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늘한 편지>

라이터 리 2007. 12. 19. 02:37

싸늘한 편지
true, dilemma

덜컹거리는 소리는 작위적이다. 역을 출발한 전철은 누군가에 의하 조금씩 빨라지고, 석양에 지는 창틀의 그림자는 점점 현란한 영상을 그린다.

조금씩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한 오후의 전철에 앉아 아픈 다리를 문질러 보지만, 아무래도 나아지진 않는다. 어쩐지 오늘은 전철 안의 사람들, 다들 안색이 좋아. 민주는 안고 있던 숄더백을 끌어당기며 중얼거린다. 하루가 저물어가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낯익은 석양.

전철은 이내 다음 역에 도착했다. 아……, 벌써 한 바퀴를 돌아온 거구나. 민주는 몸을 틀어 정차한 역이 어딘지를 확인하고는,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 쪽을 힐끗 쳐다보며 다시 자리로 뭄을 묻는다.

저쪽 맞은 편에 앉은 앳된 얼굴의 청년이 궁금하다. 플라타너스의 낙엽 빛깔 같은 옷을 입은 그 청년도, 꽤 오래전부터 이 전철에서 내리지 않고 있다. 민주는 조심스레 그를 관찰한다.

이제 갓 스물을 넘었을까. 아니, 어쩌면 아직 고등학생인지도 모른다. 아무렇게나 기른 듯한 머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베이지색 모자를 눌러쓰고, 초콜릿 색의 무늬가 있는 니트 차림. 팔짱을 낀 채 귀에는 이어폰을 꼽고서 무언가를 듣는. 가끔씩 손이나 발도 까딱거렸고 그것으로 그 청년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안다.

어느새 두 정거장을 지나친다. 민주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다. 아, 벌써 5시네……. 민주는 배가 고파져서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문 쪽으로 가 다음 역이 어디인지를 확인한 민주는, 그 청년은 무얼 하고 있는지를 돌아 본다. 청년은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자세로 음악을 들으며, 허공을 향해 무책임해 보이는 시선을 던지고 있다.

민주는 일어나 숄더백을 고쳐 맨다. 이윽고 민주가 앉아 있던 자리의 옆에 섰던 사람이 머뭇거리다 그 자리를 차지한다. 안내방송을 들으며 민주는 시계를 본다. 아직, 1분도 지나지 않았다.

청년은 민주 쪽을 응시하고 있다. 인기척을 느낀 민주도, 청년의 발 쪽에 시선을 주었다가, 천천히 눈을 든다. 민주와 눈이 마주친 청년은, 옆에 뉘어 두었던 가방을 들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민주 쪽으로 다가와서는 그 앞에 섰다. 그리고는, 자그맣지만 또박또박한 말씨로 민주에게 묻는다.

저어, 오늘 특별히 할 일 있는 거 아니죠? 예? 음, 실례지만, 남자 친구 많아요? 아, 그냥. 친구는 좀, 있어요.

주위 사람들이 그들을 흘끔 쳐다보고, 민주는 시선을 의식한 듯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본다. 청년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민주에게로 조금 더 다가가 말한다. 무책임하고, 뻔뻔스럽게.

그럼, 하나쯤 늘린다고 표나지 않겠네요? 눌러쓴 모자의 깃을 쓰다듬으며 청년은 피식 웃는다. 곧 전철이 천천히 멈추고, 얼마 안 있어 문이 열린다. 민주는 당황스럽다.

같이 내려도 되죠? 청년은 어깨에 들었던 가방을 똑바로 고치고는, 민주의 손목을 잡고 문이 닫히기 직전 열차를 나온다. 민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청년을 본다. 뻔뻔스러운 미소. 가만 보니 이 남자는, 청년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리고, 푸르지 않다. 그저, 소년(少年).

그때가 민주와 규승이 처음 만난 때였다. 그들은 그렇게, 통속적인 연극처럼 서로를 알게 되었다.

퀴퀴한 냄세 속에서 민주는, 무릎을 꿇은 채 바닥을 닦고 있었다. 손에 들려진 걸레는 이미 새까맣게 변했고, 청바지의 무릎팍도 흐릿한 얼룩이 생겼다.

변두리 지역의 볼품없는 소극장이었지만, 상영하는 작품은 늘 그럴듯했다. 셰익스피어의 고전이나 브레히트를 올리기도 했고, 요즘 무대에 선 작품은 피터 한트케의 “관객 모독”이었다.

민주는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극장에 상주하는 솜씨없는 극단의 몇몇 단원과 함께, 민주는 무대 뒤쪽의 두 평도 채 되지 않는 구들방에서 생활을 했다. 조그만 상을 펴고, 필요한 천조각들을 넣어두는 간이 옷장을 세워두면 한 쪽 벽이 꽉 찼다. 잘 때가 되면 방의 대각선으로 누워 잠들어야 했다.

민주는 극장의 사무실을 닦고 있었다. 사무실이라고는 했지만, 평수가 조금 넓은 구들방에 불과했다. 며칠 동안 닦지 않았던 탓에, 바닥을 몇 번 훔친 것으로도 걸레는 이미 쌔까맣게 변했다. 민주는 쉬지 않고 일했다. 청소, 식사 당번, 소품을 사 오는 잔심부름. 지쳐 왔지만, 쉬지 않았다.

삐그덕.

