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평:《파시즘의 대중심리》 빌헬름 라이히, 황선길 역, 1946, 2006, 그린비
‘―아아 젊은은 오래 거기 남아있거라’
빌헬름 라이히에 대해 잘못 알려진 몇 가지 편견들은 그가 ‘발견’(혹은 발명)한 것으로 알려진 ‘오르곤 에너지’에 대한 곡해에서 기인한다. 그의 업적에 대한 정신분석학계의 평가와 (후기)마르크스주의에서의 평가는 다소 상반된다. 정신분석학계에서는 그의 정신분석기술에 대한 업적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좁게 규정된 (개인적) 과학 분야로 여겼으며, 거기에서 (정치) 사회적인 부분은 배제하고 싶어했다. 프로이트의 맥락에서 라이히를 평가할 때, 그의 성격 분석에 관한 초기 작업이 정신분석학 진영 내부에 끼친 영향력은 높이 평가된다. 한편 라이히가 정통 프로이트주의에서 벗어나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을 결합시키고, 성격이나 신체가 사회에 의해서 억압되고 형성되는 방식에 대해 설명하고 성 혁명과 사회 혁명이 관련되는 방식에 관하여 연구한 20년대 이후의 작업에 관해서 정신분석학계에서는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는 평가를 내린다.
반면 ‘오르곤 에너지’에 대한 라이히의 연구를 (라이히 스스로는 물론)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 진영의 동료들은 대단한 발견으로 간주하고 있다. 습관적인 냉소나 근육 경련 등을 감정적 상태의 표현 양식으로서의 외적 증상으로 간주하고, 이를 치료하기 위한 ‘근육갑옷’에 관한 30년대의 연구, 그리고 40년대에 접어들며 스칸디나비아에서의 실험 연구에서 ‘발견’한 오르곤 에너지와 오르가즘 능력에 대한 강조는 그러나 도리어 그의 현실적인 상황을 어렵게 했을 뿐더러, 많은 사람들이 그를 정신병자로 취급하게 한 단초가 되었다. 더군다나 그는 이러한 주장 때문에 정신분석학계에서는 물론, 1929년에는 사회민주당, 1934년에는 공산당으로부터 축출당해야 했다. 그가 오르곤 에너지 축적기로 감기나 성 불능을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한 적은 한 번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로 인해 고초를 겪고 옥사해야 했다.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는 그의 사후 마르쿠제나 프롬, 알튀세르, (다소 비판적이지만) 슬라보예 지젝에 이르는 논자들에 의해 연구되어 왔다. 비록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라는 연결은 그 개념의 외연과 내포가 다양하고, 미셸 푸코나 특히 자크 라깡,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와 같은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의 반동성과 마르크스주의적 주체 개념에 대한 이론적인 해체와 그로 인한 공백 혹은 결여 탓에 대단히 난해하고 모호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라이히 식으로 말해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또 인각되거나 억압되는 ‘핵심’에 관한 프로이트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양자의 동일한 관심영역에 관한 문제 제기는 아직도 필연적이며 유효한 것이다. 비록 라이히는 오해받았지만,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는 동시대를 (‘증후적으로’) 읽어내는 가장 탁월한 분석틀이며,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과 저항하는 주체의 담론을 형성하는 데 있어 가장 폭넓은 통찰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라이히를 마르크스주의의 확장과 연결시켜 읽는 것은 중요한 작업이다. 1990년대 초 소비에트 연방과 소위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함에 따라, 마르크스주의가 어떤 ‘교리’처럼 군림해 왔던 한 시대가 끝난 것처럼 보였다.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대중’이 역사 발전의 구체로서 스스로를 구성할 수 있다는 관념(혹은 자연스럽게 ‘구성된다’는 보다 낙관적 시각)은 이제 분명하리만치 낡아 보인다. 세계-일반적으로 볼 때, 좌파진영은 급진적인 프롤레타리아트 정당 대신 사민주의의 노선을 채택하고 있으며,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과 혁명의 당위성이라는 관념은 대단히 엷어진 것도 사실이다. 더군다나 21세기 한국에서 (‘여전히’) 마르크스주의를 주장하는 것, 나아가 계급투쟁과 혁명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역사적 맥락을 이전 시대의 결에서 말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의 공고화와 그 실패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고, 이에 조응할 수 있는 이론적 실천적 기획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아직도 핵심적일 수밖에 없다. 다만 마르크스주의를 주장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 당의 결성과 혁명에 대한 전망과 기획이 어렵다는 점은,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사실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반동적으로 계급의식을 구성하였고(혹은 ‘구성되었고’), 자본주의적 관료제의 구조를 답습한 조합주의나 당의 구획 안에서 스스로의 계급적 실존을 한정시켰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는 점은 더욱 그러하며,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적 혁명이 가능하다는 근거를 찾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혁명적 이론의 지성(intellectualité;intellectual -ity)과 노동자적 실천들 사이의 때로는 첨예한 모순들’에 대한 이론적 인식, 대안적 지식, 선험적 수단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난점은 마르크스주의 진영의 지난 역사의 맥락, 즉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아닌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가 등장하게 되는 점에서 방증된다. 루이 알튀세르는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의 정통 마르크스주의(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설명을 ‘하나의 과학’과 ‘하나의 철학’으로 이야기하며, 이데올로기와 계급에서의 모순이라는 정치적인 곤란, 철학적 빈곤이라는 지배적인 곤란에 관하여 지적한 바 있다. . 이를 알튀세르는 현대 역사의 ‘이론적 스캔들’이라고 말한다 .
