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로 코엘뇨의 작품을 '끝까지' 읽은 것은 o zahir가 처음인데, 음, 솔직히 말하자면 나의 문학관.....과는 꽤 멀리 있는 소설. 일종의 명상집이거나 자기계발서 같은 글로 씌어졌다면(예컨대,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류의!) 오히려 더 납득이 갈만한 그런 작품.
간혹 문학에 비교적(秘敎的)인 소재나 주제를 끌어오는 작품들이 각광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지난 한해 동안의 나는 그런 불가해한 신비주의적인 삶의 지향들을 지양하기로 했기 때문에, 읽는 내내 작품을 자꾸 무효로 하고 싶었다. -ㅅ- 뿐만아니라 사실, 자전적인 요소가 읽기를 방해하는 한편으로 기존의 학(學)들에 대해 거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에 대해 의아하기까지 했는데, 실은 코엘뇨가 인용하고 있는 비의적인 문헌이나 미하일(혹은 올레크)에 의해 설명되는 신비적인 경험 몇몇을 제외하면 많은 것들이 이미 사회학이나 문학의 영역에서 실험되거나 논증된 사실들이었다는 점이 특히 객쩍다.
예컨대 코엘뇨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나 자신이기를 포기하고 나 자신이 되어라'라는 역설적 명제는 이미 기든스나 울리히 벡등에 의해 '말해졌'고, 역사적인 견지들은 조르주 뒤비에 의해 역설된 적 있으며, 푸코라든가, 데리다라든가, 기타 등등... 심지어 '부족들'의 이미지는 기 드보르의 그것에서 거의 완전히 따 왔는데, 심지어 라벨 바꿔붙이기는 상황주의자들이 자주 하던 장난질이 아니던가.
그쯤되어 평론가들의 악평에 대해 반박하는 부분을 읽고 싶어졌는데, 심지어 코엘뇨는 그부분도 어물쩍 넘어가는 능구렁이같은 솜씨를 보여준다. ........먹물 체질상, 그런 부분들은 정말 읽기 어려웠다. 자전적인 이야기라지만 간디의 자서전을 읽는 것과는 다르고, 지식의 패러독스를 말한다지만 푸코의 저작을 읽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결국 소설을 쓰고 자기의 서사를 연마하는 입장을 지지해야 하는 작가적인 사명,에 대한 자기 변호라는 부분에서 모순에 빠져있다는 점마저 자각하지 못하는 '작가'의 '글'이라니, 싶은 뜨악함이 더해져서.
이 아저씨는 자기도 모르는 이야기를 자꾸 쓰는 것 같다. 나는 사실 나머지 작품은 완독을 못했으니 근거부터가 틀린 말이지만, 코엘뇨의 소설에 대한 논평으로써 아주 적확한 게 아닌가 싶다. -_-
그러나저러나.... 사실 이 책을 끝까지 읽은 건 다미엔 라이스의 볼케이노를 들은 것과 마찬가지로 이 책이 누군가의 2005년 베스트였기 때문인데, 실제로 오 자히르는 충분히 의미있는, 꽤 유효한 삶의 지침서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엘뇨식으로 말해 '글을 쓴다'는 것이 자히르에 의해서가 아니라 빛의 전사들에 의한 사명에 의해서 '씌어진' 글, 그리고 그것을 그저 읽은 것이 아니라 표지로서 '읽힌' 글, 등의 관점에서 이야기해보았을 때, 나의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글은 아니었다. 즉 이게 하나의 표지가 되거나 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는 점을 상기해서 되받아읽자면, 사실, 난 주인공인 '나'가 마리와 이어지길 바랐다. 어째서! 작가는 그런 무책임하고 황당한 여인과 '나'를 끝내 이어주는 것일까? 한 마디도 없이 사라졌잖아! 내 모든 상상력을 틀어막는 '유목'이니 '사랑'이니 하는 불가해한 키워드를 마침내 실현시키고야 마는 것일까. 서로의 세계관이 다르더라도, 꾸준한 협상과 담백한 의사소통을 통해 이성적이고 이상적인 관계를 만든 것은 사실은 마리여야 했던 것이 아닌가. 물론 소설이 계속적을 에스테르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근거가 끝내 부족했지만. 긁적.