문이 열리며, 마른 체구의 규승이 구부정한 자세로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낡아 보이는 면바지에 검은색 라운드 티셔츠 차림으로, 발에는 아무 것도 신지 않은 채. 그리고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민주는 고개를 돌아보고, 규승의 얼굴을 보며 반가운 표정이 되었다. 자신의 감정을 꾸미지 않는, 솔직하고 당당한 모습. 민주는 언제나 진지했다. 규승이네, 웬일이야? 규승은 씩 웃으며 안쪽으로 들어와 방석 더미 위에 앉았다.

도와 줄까?

잠시 동안 잠자코 바라보던 규승은 민주가 힘겨워 보인 모양이었다. 민주는 말없이 아직 먼지가 많은 방구석으로 걸레를 가져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규승은 결단코 일을 도우려는 듯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가, 이내 다시 자리에 앉아 버렸다.

사람은 각자 저마다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아.

규승은 막 걸레질을 끝낸 민주에게, 조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민주는 걸레를 접어 문쪽으로 던져 놓고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규승은 말을 이었다. 사람이 몸이라는 것,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지만. 일분, 일초라도 더 살자고 만들어져 있잖아. 그런데 말야, 나는, 내 머리 속에는 말야. 지금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누나는 어때?

그런 거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난 그냥, 나 사는대로, 기질대로 사는 거니까……. 민주는 일어나 문을 열고 걸레를 밖으로 내 놓았다. 그리고 더러워진 청바지에 손을 문지르고, 규승이 앉아 있던 방석 더미에서 방석을 꺼내 그 위에 사뿐히 앉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과거의 기억은 언제나 흐릿해……. 혼잣말이었을까, 아니면 규승에게 하는 말이었을까. 민주는 한숨처럼 넋두리했다. 민주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규승을 돌아보며 물었다. 너는 어때? 옛날 일이 잘 기억나?

규승은, 자조 띈 얼굴로 어꺠를 으쓱해 보였다. 규승에게도 과거의 기억은 흐릿했다. 미래도 마찬가지였다. 미래는 오히려 더 막연한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오직 확실한 것은 오늘뿐이었지만, 그것마저도 공연한 반항으뿐이었다. 규승에게 시간이란, 사전적 의미만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추상적 관념일 뿐이었다. 규승은 규승은 몸을 벽 쪽으로 더 기댔다.

규승아, 너, 학교 어디 다녔어? 민주는 무엇인가를 생각해낸 듯 물었다. 규승은 잠시 대답을 저어하더니, 입술을 앙다물고 말았다. 고교 시절 열등생이 아니었던 규승은 지금, 대학을 두 번 낙방한 삼수생의 신분이었고, 남에게 학업 얘기를 한다는 것은 껄끄러운 일이었다. 규승은 잠시 망설이다, 민주의 눈을 바라보았다.

따뜻함. 민주의 얼굴은 지쳤으되 그 눈은 따뜻했다. 타인에게, 믿음을 전하는 눈빛. 규승은 생각했다. 나와 대화하고 있는 것은 민주 누나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아닌, ‘민주 누나’다.

규승은 표정을 밝게 고치고,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공부 얘기라면, 굳이 못할 것도 없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학업 성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냥, 보통의 학교를 졸업했지. 원래 대학은 서울에 있는 대학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시험을 망쳐서 점수가 안 따라줬고. 어쩌다 보니 인천에 있는 2년제 대학교도 떨어졌어. 난 그냥 재수를 하기로 했지. 진학 같은 건 애당초,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지금은 삼수생인가.

규승은 숨을 고르듯 말을 끊었다.

응, 그래. 안 됐다.

민주는 두 손을 무릎에 포개고, 규승이 바라보고 있는 허공의 한 지점에 같은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고 애써 밝은 웃음을 만들며 규승에게 말했다. 미안해, 그런 얘기해서.

아니, 괜찮아. 규승은 소리 없이 크게 웃어 보였다. 꼭 다문 입 양쪽에 해맑은 주름이 생겼다.

피터 한트케, 알아?

민식은 민주와 규승에게 물었다. 극장의 실무 담당인 그는 스물여섯 살로, 규승 보다 여섯, 민주 보다 다섯이 많았다. 학생 운동이 한참이던 때에 대학 졸업반이었던 그의 얼굴 왼쪽에는 불에 댄 듯한 보랏빛 상흔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가리기 위해 성형 수술도 해 보았지만 수술비를 감당치 못해 무위에 그쳤고, 민식은 그것을 ‘그 시절의 훈장’이라고 말하며 자위했다.

피터 한트케……. ‘관객 모독’을 쓴 사람. 소설가이고.

민식은, 풍채 좋은 몸과 흉터가 있는 얼굴에 비하면 목소리는 마치 변성기를 채 겪지 않은 중학생처럼 아주 맑고 깨끗한 편이었다. 민식이 민주를 바라보자, 민주는 고개를 좌우로 몇 번 흔들며 가볍게 웃어 버렸다. 민식의 시선이 규승에 닿고, 규승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연극이나 소설은 잘 모르지만, 어쨌든 그 사람은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시나리오를 썼던 것 같아요.

규승이 대답하자, 민식은 짐짓 놀라워하는 것처럼, 어라, 나는 그런 것은 몰랐는데 하고 말을 마쳤다. 민식은 그가 가진 목소리같은 순진함이 남아 있었다. 규승은 그것을 학생 운동의 후유증으로 겪는 정신적인 퇴행으로 여겼다.

규승이는 커서, 영화 감독 할 거래요. 민주는 마치, 자기가 대답한 것처럼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민식은 의외라는 듯 규승을 보며, 들고 있던 맥주 캔을 입으로 가져 갔다.

