 무대에 선 작품은 피터 한트케의 “관객 모독”이었다.

민주는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극장에 상주하는 솜씨없는 극단의 몇몇 단원과 함께, 민주는 무대 뒤쪽의 두 평도 채 되지 않는 구들방에서 생활을 했다. 조그만 상을 펴고, 필요한 천조각들을 넣어두는 간이 옷장을 세워두면 한 쪽 벽이 꽉 찼다. 잘 때가 되면 방의 대각선으로 누워 잠들어야 했다.

민주는 극장의 사무실을 닦고 있었다. 사무실이라고는 했지만, 평수가 조금 넓은 구들방에 불과했다. 며칠 동안 닦지 않았던 탓에, 바닥을 몇 번 훔친 것으로도 걸레는 이미 쌔까맣게 변했다. 민주는 쉬지 않고 일했다. 청소, 식사 당번, 소품을 사 오는 잔심부름. 지쳐 왔지만, 쉬지 않았다.

삐그덕.

문이 열리며, 마른 체구의 규승이 구부정한 자세로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낡아 보이는 면바지에 검은색 라운드 티셔츠 차림으로, 발에는 아무 것도 신지 않은 채. 그리고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민주는 고개를 돌아보고, 규승의 얼굴을 보며 반가운 표정이 되었다. 자신의 감정을 꾸미지 않는, 솔직하고 당당한 모습. 민주는 언제나 진지했다. 규승이네, 웬일이야? 규승은 씩 웃으며 안쪽으로 들어와 방석 더미 위에 앉았다.

도와 줄까?

잠시 동안 잠자코 바라보던 규승은 민주가 힘겨워 보인 모양이었다. 민주는 말없이 아직 먼지가 많은 방구석으로 걸레를 가져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규승은 결단코 일을 도우려는 듯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가, 이내 다시 자리에 앉아 버렸다.

사람은 각자 저마다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아.

규승은 막 걸레질을 끝낸 민주에게, 조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민주는 걸레를 접어 문쪽으로 던져 놓고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규승은 말을 이었다. 사람이 몸이라는 것,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지만. 일분, 일초라도 더 살자고 만들어져 있잖아. 그런데 말야, 나는, 내 머리 속에는 말야. 지금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누나는 어때?

그런 거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난 그냥, 나 사는대로, 기질대로 사는 거니까……. 민주는 일어나 문을 열고 걸레를 밖으로 내 놓았다. 그리고 더러워진 청바지에 손을 문지르고, 규승이 앉아 있던 방석 더미에서 방석을 꺼내 그 위에 사뿐히 앉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과거의 기억은 언제나 흐릿해……. 혼잣말이었을까, 아니면 규승에게 하는 말이었을까. 민주는 한숨처럼 넋두리했다. 민주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규승을 돌아보며 물었다. 너는 어때? 옛날 일이 잘 기억나?

규승은, 자조 띈 얼굴로 어꺠를 으쓱해 보였다. 규승에게도 과거의 기억은 흐릿했다. 미래도 마찬가지였다. 미래는 오히려 더 막연한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오직 확실한 것은 오늘뿐이었지만, 그것마저도 공연한 반항으뿐이었다. 규승에게 시간이란, 사전적 의미만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추상적 관념일 뿐이었다. 규승은 규승은 몸을 벽 쪽으로 더 기댔다.

규승아, 너, 학교 어디 다녔어? 민주는 무엇인가를 생각해낸 듯 물었다. 규승은 잠시 대답을 저어하더니, 입술을 앙다물고 말았다. 고교 시절 열등생이 아니었던 규승은 지금, 대학을 두 번 낙방한 삼수생의 신분이었고, 남에게 학업 얘기를 한다는 것은 껄끄러운 일이었다. 규승은 잠시 망설이다, 민주의 눈을 바라보았다.

따뜻함. 민주의 얼굴은 지쳤으되 그 눈은 따뜻했다. 타인에게, 믿음을 전하는 눈빛. 규승은 생각했다. 나와 대화하고 있는 것은 민주 누나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아닌, ‘민주 누나’다.

규승은 표정을 밝게 고치고,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공부 얘기라면, 굳이 못할 것도 없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학업 성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냥, 보통의 학교를 졸업했지. 원래 대학은 서울에 있는 대학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시험을 망쳐서 점수가 안 따라줬고. 어쩌다 보니 인천에 있는 2년제 대학교도 떨어졌어. 난 그냥 재수를 하기로 했지. 진학 같은 건 애당초,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지금은 삼수생인가.

규승은 숨을 고르듯 말을 끊었다.

응, 그래. 안 됐다.

민주는 두 손을 무릎에 포개고, 규승이 바라보고 있는 허공의 한 지점에 같은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고 애써 밝은 웃음을 만들며 규승에게 말했다. 미안해, 그런 얘기해서.

아니, 괜찮아. 규승은 소리 없이 크게 웃어 보였다. 꼭 다문 입 양쪽에 해맑은 주름이 생겼다.

피터 한트케, 알아?

