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소설따위를 읽으면서 가장 매력적이었던 인물을 한 명 꼽으라면 다나카 요시키의 <은하영웅전설>이란 대중소설에 나오는 얀웬리라는 인물을 꼽을 수 있는데, 그것은 그가 엄청난 모순을 등에 지고 살다 간 위대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민주주의의 신봉자이자 제도적 개인주의자이고, 동시에 정치적 자유주의자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천재적인 전략가인데, 그러나 그는 파쇼정부를 위해 군인으로 일하는 전체주의의 지휘자이고 전략 설계는 한 번도 못해보고 전술단위의 대승만으로 원수의 지위에 오르는 이른바 '아이러니'의 중심에 있다. 게다가 그는 신념과는 달리 게으르기까지 하다.
그가 매력적인 이유는 그가 자신의 신념을 거스를 수 밖에 없는 행동을 계속해 나갈 수 밖에 없었던 선택의 이중성 때문인데, 그의 선택은 말하자면 최악을 피한 차악들이었다. 이상은 있지만 현실은 거스를 수 없으며, 현실적인 대안을 굳이 찾아야 한다면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던 것. 그러던 그가 마지막 신념을 위해 혈혈단신 협상석에 가다가 광신도들의 습격을 받고 황망하게 죽는 장면은 대단히 허무해서 무척 슬펐다.
이렇게 말하면 우습겠지만, 나는 <칼의 노래>의 충무공 이순신에게서 얀웬리의 모습을 떠올렸는데, 문학을 정갈하게 읽는 사람들이라면 노무현이 자신의 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보수주의자' 김훈이 그려낸 이순신에게서 탄핵 정국 가운데의 자신의 심정을 포착했던 사건을 이해할 것이다. 이순신은 결코 종묘사직의 위대함과 왕과 백성이 두루 잘 사는 나라를 위한 신념, 혹은 '적'에 대한 적의 때문에 전투에 나섰던 게 아니라 실은 그저 제 한 몸 건사하기 위해, 그리고 전투에 나서서 승리를 거두는 것이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돕는 최악이 아니라 차악의 방법이었기 때문에 그리했고, 그것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 지점이 되었을 때 황망하게 죽는다. 아군과 적군의 죽음에서 개별적 무내용의 슬픔을 읽고, 그러나 그 개별적 무내용을 대신할 개개의 사연들을 읽기에도 벅찬(왜냐하면, 그 이야기는 그 순간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전장의 비장함을 그는 그저 모순을 부둥켜 안고 살아내야만 하는 삶의 중심에 선 이순신의 모습으로 체화한 것이고, 그것이 김훈이 보는 인생사의 전형인 것이다. (김훈의 저작들, <밥벌이의 지겨움>이나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강산무진>에 실린 단편들, 이후의 <남한산성>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주제는 바로 그것들이다)
나와 내 가족은 계급적으로, 쁘띠 부르주아다. 어느 정도 자산이 있지만 노동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점에서 고전적 정의에 맞고, 계급적으로도 무산 계급에 대한 연민과 부르주아적인 행동양식의 체화를 겸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어중띤 계급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순의 중심에서 나는 항상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만약 내가 조금 더 속물적이었다면, '최악'의 선택을 기꺼이 했을 수도 있다. 조금 더 시장에서 '잘 팔리는' 무언가를 생산해 낼 수 있는 스펙을 갖추기 위해 공부를 했을 것이고, 마르크스는 유머작가 정도로 치부했을 터이며, 대신 법학을 공부하거나 회계원리를 공부했을 것이다. 사회과학들? 정치학은 정치제도의 작동원리이며 경제학은 경영학의 보조자이고 사회학은 시장이나 기업의 체계를 분석하는 데 유효한 관점을 제공해주며 심리학은 마켓팅과 조직구성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일말의 죄책감이다. 어딘가 나와 꼭 같은 기량과 성정을 지닌 자가 있으되 못 먹고 못 입고 못 사는 집에서 태어나 적의를 배우고 살아가는 자가 있었다면, 나는 그에게 부채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내 계급의 특성상, 과연 내가 무산계급일 그에게 연대하는 것이 '벤담적'으로 옳은 선택일까? 그것은 절대 아니다. 헤게모니에 순종하는 편이 내 안위에 맞고, 내 삶과 거의 무관한 무산계급의 삶 따위는 금방 잊어버리는 날이 오고 마는 것이다. 어차피 내 삶에 즐거움을 주는 사람들은 내 계급의 사람들이고, 그렇게 저렇게 살다가 가면 그만이라고 말해버릴 수도 있다.
