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풀 걸>

라이터 리 2007. 12. 19. 13:55

조이풀 걸
joyful girl


두더지처럼 양팔을 허우적거리듯 지하를 헤맸다. 손아귀를 자꾸 빠져나가는, 살아있는 듯한 이물감이 드는 자동차 키에 돋은 버튼을 누르자, 저쪽 촘촘한 기둥 사이에서 삐삐 거리는 경박한 소리가 났다. 깜빡이는 불빛을 쫓아 나는 발을 질질 끌었다.

딸깍이는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아, 여자가 일러 주었던 대로 몸을 비틀어 조수석 쪽 수납함을 열었다. 견고해 보이는 봉투 하나가 들어 있었다. 나는 숨죽이고 그것을 뜯었다.

안녕, 빠리의 소년. 당신은 나의 블루칩이었어요. 우리는 세상의 마지막 시간이 흐르는 곳으로 갔습니다. 선물은 마음에 들까요.

초대하지 않는, 닿을 수 없는 청첩장이었다. 나는 가만히 시동을 걸었다. 오디오에는 쇼팽이 걸려 있었다. 기어를 넣고 액셀을 반걸음쯤 밟았다. 난파선의 파편처럼 조각난 빛이 흐트러진 입구를 향해 천천히 핸들을 꺾었다.

1

“돈 벌면 가서 너 차 한 대 새로 사자.”

옆 자리에 탄 선배가 내 낡은 차의 히터를 3단으로 올리며 말했다. 차가 더 요동했다. 매캐한 냄새가 났고, 들숨이 걸쭉했다.

“정우성하고 전지현하고 같이 차를 타고 가는데 히터를 세게 틀면 다음날 신문기사에 뭐라고 나오는 줄 알아? 정우성 전지현, 뜨겁다.”

농담 삼아 한 말인 줄 알았더니 그는 하나도 웃기지 않는다며 말을 이었다.

“야, 어제는 인터넷 기사 제목이, 김아무개, 대본이 필요하다면 코미디 접겠다. 이런 식이더라. 무슨 조지 부시, WMD 없으면 대테러전 접겠다 수준이야. 자존심이 있어서 클릭 안 했다니까.”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사차선 일방통행로 전방에는 소통이 드물었다. 혹한의 겨울밤이었다. 앙상한 가로수들 사이로 바람의 얼룩이 눈 속에 흔적으로 남았다. 나는 운전을 했고, 그는 담배를 피우며 가늘게 열린 창밖을 내다 봤다. 질이 다른 매캐함을 교환하는 창의 안팎에서 나는 한사코 맑은 것을 찾으려 애썼다. 아파트가 많았고, 테니스클럽이 보였다. 때때로 회색조의 상가건물들이 육중하게 서 있었다. 멀리 초고층 주상복합건물들의 윤곽이 밤안개 너머 아스라했다. 운전대를 비스듬히 하고 차선을 이리저리 가로질렀다.

“이 동네에는 신기하게 전신주가 하나도 없어. 이것저것 다 지하로 매설했을 거야. 대신 가로수가 많아서 좋지, 땅값 비싼 것도 다 그런 것 때문이래. 이제는 사라진 이데올로기 대신 웰-빙 열풍! 야, 저쪽에서 돌아야 돼.”

벌써 몇 주를 지내왔지만 아직도 낯선 동네였다. 태어나 삼십 년 가까이를 살던 집이 재건축 바람에 휩쓸리고 나서, 양친은 보상금으로 용인 어디쯤의 아파트를 사들였다. 그러고도 제법 많은 돈이 남았다. 나는 손을 벌려 이 동네 어디의 원룸에 입주했다. 무너진 옛날 너른 집의 감나무와 개집의 냄새를 떠올리며 나는 참지 못해 운전석의 창문을 열었다.

선배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거대한 건물의 입구였다. 네 개 동으로 이루어진 이 건물은 최근 신축된 강남 어디의 마천루에 그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 한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유명했다. 어두컴컴한 진입로를 한 바퀴 반을 돌아 지하 1층으로 들어가자, 졸고 있던 지하주차장 관리인이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나는 창문을 열고 그가 요구하는 주차료 천 원을 냈다. 열린 틈으로 아직도 어딘가를 헤집는 엔진 소리가 들렸다.

그는 익숙한 듯 동선을 잡아 상가 건물 지하에 딸린 멀티플렉스로 걸어 들어갔다. 조명을 받지 못하고 철장 속에 갇힌 마네킨들의 표정들이 암담했다. 그는 매표도 하지 않고 상영관 입구로 들어서며 검표원에게 인사했다. 앉아 있던 그는 이미 안면이 있는 듯 고개를 살짝 숙여 응대하더니, 선배의 뒤를 쫓아가던 나를 뜨악하게 쳐다보았다.

“오늘은 한 사람 더 있어요. 유 실장님한테 얘기해놨어요.”

개미굴처럼 늘어선 상영관의 입구들 가운데 더러는 불이 켜 있었고 더러는 어두웠다. 저쪽 사람 없이 스산한 스낵코너 앞에 코트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선배가 내쳐 다가가자 여자 쪽에서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몸을 돌려 반가운 얼굴로 방심하듯 손바닥을 내보이던 그는 뒤에 선 나를 보고 데인 듯 손가락을 오므렸다.

“얘가 유진이야. 너희 둘이 동기였어.”

“그래? 98학번 불문과 나온 오유진인데요.”

“네, 어, 나는 사회학과…….”

오유진. 큰 키와 긴 머리, 또렷한 눈을 가진 미인이었다. 커다란 백을 맨 그와 악수를 했고, 그는 내밀었던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여배우들을 베낀 듯 닮은 동작이었다. 나는 나와 공유했다는 그의 대학 시절을 상상했다. 서로 다른 것을 추억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술을 퍼먹고 당구장을 드나드는 한량이었던 나는 옷과 화장품을 사러 다니는 이들을 방임하여 살았다. 사회과학 도서 열람실이 학교 중앙도서관 건물의 좌측 날개에 있었고, 쇼핑객들은 거기 있는 부류를 ‘중도 좌파’라고 비아냥거렸다. 서로는 서로를 빠르고 또 깨끗하게 잊곤 했으니, 재회임이 틀림없다 해도 우리는 다른 수족관의 붕어들처럼 생면부지였다.

선배는 앞장서서 제일 구석에 있는 상영관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그는 우리에게 앉을 자리를 안내하고는(선배는 굽은 손가락으로 저 어둡고 텅 빈 공간의 어디쯤을 가리킨 것일까) 상영관 뒤쪽의 영사실 입구로 들어갔다. 발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릴 때, 오유진이 먼저 계단을 내려가 객석의 가운데 되는 쯤에 가서 앉았다. 나는 머물러 영사실에 들어간 선배가 나올 때를 기다렸다.

“근사한데요. 시네마 천국이 따로 없네. 유 실장이라는 사람이랑 잘 알아요?”

“응, 이쪽 지점 영업 담당이야. 처음에는 같이 봤어. 나중에는 아예 보고 싶을 때 밤에 와서 보라고…….”

극장 시설이 시동되면서 기계음이 식탁보처럼 상영관을 감쌌다. 선배는 내 어깨를 툭 치고 오유진이 앉은 쪽을 향했다. 나는 선배 옆에 엉덩이를 묻었고, 그 너머 오유진은 다리를 꼬고 앉아서 로고와 오프닝 크레딧이 뜨기 시작한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접하지 못했던 프랑스 영화였고, 영어로 자막이 나왔다. 최근 배우기 시작한 프랑스어 발음이 내심 반가웠다. 오유진은 영어 자막과 프랑스어 더빙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편안했을까. 선배는 언제 또 이런 영화에 관한 고상한 취향을 갖게 된 것일까. 낯설거나 낯익은 배우들이 나왔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따분했지만 잔재미가 있었다. 다행히 졸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고 우리는 들어왔던 길을 거슬러 백화점 지하로 나왔다. 나는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잠자코 두 사람을 졸졸 따라다녔다.

2

세상이 다 잠들었을 무렵 대담한 도둑처럼 영화를 보게 된 것은 선배의 일방적 강권에서였다. 그는 나보다 여섯 살이 많았고 네 학번이 위였다. 방에 달린 밖으로 난 틈을 온통 틀어막고 전기에 의지해 심해어처럼 납작해 있던 밤에, 선배는 챙겨 입고 차를 끌고 나오라고 했다. 취한 듯 박자가 불분명한 발음을 들었고, 나는 거절의 뜻을 비쳤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나는 이틀을 입던 셔츠와 코트를 대충 챙겨 입고 지하주차장으로 가며 발을 자꾸 헛디뎠다.

