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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15 <살인의 추억>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 386 세대에 관한 글을 쓰다가 생각나서, 아주 오래전 썼던 글(그러니까 영화가 개봉했던 2003년인가 2004년쯤)을 웹 어딘가에서 찾아내서 올려본다. <살인의 추억>은 386세대의 부채의식-망각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들은 대단히 놀랍다. 맑고 청명한 날, 아이들이 뛰어놀던 시골 마을의 하수도에 결박된 시체가 처박혀 있다. 누렇게 익어간 논밭과 흙내음이 묻어나는 시골길, 푸른 하늘과 동산의 능선. 그리고 제목이 그 가운데에 새겨진다. 이성과 계몽을 숭배했던 마지막 시절, 온갖 비이성이 판치던 그때 박두만(송강호 분)은 동네 양아치와 피해자의 주변인물을 데려다 놓고 조서를 쓴다. 곧 이어 이향숙의 시체가 발견된다. 짧은 커트분할의 몽타주인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에 이은, 이향숙의 시체를 둘러싼 롱테이크 시퀀스 역시 이 영화의 세심함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러나 일련의 장면들은 ‘우습다’. 이성의 숭배와 비이성의 현현(顯現)이 빚어낸 것이 당대이니, 우스운 것이 적확한 재현 방식이었으리라. 
 
 그러나 이 영화는 웃음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웃음 뒤에 찾아든 절망, 그 슬픔과 분노에 관한 영화이다. 등화관제를 통해 인위적인 암흑을 만들던 시대, 어두운 곳에서 새어드는 빛을 향해 불안한 눈빛을 쏘아보던 시대이다. 구석 자리를 좋아하며 면과 춘장을 따로 시키는, 그리고 ‘서류’를 믿는 서태윤(김상경 분)은 근대적이고 서구적인 도시 서울 사람(그래서 박두만은 그에게 ‘네가 FBI냐, 미국에나 가라’라고 말한다)인 우리의 분노이다. 객관적 자료와 이성적 추리를 신뢰하던 우리는 그것이 깨어져나가던 어느 순간,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던 것. 반면, 욕 잘하고 자칭 ‘무당눈깔’에다 ‘한국 형사는 발로 뛴다’라는 신조를 갖고 사는 박두만과 그의 파트너 조용구(김뢰하 분)는 전근대적(이것은 가치중립적 용어다), 향토적, 한국적인 비-서울인 우리의 슬픔이다. 그들은 이성을 신봉한 적은 없으나 (억압적, 왜곡적) 계몽의 객체였고, 서울-지배 체제의 이성적 억압에 자발적으로 뛰어들던 이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시대의 휘청거림에 다리를 절단하고, 수갑을 찬 용의자 박현규(박해일 분)에게 총을 쏘며 분노하는 서태윤을 막아들고는 그의 얼굴을 잡고 멍한 표정을 짓는다. ‘밥은 먹고 다니냐?’, ‘씨바 모르겠다, 가라’. 박두만이 박현규의 얼굴을 아귀에 쥐고 그렇게 말하던 순간, 우리는 지독하게, 섬뜩하리만치 슬프다.

