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 맥스웰의 사랑.

The Love of Reggie Maxwell's. Portishead의 ‘Roads’를 듣다가 생각났다. 아무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레지 맥스웰이 아니라, 그 “사랑” 말이다.

레지 맥스웰, 갑자기 그런 이름은 어디서 떠오른 것일까. Portishead의 새로운 멤버일까? 아니면 Tricky의 프로듀서였거나, Everything But The Girl의 노래에 등장한 인물인지도 모른다.

레지 맥스웰이란 유명인사를 기억해 내는 데엔 실패했지만, 레지라는 이름도 흔했고 맥스웰이란 성도 흔한 것이었으니, 그는 분명 있기는 있었다. 미국 어디쯤에서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려 보면 Reggie Maxwell이란 이름쯤은 쉽게 나오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내가 생각해낸 그 레지 맥스웰은 어떻게 생겼을까? 레드와인 색 머리칼에다가, 마찬가지로 자줏빛 눈을 하고, 녹색의 피부를 가진 이천 년대의 신종족일는지도 모르고, 더티블론드에 푸른 눈을 가진, 켈트 혈통의 미국인일 수도 있고, 독일 어디쯤에서 사는 영국인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야, 나는 레지 맥스웰을 모른다. “Hey, I'm Reggie. Nice to meet you, I've been expecting."하며 손을 건네는 레지 맥스웰이 있더라도 아마, 나는 기겁을 하고 도망치거나 했을 게 분명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겁나는 일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 타블로이드 1면을 잠식한, 레지 맥스웰의 사랑


나에겐 여자 친구가 있다. 다른 친구 녀석들에겐 친구, 라고 일컫지만, 다들 그보다는 훨씬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대학 졸업반 시절, 서로 바쁘던 때에 만났던 나와 그녀는, 힘이 되었고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변했다. 수년이 흐른 다음에 나는 변했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함정일 뿐이다. 함정에서 헤어나면 그것이 함정이었다는 것을 깨닫지만, 이미 사랑을 저버리기엔 너무 지쳐 있는 것이다.

손을 잡고 길을 걸었고, 자주 가는 공원에서는 소리나게 키스를 나누곤 했지만, 이젠 전혀 느낌이 없었다. 그건 무급으로 고생하는 막노동과도 같았다. 아무도 춤추지 않는 연회장에서, 아무도 장단을 맞추지 않는 춤곡을 연주하듯, 꼭 필요한 것 같지만 결국은 무의미한 것이다. 결국, 사랑을 느낀다기보다는, 의식한다고 할까.

그녀의 이름은 세영이었는데, 가끔은 잊는다. 세은이었는지, 은영이었는지, 혹은 애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흙이 묻은 구두를 솔로 문질러 보았다. 눌어붙었던 것들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흙이 묻어 생긴 누런 얼룩을 지울 재간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까 하다가 구둣방에 가기로 했다. 꺼내 둔 신발이 없어서 별 생각 없이 그 구두를 그대로 신고 갔는데, 마침 구둣방에는 여분의 슬리퍼가 떨어진 후였다.

나는 라면을 끓여 먹으려고 가스 불을 올려놓은 것이 생각났다. 구두를 그대로 신고 돌아올까 생각도 했지만, 얼마 멀지 않다는 생각에 맨발로 집에 돌아왔다. 길 위의 빗물은 마르지 않았고, 덕분에 맨발에 흙이 묻었다.

내가 왜 진흙길을 걸어야 했는지 기억해 보았다. 좀처럼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바로 어제의 일이었지만, 그것은 기억이라기보다는 추억에 가깝도록 흐리고 멍한 데가 있었다. 술 탓이다. 세영과 함께 마신 그 “회오리 바람 맥주” 때문일 것이다.

그녀와 마시는 술은 전혀 즐겁지가 않았다. 함께 군장을 맸던 녀석들과 마실 땐 그토록 좋던 술이었는데, 세영과 마시는 술은 차라리 쓰라렸다. 그냥 씁쓸한 액체가 혀 주위에서 맴돌다가 목구멍을 꼴깍 넘어가서, 식도를 따라 흘러 위산과 합쳐졌다. 다른 의미가 되지 못했다. 과정과 그 존재 자체일 뿐이었다.

그냥 있다, 라는 것은, 크게 의미가 되지 못하는 법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내가 변하려고 할 때, 그때 의미가 생긴다. 의미가 없는 것은, 무의식이고, 죽음이다.

덕분에, 세영과 마시는 술은, 죽음을 향해 치닫듯, 금방 취하게 된다. 그건 아마 세영도 마찬가지인 듯 싶었다. 우리는 거나하게 취하고, 술김에 어떤 나쁜 짓을 해도 서로 책임을 면할 수가 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술김에 하는 나쁜 짓은, 그저 내 프로이트적, 생리적 자아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일지여감, 공복에 알코올은 독약이란 걸 아는지 모르는지.

다 된 라면을 식탁에 그대로 두고 화장실로 갔다. 샤워기에서는 따뜻한 물이 흘렀다.

그래, 어젠 비가 왔었지. 참 오랜만에 왔어. 일곱 시쯤인가, 전화가 왔고, 그녀였어. 예전엔 그토록 잘 보이려고 몸단장이라도 했겠지만, 이젠 그런 설렘도 없이, 호프에 가서 맥주를 마셨겠지. 뭘까, 감정이 격했는데, 웃었던가, 울었던가. 겉과 속은 달랐는데, 아마 겉이 울었다면 단단히 틀어졌을 테니, 겉으로는 웃고 속으로는 운 모양이군.

