맙소사, 이 앨범의 제목은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라 'les miserables'(악쌍은 넘어가고)이다. 그것부터가 이 앨범의 '실수'에 가까운 태도를 지시하고 있는게 아닐까? 나는 위선도 선이라고 생각하고 살지만 이쯤 되면.. 좀 너무 세련된 것 아닌가? 어쩌면 화법이 앞서서 진심이 가려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메시지 송은 락이나 포크여야만 한다는 그런 음악적 편협함? 편견? 이 있는 지도 모르겠지만, 보사노바나 재지한 스탠더드 챔버 팝으로 착한 노래를 부르는 이 '잘 빠진 세련된' 음악이 어쩐지 '들으나마나' 하게 들리는 건 왜일까. 그건 아마 조윤석의 가사쓰는 방식,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 때문이기도 한데.
음악적으로만 볼 때 이 앨범은 참 잘 빠진 앨범이다. 유희열이 자기가 진행하는 프로에서 '이 앨범을 듣고 참 많이 반성했'다고 말했는데, 그런 말을 왜 했는지 어렴풋 알것도 같다. 유희열은 3집,4집,5집을 통해 음악적으로 다채로워졌으며, 한국땅에서 어덜트컨템포러리 팝뮤지션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을 정확히 짚어냈지만.. 인기를 얻고 연예인이 되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면서부터 나온 앨범은 사실 초기 사카모토 류이치를 베껴버렸기 때문이다. 비슷한 짓을 하던 김현철이나 윤상도 한 번씩 겪던 문젠데.. 조윤석의 이 앨범은 어쨌든 '할 수 있는 것'을 개정증보해내고 있으며, 한국적인 포크-어덜트컨템포러리 씬 내에서 어떤 가치의 조응을 만들어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앨범은 음악적으로 볼 때 지난 3장의(혹은 4장의) 솔로 앨범들로부터 한 발짝도 발전하지 못한 앨범이지만, 그런 제자리걸음이 마냥 매너리즘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이 유희열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걸어가자> 간주의 복잡한 편곡과 악기 편성은 <파노라마>의 성공적인 기타 리프와 <몽유도원>의 실패한 일렉트로니카 사이를 맴돈다. 그리고 누구나 <걸어가자>가 전작의 <날개>나 1집의 <풍경은 언제나>를 또 다시 부르고 있는 것에 다름아님을 느낄 수 밖에 없겠지.
어쩌면 이 앨범의 정서를 가장 잘 드러내는 곡은 챔버팝인 <고등어>일텐데.. 건반에 스트링에 콘트라베이스에 나일론기타에 알토색소폰? 까지 동원한 세련된 편성에다가 '나를 고를 때면 내 눈을 바라봐줘요 나는 눈을 감는 법도 몰라요 가난한 그대 날 골라줘서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오늘 하루도' 같은 짠한 가사를 얹는다. 김창완의 목소리로 듣던 <어머니와 고등어>에서부터 노라조의 신나는 <고등어>까지.. 고등어는 사실 이름만 빼고 모든 것이 하등한 서민들의 친구로, 이전까지의 노래는 고등어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노래를 한 건데 반해 조윤석은 아예 화자로서의 고등어를 들이민다. 이건 시에서나 가능한 것은 아닌가? 직접 불러야 하는 가사에서는 신중해야 한다. 노래는 가창되는 순간, 몇 분간의 자기-내러티브의 '분명한 시간'을 갖는다. 지면 상의 시와 낭송하는 시가 다른 이유는 물리적 육성의 확산, 그리고 그 시간의 지속이라는 분명한 특징 때문이다. 메시지송이나 내러티브가 있는 스토리송은 영화음악이나 뮤지컬이라는 제의적인 조건이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다보니 <고등어> 같은 가사를 들으면.. 조윤석은 정말 '착한 사람 컴플렉스' 같은 게 걸려서, 착한 노래를 부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응시를 강박적으로 되풀이하는 셈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일테면 이런 것이다. 이전에 <오, 사랑>에서 당신을 만나기 위해 돛대가 없어도 바다를 가르던 '나'는, 마침내 스스로 '고등어'가 되어 '나를 원하는 곳으로 (자유롭게) 헤엄치'는, '돈이 없는 사람들도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바다를 가른다. 그러니까 사실 이 노래를 지탱하고 있는 이면적인 감정은 연애인데, 그것이 표면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우리 곁의 가난한 억울한 죽음이다. 이러한 '3인칭의 1인칭화'가 성공적인지 아닌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분명 어색하게 들리는 것만은 사실이다. 첫 트랙인 <평범한 사람>은 '보사노바 양념을 치고 나일론 기타로 맛을 낸' (운동권) 포크송의 21세기식 리바이벌인데, 이 작위적인 가사를 보면 그 '오르고 또 오르던' 사람들이 투쟁현장의 망루에 오르던 사람, 혹은 지난해 투신자살한 전임 대통령의 목소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자신이 대신한다. 조윤석은 마치 자기가 무당이라도 된듯 살풀이를 해내려고 하지만.. 살풀이 치고는 곡이 너무 유려하다는 게 문제겠지. 그런 게 아니라면 설마 죽은 사람들을 꼭두각시로 내세워 복화술을 하고 싶은 건가? 그런거라면 좀 고약하지 않나.
