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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1.06 reading <foe>

다니엘 디포(Daniel Defoe)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의 주인공 크루소만큼 일반 대중에게 보통명사로서 통용되고 있는 소설의 인물도 드물다. 그는 홀로 자연을 정복해 나아가는 계몽주의 시대의 근대적 주체의 원형이었고, 의사소통의 중요한 필요성을 사람들에게 답파했으며, 아울러 고독과 신앙의 고행을 이겨낸 위대한 영웅이었다. 전형적인 ‘근대인’의 모습을 스스로 체화하고 있는 것. 그러나 존 쿳시(John. M. Coetzee)는 디포가 창조해 낸 이러한 근대적·계몽적·개인주의적인 인물인 크루소에 기대어 (탈)현대의 탈중심, 혹은 다중진리 서사의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소설은 쿳시가 등장시킨 새로운 인물인 수잔 바턴이, 소설가 포에게 보내는 서간문으로 시작하고 있다. 자신이 배에서 쫓겨나 표류한 끝에 당도한 무인도의 크루소와 프라이데이와의 경험을 들려주며 이에 관한 이야기를 써주기를 간청한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크루소는 그녀의 주인인 동시에 설명할 수 없는 관계의 연인이기도 했다. 크루소는 또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아집으로 가득하고, 인간답게 살고 싶은 의지도 없는 늙은이에 불과하다. 프라이데이는 (우리에게 알려진 것과 다르게) ‘혀가 없으며’ 따라서 욕망이나 불만을 표현할 수 없고, 다만 28년간 주인의 말에 순종했다(혹은 할 수 밖에 없었다).
다니엘 디포는 바턴의 이야기를 소설로 옮겨주지만, 바턴의 이야기를 각색하기를 원한다. 바턴은 그런 디포가 못마땅하고(‘제 삶은 이야기가 되어버렸고 이제 제삶은 남아있지 않네요’), 하여 텍스트의 주권을 두고 벌이는 디포와 바턴의 공방전이 계속된다. 이 과정에서 서로의 갈등은 실제적 경험과 그것을 옮기는 언어 사이의 전후관계, 즉 언어가 실제의 반영인가 아니면 언어가 실제를 주조하는가 하는 문제를 내보인다.
유년기를 뜻하는 영어 infancy의 어원은 ‘말할 수 없음’이다. 유아를 뜻하는 단어의 경우 프랑스어나 스페인어권에서는 그것을 사람이 아닌 사물로 취급된다. 언어를 획득하지 못한 인간은 인간으로서 인정되지 않으며, 아울러 인간성의 또 다른 단초인 젠더(gender)도 ‘지워진’다. 프라이데이의 이름은 사람도 사물도 아니며, 나아가 혀가 없으므로 소통할 수 없다. 나아가 그는 젠더가 없으므로(거세된 인간으로) 주인공인 바턴과 동침할 수도 없고, 궁극적으로 근대-서구-백인-남성의 시각에서 ‘원숭이와 다를 것 없는’ 존재이다(인간만이 동족인 인간을 ‘인간이 아닌 어떤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근대적 언어의 특성은 바턴에 의해 지적된다(‘신이 글을 쓴다면, 그는 우리가 읽을 수도 없는 비밀스러운 글을 쓸 것이고, 우리가 바로 그 글의 일부인 거지요’). 근대적 언어는 ‘신’, 혹은 ‘이성’이나 ‘논리’, ‘이데아’ 같은 형이상학적 개념을 우선시했으며 따라서 그러한 개념을 기준으로 기호화, 의미화, 나아가 중심화된 언어이다. 근대 언어의 관점에서 문학의 펜(pen)은 텍스트의 주인의 똑바로 선 욕망과 절대적인 어떤 것을 드러내는 페니스(pennis)였다. 문학작품을 매개하는 언어로부터 그것이 미학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일관된 주제를 제거할 경우 문학 언어의 가치는 제거된다.
하지만 바턴(혹은 쿳시)의 목소리는 다르다. 언어를 언어가 매개하고 있는 사상, 혹은 언어가 지칭하고 있는 선험적이고 실재적인 어떤 것이라는 기존의 사고와 다르게 『포』에서 드러나는 ‘진리’들은 다층적이고, 중요한 것은 언어 그 자체인 것이다. 즉 『포』의 서사는 중심화의 언어를 해체하고, 형이상학적 언어관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하고 있는 것.
일차적으로 되받아쓰기(write back)라는 전략은 하나의 사실에 대한 독백을 대화로 전환시킨다. 로빈슨 크루소라는 인물과 그 인물의 이야기(서사)에 대한 다니엘 디포의 독점적이고 편협한 독백으로 구성된 단일한 리얼리티를, ‘다양한 리얼리티’로 전환하여 이해하고 표현하는 하나의 가설로 바꾸는 것이다.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누구나 『포』 이전의 『로빈슨 크루소』의 주인인 다니엘 디포를 떠올릴 것이며, 두 소설을 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에서 쿳시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예술작품이 하나의 단일한 리얼리티, 특히 그중에서도 낯선 통찰을 통해 제시되는 절대적인 이상이나 진리의 모방이라는 전통적인 (플라톤의) 관점에서 벗어나고 있다. 수잔 바턴은 로빈슨 크루소를 신뢰하지 못한다. 동시에 그녀의 로빈슨 크루소나 프라이데이에 대한 묘사 역시 각 절에서 그 모습을 달리한다. 그것은 소설 내에서 시간성의 문제로 이해되기 이전에 바턴의 목소리를 통해 증명된다(‘마침내 저는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그리고 무엇이 두서없는 이야기인지 전혀 알 수 없었어요’). 즉 예술작품은 인간의 ‘다양한 행위’를 드러낸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 가깝다. 그리고 나아가 언어는 리얼리티의 반영이 아니라 리얼리티의 구성요소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대주의적인 세계관을 토대로 쌓아올린 서사의 힘은 기능적으로는 다채로운 글읽기가 가능하고, 나아가서는 작품의 본래적인 성격인 탈식민주의와 페미니즘에 입각한 글읽기의 가능성 또한 열어 놓는다. 흑인/제3세계/여성 등 타자화되는 대상이 주어진 실체처럼 상정되는 경험적 실제를 탈피한다. 4장에 등장하는 몽환적인 나레이터는 어쩌면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지도 모른다. 지배적인 언어-이데올로기의 포의 실체와 허상이 모두 드러난 종국에 있어서 포는 ‘상정된 중심 진리’의 주인이 아니므로 어떤 중심적 사실을 전달하는 강건한 나레이터가 아닌 것이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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