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과 대중심리》(이하 ‘본저’, 인용이 필요할 경우 페이지만 표시)의 여러 가지 핵심적인 지적들과 놀라운 통찰과 예지들은 이미 이러한 양상들을 설명한다. 계급 관계가 경제적인 착취 관계라면, 어째서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트는 그것에 반대하지 않는 것일까? 이 문제를 라이히는 계급관계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정서적인 만족감을 준다는 점을 정신분석학 이론을 통해 검증하고 있다. 라이히는 본저에서 주로 독일의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마르크스주의 이론과는 달리 민족사회주의와 히틀러의 나치즘에 열광했는지를 설명하는 한편으로, 어째서 소련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예견하고, ‘사랑, 노동, 지식’이 원천이 되는 새로운 ‘노동민주주의’의 모델을 제안한다. 특히 그는 ‘대중’이 파시즘에 의해 구성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중이 파시즘을 구성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개념 영역에 있어서의 ’지배‘는 실제적인 지배의 토대 위에 세워지는 것’이라거나, ‘사회의 과도한 성숙은 피지배 계급의 비성숙을 먹고 산다. (……) 오늘날 대중의 퇴행은 (……) 능력의 결핍을 의미한다’과 같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문제의식을 다른 차원에서 설명한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노동자의 보수주의적 성격, 특히 성 억압으로 인한 순종적인 성격 형성으로 인한 자발적인 구성체로 파악한다(109).
라이히는, 사회적 협동의 표면층은 심층의 생물학적 핵심과 접촉하고 있지 않으며(9), 사회적 조건과 변동이 인간의 원초적, 생물학적 요구를 변화시켜 그것을 성격구조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 놓은 다음에야 그 ‘성격구조는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사회적 구조를 재생산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53). 그는 대중의 독특하고 비합리적인 행동의 기저에 깔린 대중심리의 원인을 성 억압에서 찾는다(61). 특히 그는 한 개인을 사회경제적 구조와 사회의 성적 구조에 연결시키는 것, 즉 ‘권위주의적 가족제도는 국가의 구조와 이데올로기의 제조공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66). 프로이트에 따르면 초자아는 사회문화적인 요구(교육, 종교 도덕)에 의해 풍부해진다. 즉 종교와 도덕적 억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그 자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생겨나고, 사회적 감정은 그 당시 젊은 세대의 구성원들 사이에 남아 있던 경쟁 심리를 극복하기 위한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다. 남성이 이 모든 도덕적 습득 과정에서 앞장섰던 것 같으며, 그리고 그것은 교차 상속에 의해서 여성들에게 전수된 것이다. 라이히는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설명 모델에서, 특히 거세 콤플렉스와 관련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규범적인 금지 기능을 적시한다. 마르크스의 사회학적 기반과 프로이트의 심리학적 기반에 근거를 둔 사회적 성경제학은 성이 사회에 의해 억제되고 개인에 의해 억압된 것이 어떤 사회학적 이유 때문인가를 질문하며(65), 이는 성의 억압을 통해 경제적으로 억압받는 인간을 자신의 구조적인 물질적 이해관계에 반하여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도록 변화시킨 것(69)임을 레닌의 논의와 연결시켜 설명한다. 프로이트가 <토템과 터부> 등에서 사회에 대해 설명한 것 외에는 정신분석학 내부에서 ‘정치’를 질문하지 않았던 것과 대조적으로 라이히는 정신분석학과 정치의 접점을 끊임없이 결부시킨 것이다. 예컨대 라이히는 나치의 성 이데올로기를 분석하면서, “전시 제국주의는 여성은 단지 아이를 낳는 기계이며, 따라서 그러한 기능에 반발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천명했다. 말하자면 성적 만족이 여성의 생식기능을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165)라고 적고 있다. 나아가 라이히는 민족주의적 감정과 가족적 감정, 나아가 신비주의적 종교적 감정을 연결시키는 작업을 통해 대중심리의 속성을 분석한다. 특히 6장과 7장에서는 프로이트의 <토템과 터부>에서 말하고 있는 근친상간 금지나 동성애 금지, 즉 가부정적 권위적 신비주의의 토대의 형성 과정을 파시즘의 대중심리로서 설명하고 있다.