영화 감독……. 규승은 멋적게 웃어 보이며 민식에게 말을 건넸다. 옛날에 소설을 쓸 때부터 생각한 거에요. 실은 나는 영화에 대해서 아는 건 없어요. 피터 한트케가 시나리오를 쓴 건 기억이 나는데 감독이 누군지는 기억이 안 나요.

민주는 마시지 않던 맥주의 캔을 따며, 규승에게 물었다. 혹시 좋아하는 영화 있어? 민주는 전에도 두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대답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단 둘이 있을 때 물은 것은 한 번뿐이었고, 그저 다른 사람에게 규승의 꿈을 확인시키려는 듯한 의도가 묻어 있는 질문이었다.

규승은 그런 민주가 싫지 않았다. 자신의 꿈을 말하는 것은 어렵고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규승은 민주가 좋았다. 응,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찍은 퍼펙트 월드. 규승도 짧게 잔을 들어 보았다. 대답을 마친 규승은, 민주를 보았다.

의자의 팔걸이에 턱을 괴고 앉은 민주의 얼굴. 한없이 지친 것같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는. 흔들리는 것처럼, 창백하리만치 하얀 얼굴. 딱 그 나이에 맞는 눈매와 입술과 표정을 가지고 있는 여자. 민주는 규승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규승의 눈을 마주 보고는 말했다. 아, 그래? 나는 본 적이 없는 영화인데. 규승이는 영화 많이 보나 봐요, 그렇죠?

민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은 과장되어 있었다. 규승은 그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규승은 말이 없어진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 극장 안을 둘러 보았다. 세 사람은 극장의 객석에 앉아 술을 나눠 마셨다.

참, 규승아. 아까 사무실에서, 네가 얘기했던 거, 그거, 그러니까……. 규승이 민주의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몸과 마음의 불일치……. 왜 살아야 할까, 하는 그것? 민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얘기하고 싶다는 듯, 의자에 앉은 채 규승을 향해 몸을 틀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규승은 민주의 실루엣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이윽고 말을 꺼냈다.

사람은, 무엇인가 목표를 세워서 그 불일치를 해소하는 거야. 규승의 말은 마치 선언처럼 들렸다. 민주는 규승에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규승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계속해 나갔다.

예를 들어서, 이 워크맨은 테이프를 플레이하기 위해 존재하지. 만약 워크맨이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된다면, 그러니까 고장이 나서 고칠 수가 없으면 폐기 처분할 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워크맨 역시 망가지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잖아? 하지만 언젠가는 폐기 처분되어야 하고. 사람도 그래.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지만, 언젠가는 죽어. 사람하고 워크맨하고 다른 점은, 워크맨은 "테이프 플레이"라는 확실한 아이덴티티가 있지만 사람한테는 그게 없거든. 그러니까 사람은 살기 위해서, 자신의 아이덴티티, 자신의 목표를 세우는 거야.

민주는 규승의 얘기가 거기에까지 미치자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이해가 가, 응, 그래. 하지만, 사람의 존재에 이유를 달만큼, 세상은 각박하지 않잖아? 난 네 삶을 이해할 수가 없어. 규승이 무언가 다른 말을 꺼내려 할 때, 민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제멋대로 하게끔 해 달라는 투로, 자신은 이만 가보겠으니 둘이 잘 놀라고 말을 남기고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다.

가끔은, 일부러 이기적인 체 하지만 천성은 그렇지 않은 여자애야. 언제나 남을 배려하는 아이. 민식은 규승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규승도 그 말은 인정하고 있었다. 민주의 배려로 규승 자신도 이 극장에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으니까.

수명이 다 되었는지 어둑해진 형광등 불빛 아래, 민주가 서 있다. 민주의 꿈은 모델이다. 패션 모델, 화려한 옷을 입고 화려한 조명과 받는 사람. 조명과, 음악과, 의상과, 분장이 모델을 위해 존재한다. 민주는 매일 극장 계단을 까치발로 오르내리고, 연극이 끝난 후 무대 위에서 자신만의 쇼를 펼친다. 그리고, 규승은 그것을 바라본다.

민주는 천천히 무대 앞으로 나온다. 어색한 워킹. 그리고, 갑자기 걷는 것을 멈춘다. 하지만 민주에게는, 그 멈춰 있는 모습이 더 자연스럽다. 우울하게도. 민주가 연습을 마치면 객석에 앉아 있던 규승은 일어나 박수를 쳐 준다. 규승이 극장에 온 첫날부터 매일 이어져 온 일과다.

민주와 규승은 방으로 돌아와, 어제 민식과 함께 마실 술을 사올 때 함께 사 왔던 크래커와 아이스크림을 먹기로 했다. 꽉 닫힌 문 안에, 두 사람은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상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규승은 문을 꽉 닫고는, 앉아서 기타를 매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극장에 방치되어 있던 것이었는데, 규승이 온 뒤 주인이 되었다.

규승이 너는, 참 노래를 예쁘게 하는 것 같아. 민주는 크래커에 아이스크림을 얹으며 얘기했다. 민주의 입에서 크래커 부서지는 소리가 나자 규승도 노래를 멈추고 크래커를 한 조각 집었다.

규승아. 너, 소설 썼다는 얘기 좀 해 줄래? 민주의 질문에, 규승은 말 없이 크래커와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대답 대신 민주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누나는 애인 없어?

응, 없어. 네가 더 잘 알잖아. 민주는 크래커 부스러기가 묻은 손을 털고 벽 쪽으로 몸을 밀었다. 조금씩 바닥이 따뜻해져 왔다. 민주는 잠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표정으로, 기타를 매만지는 규승의 손을 바라보다가 되물었다. 규승아, 너는?