선배는 몇 년 전, 우리 사이에서 스타 아닌 스타였다. 빚은 것처럼 잘 생긴 외모는 아니었지만 호남이었고, 바이올린 D현의 음역에서 울리는 그의 목소리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다. 무엇보다, 학생운동이 불타고 남은 희나리 위에 새로 지은 디오니서스 신전에서 노닐던 나는, 그가 희나리에 불을 놓아 삼은 횃불을 보고 경도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신입생 시절 나는 그를 따라 총장실이 있는 학교의 본관을 점거하는 데 따라 나섰다. 그는 학생운동이 배고픈 시절이 지났다고 일갈하고는 ‘단식’ 투쟁 대신 ‘폭식’ 투쟁을 벌이자며 끼니때마다 자장면에 탕수육, 고량주 따위를 배달시켜 먹고 총장 이름으로 외상을 달았다. 캠퍼스에 상주하며 배달하던 철가방들도 그의 그런 호기에 은근히 동조해 주었다. 그는 시위 때면 화약을 구해 와, 질서 없이 도열한 우리 뒤편에 불꽃을 그렸고 우리는 그것을 후광으로 업고 전진하는 발걸음을 밀었다.

그의 ‘세미나’는 구세대의 세례를 받은 여타의 운동권들과 조금 달랐다. 다른 선배들이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 같은 글을 번역해 오거나 이론과실천판 <자본론>을 가지고 올 때, 그는 스미스의 <국부론>이나 케인즈의 <자유방임의 종언> 같은 것들을 가지고 왔다. 케인즈의 책은 미국에서 출간된, 희귀하게 낡은 하드커버 판이었다. 그는 다른 작자들은 마르크스의 핵심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 딱딱한 교조성에서 벗어나, 마르크스가 했던 바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마르크스는 변증법을 설명한 게 아니라 변증법을 사용한 거야. 마르크스 시대의 자본주의와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는 그 질이 다르지. 따라서 우리는 마르크스를 도그마로 여길 것이 아니라, 그의 철학적 방법론이라는 텍스트를 취하고 그것을 즐겨야 해”, 그는 마르크스 대신 자본주의 경제학자를 공부하는 까닭을 이렇게 밝혔다). 거기서 우리는 모두 모호했고, 모호함을 구체로 이끌어낼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세상 자본의 속도는 쫓아갈 수 없게 빨랐고, 예컨대 시시각각 변하는 우리 통장 속 숫자(어제만 해도 2백44만3천2백5십 원이었다, 나는 오늘 거래은행의 모 지점 일련번호 A14번 ATM에서 2만원을 출금했고 수수료는 물지 않았다)는 분초를 기해 변하는 그림자보다 더 변화무쌍했다.

선배는 나 같은 후배들을 달고 다니며 함께 시나 소설을 써서 학교 여기저기에 뿌리고 다녔고,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때때로 제법 규모 있는 사진전이나 연극 공연, 영화 상영회를 기획했다. 실로 캠퍼스는 마개를 방금 딴 사이다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과거 즐비했던 사회과학 동아리들은 폐쇄되거나 명맥을 잇기 어려울 정도로 쇠약해 가고 있었고, 대신 영화를 찍거나 재즈댄스를 추는 무리들이나 경영 컨설팅을 공부하는 모임 등등이 대학생 신문에 소개되었다. 확성기와 빨간 머리띠가 있던 곳에는 비트가 흐르는 앰프와 힙합바지가 있었다. 심지어 총학생회 선거가 다가오자 선거운동 구호로 ‘당신의 꿈을 위하여’ 식의 문장이 채택되었다(누가 어떤 꿈을 꾸고 있단 말인지, 나는 궁금했다). 나는 신입생 시절 ‘선배’들이 마르크스를 읽혀주던 것을 떠올릴 때마다 캠퍼스의 계통 없는 진면목들이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나는 광장의 미혹에서 중립을 말하는 것과 내 행태에는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선배들이 안겨줬던 <전후시대의 인식>과 <전환기의 논리> 대신, <시사교양>과 <롱맨 토플>을 끼고 다녔다. 후배들은 동생이 되어 오빠가 된 선배와 커플링을 끼고 연애를 시작했다.

세기가 바뀌면서도 나는 선배를 따라다니며, 지난 시절의 좌파를 서슴없이 애도하는 그의 대담함에 거듭 놀랐다. 우리는 때로 고인의 시편을 읽으며 건물에 있는 틈마다 숨겨진 비밀이 없나 들여다보고 다녔지만, 이제 버려진 금서는 나오지 않았다. 새 밀레니엄을 장식하는 행사들이 우리들을 지나쳐갔고, 정당의 이름들이 바뀌었다. 우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운동’은 선배의 마지막 겨울, 그의 논문심사가 끝나고 교정 전반이 한산하던 무렵에 자행되었다. 우리는 중앙도서관과 본관 앞에 세워진 학교 건립자들의 기념 동상에 페인트를 부었다. 하나에는 검정색, 하나에는 빨간색으로 세 통쯤. 나는 이만 가자고 했지만, 선배는 그중 하나의 목을 자르기 위해 톱질을 해대다가, 순찰을 돌던 학교 수위에게 발각되어 제지당했다. 나는 도망쳐 잡히지 않았고, 선배는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학교의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졸업학점을 다 채운 상태로 퇴학당했다. 이듬해 1월에 나는 쫓기듯 군대에 갔다. 위문편지로 지인들이 선배의 구명을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왔지만, 선배는 내게 소식이 없었고 다만 하릴없이 말없이 가이없이 떠났다고 했다. 군에 있던 시절 그가 무슨 일인가로 입건되어 1년 6월을 살았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경황이 없는 나는 그냥 듣기만 했다.

복학한 뒤에도 나는 줄곧 ‘중도 좌파’였다. 졸업한 뒤에는 어쩌다 대학원까지 흘러들었다. 선배는 대학원 시험을 치를 무렵 ‘나는 이제 철학의 땅을 떠난다, 너는 부디 건승하기를!’이라고 적힌, 구겨진 엽서를 보내왔다. 우표에 찍힌 소인에는 미국 중부의 어느 도시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함박눈처럼 내리는 선배의 추억을 밟고 석사 졸업 논문으로는 <관혼상제를 통해 본 한국 가족사회의 분석 - 연결망 이론을 중심으로>를 냈다. 늘 세상 이치에 미숙했던 나의 논리는 보잘 것 없었고, 합당하게도 성적은 평범했다. 토플 시험을 보고 대학원 시험을 치렀다. 같은 기간 주위에 휩쓸려 입사 시험도 몇 번 응시했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대학원에 남았다. 누가 왜 그래 물으면 아직 내게 세상은 알쏭달쏭한 것이라고 답했다. 존경하던 교수들은 위인들이 응당 그랬듯 내게 말이 없었고, 아마 나도 학교를 떠나기에 마뜩한 용기를 낼 수 없었다. 나는 박사 논문으로 <한국의 문화 정책>을 준비했다.

선배를 다시 만난 것은 최근이었다. 아버지는 내게 보상금 중에 남은 것이 많다며 묵혀두긴 아까우니 불릴 방도를 찾아보라고 일렀다. 부동산 투자를 핑계로 여기저기 이름난 땅들을 돌아다녔다. 격전지와 철새 도래지, 오래된 성과 옛 놀이터를 오가며 나는 사람 생각을 많이 했고 가끔 돈 생각을 했다. 서울로 돌아와 나는 입주한 원룸 근처에 있던 무슨무슨 자산투자 하는, 이름난 회사의 영업장을 들렀다. 선배는 거기에 따로 자기 방을 갖고 비서를 둔 돈놀이꾼으로 있었다. 처음 그를 마주쳤을 때에는 김동식이라는 이름조차 가물거렸다. 맥없이 앉아 홍보물을 뒤적이다가, 사무실에서 나오던 그가 먼저 아는 체를 하며 인사를 해왔다.

“아니 동식 선배, 여기서 일해요?”

“선배라니, 형이라고 불러라.”

“아니요, 선배는 선배예요. 선배다운 선배.”

나는 오랜만에 만난 그를 형이라고 부르기가 머쓱했다. 보증을 잘못 서 대신 빚을 갚았던 경험이 있던 아버지는 아는 사람과는 돈 거래를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고, 나는 거기서 노는 돈을 굴려 달라는 말 대신, 구르던 나를 놀리는 것은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웃으며 연락하겠노라 했다.