특히 본저에서 라이히는 자신이 큰 기대를 걸었던 소비에트 혁명의 성격을 분석하는데, 30년대 들어선 스딸린의 소비에트가 또 하나의 권위주의적인 국가체제에 불과함을 비난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러시아혁명은 진정한 사회혁명은 아니며, 인간에 대한 과학이 아닌 정치와 경제학에 근거하고 있으며, 나아가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기술이 범람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소비에트 실패의 원인은 노동자를 통제할 세력이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공동체를 확립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통제할 권위주의를 체화한 노동자들이 몽롱한 환상을 좇았으며(340-350), 소련 공산당의 강령을 분석하며 노동자의 자주관리가 중앙의 국가장치와 국가적 통치자로 대체되고, 노동 규준에 대한 억압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폭로한다(350-357). 이진경은 자신의 서평에서 ‘대다수 대중을 무능력하게 만드는 이런 요소에 대한 이 책의 분석은 사회주의 소련의 붕괴를 목도한 이후의 어떤 책들보다도 더 예리하고 현실적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즉 라이히는 본저에서 민족사회주의 혹은 나치즘, 그리고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현실에서 득세하고 결과적으로 마르크스주의가 실패한 원인이 마르크스주의 내부에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여,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재-급진화와 그를 위한 이론적․실천적 조건들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특히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국가의 발전 형태인 소비에트 유형의 당에 관한 분석인 9장과, 앞서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계급의식’과 ‘이데올로기’간의 선차성 문제를 다룬 1장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새롭게 재편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마르크스주의가 상부구조의 ‘이데올로기’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식의 주장을 넘어, 즉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힘이 대중의 성격구조에 기인하고 있다는 식의 설명과 그것이 가능하게 한 장치들, 즉 전술한 권위주의적인 제도와 반동적인 문화운동들, 궁극적으로 그것들의 성적인 억압 기능을 분석했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라이히는 계급투쟁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속성이 필연적으로 혁명으로 귀결되고 있다는 것에서 벗어나(예컨대,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처럼) 상부구조의 이데올로기적인 도구들, 가부장제나 민족주의, 신비주의, 인종주의 등을 비판한 것이다. 라이히는 정통마르크스주의가 상정한 국가나 상부구조의 비-본질적인 속성을 수정하고, 나아가 마르크스주의의 ‘국가’에 대한 이중적 환상(초급단계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국가 건설과 완성단계에서의 무정부주의)을 가로지르고 있다(“사회주의 국가는 당 관료들의 창작품이다. (……) 사회주의 국가사상은 (……) 오히려 사회주의 운동을 왜곡시키고 있다”, 322).
