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삶은 고생스럽다. 매 순간 아름다울 것을 강요받는다. 충분히 예쁜데도 더 예쁘게 꾸며야 한다. 여자는 시집가면 그만이라는 말은 전설이 됐다. 여성도 당연히 사회생활을 꾸려나갈 능력을 갖춰야 한다. ‘한국여자’로 사는 것은 더욱 힘들다.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억울하다고 말하는 순간, 더 많이 억울해 할 일이 생긴다. 성차에 따른 차별적 위계질서를 문제 삼고 실질적 평등을 요구하는 데에는, 다시 말해 ‘페미니스트’가 되는 일에는 더욱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물론 가시적인 생명의 위협에 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성은 차별 받는다’거나, ‘양성평등은 옳다’라고 입 밖에 내는 순간, 보이지 않는 낙인이 점차 새겨져 온다. 입에 담기도 민망한 말, ‘꼴통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도 달린다.
꼴통 페미니스트, 줄여서 ‘꼴펨’ 혹은 ‘꼴페미’라는 말은 공식적으로는 ‘금지된 말’이다.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 보면 무수한 웹페이지들이 쏟아져도 이 말을 사용한 제도권 매체의 기사는 검색되지 않는다. 하지만 제도권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다고 해서 ‘꼴펨’이라는 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어떤 맥락에서 사용하며 얼마만큼 모욕적이고 폭력적인 말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가끔은 생면부지의 불특정다수에게 그 말을 듣기도 한다.
인간을 구분하고 현상에 이름을 붙여 신조어를 만드는 일은 제도권 언론의 담당이었다. 사회과학자들의 관찰과 수사를 매체에서 수용하고 전파하면서 점차 일반 대중에게 퍼져나가는 것이 신조어의 일반적인 탄생 과정이었다. 그러나 인터넷은 언어시장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이제 사람들은 개념어가 필요할 때 저마다의 게토에서 제 입맛에 맞게 새로운 말을 만들어낸다. 근래에는 도리어 제도권 언론에서 직접 나서서 이들 신조어를 채집해 사회현상으로 인증하기도 한다. 이 ‘신조어의 길거리 캐스팅’에는 찝찝한 구석이 있다. 몇 개의 음절로 세상을 답파하는 것은 즐거울 수도 있지만, 우리가 듣곤 하는 대개의 말들은 편 가름과 다툼을 위해 태어난 것들이다. ‘-녀’로 끝났던 수많은 말들이 그렇다. ‘된장녀’라는 말은 어원도 쓰임새도 불분명하지만, ‘남자 등쳐 먹는 여자(gold digger)'부터 알파 걸(alpha girl)에 이르는 폭넓은 내포를 자랑하며 자본주의 시장에서 여성의 삶을 조롱하고 압박하고 있다. 숱한 인터넷 마녀 사냥의 과정에서 아스라진 수많은 ’-녀‘들을 여기서 더 언급하지 않겠다. ’토이남‘, ’초식남‘처럼 남자들을 겨냥한 말도 있다. 하필이면 모두 남성성을 결여한, 나약한 남성을 부정적으로 부를 때 쓰는 말들이다. 초식남의 여성명사는 ’건어물녀‘다. 불공평한 일이다. 왜 외로운 남자는 풀 먹는 온순함으로 설명되고, 외로운 여자는 말린 오징어에 비유되는 것인지.
최신조어 ‘꿀벅지’도 언어 시장에서 당당히 유통되고 있다. 블랙마켓의 자매품으로 ‘꿀덩이(꿀+엉덩이)’라는 말도 있는 모양이지만, 아직 정식 출시되지는 않았다. 된장녀 논란 때에도 그 조어 과정이 미궁에 빠졌듯, 이 기묘한 신조어 역시 어원에 관한 가설들이 분분하다. 먹는 꿀인지, 돼지 울음소리인지, 아니면 ‘기분이 꿀꿀하다’고 할 때의 그 꿀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유력가설을 채택해 보려고 해도, 보행을 위한 인간의 신체와 식물이 만들어내는 단당류 혼합물을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 것일까? ‘꿀’은 모름지기 사과나 참외 같은 과일과 합쳐져야 하는 말이 아닐까.
‘꿀벅지’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대담해진 아이돌 걸그룹들의 패션이 있다. <소원을 말해봐>를 부른 소녀시대는 핫팬츠를 입고 연신 각선미를 뽐냈다. 브라운 아이드 걸스도 핫팬츠를 입고 거만한 스탠스로 허리를 흔들었다. 이 신조어의 소유권을 주장할 법한 유이가 속한 애프터스쿨의 옷차림은 보다 노골적이다. <diva>로 활동할 무렵 애프터스쿨 멤버들은 캘빈 클라인 언더웨어의 핫팬츠를 입었다. 패션에 무지한 남자들은 그 옷을 보며 자신들의 속옷을 떠올린다.