 이 영화가 80년대를 재구성(recompose)하고 재현(represent)하는 방식은 새롭다. 영화가 사실상 80년대의 어떤 정치성의 연장에 대한 언급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성이 빚어낸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깨어졌으며, 자유와 해방의 이념을 이야기하는 시대는 갔다. 감독은 80년대로부터 빚진 것이 없는 모양이다. 같은 시기에 개봉한 <품행제로>나 <해적, 디스코왕 되다>처럼 80년대를 낭만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아니고, 박광수나 장선우의 영화처럼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담론에 대한 선언을 담고 있지도 않다. 보다 적확히 말한다면 <살인의 추억>은 이창동의 <박하사탕>과 대척을 이루는 동시에 같은 지점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박하사탕>은, 요약하면, 순수가 억압된 90년대 인간군상이 갖고 있는 80년대에 대한 낭만적 추억에 더하여, 인간을 억압한 거대구조와 사회적 모순에 반대하여 윤리적 거점의 마련을 모색하고 있는 영화이다. 그러나 <살인의 추억>은 80년대를 이명세 같은 방식을 통해 아름다운 시기로 말하고 있지도 않으며, 이창동처럼 윤리의 틀로서 이용하지도 않는다. 그가 80년대를 다루는 방식은 쿨(cool)하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 이 영화가 80년대의 정치적 정황에 대한 언급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오히려 다양한 양상의 억압으로 인해 느끼는 절망과 분노, 그리고 슬픔이라는 인생사의 원형을 다루고 있다. 80년대에 대한 부채 의식이나 윤리적 선언에 기대지 않았다는 것은 80년대 화성의 문제를 지금-여기의 문제로 바꿀 수 있으며 그 느낌을 치열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영화는 지명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도 않으며, 80년대적 소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대통령 환영인파나 등화관제, 혹은 시위진압과 같은 삽화로서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어떤 상황으로서 재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감독이 기억하여 재현하고 있는 80년대의 디테일은 대단히 놀라운 것이다. 사이렌이 울리고, 아이들은 시끄럽게 떠들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86년, 정치적으로 시절이 하 소상하던 서울의 겨울은 길고, 더럽고, 냄새나는 배설물을 만들어냈으며 거기에 화성의 연쇄 살인 사건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적 재현은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와 수미쌍관을 이루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의미의 현재성(혹은 동시대성)을 적절히 드러내고 있다. 처음 시체가 발견된 하수구에서 박두만은 언젠가 뻔한 얼굴의 남자(‘불특정다수’의 대표자)가 들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여,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영화의 티져 포스터가 던지는 화두는 비단 사건의 범인 혹은 범인들(복수의 범죄자의 가능성도 있으므로)에 대한 물음만이 아닐 것이다. 라디오에서는 비가 내리는 날 밤(자연적 억압)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가 흐르고 있으며, 사태를 진압할 경찰 인력은 부족하고(거시적 억압), 우리는 그 흔한 반목과 질시에 무기력했다(미시적 억압). 머지않아 또 하나의 시체가 발견되리라―그러던 때의 당신은 ‘지금’ 어디 있는가? 그때 우리는 그들을 잡지 못했다. 지금은 과연 다를 수 있는가?

 지난 80년대와의 관련성을 굳이 드러내지 않은 영화는 다시 말하면 오늘의 삶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쿨한 태도란 기실 체현(embodiment)의 가벼움이나 시대감각(fashion)에 대한 기민한 대응과 유의어가 아닌가. <살인의 추억>의 80년대의 이미지와 메타포들은 이념, 이성, 해방, 자유, 민주주의와 같은 거대 담론을 벗고 바라본 것들이다. 감독의 시선의 형편이란 형사를 그만두고 녹즙기 판매원이 된 2003년 오늘 박두만의 마지막 모습에 여실히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2003년, 박두만은 이미 타협한 자다. 중산층, 양복, 접대, 그리고 예금 통장, 그리고 가족주의라는 권위의 은밀한 질서 체계와 악수한 자다. 이미 일선에서 물러난 그의 무당눈깔은 이제 가장으로서의 권위의 무기이다. 다만 절망에 일그러졌던 우리의 모습과, 그 속에 숨어 있던 낯부끄러운 시대가 담담한 어조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은 그래서 기본적으로 후일담이다. 90년대 이후 우리가 맞부딪친 문제는 ‘무엇이 가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생활/생존할 것인가?’의 문제인 동시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였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인 동시에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자리에 대한 물음인 것이다.이 물음은 그러나 역사적 맥락을 상실한 사변적인 물음이 아니다. 우리는 생활세계와 체계의 긴장속에서 살지만, 그 틈으로 다른 세계로 나아가고 싶어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원형적 모습인 희망 아닌가―누군가가 희망은 오히려 절망의 유의어라고 했다. 추억 속에서 우리는 그것들을 발견하는 것.


ps. 연쇄살인을 다룬 영화로서 최근 알려진 대표작으로는 데이빗 핀쳐 David Fincher의 <세븐(Se7en)>이 첫손에 꼽히리라. 서태윤의 캐릭터는 사실상 핀쳐가 만든 윌리엄 서머셋의 원형으로부터 데이빗 밀즈의 원형으로 변화하는 어떤 현상이다. 그래서 그는 주연이 아니며,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 등장하지 않는다.
2ps. 첫 시퀀스에 등장하는 송강호를 따라하던 아이는, 글쎄, 처음엔 리바이벌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인가 했지만. 그냥 봉준호 개인적인 경험에 나온 소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 마치 보일러 김씨처럼.
3ps. '우울한 편지'가 담긴 유재하의 첫 앨범은 87년 상반기에 발매되었다. 86년 9월부터 강간이 시작되었다면, 그것 하나는 삐끗했다.
Posted by toto le he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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