3

펀드 매니저와 아나운서 커플 사이에서 대학원생은 겨울동안 적지 않은 영화를 봤다.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선배는 연락을 해왔고 나는 한 번은 거절하고 한 번은 수락했다. 선배는 프리츠 랑, 알렉산드르 도브첸코, 미조구찌 겐지, 쇼티아지트 레이,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의 필름을 가지고 왔다. 들어서 이해할 수 없는 동서남북의 제어들은 효과음에 불과했고, 나는 미장센을 챙길 틈 없이 자막을 읽어야 했다. 이해가 부족한 부분은 생각 없이 넘어갔다. 때마다 영화는 미스터리처럼 남았지만, 나는 영화관에 가는 것이 까닭 모르게 좋았다.

우리가 만나던 시간은 항상 새벽이었다. 나는 더러운 냄새가 나는 내 차를 타고 돌아왔고, 선배는 자신의 BMW로 유진을 데리고 어둠 사이로 사라졌다. 가끔 셋은 밤에 만나 영화를 보는 대신 술을 마시러 가기도 했지만, 따지고 보면 데면데면한 사이였고, 술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말없이 황망해서 일어나곤 했다.

셋이 새벽이 아닌 다른 시간에 자리를 가진 것은, 이르게 핀 꽃들을 살피며 새 학기를 준비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선배는 내게 전화해 점심 약속을 정했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나는 먼저 나가 덜 녹은 길에 빗물이 미끄러지는 거리를 쏘다녔다. 야무지지 못해서 양말이 젖는 것을 몰랐다. 선배가 잡은 인사동의 어느 한식당에서 나는 신을 벗지 않는 자리에 앉자고 했다.

원형 테이블에 셋은 둘러 앉아, 늘어진 반찬을 깨작이며 식사를 했다. 난방기 돌아가는 소리와 주변의 외치는 소리가 우리의 긴 침묵을 대신했다. 삐거덕거리는 의자에서 몸을 숙이고 또 일으키며 탕이니 구이 등속을 헤집었다. 나는 재우쳐 먹었다. 몇 달은 닦지 않은 듯 지저분한 창문에 빗자국이 하염없이 새겨졌다. 창밖을 보며 이렇게 셋이 만날 명목은 사실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웬일이에요, 점심 때.”

“오늘 우리 펀드에서 투자한 작가 전시가 있어. 너한테 보여주고 싶어서.”

“펀드에서 작가한테 무슨 투자도 해요?”

“전부터 이걸 얘기할까말까 했는데, 우리 펀드가 성격이 좀 달라. 일테면 아트펀드야.”

그는 정말 갤러리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가 입는 회색 스트라이프 수트가 그토록 어울려 보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오유진은 그의 곁에서 해사하게 웃으며, 커다란 모자를 쓰거나 지팡이를 든 관람객들과 인사하고 악수를 교환했다.

나는 그들로부터 멀거니 서서 전시된 것들을 훑었다. 실리콘과 식염수와 플라스틱과 철심 따위를 낡고 헤진 옷가지에서 자른 포목 위에 배치한 미니어처 도시들과 풍경화들이었다. 나로서 그것들은 한 겹 벗겨내고 나면 빈 공간만 남는, 느끼고 싶어도 느낄 수 없고 알 수 있어도 알고 싶지 않은 일련의 오브제들일뿐이었다. 청바지에 블라우스 차림의, 성별조차 불분명해 보이는 어린 작가가 선배와 오유진에게 굽실 인사했다. 나는 그의 불분명한 성차와 그의 작품이 짓는 경계와 선배가 투자했다는 돈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는 삼십분쯤을 화랑에서 배회했다. 나는 할 일이 없어 본 것을 또 보고, 도록을 들췄다. 이윽고 안에서는 리셉션을 시작했다. 나는 화랑의 직원이 따라주는 음료를 받아들었다. 화랑의 주인과 평론가가 작가를 소개했다. 지방의 미술대학 2학년에 다니는 여학생이었고, 절반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변에 인사를 돌렸다. 딱히 누구에게 한다고도 할 수 없는 고갯짓을 그는 연신 주억거렸다. 화랑의 주인은 리셉션에 초대된 어디 대학의 교수, 어느 협회의 고문, 무슨 화랑의 딜러 등등을 소개하더니 선배를 가리켰다.

“그리고 오늘 이 전시회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수고해 주신, 우리 한주희 작가의 후원자시지요. 김동식 선생님이십니다.”

선배는 살며시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상하로 움직였다. 그것은 인사가 아니라, 좌중의 박수에 대한 인정처럼 보였다. 떠들썩한 환호와 박수 가운데 잠자코 있던 나는 선배의 곁에서 손뼉을 부딪치던 오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를 항의하듯 가만히 보았고, 나는 이내 손을 들어 서너 번 소리를 냈다.

자리를 뜰만한 틈을 엿보며 실리콘과 청바지로 부산을 그려놓은 그림 앞에 서 있던 내게 오유진이 가만히 다가왔다. 그의 접근에는 맥락이 없었고, 그의 어깨 너머 선배는 평론가라고 했던 중년 남자와 손짓을 섞어가며 무언가를 논의하고 있었다.

“저녁 때 시간 있어요?”

“저녁 때? 왜요?”

“동식 오빠는 사람들하고 모임 있어요. 혼자 불러놓은 게 영 미안하잖아. 시간 있으면 내가 한 잔 살까 싶은데.”

4

나는 아티스트와 크리틱, 패트런과 딜러, 콜렉터와 필란트로피스트들 틈에서 갈팡질팡했다. 전시가 다 끝날 때까지 화랑 옆 커피숍에서 잡지를 읽으며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사이에 섞여 고기 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선배는 자리를 파하기 직전 내 어깨를 두드리며 인사를 했고, 나는 나와서 비 그친 것을 보고 아무 데나 걸어 다녔다. 이윽고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전화기가 울렸다. 나는 젖은 양말을 걱정하며 오유진과 접선했다.

심상하게 서 있는 건물의 입구에 그는 맑게 서 있었다. 거리는 춥고 어둡고 축축했고, 발이 시린 우리는 어디선가 꾸역꾸역 밀려드는 사람 냄새를 피해 한적해 보이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전통주 따위를 파는 주점이었다. 나는 대학 시절 다니던 그렇고 그런 주막들을 떠올렸고 그의 대학 시절을 상상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등을 벽에 기대고 소리 없이 술을 따라 마셨다.

“아나운서라면서 TV에서는 왜 한 번도 못 봤죠?”

“나 라디오만 해요. 방송사가 좀 작아. 작년부터 텔레비전 위성방송도 하긴 하는데 보통 목사들 나와서 집회하는 거 틀어대는 채널이라.”

“아, 기독교 방송이지요. 방에 라디오가 없어서 못 들어요. 유진씨도 기독교예요?”

“모태 신앙이에요.”

“나는 못해 신앙인데요.”

여흥을 만들기 여의치 않은 간극이 자꾸 아득해보였다. 나는 젓가락을 깨작거리며 술잔이 비면 재빨리 채웠고 술잔이 차면 재빨리 비웠다. 술병들이 둘 사이를 어슷거리는 사이 시나브로 취기가 돌았다. 애초부터 취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함께 학교를 다니던 무렵에는 이렇듯 한가하게 앉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신 적도 없었는데, 나는 이제 그와 흥뚱항뚱하며 잘도 마셨다.

“뉴스 말고도 그런 것도 해요. 시보랑 공익광고 멘트. 뉴스 끝나면 영화 음악 방송 DJ 보는 여자가 있는데, 한심해. 차라리 내가 하고 싶어. 매일 그래요.”

그는 고개를 가로젓다가 문득 내 쪽을 보며 말했다.

“박사 2년 했으면, 그럼 계속 학교 다니면서 교수까지 하는 건가?”

“글쎄, 사실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어요. 눈은 높은데 일자리가 시시해서 그랬지요. 보따리장사를 꼭 해야 되나 싶기도 하고요.”

그냥 앉아있는 줄 알았는데, 돌던 술병이 비자 그가 먼저 주문을 넣었다. 눈을 씻고 보니 유진의 얼굴도 제법 불콰해 있었다.

“집에서는 당연히 교수를 하라고 하지요. 근데, 박기복 알아요? 유진 씨도 박기복 알아요? 우리 과 꼰대 있잖아요.”

꼰대 하는 발음을 하며 혀 꼬이는 소리를 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종업원이 가져다 준 술병의 뚜껑을 따 죄 비어있던 잔들을 채웠다. 부딪친 술잔으로 그는 입술만 적셨고, 나는 반쯤을 비웠다. 시계를 보니 자정을 넘어 곧게 섰던 바늘이 막 헤어지고 있었다.

“나 교수한테 찍혔어요. 그 양반이 무슨 칼럼을 신문에 냈는데, 내가 그거 씹는 글을 써서 대학원 신문에 냈어요. 그 원고 쓰는 게 대학원생들한테 순번대로 청탁이 오는데, 이번에 특별케이스로 내용까지 정해줬어요.”

