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란
Failan
이 영화가 상영되던 같은 기간의 한국 영화는 대단한 선전 중이었다. 유오성 장동건을 앞세운 곽경택 감독의 “친구”는 전전년도와 전년도의 최고 흥행작들인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의 흥행기록을 경신할 기세였고(몇 달이 지난 지금 결국 경신을 했으며, 800만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박신양이 오랜만에 출연한 영화 ‘인디언 서머’도 배급사 시네마 서비스의 위력으로 일찌감치 손익 분기점을 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영화, ‘파이란’은, 사실 대단한 흥행 성적을 거둘 줄 알았다. 주류 평단(메이저 일간지)의 집중적인 지원 사격, 네티즌들의 칭찬 일색의 입소문은 개봉 전부터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감에 불을 질렀고, (정우성 - 장지이 만큼은 아니겠지만) 최민식 - 장백지의 인터내셔널 캐스팅도 눈에 띄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영화는 흥행에 있어 그리 좋은 실적을 거두지 못했고, 곧 간판을 내렸다. 이 영화를 대단히 만족스럽게 보았던 나로서는 개인적으로 굉장한 불만이었다. 영화관에서 되도록 울지 않는 나는 이강재(최민식 분)의 꺽꺽거리는 울음소리에 나를 잊고 울 수밖에 없었고, 파이란(장백지 분)의 유골이 강재의 방, 강재의 식은 몸 옆에 흩어지던 마지막 장면이 주던 충격적인 안타까움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나는 영화 감상문을 쓸 수도 없었다. 글로 적기에는 영화가 주는 감흥이 너무 강렬했다. 그러나 어쨌든 흥행에 실패했다.
얼마 지나고 나서 나는 더 우스운 일을 접했다. 어느 제품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한 유제품 회사의 커피 광고로, 영화의 제목이나 대사를 이용해 오던 시리즈 물이었다. (여담이지만 그 시리즈 물 중 ‘만화방’ 편은 통신 유머 게시판에서 꽤 오랜 기간 회자되던 작품이었다, 저작권료는 냈나 몰라) 거기서 여자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해도 되겠습니까?’ 맙소사! 나는 그 대사를 듣는 순간 실소와 더불어 냉소가 떠올랐다.
문제의 대사는 파이란이 죽어 가는 병석에서 ‘법적’ 남편인 강재에게 보내는 편지에 적힌 한 문장이었다. 전문을 기억할 수 없지만 그 부분은 이렇다. ‘강재 씨, 그 중에서 당신이 가장 친절합니다. ……강재 씨, 나는 죽습니다. 사랑해도 되겠습니까? 강재 씨를 사랑해도 되겠습니까……?’
파이란은 중국 하층민 출신이었고, 일자리를 찾아 한국에 왔으며 친지는 외국으로 가 홀홀 단신 의탁할 곳이 없던 여자였다. 그녀는 ‘희망 직업 소개소’에 들려 일자리를 수소문했고, 거기서 위장 결혼 상대로 이강재를 만났다. 아니, 만나지는 않았다, 다만 사진을 보았다. 사진 속의 그는 어색하고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직업 소개소에 연관된 한 폭력 조직에 의해 해안 어느 마을에 팔려 갔고, 새로 도착한 자신의 보금자리의 첫날 밤 녹물이 섞인 수돗물을 대야에 받으며 섧게 울었다. 그녀의 삶은 철저히 기구했다.
그런데 그녀는 말했다.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곳 사람들은 모두 친절합니다, 나에게 잘해 줍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당신이 가장 친절합니다’ 라고 말했다. 나는 처음엔, 그 부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누가 친절하다는 것일까? 자신을 거기까지 데려다 준 말숙한 깡패? 사투리가 구수한 세탁소 아주머니? 유일하게 언어 소통이 되었던 그 마을의 직업 소개소 소장? 병석에 누웠을 때 그에게 친절한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강재는 깡패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우유부단했다. 수금하러 간 구멍 가게에서는 옛 친분 때문에 모질게 굴지도 못하고, 후배와 싸움을 벌이다 얻어 맞아 ‘친구이자 오야붕’인 보스에게 ‘좇나게’ 얻어 맞는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 보스가 일으킨 살인 사건을 대신 뒤집어 쓰려 하고 있었다. 단지 고향집에 통통 고깃배 하나를 보내기 위해서 십 년을 ‘빵’에 들어갈 결정을 내리고 마는 인간이었다. 술에 취해 기분좋게 비틀거리며 ‘내가 들어간다 이 새끼야’ 하고 큰소리치던 그는 ‘돈은 줄거지?’ 라고 물으며 한없이 약해진다. 약해진 몸의 비틀거림은 넘어짐으로 이어졌다. 그는 늘 자기가 ‘호구’냐고 되묻고, ‘호구’라고 자답했다.