민식은 민주와 규승에게 물었다. 극장의 실무 담당인 그는 스물여섯 살로, 규승 보다 여섯, 민주 보다 다섯이 많았다. 학생 운동이 한참이던 때에 대학 졸업반이었던 그의 얼굴 왼쪽에는 불에 댄 듯한 보랏빛 상흔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가리기 위해 성형 수술도 해 보았지만 수술비를 감당치 못해 무위에 그쳤고, 민식은 그것을 ‘그 시절의 훈장’이라고 말하며 자위했다.

피터 한트케……. ‘관객 모독’을 쓴 사람. 소설가이고.

민식은, 풍채 좋은 몸과 흉터가 있는 얼굴에 비하면 목소리는 마치 변성기를 채 겪지 않은 중학생처럼 아주 맑고 깨끗한 편이었다. 민식이 민주를 바라보자, 민주는 고개를 좌우로 몇 번 흔들며 가볍게 웃어 버렸다. 민식의 시선이 규승에 닿고, 규승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연극이나 소설은 잘 모르지만, 어쨌든 그 사람은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시나리오를 썼던 것 같아요.

규승이 대답하자, 민식은 짐짓 놀라워하는 것처럼, 어라, 나는 그런 것은 몰랐는데 하고 말을 마쳤다. 민식은 그가 가진 목소리같은 순진함이 남아 있었다. 규승은 그것을 학생 운동의 후유증으로 겪는 정신적인 퇴행으로 여겼다.

규승이는 커서, 영화 감독 할 거래요. 민주는 마치, 자기가 대답한 것처럼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민식은 의외라는 듯 규승을 보며, 들고 있던 맥주 캔을 입으로 가져 갔다.

영화 감독……. 규승은 멋적게 웃어 보이며 민식에게 말을 건넸다. 옛날에 소설을 쓸 때부터 생각한 거에요. 실은 나는 영화에 대해서 아는 건 없어요. 피터 한트케가 시나리오를 쓴 건 기억이 나는데 감독이 누군지는 기억이 안 나요.

민주는 마시지 않던 맥주의 캔을 따며, 규승에게 물었다. 혹시 좋아하는 영화 있어? 민주는 전에도 두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대답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단 둘이 있을 때 물은 것은 한 번뿐이었고, 그저 다른 사람에게 규승의 꿈을 확인시키려는 듯한 의도가 묻어 있는 질문이었다.

규승은 그런 민주가 싫지 않았다. 자신의 꿈을 말하는 것은 어렵고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규승은 민주가 좋았다. 응,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찍은 퍼펙트 월드. 규승도 짧게 잔을 들어 보았다. 대답을 마친 규승은, 민주를 보았다.

의자의 팔걸이에 턱을 괴고 앉은 민주의 얼굴. 한없이 지친 것같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는. 흔들리는 것처럼, 창백하리만치 하얀 얼굴. 딱 그 나이에 맞는 눈매와 입술과 표정을 가지고 있는 여자. 민주는 규승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규승의 눈을 마주 보고는 말했다. 아, 그래? 나는 본 적이 없는 영화인데. 규승이는 영화 많이 보나 봐요, 그렇죠?

민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은 과장되어 있었다. 규승은 그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규승은 말이 없어진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 극장 안을 둘러 보았다. 세 사람은 극장의 객석에 앉아 술을 나눠 마셨다.

참, 규승아. 아까 사무실에서, 네가 얘기했던 거, 그거, 그러니까……. 규승이 민주의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몸과 마음의 불일치……. 왜 살아야 할까, 하는 그것? 민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얘기하고 싶다는 듯, 의자에 앉은 채 규승을 향해 몸을 틀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규승은 민주의 실루엣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이윽고 말을 꺼냈다.

사람은, 무엇인가 목표를 세워서 그 불일치를 해소하는 거야. 규승의 말은 마치 선언처럼 들렸다. 민주는 규승에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규승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계속해 나갔다.

예를 들어서, 이 워크맨은 테이프를 플레이하기 위해 존재하지. 만약 워크맨이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된다면, 그러니까 고장이 나서 고칠 수가 없으면 폐기 처분할 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워크맨 역시 망가지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잖아? 하지만 언젠가는 폐기 처분되어야 하고. 사람도 그래.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지만, 언젠가는 죽어. 사람하고 워크맨하고 다른 점은, 워크맨은 "테이프 플레이"라는 확실한 아이덴티티가 있지만 사람한테는 그게 없거든. 그러니까 사람은 살기 위해서, 자신의 아이덴티티, 자신의 목표를 세우는 거야.

민주는 규승의 얘기가 거기에까지 미치자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이해가 가, 응, 그래. 하지만, 사람의 존재에 이유를 달만큼, 세상은 각박하지 않잖아? 난 네 삶을 이해할 수가 없어. 규승이 무언가 다른 말을 꺼내려 할 때, 민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제멋대로 하게끔 해 달라는 투로, 자신은 이만 가보겠으니 둘이 잘 놀라고 말을 남기고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다.