사족, 중반부터 떠오른, 영화 <맥놀리아>의 명대사 '우리가 과거를 잊었어도 과거는 우리를 기억한다'.
간혹 문학에 비교적(秘敎的)인 소재나 주제를 끌어오는 작품들이 각광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지난 한해 동안의 나는 그런 불가해한 신비주의적인 삶의 지향들을 지양하기로 했기 때문에, 읽는 내내 작품을 자꾸 무효로 하고 싶었다. -ㅅ- 뿐만아니라 사실, 자전적인 요소가 읽기를 방해하는 한편으로 기존의 학(學)들에 대해 거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에 대해 의아하기까지 했는데, 실은 코엘뇨가 인용하고 있는 비의적인 문헌이나 미하일(혹은 올레크)에 의해 설명되는 신비적인 경험 몇몇을 제외하면 많은 것들이 이미 사회학이나 문학의 영역에서 실험되거나 논증된 사실들이었다는 점이 특히 객쩍다.
예컨대 코엘뇨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나 자신이기를 포기하고 나 자신이 되어라'라는 역설적 명제는 이미 기든스나 울리히 벡등에 의해 '말해졌'고, 역사적인 견지들은 조르주 뒤비에 의해 역설된 적 있으며, 푸코라든가, 데리다라든가, 기타 등등... 심지어 '부족들'의 이미지는 기 드보르의 그것에서 거의 완전히 따 왔는데, 심지어 라벨 바꿔붙이기는 상황주의자들이 자주 하던 장난질이 아니던가.
그쯤되어 평론가들의 악평에 대해 반박하는 부분을 읽고 싶어졌는데, 심지어 코엘뇨는 그부분도 어물쩍 넘어가는 능구렁이같은 솜씨를 보여준다. ........먹물 체질상, 그런 부분들은 정말 읽기 어려웠다. 자전적인 이야기라지만 간디의 자서전을 읽는 것과는 다르고, 지식의 패러독스를 말한다지만 푸코의 저작을 읽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결국 소설을 쓰고 자기의 서사를 연마하는 입장을 지지해야 하는 작가적인 사명,에 대한 자기 변호라는 부분에서 모순에 빠져있다는 점마저 자각하지 못하는 '작가'의 '글'이라니, 싶은 뜨악함이 더해져서.
이 아저씨는 자기도 모르는 이야기를 자꾸 쓰는 것 같다. 나는 사실 나머지 작품은 완독을 못했으니 근거부터가 틀린 말이지만, 코엘뇨의 소설에 대한 논평으로써 아주 적확한 게 아닌가 싶다. -_-
그러나저러나.... 사실 이 책을 끝까지 읽은 건 다미엔 라이스의 볼케이노를 들은 것과 마찬가지로 이 책이 누군가의 2005년 베스트였기 때문인데, 실제로 오 자히르는 충분히 의미있는, 꽤 유효한 삶의 지침서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엘뇨식으로 말해 '글을 쓴다'는 것이 자히르에 의해서가 아니라 빛의 전사들에 의한 사명에 의해서 '씌어진' 글, 그리고 그것을 그저 읽은 것이 아니라 표지로서 '읽힌' 글, 등의 관점에서 이야기해보았을 때, 나의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글은 아니었다. 즉 이게 하나의 표지가 되거나 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는 점을 상기해서 되받아읽자면, 사실, 난 주인공인 '나'가 마리와 이어지길 바랐다. 어째서! 작가는 그런 무책임하고 황당한 여인과 '나'를 끝내 이어주는 것일까? 한 마디도 없이 사라졌잖아! 내 모든 상상력을 틀어막는 '유목'이니 '사랑'이니 하는 불가해한 키워드를 마침내 실현시키고야 마는 것일까. 서로의 세계관이 다르더라도, 꾸준한 협상과 담백한 의사소통을 통해 이성적이고 이상적인 관계를 만든 것은 사실은 마리여야 했던 것이 아닌가. 물론 소설이 계속적을 에스테르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근거가 끝내 부족했지만. 긁적.
사족, 중반부터 떠오른, 영화 <맥놀리아>의 명대사 '우리가 과거를 잊었어도 과거는 우리를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