예기치 않은 마찰이었다. 갓 석사 과정을 마친 애송이였던 나는 교수를 모독했다. 나는 죽은 독재자를 치적이니 공과를 운운하며 옹호하는 그를 정치적인 청맹과니라고 썼다. 신문이 뿌려진 이틀 뒤 교수는 나를 호출했다. 수많은 사회과학 서적들로 둘러싸인 그의 사무실에서 언쟁을 시작한지 30분쯤 지나 그는 내게 꽁초가 수북했던 재떨이를 던졌다. 나는 흩어진 꽁초를 줍고 옷에 묻은 담뱃재를 털며 돌아서는 길에 분연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후회할 일이었다. 유학을 생각하기 시작했고, 프랑스어학원(‘알리앙스 프랑세즈’라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알량한 불어’라고 불렀다)을 다녔다.

“빠리 가려고? 불어는 많이 배웠어요?”

“쥬 쒸 꼬헹(Je suis Coreen) 정도는 쓸 줄 알아요. 헤헤, 유진 씨가 나 과외 해 줄래요? 불어 어렵던데요. 아, 사실 갈지 안 갈지도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몰라요, 실은요.”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오유진이 풋 웃으며 말했다.

“이제 봤더니 사회학과도 우리 과에 즐비한 간다프였네.”

“간다프가 뭔데요?”

오유진은 뒤적거리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갑자기 잔을 들어 건배를 청해왔다. 내가 엉겁결에 잔을 들어 부딪치자 유진은 희롱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반드시 간다, 프랑스로! 앙샹떼, 쁘띠 갸쏭(Enchantee, petit garcon).”

상떼, 마 벨(Sante, ma belle). 나는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혀를 꼬부라뜨렸다.

5

입춘이 지나고 2월이 다 가도록 실로 춘래불사춘이던 날들이었다. 비가 더 왔고, 옷이 얇아졌다. 괴이쩍게도 나는 여전히 추웠다. 세차게 퍼붓던 비와 이르게 지던 꽃들. 나는 하릴없고 할 일 없어 손을 비볐다. 아버지의 돈을 맡긴 금융 상품들의 수익률은 신통치 않았고, 내 잔고는 야금야금 바닥을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이리저리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을 때, 박기복은 뜻밖의 제의를 해왔다. 나는 그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기 전, 몸을 떨며 울리는 전화기를 잡았다 놓았다 했다. 그와 다툰 것은 오로지 내 지식이 미천했기 때문이라는 자책이 들었다. 나는 내게 불리한 증거물을 지우려는 미숙한 흉악범처럼 문득 내 책장을 헤아렸다.

“내가 올해 어디 간사로 가거든. 자세한 얘기는, 음, 내가 자네한테 술 한 번 사지. 그때 들려줄 테니. 어때?”

“저 더러 선생님이 맡으신 강의를 땜빵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신입생 병아리들 데리고 하는 입문 강의잖나. 병아리들 날개 짓 못한들 상관없으니 책임감은 느끼지 않아도 좋다네.”

전화를 하며 나는 내 책장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세상의 동서남북과 상하좌우가 맥락 없이 꽂혀 있었다. <SPSS 12.0> 옆에 <국어사전> 옆에 <까라마조프가 형제들> 옆에 <문명의 충돌>, 그런 식이었다. 책장에는 <자본론>과 <국부론>도 있었다(그 둘 사이엔 뜬금없게도 <수화교실>이란 책이 있었다, 신입생 때 장애인 봉사 동아리에 들어가겠다며 사고는 읽지 않은 책이었다, 결국 동아리에도 들지 않았다, 나는 어쩌자고 이 책을 이 방까지 가지고 왔을까).

나는 전화를 끊고, 그것이 그의 호의일는지를 가늠했다. 박기복은 어쩌면 제자에게 소란을 피운 부덕을 뉘우치며 일종의 선심을 쓰고 있는지도 몰랐다. 학과에는 박사과정을 밟는 대학원생이 십여 명 있었으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강의를 맡은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그러나 강의를 맡는다고 해도 강의실 밖에서는 파트타임 임노동자에 불과했다. 막상 뜻에 없던 모교에서의 강의가 손에 잡힐 듯, 아련했다. 나는 돌연 되게 쓰고 어지러웠다.

다음 날 박기복에게 전화를 걸어 수락의 뜻을 전하고, 강의안 요약을 준비하고, 학과 사무실에 필요한 서류를 등록하자 수강편람에 내 이름이 찍혀 나왔다. 나는 실무 교수안을 짜며 선배가 가지고 왔던 검은 장정의 <자유방임의 종언>를 떠올렸다. 나는 강단에서 에밀 뒤르껨과 막스 베버, 마르크스 같은 선현을 주워섬겨야 했다. 낡은 책들을 훑어보는 사이 수강 신청이 시작되었고, 양친에게 늦게나마 소식을 전했다. 당신들은 기뻐하시며, 열심히 해서 평가 잘 받으면 교수 임용도 쉬운 것 아니냐는 등의 순진함을 늘어놓았다. 나는 집에서 축하금조로 보낸 용돈으로 미욱하게도 옷을 몇 벌 샀다.

강의를 맡는다는 소식을 선배에게 전하자 그는, 삼류 대학원생이 일류 대학 교수 됐네 하며 농을 걸어왔다. 그는 개강 직전 만난 자리에서 '한국비정규직대학교수노동조합'에 가입하라며 <대학이여, 우리는 희망 없이 네 이름을 부를 수 없다>라는 긴 제목의 책을 건넸다. 훑어보니 하나 같이 우울하기 짝이 없는 시간 강사들의 수기 모음집이었다. 저 고결한 합리성을 간직하고 있어야 할 상아탑 내부에 켜켜이 쌓인 부조리들을 보며 나는 몸을 떨었다. 나는 선배와 술잔을 교환하면서도 일이 박기복 교수의 주선에 의한 것임은 끝내 말하지 않았다.

“증권맨들이 모이면 최신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예술가들이 모이면 대출 이자에 대해 이야기하거든.”

내가 선배가 하는 일에 대해 묻자 그는 손에 찬 비싸 보이는 시계를 만지작거리며 점잖게 말했다. 그는 나를 앞에 두고 연신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학창 시절 시간과 공간을 묘사하는 언어와 학(學)의 핍진함을 대신하여 모니터 속 점멸하는 경제 지표를 추적하는 사람이 된 것이 생경했다. 시나 소설을 쓰고, 연극을 보러 가던, 무던히도 모던했던 우리는 이제 삼십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그랬다. 서른 살이 넘으면, 치솟는 금리와 임박한 구조조정 따위가 각다귀처럼 달려드는 삶의 치덕거림에 마냥 태연할 수는 없게 마련이었다. 하물며 선배는 대단히 근사한 편이었다. 그 시절을 함께 했던 선배들은 대개 허리가 틀어지고 눈 밑이 퀭해, 방금 무덤에서 꺼내놓은 것처럼 보였다.

선배가 사모(私募)하는 펀드는 1억 원 이상을 투자하는 고액자산가들을 상대로 했다. 3년 6월 만기에 설정액은 150억이었으며 기준 통화는 미국 달러화를 썼다. 판매 수수료는 매입 청약금액의 1.5%, 운용보수 및 관리보수 금액은 순자산가치의 2%로 설정되었다. 평론가를 고용해 자산의 40% 가량을 미술품을 투매하는 데에 쓰고, 고용한 딜러를 통해 경매에 붙였다. 나머지 자산의 20%는 영화 수입에, 20%는 공연 산업에 투자되었고, 실비를 뺀 나머지 자산 18%는 펀드 안정성과 유동성 확보를 위해 채권과 어음 등 픽션 금융상품에 묶어둔다고 했다. 선배는 고용한 평론가들에게 최대한의 자율을 보장하는 가운데, 다만 한 가지 권고 사항을 두기를 ‘정치적으로 공정한’ 작품들을 우선 구매하라고 일렀다. 안정적인 투자를 위해 유명작가들인 김흥수, 이용덕, 박성태의 작품도 구매했지만, 머리가 노란 젊은 작가들, 이불, 서도호, 배준성, 함진 등의 작품 역시 포트폴리오의 대상이었다. 목표 수익률은 연 8%였고, 환매는 신청일로부터 익영업일 기준가로 제 7영업일 이내에 지급되었다.

선배가 초대했던 개인전의 작가는 오로지 선배의 안목으로 건진 ‘물건’이었다.