가끔은, 일부러 이기적인 체 하지만 천성은 그렇지 않은 여자애야. 언제나 남을 배려하는 아이. 민식은 규승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규승도 그 말은 인정하고 있었다. 민주의 배려로 규승 자신도 이 극장에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으니까.

수명이 다 되었는지 어둑해진 형광등 불빛 아래, 민주가 서 있다. 민주의 꿈은 모델이다. 패션 모델, 화려한 옷을 입고 화려한 조명과 받는 사람. 조명과, 음악과, 의상과, 분장이 모델을 위해 존재한다. 민주는 매일 극장 계단을 까치발로 오르내리고, 연극이 끝난 후 무대 위에서 자신만의 쇼를 펼친다. 그리고, 규승은 그것을 바라본다.

민주는 천천히 무대 앞으로 나온다. 어색한 워킹. 그리고, 갑자기 걷는 것을 멈춘다. 하지만 민주에게는, 그 멈춰 있는 모습이 더 자연스럽다. 우울하게도. 민주가 연습을 마치면 객석에 앉아 있던 규승은 일어나 박수를 쳐 준다. 규승이 극장에 온 첫날부터 매일 이어져 온 일과다.

민주와 규승은 방으로 돌아와, 어제 민식과 함께 마실 술을 사올 때 함께 사 왔던 크래커와 아이스크림을 먹기로 했다. 꽉 닫힌 문 안에, 두 사람은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상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규승은 문을 꽉 닫고는, 앉아서 기타를 매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극장에 방치되어 있던 것이었는데, 규승이 온 뒤 주인이 되었다.

규승이 너는, 참 노래를 예쁘게 하는 것 같아. 민주는 크래커에 아이스크림을 얹으며 얘기했다. 민주의 입에서 크래커 부서지는 소리가 나자 규승도 노래를 멈추고 크래커를 한 조각 집었다.

규승아. 너, 소설 썼다는 얘기 좀 해 줄래? 민주의 질문에, 규승은 말 없이 크래커와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대답 대신 민주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누나는 애인 없어?

응, 없어. 네가 더 잘 알잖아. 민주는 크래커 부스러기가 묻은 손을 털고 벽 쪽으로 몸을 밀었다. 조금씩 바닥이 따뜻해져 왔다. 민주는 잠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표정으로, 기타를 매만지는 규승의 손을 바라보다가 되물었다. 규승아, 너는?

나는, 여자친구가 있던 것은 아니고, 잘 해보려다가 차였어. 언제? 얼마 전에. 얼마 안 됐어. 언젠데? 1년하고, 아홉달 정도 전에. 그러자 민주는 정색을 하고 되물었다. 1년 9개월이 어떻게 얼마 안 된 거야?

김연진. 규승은 흐릿한 기억 속에서, 흐릿한 얼굴을 가졌던 한 여고생을 떠올렸다. 누군가 그녀에 관한 얘기를 물을 때면 규승은 말없이 잠자코 있거나, 혹 화를 내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규승과 함께 있는 것은 ‘민주 누나’였다.

얘기해 줄 수 있어?

규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규승이 연진을 처음 만난 것은 학교 복도에서 였다. 고등학교 2학년. 규승은 학급의 부반장이었고, 연진은 학교의 신문반 기자였다. 규승이 교무실에서 담임 교사와 면담을 마치고 나와 복도를 지날 때, 그녀는 손에 학교 신문 원고를 들고 교무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규승은 그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게 되었다.

규승이 처음 연진에게 말을 건낸 것은 학교의 매점에서였다. 연진은 친구와 함께 빵을 사 먹고 있었고, 규승은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 빵 맛있니?

학교 신문에, 자신과는 별 상관없는 투고를 하던 규승은, 연진을 만난 뒤 두달 후 처음으로 연애 편지를 써 보게 되었다. 그 이후는 고교생의 풋사랑이 늘 그렇듯, 편지를 주고 받고, 함께 영화를 보고, 선물을 주고 받기도 했다.

그런 두 사람의 관계는 방학을 계기로 틀어지고 말았다. 학교에 나오지 않는 동안 연진에게는 새 친구가 생겼고, 그 새 친구는 규승과의 관계를 정리하기를 원했다. 규승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규승의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방적인 변심’이었다.

그 무렵 규승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규승의 부모가 규승을 한국에 남겨 둔 채 도미한 것이었다. 한국에 홀로 규승은 당숙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고, 부모의 그런 행동은 규승을 혼란스럽게 했다. 당숙은 규승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민주는 규승에게 다가가 규승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 됐어, 이제 그만 얘기해도 좋아. 하지만 규승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가끔, 표정을 일그러뜨렸지만, 규승은 말을 하고 싶어 했다.

나, 아마 그애한테 나는 아마 그렇게 보였나 봐. 성격도 장점이 없고, 그 반대로 단점 투성이고.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허풍쟁이. 이기적이고, 제 잘난 줄만 알고, 남 생각해주려고 하는 건 하나도 없고, 자기 생각을 지키면 다인 줄 알고, 남 무시하기 잘 하고, 비꼬기 잘 하고.