그들은 부부였다. 잠자리는커녕,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부부. 파이란은 그런 강재를 위해 칫솔을 두 개 사 두었고, 강재는 오줌을 누던 싱크대 앞에서 칫솔질을 하다 아내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영영 그녀가 산 칫솔은 써 보지도 못한 채. 그녀의 장례를 위해 차에 몸을 싣고, 사진을 통해 그녀의 얼굴을 보고, 편지를 읽고 하는 동안 그는 죽은 아내를 사랑하게 되었고, 경찰서에서 사망 확인을 하는 순간 ‘뭐가 이렇게 간단해요?’ 라고 흥분하며 자신의 참담함을 확인했다. 당신이 가장 친절합니다, 라는 파이란의 말을 곱씹으며, ‘좇나 친절해서 친구 대신 감방 가는 병신같은 머저리’ 라고 자조했다. 파이란은 그런 그를 죽기 전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나고 싶었고, 그래서 찾아간 인천에서 그녀는 경찰에 연행되는 남편의 모습을 보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죽어가며 물었다, ‘사랑해도 되겠습니까?’.
예쁘고, ‘사랑스러운 것’을 사랑하는 일은 너무나 쉽다. 나에게 이익이 되고, 함께 있으면 우월해지는 느낌을 얻는 것들을 사랑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시중 다른 캔커피보다 비싼 커피를 마시며 ‘사랑해도 되겠습니까?’ 라고 묻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그 커피는 다른 커피보다 부드럽고 맛있으며, 들고 있으면 패션 소품 같은 느낌까지 주니까. 그러나 파이란의 사랑은 다르다. 솔직한 말이지만, 그녀에게 진정 ‘친절한 사람’은 없었다. 국제 관계 힘의 논리 따위를 안 가지고 와도, 그녀는 분명 우리 사회의 가장 음지에서 가장 핍박받는 여자였다. 그녀를 죽음으로 몬 병은 직업 소개소 소장 발가락 무좀만도 못하게 여겨질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것을 사랑했다. 모두가 친절하다고 했다. 강재는 단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할 인생이었으나 그녀를 만나 처음으로 ‘당신이 가장 친절하다’ 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송장이 되어 있었다. 자신을 사랑해주던 여자가 아니라 해도, 어찌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까? 하물며 그녀의 남편이라면?
그녀의 죽음처럼 부숴지는 파도를 바라보며 강재는 꺽꺽거리며 울었다. 결코 소리내서 울지 않았다. 자신은 울 자격이 없다는 자격지심을 느꼈으리라. 그러한,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나눠 주었던, 줄 사랑이 많았으되 사랑이 방법이 허락되지 않았던 여자의 죽음을, 자신은 슬퍼할 자격이 없었으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는, 친구 대신 감방에 가느니 떳떳하고 솔직하게, 아내를 사별한 남편으로서 사랑을 실천하며 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유골도, 그도 결국 그 지저분한 방을 벗어나지 못한 채 끝이 났다. 그런데, 시중 가격의 두 배인 커피 음료를 선전하며, 뭐, 사랑해도 되겠냐고?
엘리트 영화 평론가 동국대 모 교수는 이 영화를 두고 ‘백치미가 필요했던 남성 환타지 영화’ 라고 평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페미니즘 논쟁에 굉장한 의아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영화를 두고 남성 팬터지라고 평한 것에 기가 차고 말았다. 그녀는 특권층이고, 단 한 번도 강재나 파이란의 삶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도 절실히 몸으로 이해할 수는 없으되, 그러나 이 영화를 남성 팬터지라고 말할 만큼 철저하게 허위 의식으로 무장하지는 않았다. 나는 다만, 파이란의 사랑에 내 사랑이 부딪쳐 깨져나가는 모습에 슬펐고, 그래서 어떤 삶을 살아야할지 고민을 했고, 가끔 울먹거림을 삼키기도 했다.
같은 깡패 영화인데, 이렇듯 잘 만들어진, 또 좋은 얘기를 하는 영화는 금새 간판을 내리고, 분명한 살인자에 우정 같지도 않은 우정을 내세우며 제목을 ‘친구’ 랍시고 다는 영화에는 팔백만이 몰리는 사회 풍조는 정말 우습지도 않다. 정부는 북한에 대해 감싸 안기를 하기 전에 국내 노동자들의 처우 환경이나 제대로 해 놓아야 할텐데 하는 말도 이제는 지겹다. 정말 제대로 되 가는 일은 하나도 없다.
ps. 한 가지 제대로 되가는 일이 있는 것 같다;‘번지 점프를 하다’의 재개봉에 이어 이 영화도 곧 재개봉한다고 한다. 모쪼록 많은 관객이 이 영화를 보고, 최소한 나만큼 느껴 왔으면 좋겠다. 부자들이 갑자기 자선 사업을 한다거나 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착취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8월 22일자로 추가)
(2001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