“유진이랑 대학생들 연합 작품전 하는 미술관에 갔거든. 너무 괜찮은 거야. 포스트모던한 몸을 이루는 질료들로 만든 보디스케이프지. 그 시각적 충격! 이번 개인전은 프로모션일 뿐이야. 작품도 내가 다 사들였어. 다 해서 5천만 원 줬지만, 두고 봐. 작품 당 3천은 받을 거야.”

선배는 그날 박수 받던 자리에서 짓던 표정으로 내게 모종의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나는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술가의 창조성과 감상자의 수준을 맞추는 거지. 고유 가치와 유효 가치를 맞추는 작업이야. 예술가와 감상자가 서로를 자극시키고, 우리 예술이 인간의 윤택하게 하는 거지.”

“좋네요. 말하자면 병인이라든가 변증인가요.”

“블록버스터급의 미술기획사와 영화 수입사를 차릴 거야. 그날 전시는 장난 수준이야, 제대로 된, 매머드급 아트 페어 올리고 경매에도 제대로 참가할 거야. 필름마켓도 다니고.”

그는 선언하듯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떴다. 나는 남아 술병에 남은 것을 다 비우고야 일어났다.

6

강의를 하고 또 듣는 날이 지나 밤이 되면 가끔 오유진이 생각났다. 그때는 자정을 기다려 지하에 세워둔 차로 향했다. 가끔 주차한 자리에서 난청일 때 차를 빼 동네를 돌기도 했다. 또박또박 세파를 설명하는 목소리는 언젠가 ‘간다 프랑스’ 하던 그 목소리가 아니어서, 차에서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방송국의 웹사이트에 접속해 이름을 확인하기도 했다. 여지없이 진행 오유진 하는 문자열이 빛났고, 나는 마뜩찮게 위로 마우스 커서를 올리고 좌우로 긁었다. 프로듀서 김 아무개, 엔지니어 박 아무개, 저는 오유진이었습니다. 거짓말 같았다.

급기야 나는 3월의 두번째 수요일에 동네를 돌아 조그만 오디오를 사들였다. 책상 한쪽에 기기들을 쌓아두고 나는 라디오 튜너부터 전원을 올렸다. 시간을 기다려 주파수를 맞추고, 고루한 세상을 육하원칙에 따라 정리하는 유진의 명쾌함에 새삼 놀라며 나는 뿌연 창밖에 현실이 있음을 느꼈다. 정부의 부동산 시장 정책과 향후 전망,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국제사회의 경향,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과 그 의미, 이상기후의 원인과 대책을 들으며 나는 고궁의 이끼처럼 몸을 눕혔다. 라디오 속에서 유진은, 가까운 곳에서 먼 곳을 향해 하루를 정리하고 있었다. 동북아 정상 회담의 파행과 정당들의 이합집산, 지속적인 유가 안정과 경제 동향, 빅 리그 스포츠스타의 선전 가운데 유진은 밥벌이를 했고, 채점 받아 감점당해야 할 나는 도리어 채점하며 감점을 하기도 했다.

그런 그를, 그저 오랜만에 만난 성공한 선배의 애인쯤으로 여겨야 했던 나로서는 갑작스레 걸려온 유진의 연락이 당혹스럽게도 반가웠다.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를 가지며 말을 트고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날의 수고에 대한 대가였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흔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도 주고받은 적이 없는 사이에 걸려온 전화를 아무렇지 않게 받기에는 말하자면 자신감과 용기가 필요했다. 사실은, 일종의 두려움과 수치심을 버려야 했다. 그는 선배의 애인이기에 앞서 잘난 여자였다. 나는 자신을 가지고 겸허해져야 했다. 출강을 두어 번쯤 하던 어느 날 그는 전화를 걸어 방송국 앞에 잘하는 회전초밥집이 있는데 식사나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교수님 되셨잖아. 한 턱 내야지요.”

“스시? 박봉인데……. 나 시간 강사야. 교수는 무슨. 축하할 일도 아니야.”

우리가 만난 것은 오유진의 방송국에서 정한 저녁 시간 동안이었다. 따로 만난 그는 선배와 함께였을 때에는 알지 못했던, 오히려 더 활달하게 잘 웃는 여자였다. 나는 그의 어깨에서 미려하게 떨어지는 수트의 선을 보며 내 비루한 옷차림이 못내 부끄러웠다.

내가 앉아 타이, 히라메, 시요리, 미구로아카미를 구별하며 남은 시간을 재고 있을 때 그가, 새벽에 다시 만나 겨울처럼 영화를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물었다. 우리는 처음으로 유진의 주선 하에 만났다. 유진이 가운데 앉았고, 남자들이 양 옆을 점했다. 선배는 나를 보며 짐짓 하는 말인 듯 오랜만이라 했다. 따져 보니 오랜만도 아니었으나, 오랜만이라는 말 밖에는 하지 못했다.

영화를 다 보고, 선배는 나와 유진을 태우고 차를 몰았다. 이문이 남지 않는 내 아버지의 돈에 대해 묻자, 그는 기대 수익률을 낮춰 보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해 왔다. 원칙적으로는 가치주 보다는 성장주를 주목해야 하며, 분산투자하는 쪽이 좋다고도 했다. 금리가 인상되면 조정 장세에 있는 주가가 탄력을 받을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미국의 금리 인상이 마무리되는 대로 채권형 펀드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리스크 관리를 해야 하며, MMF 같은 단기 매칭형 펀드에 투자하다가, 금리가 어느 정도 안정되는 타이밍에 채권형 펀드를 본격 늘리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이어 신약, 금융 등 성장주를 추천하며 최근 한 달 수익률이 주식 상승률을 웃돈다고 설명했다. 나는 선배의 설명을 들으며 반쯤은 이해하고 또 반쯤은 넘어갔다.

봄이 익어가며 나는 유진과 만나는 일이 더 늘었고, 선배는 더욱 바쁜듯했다. 나와 유진은 식사를 하거나 커피를 마시며 소소한 데이트를 했다. 그녀는 가끔 내 팔을 안았고, 나는 자주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나는 날짜가 바뀌는 순간마다 유진의 목소리를 들었다.

7

나는 시험문제를 준비하며 어린 날 뻔질나게 드나들던 ‘세미나’에서의 선배의 장광설을 떠올렸다. 나는 그때 열정 없이 앉아 라캉, 틸리, 부르디외, 하버마스, 아도르노, 푸코의 국적과 연배를 구별하곤 했다. 이제 강의실에 서서 나는 아이들에게, 지난 12년간 여러분이 ‘무엇’을 받아들였다면 이제는 ‘어떻게’를 받아들여야 하며, 책에 적힌 분석 결과가 아니라 분석 방법을 염두에 두고 공부하라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래놓고 시험지에다 ‘아노미 현상이란?’ 같은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에서나 나올 법한 질문 주변을 적어놓고 나는, 벌레처럼 몸을 숙여 어두운 방으로 숨어들었다. 찜찜한 마음을 지울 길 없이, 도둑이 도망치듯 정신없이, 나는 굳어서 가끔 밭은 기침소리를 냈다.

“어제 열린 홍콩 크리스티에서 열린 현대미술 경매에서, 우리나라의 젊은 작가 한주희씨가 그린 작품이 한화 2억원에 낙찰되었습니다. 아시아 최대 미술품 경매인 이 경매 행사에서 독특한 화풍의 풍경화 <부산>은 영국의 한 수집가에게 미화 180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2억원에 달하는 고가에 낙찰되었습니다.”

자정 라디오 뉴스의 행간으로부터 날아온 나비가 뜻하지 않게 내 뱃속에 앉았다.

“현재 미술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인 한주희씨는 짧은 연륜에도 불구하고 독창적인 작업을 앞세워 세계적인 비엔날레나 아트페어에서 주목받아 왔습니다. 이 날 경매에서는 한국 작가 12명이 총 24점을 출품해 전 작품이 낙찰되며, 한국 미술계의 정취와 세련미를 과시했습니다.”

창문을 열자 가벼이 봄바람이 들었다. 이 바람이 태평양을 건너 인파로 붐비는 타임스퀘어에서 폭풍으로 변해 에너지를 소진하는 순간을 상상했다. 나는 뱃속의 나비가 바다를 향해 날다가 죽은 생선 위에 앉아 날개를 희미하게 떠는 모습을 떠올렸다. 어둠이 더할 쯤 참지 못하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진은 조용히 전화를 받았다. 방송을 들었노라고 했다. 대답이 없었다. 유진은 잦아드는 숨소리를 수습하듯 내게 작게 속삭였다.

“동식 오빠 작품이야. 다 해서 10억도 넘게 팔았대.”

“잘됐구나.”

나는 그렇게만 대답했다.

“우리…… 만날까? 이리로 올래? 방송국 로비에서 기다릴게.”

“뭐 하려고, 이 밤에?”