나는, 여자친구가 있던 것은 아니고, 잘 해보려다가 차였어. 언제? 얼마 전에. 얼마 안 됐어. 언젠데? 1년하고, 아홉달 정도 전에. 그러자 민주는 정색을 하고 되물었다. 1년 9개월이 어떻게 얼마 안 된 거야?

김연진. 규승은 흐릿한 기억 속에서, 흐릿한 얼굴을 가졌던 한 여고생을 떠올렸다. 누군가 그녀에 관한 얘기를 물을 때면 규승은 말없이 잠자코 있거나, 혹 화를 내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규승과 함께 있는 것은 ‘민주 누나’였다.

얘기해 줄 수 있어?

규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규승이 연진을 처음 만난 것은 학교 복도에서 였다. 고등학교 2학년. 규승은 학급의 부반장이었고, 연진은 학교의 신문반 기자였다. 규승이 교무실에서 담임 교사와 면담을 마치고 나와 복도를 지날 때, 그녀는 손에 학교 신문 원고를 들고 교무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규승은 그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게 되었다.

규승이 처음 연진에게 말을 건낸 것은 학교의 매점에서였다. 연진은 친구와 함께 빵을 사 먹고 있었고, 규승은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 빵 맛있니?

학교 신문에, 자신과는 별 상관없는 투고를 하던 규승은, 연진을 만난 뒤 두달 후 처음으로 연애 편지를 써 보게 되었다. 그 이후는 고교생의 풋사랑이 늘 그렇듯, 편지를 주고 받고, 함께 영화를 보고, 선물을 주고 받기도 했다.

그런 두 사람의 관계는 방학을 계기로 틀어지고 말았다. 학교에 나오지 않는 동안 연진에게는 새 친구가 생겼고, 그 새 친구는 규승과의 관계를 정리하기를 원했다. 규승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규승의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방적인 변심’이었다.

그 무렵 규승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규승의 부모가 규승을 한국에 남겨 둔 채 도미한 것이었다. 한국에 홀로 규승은 당숙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고, 부모의 그런 행동은 규승을 혼란스럽게 했다. 당숙은 규승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민주는 규승에게 다가가 규승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 됐어, 이제 그만 얘기해도 좋아. 하지만 규승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가끔, 표정을 일그러뜨렸지만, 규승은 말을 하고 싶어 했다.

나, 아마 그애한테 나는 아마 그렇게 보였나 봐. 성격도 장점이 없고, 그 반대로 단점 투성이고.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허풍쟁이. 이기적이고, 제 잘난 줄만 알고, 남 생각해주려고 하는 건 하나도 없고, 자기 생각을 지키면 다인 줄 알고, 남 무시하기 잘 하고, 비꼬기 잘 하고.

나를 맡아서 기르게 된 오촌 아저씨가 늘 하던 말이 있어, 넌 왜 이렇게 싸가지가 없느냐, 하고. 그래, 난 왜 이렇게 싸가지가 없는 거지? 항상 자조했던 때가 있어. 그래서인지 나는, 그애가 나를 버렸다는 사실에 대해 조금도 억울하지도, 원망스럽지도 않았어.

그래서, 나는 생각했어.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지도 말자. 그리고 내 상처를 보여주지도 말자. 나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입힌 적이 있는 전과자이고, 피해자이고……. 그래서, 오래 전부터,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나를 닫았어.

규승은 무릎에 놓았던 기타를 끌어 안으며 말했다. 아까 왜 소설을 쓰냐고 물었지? 나는 타인과의 소통 대신에, 나는, 소설을 쓴 거야. 노래를 부른 거고. 아픔을 달래려고.

소설을 쓰지 않고서는, 기타를 치지 않고서는 조금도 숨쉴 수 없었어. 무언가를 내뱉어 놓지 않으면, 한시도 살 수 없을 것만 같았어. 민주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를 하는 규승의 얼굴만큼이나, 민주의 얼굴도 굳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제법 포기했어. 숨쉬는 것 따위……. 나 따위, 버려 버렸어. 지금 그애를 다시 만나서, 아무 탈없이 잘 살고 있는 걸 알게 될 때, 난 어떤 표정이어야 할까?

규승은 언제 쾌활하게 웃었냐는 듯이 싸늘한 표정이 되어서 허공을 주시했다. 그리고 안고 있던 기타의 줄을 퉁기며,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무언가를 흥얼거렸다. 민주는 잠자코 노래를 듣다가, 이윽고 그 노래를 기억해 냈다. 유재하의 노래인가, ‘우울한 편지’ 라고 하는.

다음 날 아침, 민주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규승을 데리고 바깥에 나가, 공중 전화 박스에 밀어 넣었다. 수화기를 들어 규승에게 건넨 민주는, 전화카드를 넣고 손에 들고 있던 번호를 차례차례 눌렀다. 신호음이 울리고, 규승은 의아한 표정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민주는 대답 대신, 손에 들고 있던 메모지를 규승에게 주었다. 그 메모 안에는, 규승에게 있어 너무도 낯익은 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 번호를 본 순간, 규승은 급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뭐야, 어떻게 알았어? 규승의 항의에 민주는 살짝 웃는 듯한 표정으로, 네 다이어리 보고,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수화기를 들고 손을 들었다. 번호를 누르며 민주는 규승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그애에게 전화해서, 네 남은 진심을 말해. 그래야 돼.