타이틀트랙인 <레 미제라블>은 두 곡으로 되어 있는데, 두 남녀의 헤어짐을 남자와 여자 목소리로 각각 부르는 일종의 뮤지컬송인데.. 준희가 광주 얘기가 아니겠느냐, 라고 해서 가사를 뜯어보니 광주 얘기로 해석될 여지가 참 많은데.. 음악은 광주가 아니라 어디 니스나 깐느나 아비뇽쯤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철수와 영희가 헤어지는 게 아니라 폴과 마리가 헤어지는 게 이 노래라는 거지. <버스, 정류장>에서 '정류장에서'라고 안 하고 'sur le quai'라고 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불쌍한 사람들'을 굳이 'les miserables'라고 한 이유도 모르겠고. 그러니까 결국 이 노래들 역시, 지탱하고 있는 건 '이런 추운 날에는 트뤼플을 먹으며 뱅 쇼를 곁들어야지'하는 연애 감성으로 만든 메시지송이라는 거지. 물론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 프랑스 혁명기를 운위하는 건 알겠고, 리영희 선생도 만년에 <레 미제라블>을 다시 읽고 느끼신 바가 있다고 하신 것도 있지만.. 아무리 그렇게 연결해서 들으려고 해도 이건 너무 세련된 노래다. 이건 GQ에서 환경문제를 운운하는 것보다 좀 더 심한 것 아닌가? 이 노래를 들으면서 감동해야 하는 건 멋들어진 스트링 편곡에서일까, '조금 더 살고 싶어요'와 '그댈 어떻게 잊어요'로 대구를 맞춘 가사에서일까? 그리고 그 '감동에의 의무'에 당혹스러워하는 내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이전까지 나왔었던 메시지송이었던 <사람이었네>나 <kid>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치질>이나 <진달래 타이머>가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확실히 하고 있는 노래였던 반면에.. 이 앨범은 타자의 목소리를 담으며 주체가 타자를 점령해버린 앨범이다. 레비나스식으로 말해 주체가 타자의 인질이 된 게 아니라.. 타자가 주체의 포로가 되어 있다는 거지. 그래놓고 이렇게 세련된 음악을 듣게 만든다. 이 모든 경험을 제공하는 이 앨범을 듣는 시간이.. 우리의 죄책감을 자극시키려는 의도에서 계산된 결과물이라면 정말 대단한거고. 그럴린 없겠지만 말이지. 생각해보면 그냥 앨범 제목만 '불쌍한 사람들'이었어도 많은 게 괜찮아졌을텐데.. 왜 굳이 불어를 사용한 걸까? 경상도 사투리와 프랑스말이 억양상, 발음상 가장 먼 언어인데 말야.
음악적으로만 볼 때 이 앨범은 참 잘 빠진 앨범이다. 유희열이 자기가 진행하는 프로에서 '이 앨범을 듣고 참 많이 반성했'다고 말했는데, 그런 말을 왜 했는지 어렴풋 알것도 같다. 유희열은 3집,4집,5집을 통해 음악적으로 다채로워졌으며, 한국땅에서 어덜트컨템포러리 팝뮤지션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을 정확히 짚어냈지만.. 인기를 얻고 연예인이 되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면서부터 나온 앨범은 사실 초기 사카모토 류이치를 베껴버렸기 때문이다. 비슷한 짓을 하던 김현철이나 윤상도 한 번씩 겪던 문젠데.. 조윤석의 이 앨범은 어쨌든 '할 수 있는 것'을 개정증보해내고 있으며, 한국적인 포크-어덜트컨템포러리 씬 내에서 어떤 가치의 조응을 만들어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앨범은 음악적으로 볼 때 지난 3장의(혹은 4장의) 솔로 앨범들로부터 한 발짝도 발전하지 못한 앨범이지만, 그런 제자리걸음이 마냥 매너리즘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이 유희열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걸어가자> 간주의 복잡한 편곡과 악기 편성은 <파노라마>의 성공적인 기타 리프와 <몽유도원>의 실패한 일렉트로니카 사이를 맴돈다. 그리고 누구나 <걸어가자>가 전작의 <날개>나 1집의 <풍경은 언제나>를 또 다시 부르고 있는 것에 다름아님을 느낄 수 밖에 없겠지.