“그냥 얘기나 해도 좋아. 집 구경이나 시켜 주든지. 돈 쓰기는 아까우니까.”

시계를 보니 오전 1시가 가까웠다. 밖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또 만나러 가기에는 익숙한 시각이 아니었다. 덧붙이자면 누군가를 방에 초대하기에는 더없이 의심스러운 시각이었다. 그의 일터는 가까운 곳이었지만, 우리는 우리 사이에 놓인 물리적 거리보다는 더 멀리 놓인 사람들이었다. 나는 출발하기 전 대충 방을 치우고 문득 냉장고 속을 확인했다. 실로 어림없는 살림살이였다. 나는 나가는 길에 쓰레기를 두 봉투나 버렸다.

그를 차에 태우고 나는 어색해 카 오디오(차를 사면서 과욕으로 달았던 것이다. 차도 그렇지만 이 녀석도 아직 할부 기간이 끝나지 않았다)에 넣은 CD를 돌렸다. 앞 뒤 스피커에서 큰 소리로 익숙한 음악이 흘렀다. 이게 누구의 음반이더라 하는데, 제 3의 인물이 호들갑을 떨어 인사를 건네고는 무어라 떠들기 시작했다.

“하하, 이거 프랑스어 교재니? 너 아직도 간다프네?”

나는 다급하게 브레이크를 밟고 CD 트레이에서 복사한 교육방송의 불어 강좌 CD를 뺐다. 나는 유진이 앉은 조수석 쪽의 문에 달린 수납함을 가리키며 듣고 싶은 것을 찾아보라고 했다. 나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았고, 유진은 CD들을 훑어보다가 아기가 헤엄치며 웃고 있는 사진이 실린 케이스를 꺼내어들었다.

“아, 그거 빈 거야. 알맹이는 집에 있다.”

“그래? 무슨 앨범이야?”

“모르고 꺼낸 거야? 너바나 몰라?”

그는 ‘너바나’라는 말도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듯했다(너바나의 음악을 쓴 영화가 없던가). 방송국에서 내 방이 있는 건물까지 차로 불과 5분이 걸리지 않았다. 유진이 너바나의 재킷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지하주차장으로 차를 몰아 주차까지 마쳤다. 시동을 끄려던 참에 유진이 다른 CD 하나를 꺼냈다. 가끔 듣는 쇼팽의 피아노곡들이었다. 쇼팽 연습곡 작품번호 10번과 25번. 얼핏 보니 재킷에 그리 적혀 있었다.

“이런 걸 차에서 들어?”

“아, 방에 오디오가 없었어. 얼마 전에야 샀거든. 음악을 듣고 싶을 땐 차에 와서 들었어.”

“나 이거 좋아해. 듣고 싶네. 가지고 올라가도 되지?”

좋을 대로 하렴, 들을 시간이 있을까 싶었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며, 방향제를 뿌리고 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별 수 없었다. 불을 켜고 보일러를 틀었다. 유진에게 의자를 끌어다 주고 창문을 조금 열었다. 나는 커피포트의 전원을 올리고 잔을 꺼냈다.

“나 커피 믹스는 안 마셔. 너무 달더라.”

나는 대신 냉장고를 열어 인스턴트 밀크티를 꺼내주었다. 그는 차가운 밀크티를 홀짝이며 오디오에 가지고 올라온 CD를 넣었다. 오디오를 만져 듣고 싶다던 트랙을 틀었다. 12번인가 그랬다. 그는 의자에 가만히 앉아 격정적인 선율을 들었다.

“나 이 곡이 끝나면 집에 가야 되나?”

나는 그 말을 신호로 여기듯, 그에게 바투 다가갔다. 나는 유진의 어깨에 손을 얹고 허리를 굽혀 그의 뺨 근처에서 나는 냄새를 맡았다. 입술을 볼에 대고 소리를 내자 그녀는 풋 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녀는 거부하는 기색이 없었다. 나는 잠시 선배의 얼굴을 떠올렸다. 우리는 가볍고 길게 입을 맞췄다.

2분 38초짜리 트랙은 2분 38초 만에 끝났고, 다음 곡이 연주되었다. 유진은 일어나 다가와 슬쩍 내 팔을 안았다. 나는 셋이 함께 봤던 어느 영화 한 장면을 떠올리며, 피아노 소리와 함께 그를 흠뻑 안았다. 짧거나 긴 입맞춤이 있었고, 손을 뻗어 등을 어루만졌다. 잠시 숨이 가빠왔다. 우리는 엉켜서 방안을 비틀, 네 발로 걸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서 옷자락을 끌어내렸다. 바닥에 놓였던 무엇이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가 내 귀에 날숨을 밀었다. 속삭였다.

“내가 온 건, 비밀로 해.”

우리는 방안을 돌며 춤추듯 입을 맞췄다. 고개를 숙여 그의 가슴에 귀를 대보니 긴급히 움직이는 것이 있어 기뻤다. 그의 앙가슴에 닿은 내 관자놀이에 쳐들어왔다가 사라지고 다시 들어오는 것이 성급한 소리로 울렸다. 뱃속의 나비처럼 방안을 돌다가 그에게 와인을 따라주었다. 우리는 사막에 온 사람처럼 마셨다. 모래 섞인 바람이 아스스 쏘듯, 쌓이던 사구가 급거 무너지듯 우리는 서로를 향해 털썩 주저앉았다.

유진은 머리를 풀고 내 어깨에 턱을 대고 잔에 남은 것들을 핥았다. 나는 볼펜으로 책에 밑줄을 긋듯 그의 옷매무새를 교란했다. 그는 지금 나와 무엇을 하려고 이 방에 온 것일까. 그리고 선배는……사람들은, 잠들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는 대답을 찾지 못했고, 대신 그의 옷 속에 야무지지 못한 손을 넣었다. 그가 움찔거렸다.

“나한테 할 말 없어? 하고 싶은 말 없어?”

취조일까. 혹은 공범자로서의 알리바이를 모색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마뜩하게 진술할 것을 찾지 못하고 몸을 만지던 것을 멈췄다. 나는 혹시 있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말이 없었고, 조용했다. 하여 내가 무언가 말해야했던 순간, 그가 입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생각해보면 이 방에서 자정 마다 늘 있어오던 일이었다. 그가 읽는 기왕의 세상으로 인해 나는 새로이 세상 쓰는 일을 멈추곤 했다. 길고, 쓰고, 달고, 짧은 입맞춤이었다.

나는 홍콩에 있다는 선배의 얼굴을 떠올리며, 감았던 눈을 떠 창에 비친 것을 보았다. 우리의 서로 입을 포갠 반영이 너머 보이는 고대비로 선명한 도시로 묻혔다. 전선이 없는 도시. 우리가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던 시절에 하릴없이 돈을 쓰러 다녔던 거리. 우리의 교접은 더 없이, 아아, 아득했다. 나는 가만히 그의 등을 어루만졌다. 방심하듯 풀어진 그의 드러난 상체가 안쓰러웠다.

선실처럼 춥고 축축한 밤이었다. 백경을 잡던 배를 탔던, 커피를 좋아하던 스타벅스를 떠올리며 아침을 맞았다.

나는 그녀를 데려다주며 낡은 차를 천천히 몰았다. 차는 몸이 불편한 듯 자꾸만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녀에게 너바나의 노래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말없이 들으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혼자 오는 길에 차를 멈추고 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문득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배는 웬일이냐고 전화를 받았다. 그는 정말 홍콩에 있었다. 알면서도 홍콩에는 무슨 일이냐고 묻자 도리어 너는 그럼 무슨 까닭에 전화질이냐고 물어왔다.

“물어 볼 것이 있어서요.”

“나는 호텔방에 앉아 쇼스타코비치 심포니 5번 3악장을 듣고 있다가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하고 있지. 너는 그래 무엇이 궁금해서?”

“아니요, 혹시 선배 애인 있잖아요. 오유진이요.”

선배는 잠시 말이 없었다. 말이 없는 동안 나는 너머로 음악소리를 듣나 했지만, 그것도 때를 맞춰 잠시 멈춘 듯, 바다를 건너오는 치 하는 잡음만 일었다. 선배는 무슨 일로 그리 되었는가, 그리고 그래서 내게 묻는 것이 무어냐를 넌지시 물었다.

“……혹시 유진이가 저에 대해 뭐라던가요?”

선배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넌지시 물어왔다.

“글쎄다, 아침부터 왜 그걸 묻는 거지?”

“아니, 특별한 일은 없어요, 형.”

“……유진이가 너한테 나에 대해 나쁜 말이라도 했니?”