규승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저어 보이고는 그대로 공중 전화 부스를 나가려다, 민주가 건네는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잠자코, 귀에 가져다 대었다.

뚜르르, 뚜르르, 딸칵. 여보세요? 수화기 안에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흘렀다. 저어, 거기 김연진이네 집인가요? 네, 그런데요. 저어, 혹시 김연진 있나요? 아뇨, 학교 갔는데요, 실례지만 누구……? 아, 아, 그게, 학교 동아리 친구입니다, 예. 무슨 동아리?, 우리 연진인 아직 동아리 든 게 없을 텐데?

규승은 두근거리고 있던 가슴이 철렁,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수화기를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리고 불안한 표정으로 민주를 돌아보았다. 누나, 이런 장난치지 마. 규승은 약간 흥분이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내뱉고는 민주를 남겨둔 채 밖으로 나갔다. 덜컹, 하고 문이 닫히자, 민주는 부스 안에 남아, 부스의 유리창 밖을 통해 극장으로 돌아가는 규승의 모습을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난 뒤, 규승은 라면을 두 개 끓여 민주의 방으로 들어왔다. 아침의 일은 읹은 듯 밝은 표정이었다. 상 위에 냄비를 올려 놓고, 김이 솟는 라면을 두 개의 그릇에 나누어 담았다.

민주는 규승을 바라보며 고민한 끝에, 다시 물어보았다. 규승아, 전화 다시 해볼까? 민주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오자, 젓가락질에 열심이던 규승의 손이 멈추었다. 야, 맛있겠다, 하던 나지막한 읊조림도 멈췄다. 하지만 규승은, 뒤틀린 분위기가 싫은지 멋적게 웃으며 하던 일을 마저 다 하고, 자신의 그릇에 담긴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민주를 향해 너스레를 떨었다. 먹어 봐, 잘 익었다.

민주도 이내 천천히 그릇을 끌어와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방안에는 라면을 먹는 소리 말고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규승은, 그릇을 비우며 상황이 지나치게 사실적이라고 생각했다. 라면을 먹는 소리 외에 다른 소리는 전연 들리지 않았고, 그래서 마치 영화의 음향 효과같다는 생각을 했다.

규승은 자신이 끓인 라면을 먹고 있는 민주를 바라보다, 누나, 하고 민주를 불러 보았다. 민주는 입으로 가져가려던 라면을 그릇에 내려놓고, 규승을 마주 보았다. 규승은 말을 하기가 어려운지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이윽고 목을 울려 말했다. 전화, 해볼까?

응, 해 봐. 같이 나가자. 민주는 규승보다 먼저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규승은 자신이, 다시금 전화를 해 볼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없는 모습이었다.

뚜르르, 뚜르르, 뚜르르, 딸칵. 여보세요?

공중전화의 수화기 저쪽 편에서는, 들은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기억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규승은 전화를 받은 상대가 연진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지만, 조심스레 물었다. 김연진 씨 댁인가요? 쓸데없는, 정중한 말투.

네, 그런데요. 저어, 바꿔 주실 수 있습니까? 고등학교 때 친구입니다. 제가 김연진인데요, 누구시죠? 저어, 연규승입니다. 규승은 떨고 있었다. 처음 술을 마셨을 때의 기분이었다. 마음을 진정시킬 방법이 없었고, 침착하게 목소리를 내는 일조차 힘들었다. 민주가 그런 규승을 말없이 바라보며 심호흡했다.

아, 규승이. 너 오랜만이다. 웬일이야, 나한테 전화를 하고? 응, 그냥, 잘 지내는지 궁금했어……. 규승의 어투에는, 이미 규승이 없었다. 민주가 규승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었다. 하지만 규승은, 곁에 민주가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구니?, 전화기 속에선 아침에 들었던 연진의 어머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동안, 전화선을 통해 어색한 침묵이 교환되었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 규승아, 너 삐삐 있어? 내가 삐삐 칠 테니까 그때 전화해. 그 전엔 전화하지 마.

전화 속 연진의 목소리는 조용조용했다. 규승은, 으응, 하고 장황한 말투로 호출기 번호를 불러주었고, 연진은 안녕, 하고 짧게 인사하고 전화를 끊었다. 규승은 오랫동안 그 뚜, 뚜, 하는 신호음을 듣고 있었다.

민주는 규승의 왼쪽 어깨에 손을 얹고는 엷은 미소를 비춰주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할 말을 잊게 하는 그러한 종류의 미소였다.

난 누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아. 누나 얘기 들려 줄 거 없어? 규승이 묻자 민주는 머뭇거렸다. 내 얘기? 민주는 바닥을 쓸며 굽혔던 허리를 곧게 펴고는 조그맣게 말했다. 별로 해 줄 말이 없는데…….

규승은 민주한테로 와서는 약간 들뜬 목소리로 떠들었다. 누나, 누나 가족들을 얘기해 줘. 누나 가족들, 누나 닮았다면, 모두 좋은 사람일 거야. 민주는 빗자루를 든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생각하더니, 이내 천천히 대답했다. 우리 가족들…….

가족이란 민주에게 있어서는 영원히 돌아가지 못할, 망각의 강 너머의 공간 같았다. 민주에게 있어 가족은 흐릿한 기억속에만 존재했다. 민주는 여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텐 어린 남동생이 있어. 지금…… 중학교 1학년인가? 아마, 올해 입학했었을 거야. 그 위로, 내 바로 밑 동생이 여자앤데, 걔는 나보다도 공부를 못하는데, 마음씨는 착해서. 상고 다니면서 취업 준비해. 난 지금 이렇게 살고, 그래.