라이히가 주장한 마르크스주의의 개인숭배나 개인주의에 입각한 계급투쟁과 혁명 이론을 비판하고 있는 자신의 (과학적 인종주의의 생물학 결정론과는 다른) 노동 개념의 생물학(중심)주의와 성경제, 그리고 그에 입각한 ‘노동민주주의’라는 새로운 기획의 정당함을 살펴본다면, 생물학주의 역시 사실상 개인적인 차원으로 환원될 여지가 있기 때문에 일견 난해하다. 특히 인종주의나 민족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의 정당함과는 별개로, 실제의 그의 ‘성정치(sexpol)’에 입각한 운동들, 예컨대 68혁명에서의 전개된 실천들은 다소 몽상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i)이 연출한 68혁명 당시를 다룬 영화 《몽상가들(The Dreamers;I Sognatori, 2003)》은 라이히의 이론에 영향 받았던 당시 젊은이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영화는 대단히 퇴영적으로 보인다. 라이히의 성정치는 ‘유기체(organism)’의 자연적 속성인 오르가즘을 방해하며 개인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의 거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본저에서 밝히고 있는 성정치의 규준은 가족(특히 노동력 시장의 재생산의 장으로서의 부정적인 가부장제)과 노동의 관계의 잠정적 해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족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신비주의를 연결시키는 것이 파시즘의 대중심리이며, 따라서 억압하는 기제인 권위적인 아버지의 공포에서 탈출할 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푸코의 억압가설에 관한 문제제기나, 알튀세르의 중층결정론에 대한 제안에서 보듯 라이히는 정통프로이트주의적인 환원론적이고 기능론적인 설명 도식의 한계를 갖는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보다 근본적일 수 있지만,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고 핵심과 접하려는 시도로서 라이히의 주장은 집단적 주체화의 체계를 갖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라이히의 주장대로 사회 일반의 관계망으로서 가족이나 국가, 특히 그러한 관계망 안의 인간들의 행위 양식을 결정짓는 심급은 개인의 계급이 아니라는 점을 환기한다면, 파시즘과 자본주의의 노동에 대한 지배는 여러모로 중층결정적(over-determined)이며, 동시에 구조 수준에서 분석해야 하며 따라서 구조수준으로 해방해야 한다. 그러나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개인적 차원의 심리수준에서 분석했으며, 나아가 심리수준으로 해방하고 있다. 여기에 라이히가 사용한 정신분석학의 분석 틀을 재검토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계급과 대중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구호(‘역사를 만드는 것은 대중들이다’)에 대한 역사적 인과법칙, 역사유물론에 대한 부정은 라이히에게 있어 정통프로이트주의의 무의식 개념으로부터 가능해진다(62). 그러나 이를 정신분석학 내부에서 읽는다면, 특히 프로이트-라깡의 정신분석의 차원에서 읽는다면 주체설정의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라이히는 성억압과 ‘생물학적 핵심으로의 접근에 대한 방해’에 관하여 초자아의 형성(자아-이상과의 동일시)과, 대상애의 형성과 현실원칙의 확대 등과 같은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사용하여 이를 파시즘이 등장하게 만든 대중심리의 ‘원인’으로 연결시킨다. 그러나 자아와 초자아의 형성은 정통프로이트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는 (개인) 주체 설정에 있어서 통시적인 보편성을 갖는 인류사적인 현상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과학적 보편이다. 따라서 프로이트주의에서 입각해 본다면, 파시즘적 대중심리가 파시즘의 ‘원인’으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대중심리가 정신현상에 대한 파시즘의 영향, 즉 ‘파시즘적인 신경증’이라는 결과로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라이히가 본저에서 성격구조의 ‘사회적’ 측면과 그 지형학을 보여준다는 점은 충분히 고려할만 하지만, 개인적 정신현상과 대중적, 집단적 동일시의 관계를 결합하는 제도적 총체로서의 파시즘을 연결시키고 그것의 해체를 기획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정신분석학에서 말하고 있는 정신의 지형학이나 성격구조, 즉 ‘자아’의 형성과 ‘자아이상’의 내면화, 혹은 유기체적인 욕동과 본능의 장인 무의식(‘그거id’)에 관한 자아와 초자아의 검열과 협상 등의 이론은 자아가 쾌락 원칙이 아닌 현실 원칙으로부터 정립되고 일반적 사회관계를 이루게 되는 복합적 구조, 즉 제도나 이데올로기 등에 지배받는다는 사실에 