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비슷한 것을 인연으로 눈여겨 보았던 성석제라는 거짓말쟁이의 소설 중에 처음 접한 것은 조똥간인지 조동관인지 하는 사람의 일대기(‘조동관 약전’)였고, 비교적 최근에 읽은 것이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였습니다. 제목만 봐서는 사뭇 진중해 보였지요. 버젓한 이름을 가진 인물들의 일생, 혹은 그들의 죽음에 얽힌 전말기인지라 종전에 읽었던 비슷한 내용의 소설들(예컨대 유력 정치가 이 모 씨가 좋아한다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같은 교양소설들)이 떠올랐던 겝니다. 게다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떠올리게 하는 제목이라니!
그러나 성석제 소설은 재미가 먼접니다. 조동관이나 황만근의 죽음에 얽힌 사연이 참으로 기구하고 부조리해서, 어찌 보면 참으로 천인공노하여 비분강개해야 할 일이나, 읽다 보면 웃음이 먼저니 이거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아 글쎄 어디에 누가 살았는데’ 라고 시작하는 건 옛날 이야기꾼의 수법 그대로입니다(이건 박완서 할머니도 인정했던 바이지요). ‘그래서, 그래서?’ 라고 묻게 된다는 겁니다. 소설 치고는 생경한 문체가 어찌 그리 친숙한지요. 그런데 그렇다고 그게 진중하지 않다는 것도 아닙니다. 활극이나 만화를 읽는듯했으면서도 읽고 나니 뭔가 떠오르는, 꺼림칙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 뭔가가 있긴 있습니다. 페이소스가 그것인가, 에피파니가 그것인가 생각해보지만 그런 서양말보다도 ‘건더기’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게 사실입니다. 어찌하였건 그 재미가 ‘재미를 위한 재미’는 아니란 거지요.
신작 중편으로 소개된 ‘본래면목을 보았더뇨’ 역시 그 스타일이 참 친숙합니다. 제목을 살피니 그 재미가 무얼 말하는 지 알 듯도 합니다. 웃음이 무엇이더뇨, 그것이 사람 본래면목이 아니더뇨. 아리스토텔레스 선생은 눈물이 더 값지다 했지만, 어쨌든 웃음이란 울음과 더불어 인간 중생들의 역사의 창조적 원천임에 틀림이 없지요. 게다가 우는 동물은 있어도 웃는 동물은 한 번도 보질 못했으니 오히려 웃음이 한 수 위가 아닐는지.
성석제 소설의 웃음은 그래 종래의 풍자니 골계니 해학이나 하는 것과는 그 속내가 다릅니다. 누구를 찌르고 공박하기 위해서 라기 보다는, 웃다 보면 공감을 하게 되는 그런 류지요. 인간의 것이 농담이고, 농담의 것이 웃음이며, 거꾸로 웃음의 것이 농담이고 농담의 것이 인간이란 겁니다. 하여 비웃는 듯하면서도 비웃지를 않아요. 남을 비웃는 것은 결국 자기를 비웃는 것이라는 사소한 진리의 정서가 소설 안에 있습니다.
예의 조동관이나 황만근이 그랬던 것처럼, 황봉춘도 참으로 기인입니다. 변화하는 세태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한 사람이지요. 그는 읍내에 이름난 예술가이고, 정력 문제에도 관심이 많은 호색한인 동시에, 유능한(?) 건축업자이면서도 동시에 탐험가, 혹은 종교 지도자이기도 합니다. 황거석이라고도 불리는 그는 결혼을 했어도 결혼한 것 같지 않고, 애인이 있어도 애인 같지 않고, 돈을 벌어도 번 것 같지가 않은 사람입니다.
예술가로서는 제법 실력도 있지만(‘나는 문패를 계기로 황의 실력을 약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만’) 그걸 문제 삼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나는 예술을 잘 모릅니다, 잘 모르니 싫고 좋을 까닭이 없지요’). 그렇다면 문제 삼는 건 정작 무엇일는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한 선생도 스스로 잘 모르겠다고 하지 않습니까(‘나는 잘 모릅니다, 그 말이 정녕 무슨 뜻인지’).
황봉춘은 여자를 좋아합니다. 페치카를 설치해준 국수집 여자도 그치 집에 와서 술도 먹고 사고도 치고는 야릇한 밤을 보내긴 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황봉춘은 스스로 탐독한, 그래서 제법 신봉하기까지 하는 ‘동서고금 비전 방중술’을 ‘인생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나쁜 책’으로 몰아세우기도 합니다(사견이지만 그 책은 분명 나쁜 책입니다!). 술집 여주인에게 추파를 던지다가, 함께 노래를 부르던 술자리의 합석자가 여주인의 남편이란 사실을 알고 도망치면서 재수없다는 말을 연발하는 걸 보니 양심의 가책이란 것을 알기는 아는가싶습니다. ‘쟈들한테는 뼈다구도 못 추린다’며 도망치는 그 모습은 계란과 꿀의 비법을 시전하던 그를 다시 보게 합지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런 기이한 면모를 성석제는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듯하지만, 실은 좌절 속에서도 본래면목을 간직한 사람들의 이야기인지라, 꼭 그렇지는 않는 게지요. 성석제는 그럼 이 이야기를 왜 썼을까요? 슬플라고 썼는갑다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우리네 사는 게 슬플라고 산다고만은 못하는 게 사실 아닙니까. 게다가 한 선생은 천식도 다 나았다니 말이지요. 거기에 정작 주인공을 괴롭히는 야멸치고 탐욕으로 가득한 사람들은 여기엔 나오지도 않습니다. 고작해야 사내 맛을 보자는 백전노장 여인 셋뿐이었지요. 본래면목을 벗어 법도를 깨우치면 알까요, 불심으로 대동단결해 볼 일인지요. 하여 나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성석제는 왜 웃음을 빌어서 웃음의 그늘을 디뎌 놓고는 기어코는 슬픔으로 가려 하는지.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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