민주는 잠시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규승은 궁금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민주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내 남자 동생. 걔가 그렇게 똑똑해. 한글도 4살인가 5살인가에 다 배웠구, 국민학교 때엔 전교 1등도 여러 번 하더라구. 나랑 내 바로 밑 동생은 엄마를 닮았는가 본데, 걘 남자애라고 아빠를 닮았나 봐.

누나 아빠 엄마는 뭐 하시는데? 민주와 규승은 청소를 하다 말고 객석의 의자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민주는, 가족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행복한 얼굴이 아니라, 가족의 이야기를 남에게 한다는 사실 자체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 같았다.

우리 아빠는 교통 사고로 돌아가셨어.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난 아빠하고 별로 안 친해서, 정작 장례식 때에, 다들 곡을 하고 울고 그랬는데, 나, 하나도 눈물이 안 났어. 다들 그렇게 시끄러울 때, 혼자 내 방으로 와서 내 동생 침대에 앉았어―내 동생하고 나하고는, 방을 같이 쓰는데, 침대는 내 동생 거야―. 그리고 앉아 있으려니까, 코끝이 시큰해지면서, 울었어. 마치 모든 걸 빼앗겼다는 듯 울었어.

그리고 허공에다 대고, 있는 욕 없는 욕 다 했었던 것 같아. 그렇게 막 소릴 지르고 있는데, 방문이 덜컥 열리면서, 엄마가 들어왔어. 엄마를 보고 내가 일어서니까, 엄마는 갑자기 내 뺨을 때렸어. 조용히 하라고. 그렇다고 해서 우리 엄마가, 아량이 없다거나, 못되었다는 건 아니야. 지금 내 남동생 학비를 벌려고, 일주일의 반은 파출부를 나가고, 나머지 반은 노점상을 해. 그렇게 번 돈으로, 내 동생 학원 보낸다.

내가 집 나와서 여기 있는 거, 오히려 울 엄마는 좋아해. 돈 좀 덜 나간다고. 그렇다고 내가, 엄마를 미워한다거나 그러진 않아. 오히려, 여기 도망쳐 와 있는 내가 아쉬울 뿐야.

도망치긴 누가 도망쳤다 그래……. 약간은 미안한 기색이 도는 목소리로 규승은 말했다. 그리고 일어서서는 쓸다 만 바닥을 어색하게 큰 몸짓으로 쓸어내다가, 아직 앉아 있는 민주에게 조금 크다 싶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누나, 그런 얘기하게 시켜서. 그러자 민주는 힘은 없지만 맑게 웃으며 괜찮아, 라고 대답했다. 쓸쓸한 민주의 얼굴에는 아직, 처음의 행복한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다음날, 규승의 호출기가 울렸다. 규승이 모르는 전화 번호였다. 민주는 말없이 규승을 바라보았다. 규승은 하던 일을 대충 마무리 짓고 극장을 나와, 공중 전화 박스로 향했다. 음성 메시지를 듣기 위해서였다.

차례로 번호를 눌렀다.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규승은 남의 눈을 의식하듯 침착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을 진정시킬 수는 없었다. 어떤 내용일까, 언제 어디로 전화하라는 뜻일까, 혹시 만나자고 한다면, 그리고, 이건 어디의 전화 번호일까, 처음 보는 번호인데.

한 개의 메세지가 있습니다. 메세지 청취는 1번……. 규승은 조심스레 1번을 눌렀다. 잠시 후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건 연진의 목소리가 아니라, 지금도 가끔 연락하는 고등학교 동창인 창욱의 목소리였다. 어, 규승아, 우리 3학년 때 같은 반이던 호철이가 어제 죽었다. 오늘 5시까지는 여기 있을 거니까, 자세한 건 여기 번호 찍을 테니까 전화 주고…… 한강 성모 병원 영안실이란다. 지금 말이 잘 안 나오니까…… 삐삐 받으면 빨리 연락 주라.

너무나도 차분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끝없는 우울을 전하듯 부보를 전했다. 규승은 전화를 끊고는 잠시 동안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기대가 빗나갔다는 허탈감과 자의식이 주는 수치심을 넘어서는, 실존의 허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규승은 입을 꼭 다물고, 호출기를 꺼내 창욱이 준 번호를 보며 수화기를 들었다. 잠시 후, 수화기 반대편에서 창욱의 목소리가 흘렀다.

응, 규승이냐? 그래, 창욱아. 규승은 호철이를 생각해 냈다. 공부를 잘했고 유머 감각도 있었으며, 깨끗한 얼굴에 옷도 좋은 것을 입고 다녔다. 아버지는 어딘가 큰 병원의 과장쯤 되는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대학 교수였다.

호철은 서울대 의예과에 입학했다. 규승은 그것이 호철에게 어울리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호철은 소위 말하는 상류층의 참한 엘리트 자제였다. 대학에 가서도 무언가 큰 일을 할거라고 생각을 했고, 첫 3개월 동안 서로 연락이 닿을 때 까진 그랬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있어. 그때도 좀 이상했었는데…… 좀 더 많이 얘기할 걸……, 하는 생각이 들더라. 창욱은 진심으로 우울해 하고 있었다. 어땠었는데, 호철이가?

글쎄, 너무 필요 이상으로 말이나 몸짓이나, 과장한다 고나 할까. 조금 튄다 싶을 정도로 웃고 마시고 그러더라고. 원래 걔가 좀 차분한 애였잖냐? 그런데 그 날은 그렇더라고……. 그러다가 어제, 술 마시고 올림픽 대로에서 사고가 났대나 봐. 혈중 알코올 농도가 0.18이라던가…….