나를 맡아서 기르게 된 오촌 아저씨가 늘 하던 말이 있어, 넌 왜 이렇게 싸가지가 없느냐, 하고. 그래, 난 왜 이렇게 싸가지가 없는 거지? 항상 자조했던 때가 있어. 그래서인지 나는, 그애가 나를 버렸다는 사실에 대해 조금도 억울하지도, 원망스럽지도 않았어.

그래서, 나는 생각했어.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지도 말자. 그리고 내 상처를 보여주지도 말자. 나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입힌 적이 있는 전과자이고, 피해자이고……. 그래서, 오래 전부터,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나를 닫았어.

규승은 무릎에 놓았던 기타를 끌어 안으며 말했다. 아까 왜 소설을 쓰냐고 물었지? 나는 타인과의 소통 대신에, 나는, 소설을 쓴 거야. 노래를 부른 거고. 아픔을 달래려고.

소설을 쓰지 않고서는, 기타를 치지 않고서는 조금도 숨쉴 수 없었어. 무언가를 내뱉어 놓지 않으면, 한시도 살 수 없을 것만 같았어. 민주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를 하는 규승의 얼굴만큼이나, 민주의 얼굴도 굳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제법 포기했어. 숨쉬는 것 따위……. 나 따위, 버려 버렸어. 지금 그애를 다시 만나서, 아무 탈없이 잘 살고 있는 걸 알게 될 때, 난 어떤 표정이어야 할까?

규승은 언제 쾌활하게 웃었냐는 듯이 싸늘한 표정이 되어서 허공을 주시했다. 그리고 안고 있던 기타의 줄을 퉁기며,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무언가를 흥얼거렸다. 민주는 잠자코 노래를 듣다가, 이윽고 그 노래를 기억해 냈다. 유재하의 노래인가, ‘우울한 편지’ 라고 하는.

다음 날 아침, 민주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규승을 데리고 바깥에 나가, 공중 전화 박스에 밀어 넣었다. 수화기를 들어 규승에게 건넨 민주는, 전화카드를 넣고 손에 들고 있던 번호를 차례차례 눌렀다. 신호음이 울리고, 규승은 의아한 표정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민주는 대답 대신, 손에 들고 있던 메모지를 규승에게 주었다. 그 메모 안에는, 규승에게 있어 너무도 낯익은 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 번호를 본 순간, 규승은 급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뭐야, 어떻게 알았어? 규승의 항의에 민주는 살짝 웃는 듯한 표정으로, 네 다이어리 보고,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수화기를 들고 손을 들었다. 번호를 누르며 민주는 규승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그애에게 전화해서, 네 남은 진심을 말해. 그래야 돼.

규승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저어 보이고는 그대로 공중 전화 부스를 나가려다, 민주가 건네는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잠자코, 귀에 가져다 대었다.

뚜르르, 뚜르르, 딸칵. 여보세요? 수화기 안에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흘렀다. 저어, 거기 김연진이네 집인가요? 네, 그런데요. 저어, 혹시 김연진 있나요? 아뇨, 학교 갔는데요, 실례지만 누구……? 아, 아, 그게, 학교 동아리 친구입니다, 예. 무슨 동아리?, 우리 연진인 아직 동아리 든 게 없을 텐데?

규승은 두근거리고 있던 가슴이 철렁,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수화기를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리고 불안한 표정으로 민주를 돌아보았다. 누나, 이런 장난치지 마. 규승은 약간 흥분이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내뱉고는 민주를 남겨둔 채 밖으로 나갔다. 덜컹, 하고 문이 닫히자, 민주는 부스 안에 남아, 부스의 유리창 밖을 통해 극장으로 돌아가는 규승의 모습을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난 뒤, 규승은 라면을 두 개 끓여 민주의 방으로 들어왔다. 아침의 일은 읹은 듯 밝은 표정이었다. 상 위에 냄비를 올려 놓고, 김이 솟는 라면을 두 개의 그릇에 나누어 담았다.

민주는 규승을 바라보며 고민한 끝에, 다시 물어보았다. 규승아, 전화 다시 해볼까? 민주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오자, 젓가락질에 열심이던 규승의 손이 멈추었다. 야, 맛있겠다, 하던 나지막한 읊조림도 멈췄다. 하지만 규승은, 뒤틀린 분위기가 싫은지 멋적게 웃으며 하던 일을 마저 다 하고, 자신의 그릇에 담긴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민주를 향해 너스레를 떨었다. 먹어 봐, 잘 익었다.

민주도 이내 천천히 그릇을 끌어와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방안에는 라면을 먹는 소리 말고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규승은, 그릇을 비우며 상황이 지나치게 사실적이라고 생각했다. 라면을 먹는 소리 외에 다른 소리는 전연 들리지 않았고, 그래서 마치 영화의 음향 효과같다는 생각을 했다.