의미가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라깡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우선하는 것은 ‘실재’나 ‘상상’이 아니라, 상징적 (대)타자들이다. ‘파시즘의 대중심리’가 하나의 이상심리라고 한다면, 이상심리에 대한 프로이트의 임상적 치료가 초자아의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할 때 초자아의 전복적 재구성 혹은 해체를 요청하는 라이히의 본저는 정신분석학적인 모순성과 급진성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라이히는 개개 정신병자가 아닌 대중 스스로가 사회적 불행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을 통해 권력을 쟁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인민대중들 스스로가 자신의 사회적 행위에 대한 통찰력을 획득하고, 스스로 자신을 변화시켜 사회적 책임을 강제 받는 단계가 도래한다고 설명한다(451). 그리고 노동자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459, 이는 프란츠 파농이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흑인이 원하는 것은 인간이 되길 원하는 것이다’이라고 말한 것과 비슷하게 들린다). 그러나 역사의 동인이 되는 ‘인민대중’과, 이데올로기적으로 조작된 대중 사이의 프로이트적인 구별(대중적 이상심리로 구별하는 것) 가운데, 만약 후자가 대중심리의 초자아들(가족주의, 민족주의, 애국주의, 신비주의와 같은)을 갖고 그것이 관습화되는 것이며 권위주의적인 사회관계를 파괴하고 자유를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물학적인 에너지 문제에 있다는 라이히의 결론(486)은 ‘인민대중’과 ‘조작된 대중’ 사이의 구별을 무색하게 한다. 성억압과 권위에 대한 복종, 나아가 권위에 대한 동일시를 상징적 거세와 초자아의 형성이라는 개인적 차원에서 읽는 것과 대중심리의 차원에서 읽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의 문제는 프로이트의 주된 관심 영역은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정신의 지형학(그거-자아-초자아)을 통해 자아가 구현되지 않는다면 그 개체의 정신현상이란 대상은 성립하지 않으며, 따라서 라이히가 조작된 대중이라고 말한 ‘조직된’ 대중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민대중의 필연적 귀결이다. 프로이트가 권위주의적 가족, 즉 남근적인 아버지와 성억압의 문제들을 정치적으로 문제 삼지 않았으며 또 가족의 역사적 형태들이 당대에 어떤 정치경제적 맥락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고려하지 않았던 것은 부모와 그 자식이라는 가족 삼각형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그의 설명틀의 기본전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가족 개념을 문제 삼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신화의 수준으로 격하시킨다면, 정신분석학의 기본전제를 거스르게 된다. 프로이트가 집단적인 억압으로서의 문명과 그 불만에 대해 인정하고 있지만, 그러나 프로이트는 초자아를 극복의 대상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인류가 절대 전적으로 ‘현재’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며, 현재와 새로운 변화의 영향에는 단지 느리게 굴복하는데, 이데올로기는 초자아를 통해 기능하지만, 국가나 집단의 갈등이나 불안, 폭력의 문제가 발생하므로 지도자 즉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필요하며 또 동시에 그것이 대중을 통제하는 제도로서 정착되어서는 안 된다는 수준에서 논의한다. 또 그는 초자아의 형성이 자아가 그거와의 갈등을 극복하는 기제이며, 본능과의 관계에서 그것이 거세 불안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죽음과 양심의 공포를 통해 기능하고 있다고 말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라이히가 본저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정신분석학이나 철학이 아니라 사회학이며,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개조 작업을 위해 그는 억압을 의식하고 성과 신비주의 사이의 투쟁을 대중 이데올로기의 압력 아래 실행의 단계에 도달하게 만들어 사회적 행동으로 변화시키려는(274) 시도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노동자의 성생활과 작업 사이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며, 성생활의 만족과 작업을 위한 외적 조건과 생물학적인 전제조건으로서 자주관리와 노동의 즐거움을 위해 고루하고 학문적인 철학의 논쟁을 쓸데없는 것으로 말하며 노동의민주주의에 입각한 외적 노동조건의 형성과 성적 에너지의 충족을 위한 제도를 설명한다(408-409). 