그녀와 당신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은지가 꽤 오래되었다. 처음 만났을 무렵 우리의 화제는 근황과 더불어 당신 이야기뿐이었지만, 뱃속의 날생선이 삭아갈 때 우리는 더 이상 당신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나는 하마터면 놀리는 말처럼 그렇게 얘기할 뻔했다. 나는 유진과 선배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불편했다. 유진도 나를 이해하는 눈치였다. 왜일까.

“그런 건 아닌데, 형한테는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네가 날 ‘형’이라고 하니 참 이상하구나.”

선배는, 요사이 유진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8

세차게 비가 오는 토요일이었다. 도시는 젖었고 또 적막하게 푸르렀다. 선배는 돌아와 경매에서의 승전보를 호기롭게 알려오며 나를 불렀다. 동행한 유진은 그날 무안한 듯 굳은 얼굴이었다. 나는 쇼팽을 들었고, <한 권으로 읽는 예수님> 따위를 펴들어 읽다가 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은 말씀이시며, 우리의 마음에 언제나 계시다고 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나는 읽으며 또 읽었다.

우리는 저녁에 만나 좋은 음식을 먹었고, 술을 마셨다. 무던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밤이 되어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관람객으로 붐비던 극장에서 우리는 프리츠 랑을 보던 상영관에서 일어났던 일을 복기했다. 나는 국내 상업자본이 만든 영화들의 포스터를 보며 국내 영화산업의 수익배분구조를 생각했고, 선배가 차린다는 영화 수입사를 생각했다.

“월가에서 할리우드로 공급되는 자금이 4조원이다. 우리네는 관객이 많은 것 같아도 시장 전체로 보면 500억 적자야. 대박 났던 영화 펀드도 설정액 다 합치면 300억 밖에 안 된대.”

“그래도 수익률은 좀 되지 않아요?”

“설정 1년에 2%나 되나, 그래. 은행에 넣어도 그것보다는 이표가 높지.”

“그래서 수입하는 게 낫다는 거예요?”

“수입도 수입이지만…… 국내 자본의 지배구조를 개선해야 돼. 정해진 기간 내에 수익을 보장하는 영화를 만든다는 게 사실 말이 안 되잖아. 우회상장에다 회계부정에다 검은 돈까지 왔다 갔다 하니까, 결국 영화판 안쪽의 매판 자본들만 대박을 맞는 거지.”

객석에 앉아 나는 돌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선배가 영화를 틀었다. 나는 옆에 앉은 유진이 차가운 밀크티를 홀짝거리는 것을 보았다. 익숙한 로고 음악이 흘러나오며, 스크린에 사자가 포효하는 MGM의 로고가 올라왔다. ARS GRATIA ARTIS. 진 켈리가 우산을 쓰고 탭댄스를 추는 1952년 작품 <사랑은 비를 타고>였다. 나는 영화가 상영되는 103분 동안, 뜻 모르고 보아 넘겼던 프리츠 랑, 알렉산드르 도브첸코, 미조구찌 겐지, 쇼티아지트 레이,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의 영화들에 나오던 배우들의 대사를 떠올렸다. 마음속에서 그들의 말은 텔레비전 영화의 더빙처럼 모국어로 들려와 허허로웠고, 나는 그 허허로움을 감당하지 못했다. 말이 없는 영화로부터 노래하는 영화로의 비약, 최초의 달세계 여행으로부터 지금 우리 셋의 역사까지, 비 오는 거리가 나오는 영화를 나는 잠자코 봤다. 영화를 보고 나온 뒤 유진은 먼저 가야한다며 택시를 탔다. 선배는 모범택시를 잡아주었고 기사에게 요금을 선불했다.

“잠깐 쉬러 갈까?”

나는 선배의 말이 무슨 뜻인 줄 몰라 갸우뚱했다. 선배는 대리운전을 불러 나를 강남 어디께로 이끌고 갔다. 시간은 이미 두 시를 넘어 있었다. 선배는 어딘가에 전화하더니 준비해 두세요 하는 몇 마디만 하고 자리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시트의 가죽 냄새가 시큰했다. 나는 창밖으로 지나쳐가는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보던, 위스키와 실론티와 얼음통과 과일 따위가 흐드러지게 차려져 있는 방에 시중드는 사람까지 둘 기다리고 있었다. 위스키를 하룻밤 사이에 반병이나 먹은 것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선배는 화장이 짙은 여자의 허벅지를 주무르며 이글스의 <쌔드 카페>를 불렀다. 그가 내게 마이크를 건네줬고, 나는 마이클 잭슨의 <빌리 진>을 불렀다. 대학 시절 가라오케 애창곡이었고, 선배는 들으며 크게 웃었다.

9

나의 강의는 제법 무난했다. 돌아보면 객쩍고 위험하고 무모했던 불장난이었다. 공부를 하며 강단에 서는 일은 오랜 염원이었으나 기실 나는 하찮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저질렀고, 학생들은 내가 하는 말을 농담까지 받아 적었다. 나는 내가 전하는 말과 유진이 전하는 말 가운데, 어떤 쪽이 이해에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하는 일인가가 항상 궁금했다. 누군가 ‘이 건물은 바로크 건축 양식의 훌륭한 예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이 건물은 1843년에 건립되었다’라고 말하는 데에는 아무 차이가 없다고 했다. 요컨대 건물의 건립 연도를 밝혀야만 한다는 진술 자체가 하나의 가치판단에 의한 결과라고 했다. 말하자면, 내가 강단에서 어떤 가치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을 애꿎게 논하는 것과 그가 세상을 향해 어떤 사실을 말하는 것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고, 오히려 내 것이 성냥 정도라면 그의 것은 화산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유진은, 여름이 가기 전에 선배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알려왔다. 쌍춘년이라 길하다는 것이 양가 부모의 뜻이라고 했다. 혼수품을 살 것이고, 집을 보러 다닌다고 했다. 나는 아무 말 못하다 잘 됐네 하고 대답했다. 그는 소식을 전하며 침착했다. 그는 가만히 있다가 내게 할 말이 없냐고 물었다. 나는 일을 계속하느냐고 했다.

“아마 이쪽 일은 그만 둘 것 같아. 비전도 없는데 잘 됐어. 대신 오빠가 만든 회사 쪽에서 일하지 않을까 싶어.”

미술기획사니 영화 수입사를 말하는 것일까.

“좋아하는 일이었잖아?”

“그랬지. 하지만 이게 더 좋은 일일지도 모르잖아.”

그가 소식을 전한 이틀 뒤부터 자정의 라디오에서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진행 누구누구입니다, 하는 다른 이름을 듣고, 웹사이트에 게재된 새 진행자의 이름 위를 굴렀다. 나는 속없게 유진의 번호를 눌렀다. 그는 받지 않았다. 왜일까.

그에게서 연락이 끊기고 이틀 뒤, 박기복 교수가 쉐라톤 워커힐의 바로 나를 불렀다. 나는 길을 헤맸고, 약속 시간을 30분이나 늦었지만 그는 느긋한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테이블 위에는 벌써 꽁초가 수북한 재떨이와 주둥이가 고적한 위스키가 한 병 놓여 있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그간 격조했네. 술을 사겠다고 한 게 지난겨울인데, 이제야 약속을 지키니 멋쩍구만.”

“바쁘셨다고 들었습니다.”

박기복은 사람을 불러, 내게 잔을 내주게 하고는 손수 그것을 채워 주었다. 나는 선배와 마셨던 일을 떠올리며 오늘도 끝이 좋지 않겠구나 싶었다. 그는 잔을 들어 건배를 청했다. 나는 두 손으로 받들어 받았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얼음을 입술에 대자 알코올 냄새가 전후좌우로 작열했다. 박기복은 나의 마시는 모습을 보고 소리 내어 웃었다.

“편한 자리니 편하게 마셔. 담배를 피우면 피워도 좋고.”

“담배는 피우지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박기복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나는 잔을 내려놓고 멀거니 그의 가슴께에 흐르는 넥타이를 보았다. 고상한 빛깔이었다. 나는 스승을 만나는 자리라고 정장을 했지만, 박기복은 태생부터가 멋쟁이였다. 그는 담배 연기를 훅 불며 크고 단단해 보이는 라이터를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는 내게 으레 할 것이라 예상했던 질문들을 했다. 강의를 해 보니 어떤 느낌인가, 누구누구는 학교에서 잘 지내는지부터 묻고는 다정하게 웃으며 내 부모의 건강을 챙겨 물었다. 나는 그가 담뱃불을 끌 때, 그가 던졌던 일을 떠올리며 멈칫거렸다. 그는 이어 연애는 하고 있는가 물었고, 내가 웃으며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자 역시 그렇군 하고 답했다.

“어째서 역시 그렇다는 말씀이신지…….”