규승은 자신이 끓인 라면을 먹고 있는 민주를 바라보다, 누나, 하고 민주를 불러 보았다. 민주는 입으로 가져가려던 라면을 그릇에 내려놓고, 규승을 마주 보았다. 규승은 말을 하기가 어려운지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이윽고 목을 울려 말했다. 전화, 해볼까?

응, 해 봐. 같이 나가자. 민주는 규승보다 먼저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규승은 자신이, 다시금 전화를 해 볼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없는 모습이었다.

뚜르르, 뚜르르, 뚜르르, 딸칵. 여보세요?

공중전화의 수화기 저쪽 편에서는, 들은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기억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규승은 전화를 받은 상대가 연진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지만, 조심스레 물었다. 김연진 씨 댁인가요? 쓸데없는, 정중한 말투.

네, 그런데요. 저어, 바꿔 주실 수 있습니까? 고등학교 때 친구입니다. 제가 김연진인데요, 누구시죠? 저어, 연규승입니다. 규승은 떨고 있었다. 처음 술을 마셨을 때의 기분이었다. 마음을 진정시킬 방법이 없었고, 침착하게 목소리를 내는 일조차 힘들었다. 민주가 그런 규승을 말없이 바라보며 심호흡했다.

아, 규승이. 너 오랜만이다. 웬일이야, 나한테 전화를 하고? 응, 그냥, 잘 지내는지 궁금했어……. 규승의 어투에는, 이미 규승이 없었다. 민주가 규승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었다. 하지만 규승은, 곁에 민주가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구니?, 전화기 속에선 아침에 들었던 연진의 어머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동안, 전화선을 통해 어색한 침묵이 교환되었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 규승아, 너 삐삐 있어? 내가 삐삐 칠 테니까 그때 전화해. 그 전엔 전화하지 마.

전화 속 연진의 목소리는 조용조용했다. 규승은, 으응, 하고 장황한 말투로 호출기 번호를 불러주었고, 연진은 안녕, 하고 짧게 인사하고 전화를 끊었다. 규승은 오랫동안 그 뚜, 뚜, 하는 신호음을 듣고 있었다.

민주는 규승의 왼쪽 어깨에 손을 얹고는 엷은 미소를 비춰주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할 말을 잊게 하는 그러한 종류의 미소였다.

난 누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아. 누나 얘기 들려 줄 거 없어? 규승이 묻자 민주는 머뭇거렸다. 내 얘기? 민주는 바닥을 쓸며 굽혔던 허리를 곧게 펴고는 조그맣게 말했다. 별로 해 줄 말이 없는데…….

규승은 민주한테로 와서는 약간 들뜬 목소리로 떠들었다. 누나, 누나 가족들을 얘기해 줘. 누나 가족들, 누나 닮았다면, 모두 좋은 사람일 거야. 민주는 빗자루를 든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생각하더니, 이내 천천히 대답했다. 우리 가족들…….

가족이란 민주에게 있어서는 영원히 돌아가지 못할, 망각의 강 너머의 공간 같았다. 민주에게 있어 가족은 흐릿한 기억속에만 존재했다. 민주는 여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텐 어린 남동생이 있어. 지금…… 중학교 1학년인가? 아마, 올해 입학했었을 거야. 그 위로, 내 바로 밑 동생이 여자앤데, 걔는 나보다도 공부를 못하는데, 마음씨는 착해서. 상고 다니면서 취업 준비해. 난 지금 이렇게 살고, 그래.

민주는 잠시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규승은 궁금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민주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내 남자 동생. 걔가 그렇게 똑똑해. 한글도 4살인가 5살인가에 다 배웠구, 국민학교 때엔 전교 1등도 여러 번 하더라구. 나랑 내 바로 밑 동생은 엄마를 닮았는가 본데, 걘 남자애라고 아빠를 닮았나 봐.

누나 아빠 엄마는 뭐 하시는데? 민주와 규승은 청소를 하다 말고 객석의 의자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민주는, 가족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행복한 얼굴이 아니라, 가족의 이야기를 남에게 한다는 사실 자체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 같았다.

우리 아빠는 교통 사고로 돌아가셨어.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난 아빠하고 별로 안 친해서, 정작 장례식 때에, 다들 곡을 하고 울고 그랬는데, 나, 하나도 눈물이 안 났어. 다들 그렇게 시끄러울 때, 혼자 내 방으로 와서 내 동생 침대에 앉았어―내 동생하고 나하고는, 방을 같이 쓰는데, 침대는 내 동생 거야―. 그리고 앉아 있으려니까, 코끝이 시큰해지면서, 울었어. 마치 모든 걸 빼앗겼다는 듯 울었어.

그리고 허공에다 대고, 있는 욕 없는 욕 다 했었던 것 같아. 그렇게 막 소릴 지르고 있는데, 방문이 덜컥 열리면서, 엄마가 들어왔어. 엄마를 보고 내가 일어서니까, 엄마는 갑자기 내 뺨을 때렸어. 조용히 하라고. 그렇다고 해서 우리 엄마가, 아량이 없다거나, 못되었다는 건 아니야. 지금 내 남동생 학비를 벌려고, 일주일의 반은 파출부를 나가고, 나머지 반은 노점상을 해. 그렇게 번 돈으로, 내 동생 학원 보낸다.