좀 자세히 얘기해 봐. 규승은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창욱은 침울하게 대답했다. 원래 걔가 진짜 친한 친구라든가 그런 게 없었잖아. 아까 어머님하고 통화하는데, 유서에다가 ‘죽음이 가장 확실한 의사 소통 도구라고 생각했습니다’ 라고 썼다더라. 자세한 건 잘 모르겠어.

창욱과 얘기를 하고 있는데, 다시 호출기가 울렸다. 연진의 번호였다. 규승은 갑자기 심한 두통을 느꼈다. 규승은 호출기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머리 뒤쪽을 주물렀다.

이번엔 연진의 전화번호와 메세지 있음이었다. 규승은 갑자기 머리 쪽으로 피가 몰리며 두통이 생기는 걸 느꼈다. 호출기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그 손으로 머리 뒤쪽을 주물렀다.

조문을 오겠느냐는 창욱의 말에 규승은 응, 갈게, 하고 말하려고 했지만 목이 울리지 않았다. 규승은 그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대로 썩어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규승은 말을 더듬으며 창욱에게 얘기했다. 어, 난 못 갈 것 같아, 요즘 바쁘거든.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순간의 감정일지도 모를 기분 탓에 동창이 죽은 자리에 모습을 나타내질 않다니. 규승은 자신이 속이 좁은 놈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호출기 번호를 차례로 눌렀다. 이윽고 연진의 차가운 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규승은 그 목소리를 듣고는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규승은 장기 보존을 하려다 말고 천천히 8번을 눌러 메시지를 삭제했다. 손가락을 버튼에 누른 채로, 차가운 전자음을 계속 들었다.

그리고 전화를 하는 것을 그만 두고 극장으로 돌아왔다.

전화, 했어? 민주는 언뜻 무심해 보이는 표정으로 물었다.

규승은 가볍게, 그러나 무겁게 웃으면서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저었다. 무대 위에선 민식의 연출 하에 배우들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규승은 입을 다물고는 그것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민주는 천천히 규승 쪽으로 와서 조용히 물었다. 왜 안 했어?

규승은 딴 사람이었어, 하고 말하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어서는 무대 뒤쪽으로 향했다. 민주는 그런 규승을 뒤에서 잠자코 보다가, 그 뒤를 빠른 걸음으로 쫓았다. 규승은 민주가 쫓아오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곧바로 자기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바닥에 쓰러져서 누웠다. 민주는 조심스레 규승의 방문을 열었다.

왜 그래, 규승아. 규승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서 민주 쪽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고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조금은 힘겨운 웃음을 지으며 민주에게 들어 올 거냐고 물었다. 민주는 아무 대답도 않고 방으로 들어와 앉았다. 그리고 민주는, 무표정으로 일관한 채 규승의 옆에 마주 앉았다.

그렇게, 어설픈 침묵이 1분이 넘도록 계속되자 규승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민주 누나, 오늘은 왜 그렇게 무뚝뚝해? 규승은 침묵을 깨뜨리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민주에게 물었다. 민주는 느릿느릿한 규승의 말이 끝날 때까지 아무런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말이 끝나고 나서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겠지, 당연히, 너무도 당연히. 규승은 민주 대신 대답했다. 나 같은 쓰레기……. 규승의 힘없는 말을 들으며 민주는 몸을 일으켜 규승에게 다가가 규승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규승의 손을 잡고 쓰다듬으며 얘기했다. 아냐, 넌 소중해, 나한테 규승인 소중해.

……그래, 그건 어찌 됐든 괜찮아. 나를 죽이면 되니까. 내 존재 목적이 사라졌으니까, 날 폐기하면 되니까. 규승은 민주가 잡고 있던 손을 빼면서 고개를 가볍게, 그러나 무겁게 저었다.

누나, 내가 괴롭혔던 그앤, 나를 미워할까? 싫어할까? 미워할까? 싫어할까? 규승은 가벼운, 그러나 무거운 목소리로 그렇게 얘기했다. 그 동안 민주는 소리 없이, 움직임 없이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규승의 얘기가 끝나자, 다시 손을 가져가서 만지작거리며, 입을 다물고 고아하게 웃으며 규승을 보았다. 규승아, 넌 너 자체로 소중해. 그러니까 제발, ……있어 줘.

나는 그애가, 날 그애의 것으로 만들어 줬으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애가 앉아 있는 의자의 한쪽 다리가 되어도 좋아. 나는 내가 아닌 다른 것으로 되어, 나란 존재, 나란 개체를 없애 버리고, 나에 대한 자의식을 날려 버리고, 그저, 그애의 것, 그애의 소유물,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렇게라도 일단은 남고 싶었어. 떠나지 않고, 멈추지 않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 이름을 잊고, 그렇게 남아서 존재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더 나은지, 내 판단을 갖고 살고 싶지 않아, 내가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고 싶지 않아, 완전히, 정말 완벽하게 도망치고 싶었어……. 그래서, 난 나란 존재를 지워버리고, 누군가의 소유물이 되고 싶었어. 하지만, 누나도 알겠지만, 그렇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규승은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쓰러진 채로 민주를 올려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아직, 누나 같은 고마운 사람들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렇게 말하고 규승은 눈을 뜬 채 가만히 움직이지 않았다. 민주는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가서 문을 꼭 닫고 문고리의 버튼을 눌러 문을 잠궜다. 그리고 입고 있던 스웨터 자락을 천천히 걷어 올렸다. 규승은 어느 새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민주는 어느새 속옷만 입은 채로 규승에게 다가와 규승의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규승의 셔츠를 벗기면서, 규승의 눈 위에 입을 맞췄다. 민주의 가만히 열린 입술 밑으로 규승의 눈에선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규승은 자신의 몸을 완전히 민주에게 맡기고 있었다. 아주 조용히 목소리를 억누른 채로, 벗기고, 만지고, 부비고, 서로 껴안는 간결한 행위의 간극에 규승은 민주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전달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것은 배설한 체액 같은 실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뜨겁고, 그것만이 그 순간의 자신을 채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자신의 호흡을 도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 긴 밤은 지나갔다.