이런 식의 말들이 역겹다고? 그러나 나는 저 막강한 헤게모니에 대해 투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과연 어떤 선험적 논증과 경험적 실증으로 그 헤게모니의 필패를 주장하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분노와 적의? 분노와 적의를 당장 드러내면 헤게모니를 가진 '그들'이 당장 죄책감을 느끼고 어이쿠 잘못했소 하고 항복할까? 그러한 역사는 결코 없었다. 헤게모니를 가진 자들은 이미 가진 자일 따름이고, 설혹 성공하더라도 그것은 실패의 전주곡일 뿐이다. 그리고 당장 투쟁에서 극적 승리를 이룬다고 한들, 어떤 사회가 도래할 것인지 (완벽하지는 않아도 어느 수준까지는) 기획할 수 있었던 학문의 존재도 알 수가 없다. 그저 그들에게 중요한 건 투쟁의 당위성과 혁명의 필요성 뿐인데, 그나마도 무척이나 단순한 견해인 경제학적 착취설에 불과하잖아. 프랑스 대혁명? 그건 이면적 헤게모니와 표면적 헤게모니의 불균형이 해소된 계기일 뿐 어떤 계급적 차이를 해소하는 사건이 아니었다는 걸 다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내 삶은 수많은 모순과 그에 따른 번민으로 가득하지만, 그러나 내가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건 시장질서 안에서, 생산 체계 안에서 유효한 정치적인 올바름을 상품화하는 적당히 키치적인 몸짓이다. 이때의 키치는 완전희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그것도 질서를 해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내가 온 몸과 온 맘으로 동감(sympathy)하지 못하는 것들을 인식할 수 없으며, 그들과 함께 존재할 수 없다. 역겨운 선언일지 모르지만, 나의 쁘띠부르주아적인 낭만주의나 프롤레타리아트의 낭만주의나 어차피 거기서 거기 아닌가. 조금 더 역겹게 말할까? 나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도 이미 거의 '시혜'에 가까운 생각이 아닐까? 중국과 티벳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티벳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나라이기 때문에 중국이 당장 물러나도 티벳은 티벳일뿐이라는 얘기는 티벳의 현실을 도외한 낭만주의적인 선언이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진술은 티벳은 중국으로부터 자유를 '시혜'받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해야 옳다. 나는 프롤레타리아트와 '연대'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얼마간의 '원조'를 해줄 수 있을 뿐이다. 부모가 돈을 가진 것이 자식의 계급을 결정했는데 그런식으로 말한다, 라고 한다면.. 그건 빈부의 재생산을 논해야지 시장경제를 논하면 안된다. 빈부의 대를 이은 순환 문제는 사실 시장경제의 핵심 룰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적 패트런을 자처하는 꽤 많은 '지식인들'에게서 과연 합당한 일상의 정치는 무엇일까. 배울만큼 배울 여건이 되는 그들이 못 배운 자들을 사랑한다면, 어쩌면 돈을 많이 벌어서 가져다 주는 게 어떤 방식에서 올바른 정치이며 사랑일지도 모른다. 가능하지 않은 혁명을 논하고 있는 건 지적인 정직함을 빙자한 퇴행적인 놀음에 불과할지도 모르고.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그래서 배설을 증오했는지도 모르고.
그는 민주주의의 신봉자이자 제도적 개인주의자이고, 동시에 정치적 자유주의자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천재적인 전략가인데, 그러나 그는 파쇼정부를 위해 군인으로 일하는 전체주의의 지휘자이고 전략 설계는 한 번도 못해보고 전술단위의 대승만으로 원수의 지위에 오르는 이른바 '아이러니'의 중심에 있다. 게다가 그는 신념과는 달리 게으르기까지 하다.
그가 매력적인 이유는 그가 자신의 신념을 거스를 수 밖에 없는 행동을 계속해 나갈 수 밖에 없었던 선택의 이중성 때문인데, 그의 선택은 말하자면 최악을 피한 차악들이었다. 이상은 있지만 현실은 거스를 수 없으며, 현실적인 대안을 굳이 찾아야 한다면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던 것. 그러던 그가 마지막 신념을 위해 혈혈단신 협상석에 가다가 광신도들의 습격을 받고 황망하게 죽는 장면은 대단히 허무해서 무척 슬펐다.