내가 집 나와서 여기 있는 거, 오히려 울 엄마는 좋아해. 돈 좀 덜 나간다고. 그렇다고 내가, 엄마를 미워한다거나 그러진 않아. 오히려, 여기 도망쳐 와 있는 내가 아쉬울 뿐야.

도망치긴 누가 도망쳤다 그래……. 약간은 미안한 기색이 도는 목소리로 규승은 말했다. 그리고 일어서서는 쓸다 만 바닥을 어색하게 큰 몸짓으로 쓸어내다가, 아직 앉아 있는 민주에게 조금 크다 싶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누나, 그런 얘기하게 시켜서. 그러자 민주는 힘은 없지만 맑게 웃으며 괜찮아, 라고 대답했다. 쓸쓸한 민주의 얼굴에는 아직, 처음의 행복한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다음날, 규승의 호출기가 울렸다. 규승이 모르는 전화 번호였다. 민주는 말없이 규승을 바라보았다. 규승은 하던 일을 대충 마무리 짓고 극장을 나와, 공중 전화 박스로 향했다. 음성 메시지를 듣기 위해서였다.

차례로 번호를 눌렀다.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규승은 남의 눈을 의식하듯 침착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을 진정시킬 수는 없었다. 어떤 내용일까, 언제 어디로 전화하라는 뜻일까, 혹시 만나자고 한다면, 그리고, 이건 어디의 전화 번호일까, 처음 보는 번호인데.

한 개의 메세지가 있습니다. 메세지 청취는 1번……. 규승은 조심스레 1번을 눌렀다. 잠시 후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건 연진의 목소리가 아니라, 지금도 가끔 연락하는 고등학교 동창인 창욱의 목소리였다. 어, 규승아, 우리 3학년 때 같은 반이던 호철이가 어제 죽었다. 오늘 5시까지는 여기 있을 거니까, 자세한 건 여기 번호 찍을 테니까 전화 주고…… 한강 성모 병원 영안실이란다. 지금 말이 잘 안 나오니까…… 삐삐 받으면 빨리 연락 주라.

너무나도 차분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끝없는 우울을 전하듯 부보를 전했다. 규승은 전화를 끊고는 잠시 동안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기대가 빗나갔다는 허탈감과 자의식이 주는 수치심을 넘어서는, 실존의 허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규승은 입을 꼭 다물고, 호출기를 꺼내 창욱이 준 번호를 보며 수화기를 들었다. 잠시 후, 수화기 반대편에서 창욱의 목소리가 흘렀다.

응, 규승이냐? 그래, 창욱아. 규승은 호철이를 생각해 냈다. 공부를 잘했고 유머 감각도 있었으며, 깨끗한 얼굴에 옷도 좋은 것을 입고 다녔다. 아버지는 어딘가 큰 병원의 과장쯤 되는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대학 교수였다.

호철은 서울대 의예과에 입학했다. 규승은 그것이 호철에게 어울리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호철은 소위 말하는 상류층의 참한 엘리트 자제였다. 대학에 가서도 무언가 큰 일을 할거라고 생각을 했고, 첫 3개월 동안 서로 연락이 닿을 때 까진 그랬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있어. 그때도 좀 이상했었는데…… 좀 더 많이 얘기할 걸……, 하는 생각이 들더라. 창욱은 진심으로 우울해 하고 있었다. 어땠었는데, 호철이가?

글쎄, 너무 필요 이상으로 말이나 몸짓이나, 과장한다 고나 할까. 조금 튄다 싶을 정도로 웃고 마시고 그러더라고. 원래 걔가 좀 차분한 애였잖냐? 그런데 그 날은 그렇더라고……. 그러다가 어제, 술 마시고 올림픽 대로에서 사고가 났대나 봐. 혈중 알코올 농도가 0.18이라던가…….

좀 자세히 얘기해 봐. 규승은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창욱은 침울하게 대답했다. 원래 걔가 진짜 친한 친구라든가 그런 게 없었잖아. 아까 어머님하고 통화하는데, 유서에다가 ‘죽음이 가장 확실한 의사 소통 도구라고 생각했습니다’ 라고 썼다더라. 자세한 건 잘 모르겠어.

창욱과 얘기를 하고 있는데, 다시 호출기가 울렸다. 연진의 번호였다. 규승은 갑자기 심한 두통을 느꼈다. 규승은 호출기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머리 뒤쪽을 주물렀다.

이번엔 연진의 전화번호와 메세지 있음이었다. 규승은 갑자기 머리 쪽으로 피가 몰리며 두통이 생기는 걸 느꼈다. 호출기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그 손으로 머리 뒤쪽을 주물렀다.