또한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권력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며 그 진실은 학문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며(449) 투쟁을 강조한다. 그러나 라이히는 이러한 조건의 완성을 마치 정신분석학적 임상과 치료, 그리고 성 억압의 전면적 해방의 차원으로 설명하고 있다(501-502). 라이히는 노동민주주의에 대해 논하며 그것을 생물학적으로 환원하는 한편, 히틀러의 이상심리에 대해 피력하는 등 사회학적 실천의 문제에 있어서는 다소간의 모순점을 드러낸다. 요약한다면 라이히의 이론적 설명에서 ‘억압적 권위’란 ‘현실적’인 동시에 ‘허구적’이며, 가부장제의 가족과 민족주의적 국가, 신비주의적 종교 사이의 일원적인 접합이라는 설명 도식은 그것들의 중층적 성격을 파악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노동민주주의’는 억압가설이나 자아지각의 동일성이라는 정신분석학적 기본전제를 해체하는, 즉 억압의 전면적 제거라는 정치적 목표에 의해 정신현상에서 ‘억압’이 없고 무의식과 의식의 일치를 이루는 지형학적인 이상향을 상정하는데, 이는 유토피아적 몽상이다. 성정치와 성혁명으로 인해 성적으로 해방된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의 차원에서도 해방되어 있으며, 이러한 노동민주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은 파시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식의 발언으로 라이히는 비록 정치적 입장을 재확인하는 작업을 검증하지만, 이러한 발언은 동시에 ‘정치적’이지 않음을 천명하는 것이다(498, 521). 라이히의 오르곤 에너지에 대한 유토피아적이고 한편으로는 몽상적인 시도는, 오히려 그가 비판한 종교적 신비주의나 부르주아적 인간주의의 특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즉 라이히에게 주어지는 정치적 요구는 역설적으로 비정치적인 영역에 대한 회상 혹은 향수처럼 읽힌다. 앞서 언급한 베르톨루치의 영화가 회상적이며 몽상적인 이유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성적 실험을 실패한 뒤 하릴없이 화염병을 던지는 시위대에 무의식적으로 참가하는데, 이는 개인적인 성혁명의 허무와 패배의 기억과 그것의 퇴영성을 자조적으로 보여준다.
초자아의 형성이라는 정신분석학적인 설명은 개인이 개인일 수 없다는 근대적인 사회관계에 관한 유효한 설명이며, 마르크스주의의 계급과 대중에 관한 설명을 보충해줄 수 있는 설명 도식이다. 즉 개인은 개인인 동시에 집단이지만, 그러나 그 중간태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관계와 주체의 문제를 사실상 계급관계만으로 거칠게 환원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중간태적인 속성에 대해서는 다소간 간과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라이히가 마르크스의 이론을 자신의 용어로 새롭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유의미하다. 인간의 본질적 활동을 노동이라고 정의하는 단순한 철학에서 벗어나 노동을 인간과 사회적 관계들의 본질로서, 즉 삶에 필수적인 노동을 수행하는 노동하는 사람이라는 개념으로 단순화시키고 직업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철학으로 확대시킨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를 비판하는 작업에서, 권위에 굴복하는 인간, 즉 초자아에 일방적으로 순종하는 왜소한 자아를 전면적으로 삭제하는 식의 치유는 가능하지 않다. 사회적인 차원에서 노동을 자유롭게 하고, 성적 욕동과 죽음 욕동, 나아가 근대의 기계화된 노동과 그에 수반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의 정신분석학적 해방의 문제를 단지 생물학적 목표로 환원시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라이히에게 있어 계급 관계, 즉 사회적 관계들의 착취를 가능케 하는 조건에 관한 역사적 설명은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진공 상태에 빠져 있는 듯하다.
이상의 논의에서, 가능한 사회적 프로젝트를 제시하지 못하는 라이히의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의 ‘불가능성’은 그의 이론이 사회학의 차원에서 볼 때는 진정한 사회학적 종합 이론은 아니라고 말하게 된다. 1968년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갔던 것은 이러한 까닭에서일 것이다. 라이히의 프로젝트와 1968년의 혁명은 마치 인류가 잠시 짧은 꿈을 꾼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파시즘에 대한 반대의 기획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비록 1968년은 베르톨루치의 영화에서처럼, 윤동주 시인의 시 제목처럼 ‘사랑스러운 추억’일지도 모른다.