다리를 드러내는 패션 트렌드의 레퍼런스는 헐리웃 스타들이다. 비욘세와 시애라, 제니퍼 러브-휴잇이 그렇다. 그들과 한국 아이돌의 다리에 담긴 의미가 서로 온전히 같아 보이지 않는다. 비욘세나 제시카 알바도 출산 후 체중 문제로 고민에 빠진다지만, 그들이 각선미를 관리하기 위해 카복시 주사를 맞아가며 활동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씩 셀룰라이트가 드러나기도 하는 그 다리에 붙여줄 수 있는 레토릭은 ‘꿀벅지’라기 보다는 ‘건강미’ 쪽이다. 그들의 다리에는 어떤 반-미학과 성적 자유의 맥락까지 담겨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누군가의 다리를 보고 꿀벅지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을 인격에 덧칠하는 추문으로 사용하는 그때 그녀는 아름다운 신체 부위로서의 다리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그 다리가 된다. 결국 꿀벅지라는 말은 페티시즘의 욕망 외에는 딱히 담고 있는 것이 없는 가벼운 말이다. 성적인 욕망을 갖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성적인 욕망을 함부로 드러내고, 어떤 말로 대상을 가두려고 하는 것이 음험한 것이다.
유이가 ‘꿀벅지라는 별명에 기분이 나쁘지 않다’라고 해서, 그녀를 계속 꿀벅지라고 불러도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종류의 언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될 때 느껴지는 불쾌함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분명 사회적인 문제다. 가부장적 응시에 의해 분절적으로 포착된 다리를 고작 식품에 치환시키는 상상력의 과정 전반을 우리는 불쾌해 해야 한다.
패션은 분명 자기만족인 동시에, 사회적인 소통의 수단이다. 여성의 신체에 대한 아름다움이 내재적이고 본질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기준이 오로지 남성적인 응시, 남성의 미적 주체성과 결부되는 것만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스스로를 사진 찍는 행위인 ‘응시’를 벗어난 순수한 나르시시즘을 실천할 수는 없다. 순수한 나르시시즘이라고 한다면,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아무 것도 찍어 바르지 않고, 누구와도 만나지 않을 때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아름다운 여성이 외모 권력을 소유함으로써 파워우먼이 될 수 있을지라도, 보부아르가 말했듯 여성이 아름다운 외모를 원하고 자기애에 빠지는 것은 이 광폭한 남성지배 사회에서의 가녀린 생존전략일 뿐이다. 때에 따라서는 완벽해 보이는 변신도 있다. 만 레이의 모델이자 장 꼭또의 <어느 시인의 피>에 출연했던 리 밀러는 만 레이의 모델이었다. 만 레이에게서 사진을 배운 그녀는 <Vogue>의 종군기자로서 제 2차 세계대전 현장을 누볐다. 대상에서 주체로 완벽하게 변신한 것이다. 만년에는 사진을 그만두고, 요리의 여왕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나 리 밀러가 될 수는 없다.
매일 아침 여성들의 자존심은 뿌리부터 흔들린다. 세안을 하고 화장을 하고 입을 옷을 고르는 데 이르는 수많은 협상에서 대다수의 여성은 약자다. 여성들의 자존감이 꿈꾸는 이상향은 슬프리만치 한결같다. 마른 몸에 가슴은 커야 좋다. 경추와 척추는 곧고 당당해야 한다. 엉덩이와 다리에 탄력이 더해지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여성 신체의 미학이란 아직도 헬무트 뉴튼 사진의 피사체에서 조금도 발전하지 못했다. 신디 셔먼이 촬영한 레이 가와쿠보의 안티패션 미학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언캐니(uncanny)한 아방가르드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성들에게 패션이 중요한 이유는 여성이 본디 심미적인 존재여서가 아니다. 많은 여성에게 있어 패션 매거진은 자기 인적자본 확충의 매뉴얼로 기능한다. 패션을 논하는 미디어들은 나름대로 저마다의 미학과 인문학을 전달하려고 무던 애를 쓰지만, 취향과 품위가 온전히 소통된다는 말은 거짓말일 것이다. 패션에 매달리는 여성들을 다만 계속 염려해야 한다. 패션 매거진은 예뻐지려는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개별적 욕망들을 거짓되게 추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응원하고 도와준다고 말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대한민국의 남자들이 꿀벅지 따위의 말에 갇혀 살아야 하는 여성들에게 품는 성적 욕망을 책망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무쇠팔 무쇠다리’에게도, 똑같은 인격적 존중과 정치적 공정성을 갖추고 사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묻는 것이다. 튼튼한 무쇠 팔 무쇠다리는 꿀벅지보다 더 예쁜 것이다. 더 강한 것이다. 그러니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