어쩌면 이 앨범의 정서를 가장 잘 드러내는 곡은 챔버팝인 <고등어>일텐데.. 건반에 스트링에 콘트라베이스에 나일론기타에 알토색소폰? 까지 동원한 세련된 편성에다가 '나를 고를 때면 내 눈을 바라봐줘요 나는 눈을 감는 법도 몰라요 가난한 그대 날 골라줘서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오늘 하루도' 같은 짠한 가사를 얹는다. 김창완의 목소리로 듣던 <어머니와 고등어>에서부터 노라조의 신나는 <고등어>까지.. 고등어는 사실 이름만 빼고 모든 것이 하등한 서민들의 친구로, 이전까지의 노래는 고등어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노래를 한 건데 반해 조윤석은 아예 화자로서의 고등어를 들이민다. 이건 시에서나 가능한 것은 아닌가? 직접 불러야 하는 가사에서는 신중해야 한다. 노래는 가창되는 순간, 몇 분간의 자기-내러티브의 '분명한 시간'을 갖는다. 지면 상의 시와 낭송하는 시가 다른 이유는 물리적 육성의 확산, 그리고 그 시간의 지속이라는 분명한 특징 때문이다. 메시지송이나 내러티브가 있는 스토리송은 영화음악이나 뮤지컬이라는 제의적인 조건이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다보니 <고등어> 같은 가사를 들으면.. 조윤석은 정말 '착한 사람 컴플렉스' 같은 게 걸려서, 착한 노래를 부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응시를 강박적으로 되풀이하는 셈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일테면 이런 것이다. 이전에 <오, 사랑>에서 당신을 만나기 위해 돛대가 없어도 바다를 가르던 '나'는, 마침내 스스로 '고등어'가 되어 '나를 원하는 곳으로 (자유롭게) 헤엄치'는, '돈이 없는 사람들도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바다를 가른다. 그러니까 사실 이 노래를 지탱하고 있는 이면적인 감정은 연애인데, 그것이 표면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우리 곁의 가난한 억울한 죽음이다. 이러한 '3인칭의 1인칭화'가 성공적인지 아닌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분명 어색하게 들리는 것만은 사실이다. 첫 트랙인 <평범한 사람>은 '보사노바 양념을 치고 나일론 기타로 맛을 낸' (운동권) 포크송의 21세기식 리바이벌인데, 이 작위적인 가사를 보면 그 '오르고 또 오르던' 사람들이 투쟁현장의 망루에 오르던 사람, 혹은 지난해 투신자살한 전임 대통령의 목소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자신이 대신한다. 조윤석은 마치 자기가 무당이라도 된듯 살풀이를 해내려고 하지만.. 살풀이 치고는 곡이 너무 유려하다는 게 문제겠지. 그런 게 아니라면 설마 죽은 사람들을 꼭두각시로 내세워 복화술을 하고 싶은 건가? 그런거라면 좀 고약하지 않나.
타이틀트랙인 <레 미제라블>은 두 곡으로 되어 있는데, 두 남녀의 헤어짐을 남자와 여자 목소리로 각각 부르는 일종의 뮤지컬송인데.. 준희가 광주 얘기가 아니겠느냐, 라고 해서 가사를 뜯어보니 광주 얘기로 해석될 여지가 참 많은데.. 음악은 광주가 아니라 어디 니스나 깐느나 아비뇽쯤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철수와 영희가 헤어지는 게 아니라 폴과 마리가 헤어지는 게 이 노래라는 거지. <버스, 정류장>에서 '정류장에서'라고 안 하고 'sur le quai'라고 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불쌍한 사람들'을 굳이 'les miserables'라고 한 이유도 모르겠고. 그러니까 결국 이 노래들 역시, 지탱하고 있는 건 '이런 추운 날에는 트뤼플을 먹으며 뱅 쇼를 곁들어야지'하는 연애 감성으로 만든 메시지송이라는 거지. 물론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 프랑스 혁명기를 운위하는 건 알겠고, 리영희 선생도 만년에 <레 미제라블>을 다시 읽고 느끼신 바가 있다고 하신 것도 있지만.. 아무리 그렇게 연결해서 들으려고 해도 이건 너무 세련된 노래다. 이건 GQ에서 환경문제를 운운하는 것보다 좀 더 심한 것 아닌가? 이 노래를 들으면서 감동해야 하는 건 멋들어진 스트링 편곡에서일까, '조금 더 살고 싶어요'와 '그댈 어떻게 잊어요'로 대구를 맞춘 가사에서일까? 그리고 그 '감동에의 의무'에 당혹스러워하는 내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이전까지 나왔었던 메시지송이었던 <사람이었네>나 <kid>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치질>이나 <진달래 타이머>가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확실히 하고 있는 노래였던 반면에.. 이 앨범은 타자의 목소리를 담으며 주체가 타자를 점령해버린 앨범이다. 레비나스식으로 말해 주체가 타자의 인질이 된 게 아니라.. 타자가 주체의 포로가 되어 있다는 거지. 그래놓고 이렇게 세련된 음악을 듣게 만든다. 이 모든 경험을 제공하는 이 앨범을 듣는 시간이.. 우리의 죄책감을 자극시키려는 의도에서 계산된 결과물이라면 정말 대단한거고. 그럴린 없겠지만 말이지. 생각해보면 그냥 앨범 제목만 '불쌍한 사람들'이었어도 많은 게 괜찮아졌을텐데.. 왜 굳이 불어를 사용한 걸까? 경상도 사투리와 프랑스말이 억양상, 발음상 가장 먼 언어인데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