송호근은 자신의 저서 《또 하나의 기적을 향한 짧은 시련》(1998, 나남)에서, 고도 성장을 경험한 한국인의 사회심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송호근이 ‘고도성장의 사회심리’라고 부르는 가치관과 사고양식은 평등주의, 의사사회주의, 낙관주의의 습속도 갖지만 압축성장과 개발독재의 경험은 권위주의, 이기적 자조주의, 가족주의, 독단주의, 지역주의, 엘리트주의, 국가중심주의의 ‘파시즘적 대중심리’의 내용과 유사한 특질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송호근은 또 《한국,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세대, 그 갈등의 미학》(2003, 삼성경제연구소)에서 평등주의, 지역주의, 가족주의, 자조주의는 강화된 반면 다른 항목들, 특히 권위주의나 독단주의, 국가중심주의는 약화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 특히 ‘월드컵 세대’, ‘촛불 시위 세대’로 표상되는 20대에서 40대 초반에 걸친 소위 ‘2030세대’의 변화에서 이러한 특질들이 더욱 잘 발견된다. 송호근은 이 세대가 권위주의적인 과거와 결별하고 자유주의적인 가치를 중시한다고 설명한다. 대중교육, 빈곤과의 결별과 경제적 윤택, 세계무대로의 진출, 자유주의의 확산, 개인주의 증대, 가정의 구속력 저하, 정보화 등 시대의 흐름은 87년 6.10 시민항쟁을 경험하고 90년대 중반 이후 인터넷혁명의 기치에 선 세대를 만들었다. 젊은 세대는 거대담론과 이데올로기 논쟁을 거부하는 한편, 전통적인 규제와 강압으로부터 탈주하는 세대이다. 송호근은 젊은 세대를 프로이트의 용어를 빌려 부친살해의 욕망, 아버지에 대한 거역을 실천하려는 세대이며, 이러한 특질이 2002년 대선에서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 행동한 것에서 드러났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젊은 세대는 지배이데올로기로부터 탈주하는 세대이며, 이는 풍요의 시대를 거친 세대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는 유럽의 68혁명 세대나 미국의 히피 세대에 비교할 때, 거부해야 할 짐은 더 무거운 반면 그 거부를 정당화해 줄 이론적 무기는 빈약하다. 자유주의나 평등주의, 시장합리성 등 신자유주의의 가치를 옹호할 준비는 되어 있지만, 자유와 평등의 모순이나 경쟁과 기회균등의 충돌, 기회균등과 사적 이해의 갈등 등을 조정할 수 있는 기제는 미약하며 따라서 젊은 세대의 세대정신으로서의 지반은 미약하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세대가 국가중심적, 집단우위적 지배이데올로기에 의해 시민 윤리에 입각한 사회학적 프로젝트를 만들어낼 역량을 결여하고 있으며, 가족주의 역시 자율적 규제권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세대는 사회적, 정치적으로 유효한 지평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반이 부족하다. 전쟁, 쿠데타, 권위주의적 동원과 경제성장이라는 구시대의 자산의 대립항으로서 자유, 평등, 시장합리성을 택하는 세대는 여전히 결핍된 ‘공허한 자아’이다.
2006년 한국대학신문에서 대학생의 사회에 대한 의식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정치 사회 성향은 보수화한 반면 성 문제 등 개인 생활에 대한 의식은 자유분방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수적 정치인에 대한 선호, 성장을 우선시하는 사회관과 더불어 성적으로는 보다 개방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인 가치의 내면화는 권위 없는 권위주의, 민족 없는 민족주의를 등장시켰으며, 더불어 ‘된장녀’ 논란에서 보여지 듯 여전한 가부장제 중심주의와 함께 찾아온 젠더질서의 재구성에 대한 열망 등은 라이히의 성 억압에 대한 해방과 사회 혁명에 대한 설명 도식이 반드시 일치할 수는 없다는 것을 방증하며,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것은 시민 윤리, 경제적 평등, 약자에 대한 배려와 같은 생활세계의 아젠다들이다. 국가주의와 권위주의, 억압의 해체와 파괴를 위한 좌파의 재-급진화는 따라서 우리 안의 새로운 응시에 의한 결여들을 올곧게 목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즉 좌파의 재-급진화는 ‘몽상’의 차원이 아니라, 노동자와 민중들의 진짜 욕망을 향해 진주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아 젊은은 오래 거기 남아있거라’, 라이히에 대한 곡해와 그 애석한 죽음을 반면교사삼아야 한다. 이데올로기가 물질적인 힘을 갖듯, 안티테제로서의 이론 역시 물질적인 힘을 갖고 있다. 라이히에게 있어, “나의 작업이 나로 하여금 기능적으로 사유하는 것을 배우게 했던 것(486)”이다. 미래는 오래 지속되며, 하여 온당한 정치, 가능한 기획, 열정적 실천의 지평을 새로 구축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