연극이 끝나자 사람들은 어느새 모두들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리고, 텅 빈 객석과 조명이 꺼진 채 수명이 다 되어 가는 형광등 불빛만 불안하게 흔들리며 그 공백을 메우고 있었다. 그 순간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민주와 규승은 객석 복도 옆쪽에 서 있었다.

무슨 생각해?, 하고 민주가 묻자 규승은 잠자코 대답했다. 죽은 사람. 누구? 내 동창. 서울대 의대 다니던 놈인데, 차 타고 달리다가 어딘가에 뛰어들었나 봐. 자살이야? 그런가 봐. 아……, 나, 옛날에 만나던 사람도, 그렇게 죽었었는데.

규승은 순간, 전혀 다른 ‘민주 누나’를 보고 있었다. 민주는 예전에 보지 못했던 아련함이 어린 눈을 하고 있었다. 민주는 떨면서 말했다. 사람은, 문득 너무 쉽게, 그렇게 사라져 버려, 그리고 잊혀지고……. 어쩜 좋아, 지금까지 난 그 사람을 잊고 있었어. 민주의 감정이 고조된 모든 표정은 보는 사람에게 할 말을 잊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규승은 조용히 민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앞으로 커서도 서로를 기억할 수 있을까? 나, 그 사람 만날 때는 행복했어. 외롭지 않았어―물론 규승아, 너랑 있을 때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 사람, 어느 날 갑자기, 안녕이라더니,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트럭이랑 부딪쳤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래, 깨끗하게 그 자리에서 죽었겠지.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거야.

그 이후 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 그 사람과 있을 때 하던 모든 것들…… 모든 순간의 행복을 재생하고 싶었어. 오토바이 뒤에 올라서, 그 사람이 행복하냐고 물으면 난, 세상에서 우리가 제일 행복한 사람일 거야, 하고 소리질렀어.

하지만 나는 행복하지 않았어. 나는 그 사람들을 안아주려고 했지만, 다들 내 굴레를 부담스러워했어. 예전의 그 사람하고는, 나, 짧은 키스에도 서로 느껴지는 게 있었어. 하지만, 다른 사람들……. 그렇지 않았는데, 그래서 모두 다 잊었는데……. 난 지금까지, 왜 사람을 만났는지 잊고 있었는데…… 너와 있으니까, 그때의 행복, 조금씩 찾아드는 것 같아. 그리고, 그제서야 나, 그 고마운 사람이 생각난 거야…….

나는, 누군가에 잊혀진다는 게, 두려워. 서로 생각하는 마음이, 아름다운 만큼…… 그 잊혀지는 마음은, 안타까울 거야. 나는 잊혀지고 싶지 않아. 규승아, 나, 기억해 줄 거야?

나, 정말 행복해지고 싶었어. 가끔씩 꿈에서 그 사람이 나타나서, 이젠 행복해? 외롭지 않아? 하고 물을 때가 있어. 지금 나, 자신있게 대답해 주고 싶어. 이젠 행복해, 정말 행복해, 하고.

규승은 말없이 민주의 양손을 잡고, 그리고 입술을 맞대었다. 긴 키스 도중에 규승은, 누나, 잊지 않을게, 하고 끊임없이 얘기했다.

하지만 행복이란, 시간처럼 어느새 왔다가 어느새 사라지는 줄 모른다. 그 긴 키스를 하던 민주와 규승도, 이윽고 그 극장을 떠나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다. 공연이 끝난 극장처럼, 흩어지는 담배 연기처럼, 세월처럼……. 그렇게 사라지고는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민주는 집으로, 규승은 학교로 돌아갔고, 최소한 그 전처럼 외로워하지 않았다.

몇 년 후 여름이 막 끝나갈 무렵 규승은 서울에 있는 조그만 레스토랑에서 민주를 만난 적이 있었다. 민주는 규승이 만든 영화 팜플렛을 들고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모델로 성공은 하지 못했지만, 조그만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평범한 남자와 만나 아기자기하게 살았고 그런 생활의 활력이 그 시절의 그녀를 여전히 아름답게 한 모양이었다.

어때, 지금 결혼은 했어?

응. 누나 남편만큼 소박하고, 참 편한 여자야. 옛날의 그녀―김연진―하고 와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평범한 여자.

너랑은 안 맞는 거 아니야?

아, 누구보다 나를 사랑해.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뭐.

잘 됐네.

참, 그때 얘길 들려줬어.

그때? 언제?

우리가 같이 잤던 때.

훗. 그래서, 어땠어?

어땠냐고 물어 보며 웃던데?

민주는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살며시 회상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담백했어, 그때는.

그리고, 고개를 들어, 세상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은 저물어 가는 석양과 교감 중이었다.

규승아, 지금은 숨쉴 수 있니?

좀 가쁘지만, 괜찮아.

잘 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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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5월.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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