조문을 오겠느냐는 창욱의 말에 규승은 응, 갈게, 하고 말하려고 했지만 목이 울리지 않았다. 규승은 그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대로 썩어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규승은 말을 더듬으며 창욱에게 얘기했다. 어, 난 못 갈 것 같아, 요즘 바쁘거든.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순간의 감정일지도 모를 기분 탓에 동창이 죽은 자리에 모습을 나타내질 않다니. 규승은 자신이 속이 좁은 놈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호출기 번호를 차례로 눌렀다. 이윽고 연진의 차가운 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규승은 그 목소리를 듣고는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규승은 장기 보존을 하려다 말고 천천히 8번을 눌러 메시지를 삭제했다. 손가락을 버튼에 누른 채로, 차가운 전자음을 계속 들었다.

그리고 전화를 하는 것을 그만 두고 극장으로 돌아왔다.

전화, 했어? 민주는 언뜻 무심해 보이는 표정으로 물었다.

규승은 가볍게, 그러나 무겁게 웃으면서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저었다. 무대 위에선 민식의 연출 하에 배우들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규승은 입을 다물고는 그것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민주는 천천히 규승 쪽으로 와서 조용히 물었다. 왜 안 했어?

규승은 딴 사람이었어, 하고 말하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어서는 무대 뒤쪽으로 향했다. 민주는 그런 규승을 뒤에서 잠자코 보다가, 그 뒤를 빠른 걸음으로 쫓았다. 규승은 민주가 쫓아오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곧바로 자기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바닥에 쓰러져서 누웠다. 민주는 조심스레 규승의 방문을 열었다.

왜 그래, 규승아. 규승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서 민주 쪽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고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조금은 힘겨운 웃음을 지으며 민주에게 들어 올 거냐고 물었다. 민주는 아무 대답도 않고 방으로 들어와 앉았다. 그리고 민주는, 무표정으로 일관한 채 규승의 옆에 마주 앉았다.

그렇게, 어설픈 침묵이 1분이 넘도록 계속되자 규승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민주 누나, 오늘은 왜 그렇게 무뚝뚝해? 규승은 침묵을 깨뜨리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민주에게 물었다. 민주는 느릿느릿한 규승의 말이 끝날 때까지 아무런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말이 끝나고 나서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겠지, 당연히, 너무도 당연히. 규승은 민주 대신 대답했다. 나 같은 쓰레기……. 규승의 힘없는 말을 들으며 민주는 몸을 일으켜 규승에게 다가가 규승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규승의 손을 잡고 쓰다듬으며 얘기했다. 아냐, 넌 소중해, 나한테 규승인 소중해.

……그래, 그건 어찌 됐든 괜찮아. 나를 죽이면 되니까. 내 존재 목적이 사라졌으니까, 날 폐기하면 되니까. 규승은 민주가 잡고 있던 손을 빼면서 고개를 가볍게, 그러나 무겁게 저었다.

누나, 내가 괴롭혔던 그앤, 나를 미워할까? 싫어할까? 미워할까? 싫어할까? 규승은 가벼운, 그러나 무거운 목소리로 그렇게 얘기했다. 그 동안 민주는 소리 없이, 움직임 없이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규승의 얘기가 끝나자, 다시 손을 가져가서 만지작거리며, 입을 다물고 고아하게 웃으며 규승을 보았다. 규승아, 넌 너 자체로 소중해. 그러니까 제발, ……있어 줘.

나는 그애가, 날 그애의 것으로 만들어 줬으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애가 앉아 있는 의자의 한쪽 다리가 되어도 좋아. 나는 내가 아닌 다른 것으로 되어, 나란 존재, 나란 개체를 없애 버리고, 나에 대한 자의식을 날려 버리고, 그저, 그애의 것, 그애의 소유물,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렇게라도 일단은 남고 싶었어. 떠나지 않고, 멈추지 않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 이름을 잊고, 그렇게 남아서 존재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더 나은지, 내 판단을 갖고 살고 싶지 않아, 내가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고 싶지 않아, 완전히, 정말 완벽하게 도망치고 싶었어……. 그래서, 난 나란 존재를 지워버리고, 누군가의 소유물이 되고 싶었어. 하지만, 누나도 알겠지만, 그렇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규승은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쓰러진 채로 민주를 올려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아직, 누나 같은 고마운 사람들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렇게 말하고 규승은 눈을 뜬 채 가만히 움직이지 않았다. 민주는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가서 문을 꼭 닫고 문고리의 버튼을 눌러 문을 잠궜다. 그리고 입고 있던 스웨터 자락을 천천히 걷어 올렸다. 규승은 어느 새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민주는 어느새 속옷만 입은 채로 규승에게 다가와 규승의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규승의 셔츠를 벗기면서, 규승의 눈 위에 입을 맞췄다. 민주의 가만히 열린 입술 밑으로 규승의 눈에선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규승은 자신의 몸을 완전히 민주에게 맡기고 있었다. 아주 조용히 목소리를 억누른 채로, 벗기고, 만지고, 부비고, 서로 껴안는 간결한 행위의 간극에 규승은 민주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전달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것은 배설한 체액 같은 실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뜨겁고, 그것만이 그 순간의 자신을 채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자신의 호흡을 도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 긴 밤은 지나갔다.