“자네 같은 남자를 요새 여자들이 무얼 보고 좋아하나. 돈이 있길 해, 인물이 낫길 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들으니 강의는 괜찮았다고 들었네. 여자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들어. 조금 더 열심히 하면 공부로 기백을 떨칠만한데 게으른 게 문제겠지.”

나는 들어서는 안 될 비밀을 듣는 꼬마아이가 된듯했다. 입시 상담을 하는 고등학교 선생처럼 그는 내게 손짓을 섞어가며 말을 이었다.

“자네, 준비하는 졸업 논문 말이야. 잘 써봐. 좋은 내용이 나올 것 같네. 내가 지금 간사로 간 데가, 문화예술정책 기획하고 연구하는 데거든. 잘만 써 보면 내가 예뻐함세.”

“아직 진행이 더딥니다.”

“그럼 내 쪽에서 도울 게 많겠구만. 필요한 게 있으면 전화해. 사실 자네가 간간히 내는 소논문들을 눈 여겨 봤어. 믿을만한 얘기인지 모르겠네만 자네가 신문에 낸 글 보고도, 오호라, 이 친구 강단이 있군, 하는 생각을 했네. 그땐 노망이 들어 그리했지만…….”

그는 물끄러미 자기 앞에 놓인 재떨이를 보다가 쿡쿡 웃었다.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늙은 몸이야. 책상을 뺄 때쯤 되면 물려줄 사람이 없나, 내가 아끼던 것을 똑같이 아낄 만한 인재가 없나 하는 오만한 생각을 한다네. 그러면서도 또 그걸 뺏기는 것 같아서, 괜히 그렇게 시비를 거는 거야. 자네가 그날 뜻을 굽히지 않아서 고마웠네.”

그는 병을 들어 서로 비어 있던 잔들을 채웠다. 나는 이야기에 온통 집중해 예의를 거스른 것 같아 민망했다.

“그런데 말이야, 혹시 자네 김동식이라고 알지?”

“그, 퇴학 처분 받은 김동식을 말씀하시는지……?”

그는 새 담배에 불을 붙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갑자기 목이 말랐다. 술을 대신 밀어 넣었고, 식도를 태우고 흐르는 느낌에 작게 신음을 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는 혹시 선배의 소식을 듣느냐고 물었다. 눈치로 내가 선배와 만나고 있던 것은 모르는 듯했다. 나는 그저 가끔 들려오는 말로, 펀드 매니저가 되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교수는 담배를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퇴학당하기 전에 나와 교분이 좀 있었어. 내가 녀석에게 케인즈의 책도 내주었지. 퇴학당할 때쯤에 내가 연구 교환으로 미국에 있느라 구명을 못했네. 미안해서, 그 친구가 연락해 왔을 때 미국으로 불러 이것저것 가르치기도 했어. 학위를 받는 것까지 챙겨주고 싶었지만, 내가 먼저 오느라 어찌 됐는지도 모르고. 소식 없이 지낸지 수년이 흘렀지.”

뜻밖의 이야기였다. 나는 퍼지는 담배 연기 사이로 드러나는 그의 얼굴을 보듯 그의 목소리에 온통 집중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찾아와서, 근사한 말들을 늘어놓더군. 아트펀드라고…… 미국에 있을 때는 가끔 들었지만, 우리 풍토에도 가능한 줄은 생각 못했네. 하긴, 돈이 있으면 삶이 있지. 그 반대라면 좋겠지만.”

삶이 없으면 부가 없으련만, 우리는 부에 눌려 삶을 살지 못한다. 내가 글을 읽고 박기복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내 아버지의 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서로를 계몽하지 못하는 것은 살기에 바쁘기 때문이었고, 계몽한 자들은 이미 계몽이 필요 없는 작자가 되어 배를 두드리고 있는 것이 그 잘난 삶이었다. 박기복은 피우던 담배를 비벼 껐다. 연기가 흘러나왔다.

“이틀 전에 사라졌어. 모은 돈을 가지고 말일세. 나한테도 1억 2천을 뜯어갔네. 혹시 아나 해서 물었어.”

나는 별안간 속이 거북해졌다. 속에 들었던 나비가 잠을 깨서 날개 짓을 시작했는가.

10

밝혀진 피해자만 18명, 피해액은 150억여 원. 주로 대기업의 오너나 간부급 사원들, 스타급에 속하는 대학 교수나 예술가, 미술품 수집상들이 그에게 믿고 돈을 맡겼다. 나는 학교의 사무실에서, 쓰린 속을 달래며 텔레비전 뉴스를 들었다. 그의 말쑥한 사진과, 언젠가 들렀던 그의 사무실과, 홍콩에서 팔린 2억 짜리 그림과, 알지 못하고 지나간 영화 수입사 사무실 따위가 맥락 없이 화면에서 명멸했다.

퇴학처분을 받았던 이야기도 나왔고, 미국에서 학위를 받지 못했다고도 했다. 여러 피해자들이 번갈아 나와 인터뷰까지 했다. 선배에게 그림들을 5천만 원에 팔았던 젊은 작가도 나와 그를 매도했다. 그는 고개를 열두 시 오 분 전을 가리키는 분침 같은 고개를 하고, 외모와는 다르게 엉뚱한 일을 저질렀다고 말하고 있었다. 함께 갔던 룸살롱의 여급도 나와 조잘거렸다. 그분이 준비해 두세요, 하면 무슨무슨 술과 가라오케를 준비했어요, 팝송을 즐겨 부르시더라구요, 그러면서 그들은 꺄르르 웃었다.

경찰이 그를 추적했고, 나는 복도를 배회하며 선배와 오유진에게 번갈아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울렸지만, 그들은 받지 않았다.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는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밤길에, 편의점에서 유진이 마셨던 밀크티를 8백 원에 샀다. 외국인 사진이 찍힌 속옷 한 벌을 6천 원에 샀다. 샴푸와 비누를 4천 5백 원에 샀다. 길에서, 가로등 빛을 지우는 가로수 그늘에서, 사라진 전선을 묻은 잘 닦인 도로 위에 서서, 나는 먹먹한 마음으로 유진이 들렀던 내 방을 헤아렸다. 빛과 어둠의 경계로 그의 뺨 냄새가 비어져 나오는 듯했다. 나는 상점으로 돌아가 담배를 2천 5백 원에 샀다. 라이터를 3백 원에 샀다.

나는 문득 대책이 없었다. 나는 사각거리는 어둠 속에서 색이 다른 그림자를 쫓으며 몇 년 만에 담배를 피웠다. 어지러웠다. 검은 먼지가 굴러다녔고, 전선을 잃은 거리를 젊은이들은 시시각각 전술을 바꾸어 빠르게 이동했다. 담뱃불을 튀기니 연기가 사소하게 부서질 뿐이었고, 나는 어둠 속에서 사람들의 욕망은 같은 종류가 아니면서 또 여전히 같다고 생각했다. 사위 가득히 차는 적막. 허벅다리쯤에서 떨리는 수신음. 나는 잠시 받지 않았다. 누가 누구를 그리워하나, 다시 전화가 왔다. 나는 또 받지 않았다. 나는 잠시 어둠속에 숨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둠 속을 벌레처럼 빠른 걸음으로 기어 다니다가, 적막이 기다리는 집으로 향했다. 다시 전화가 왔다.

“저는 오유진 씨 부탁으로 전화를 드립니다. 직장 동료였어요. 우편을 보시면 열쇠가 있을 거랍니다.”

정말 있었다.

“그걸 들고 지하 주차장에 가시면, 차가 있답니다. 조수석 쪽에 그……, 여는 데 있잖아요. 그걸 열어 보시랍니다. 그리고 또…….”

여자의 목소리가 바람에 떨렸다.

“저더러, 지금 통화하시는 그쪽에게 프랑스어 교습을 해 주라고 했어요. 강습료도 받았습니다. 원치 않으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돈까지 받은 마당에…….”

“아뇨, 그건 괜찮아요. 신의가 있으신 분이네요. ……혹시, 혹시 유진이는 어디 있나 아시는지…….”

“그건 저도 모릅니다. 어디론가 간다는 얘기만 했어요.”

나는 방문 앞에 서서, 어둔 눈을 하고 담배를 한 대 더 피워 물었다. 열쇠 끝에는 물고기 모양의 고리가 매달려 있었다. 왜일까. 문득 밖에서 비가 내렸다. 나는 방문 바로 앞에서 발 길을 돌려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굵은 빗발소리가 들려왔다. 내 방 문과 꼭 같은 것이 열 몇 개씩 늘어선 복도는 음험해 보였고, 나는 두 걸음 걸을 것을 세 걸음씩 딛고 내달려갔다. 혹, 있을까, 하는, 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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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 : 2전 2패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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