이렇게 말하면 우습겠지만, 나는 <칼의 노래>의 충무공 이순신에게서 얀웬리의 모습을 떠올렸는데, 문학을 정갈하게 읽는 사람들이라면 노무현이 자신의 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보수주의자' 김훈이 그려낸 이순신에게서 탄핵 정국 가운데의 자신의 심정을 포착했던 사건을 이해할 것이다. 이순신은 결코 종묘사직의 위대함과 왕과 백성이 두루 잘 사는 나라를 위한 신념, 혹은 '적'에 대한 적의 때문에 전투에 나섰던 게 아니라 실은 그저 제 한 몸 건사하기 위해, 그리고 전투에 나서서 승리를 거두는 것이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돕는 최악이 아니라 차악의 방법이었기 때문에 그리했고, 그것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 지점이 되었을 때 황망하게 죽는다. 아군과 적군의 죽음에서 개별적 무내용의 슬픔을 읽고, 그러나 그 개별적 무내용을 대신할 개개의 사연들을 읽기에도 벅찬(왜냐하면, 그 이야기는 그 순간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전장의 비장함을 그는 그저 모순을 부둥켜 안고 살아내야만 하는 삶의 중심에 선 이순신의 모습으로 체화한 것이고, 그것이 김훈이 보는 인생사의 전형인 것이다. (김훈의 저작들, <밥벌이의 지겨움>이나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강산무진>에 실린 단편들, 이후의 <남한산성>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주제는 바로 그것들이다)
나와 내 가족은 계급적으로, 쁘띠 부르주아다. 어느 정도 자산이 있지만 노동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점에서 고전적 정의에 맞고, 계급적으로도 무산 계급에 대한 연민과 부르주아적인 행동양식의 체화를 겸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어중띤 계급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순의 중심에서 나는 항상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만약 내가 조금 더 속물적이었다면, '최악'의 선택을 기꺼이 했을 수도 있다. 조금 더 시장에서 '잘 팔리는' 무언가를 생산해 낼 수 있는 스펙을 갖추기 위해 공부를 했을 것이고, 마르크스는 유머작가 정도로 치부했을 터이며, 대신 법학을 공부하거나 회계원리를 공부했을 것이다. 사회과학들? 정치학은 정치제도의 작동원리이며 경제학은 경영학의 보조자이고 사회학은 시장이나 기업의 체계를 분석하는 데 유효한 관점을 제공해주며 심리학은 마켓팅과 조직구성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일말의 죄책감이다. 어딘가 나와 꼭 같은 기량과 성정을 지닌 자가 있으되 못 먹고 못 입고 못 사는 집에서 태어나 적의를 배우고 살아가는 자가 있었다면, 나는 그에게 부채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내 계급의 특성상, 과연 내가 무산계급일 그에게 연대하는 것이 '벤담적'으로 옳은 선택일까? 그것은 절대 아니다. 헤게모니에 순종하는 편이 내 안위에 맞고, 내 삶과 거의 무관한 무산계급의 삶 따위는 금방 잊어버리는 날이 오고 마는 것이다. 어차피 내 삶에 즐거움을 주는 사람들은 내 계급의 사람들이고, 그렇게 저렇게 살다가 가면 그만이라고 말해버릴 수도 있다.
이런 식의 말들이 역겹다고? 그러나 나는 저 막강한 헤게모니에 대해 투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과연 어떤 선험적 논증과 경험적 실증으로 그 헤게모니의 필패를 주장하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분노와 적의? 분노와 적의를 당장 드러내면 헤게모니를 가진 '그들'이 당장 죄책감을 느끼고 어이쿠 잘못했소 하고 항복할까? 그러한 역사는 결코 없었다. 헤게모니를 가진 자들은 이미 가진 자일 따름이고, 설혹 성공하더라도 그것은 실패의 전주곡일 뿐이다. 그리고 당장 투쟁에서 극적 승리를 이룬다고 한들, 어떤 사회가 도래할 것인지 (완벽하지는 않아도 어느 수준까지는) 기획할 수 있었던 학문의 존재도 알 수가 없다. 그저 그들에게 중요한 건 투쟁의 당위성과 혁명의 필요성 뿐인데, 그나마도 무척이나 단순한 견해인 경제학적 착취설에 불과하잖아. 프랑스 대혁명? 그건 이면적 헤게모니와 표면적 헤게모니의 불균형이 해소된 계기일 뿐 어떤 계급적 차이를 해소하는 사건이 아니었다는 걸 다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내 삶은 수많은 모순과 그에 따른 번민으로 가득하지만, 그러나 내가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건 시장질서 안에서, 생산 체계 안에서 유효한 정치적인 올바름을 상품화하는 적당히 키치적인 몸짓이다. 이때의 키치는 완전희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그것도 질서를 해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내가 온 몸과 온 맘으로 동감(sympathy)하지 못하는 것들을 인식할 수 없으며, 그들과 함께 존재할 수 없다. 역겨운 선언일지 모르지만, 나의 쁘띠부르주아적인 낭만주의나 프롤레타리아트의 낭만주의나 어차피 거기서 거기 아닌가. 조금 더 역겹게 말할까? 나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도 이미 거의 '시혜'에 가까운 생각이 아닐까? 중국과 티벳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티벳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나라이기 때문에 중국이 당장 물러나도 티벳은 티벳일뿐이라는 얘기는 티벳의 현실을 도외한 낭만주의적인 선언이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진술은 티벳은 중국으로부터 자유를 '시혜'받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해야 옳다. 나는 프롤레타리아트와 '연대'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얼마간의 '원조'를 해줄 수 있을 뿐이다. 부모가 돈을 가진 것이 자식의 계급을 결정했는데 그런식으로 말한다, 라고 한다면.. 그건 빈부의 재생산을 논해야지 시장경제를 논하면 안된다. 빈부의 대를 이은 순환 문제는 사실 시장경제의 핵심 룰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적 패트런을 자처하는 꽤 많은 '지식인들'에게서 과연 합당한 일상의 정치는 무엇일까. 배울만큼 배울 여건이 되는 그들이 못 배운 자들을 사랑한다면, 어쩌면 돈을 많이 벌어서 가져다 주는 게 어떤 방식에서 올바른 정치이며 사랑일지도 모른다. 가능하지 않은 혁명을 논하고 있는 건 지적인 정직함을 빙자한 퇴행적인 놀음에 불과할지도 모르고.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그래서 배설을 증오했는지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