연극이 끝나자 사람들은 어느새 모두들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리고, 텅 빈 객석과 조명이 꺼진 채 수명이 다 되어 가는 형광등 불빛만 불안하게 흔들리며 그 공백을 메우고 있었다. 그 순간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민주와 규승은 객석 복도 옆쪽에 서 있었다.

무슨 생각해?, 하고 민주가 묻자 규승은 잠자코 대답했다. 죽은 사람. 누구? 내 동창. 서울대 의대 다니던 놈인데, 차 타고 달리다가 어딘가에 뛰어들었나 봐. 자살이야? 그런가 봐. 아……, 나, 옛날에 만나던 사람도, 그렇게 죽었었는데.

규승은 순간, 전혀 다른 ‘민주 누나’를 보고 있었다. 민주는 예전에 보지 못했던 아련함이 어린 눈을 하고 있었다. 민주는 떨면서 말했다. 사람은, 문득 너무 쉽게, 그렇게 사라져 버려, 그리고 잊혀지고……. 어쩜 좋아, 지금까지 난 그 사람을 잊고 있었어. 민주의 감정이 고조된 모든 표정은 보는 사람에게 할 말을 잊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규승은 조용히 민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앞으로 커서도 서로를 기억할 수 있을까? 나, 그 사람 만날 때는 행복했어. 외롭지 않았어―물론 규승아, 너랑 있을 때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 사람, 어느 날 갑자기, 안녕이라더니,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트럭이랑 부딪쳤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래, 깨끗하게 그 자리에서 죽었겠지.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거야.

그 이후 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 그 사람과 있을 때 하던 모든 것들…… 모든 순간의 행복을 재생하고 싶었어. 오토바이 뒤에 올라서, 그 사람이 행복하냐고 물으면 난, 세상에서 우리가 제일 행복한 사람일 거야, 하고 소리질렀어.

하지만 나는 행복하지 않았어. 나는 그 사람들을 안아주려고 했지만, 다들 내 굴레를 부담스러워했어. 예전의 그 사람하고는, 나, 짧은 키스에도 서로 느껴지는 게 있었어. 하지만, 다른 사람들……. 그렇지 않았는데, 그래서 모두 다 잊었는데……. 난 지금까지, 왜 사람을 만났는지 잊고 있었는데…… 너와 있으니까, 그때의 행복, 조금씩 찾아드는 것 같아. 그리고, 그제서야 나, 그 고마운 사람이 생각난 거야…….

나는, 누군가에 잊혀진다는 게, 두려워. 서로 생각하는 마음이, 아름다운 만큼…… 그 잊혀지는 마음은, 안타까울 거야. 나는 잊혀지고 싶지 않아. 규승아, 나, 기억해 줄 거야?

나, 정말 행복해지고 싶었어. 가끔씩 꿈에서 그 사람이 나타나서, 이젠 행복해? 외롭지 않아? 하고 물을 때가 있어. 지금 나, 자신있게 대답해 주고 싶어. 이젠 행복해, 정말 행복해, 하고.

규승은 말없이 민주의 양손을 잡고, 그리고 입술을 맞대었다. 긴 키스 도중에 규승은, 누나, 잊지 않을게, 하고 끊임없이 얘기했다.

하지만 행복이란, 시간처럼 어느새 왔다가 어느새 사라지는 줄 모른다. 그 긴 키스를 하던 민주와 규승도, 이윽고 그 극장을 떠나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다. 공연이 끝난 극장처럼, 흩어지는 담배 연기처럼, 세월처럼……. 그렇게 사라지고는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민주는 집으로, 규승은 학교로 돌아갔고, 최소한 그 전처럼 외로워하지 않았다.

몇 년 후 여름이 막 끝나갈 무렵 규승은 서울에 있는 조그만 레스토랑에서 민주를 만난 적이 있었다. 민주는 규승이 만든 영화 팜플렛을 들고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모델로 성공은 하지 못했지만, 조그만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평범한 남자와 만나 아기자기하게 살았고 그런 생활의 활력이 그 시절의 그녀를 여전히 아름답게 한 모양이었다.

어때, 지금 결혼은 했어?

응. 누나 남편만큼 소박하고, 참 편한 여자야. 옛날의 그녀―김연진―하고 와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평범한 여자.

너랑은 안 맞는 거 아니야?

아, 누구보다 나를 사랑해.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뭐.

잘 됐네.

참, 그때 얘길 들려줬어.

그때? 언제?

우리가 같이 잤던 때.

훗. 그래서, 어땠어?

어땠냐고 물어 보며 웃던데?

민주는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살며시 회상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담백했어, 그때는.

그리고, 고개를 들어, 세상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은 저물어 가는 석양과 교감 중이었다.

규승아, 지금은 숨쉴 수 있니?

좀 가쁘지만, 괜찮아.

잘 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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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5월.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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