그리고 비속을 우산 없이 걸었지. 미친 사람처럼. 질퍽한 길 위를 걸으며 미친 듯 웃었어. 남들 눈에 이상하게 보였겠지만, 누가 뭐라 하든 상관없는 건, 우리니까……. 하긴, 원래 나와 세영이, 확실히 미쳤어. 미치지 않고서야 지금껏 이렇게 만나고 있을까?

화장실에서 나와 젖은 발을 수건으로 감싸 안았다. 나는 레지 맥스웰의 사랑만은 미친 짓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 사람이라면 충분히, 함정이 아닌 사랑을 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라면을 먹으며, 오늘 해야 할 일을 체크했다.

컴퓨터를 켜자, 윙, 하는 소리와 삑삑 거리는 기계음이 어지럽게 흘렀다. 컴퓨터를 시작할 때 나오는 지겨운 팡파레. 버릇대로 네트워크에 접속하고, 커피를 마시며 화면을 주시했다. 사이버 공간에선 모든 게 가능하지, 무기력한 눈으로 자판을 두드리면……. 언젠가 잡지 일을 하며 들었던 인상적인 노래 가사가 으스스하게 떠오르곤 했다.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요. =)]

정말 즐거워서 "^^" 와 "=)" 를 찍는 걸까. 평소 친분이 있던 누군가가 메시지를 보냈다. 컴퓨터 옆의 CD 꽂이에서 David Bowie의 음반을 꺼냈다. Golden Years가 흐르기 시작했다. 에인절, 우리의 밤은 뜨겁고, 술을 마시고, 환상의 나락으로…….

[후훗. 데이빗 보위의 골든 이어즈? 그거 제 주제곡이에요.]

[아, 아시는군요? 데이빗 보위 좋아하세요?]

[네, 어느 정도. 참, 가이거님도 나오실 거죠, 저랑 디비젼씨랑 하는 오프모임때요?]

[예. 그런데 엔젤님께서는 딥뎐이 얼굴 보신 적 있으세요?]

[아뇨. 전화통화는 많이 했지만 얼굴은 본 적 없어요.]

가이거는 내 통신 닉네임이었고, Giger, 라고 썼다. 디비젼, 은 Joy Division에서 이름을 딴 동선이의 통신 이름이었다. 이름 탓에 동전이라고 불렸고, 디비젼이라는 닉네임마저 딥뎐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엔젤이라는 그 사람은 이름이 천사희, 였는데, 안지는 오래 됐지만 정말 천사 같은지는 알 수 없는 것이 전자 메일의 맹점이었다.

수십 통의 E-mail보다, 십 분의 대화가 훨씬 더 많은 정보의 양을 함유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 물론 십 분의 대화의 정보조차 무의미한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 쓸모없긴 하지만, 그래도 컴퓨터통신처럼, 이진법화된 인생보다는 훨씬 나을 거란 생각마저 들었다.

사이버 공간에선, 뭐든지 가능하지, 무기력한 눈으로, 자판을 두드리면…….

[참, 엔젤님, 레지 맥스웰이 누군지 아시나요?]

[레지 맥스웰이요? 글쎄요? 가수나 운동 선수 아닐까요?]

[아닌 것 같은데요.. 혹시 노래 같은 데에 등장하는 사람 아니에요?]

[글쎄요.. 레지 맥스웰이란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요.. 답변]

[답변 다음이 짤렸네요. ^^]

[제대로 못해드려서 죄송해요.. ^-^;]

가이거, 는 통신에서의 또 다른 나였다. 사이버 공간에서 나는 육체가 없었다. 마치 천사처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했다. 우리가 서로 전달하고 전해 받을 수 있는 것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극히 정신적인 것이었다. 신호, 메시지, 우리의 감각에 호소하는 것들을 서로 교류한다. 그래서 나는 내 이름 진석, 보다 가이거, 라는 이름을 좋아했다.

컴퓨터를 끄고 조간 신문을 뒤적거리고 있을 무렵, 친구 준구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오늘 저녁에 시간이 있냐고 물었다. 그렇지, 오늘은 세영이 바쁘다고 했다. 벤쳐 사업을 하겠다고 한참 난리인 준구 녀석은 언젠가, ‘쓸만한 웹디자이너를 구했다’ 라더니 그만 그 쓸만한 인재와 결혼을 해 버렸다. 이후 아내는 전업주부가 되어버렸고, 준구는 나에게 부탁해 후임 웹 디자이너를 물색했다. 나는 우리 출판사에서 일하다가 ‘진짜 다큐멘터리를 찍어 볼래요’ 하고 회사를 뛰쳐나갔던 후배 녀석을 추천해 주었다.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 찍고 다녔지만 편집이 미흡해서 늘 일을 망치는 괴짜였다.

“시간이 빈다고? 그럼 우리 집에 올래? 우리 집사람하고 내가 차려 줄 테니까. 마침 네 덕분에 일이 잘 풀렸다.”

“그러든지. 몇 시쯤 갈까?

“한 7시 정도면 될까?”

“그래. 몇 동 몇 호지?”

전화를 끊고 나니, 준구에게 레지 맥스웰의 사랑에 관해 묻는 것을 잊었음을 깨달았다. 그 말을 생각하게 했던 Portishead의 노래를 다시 플레이했다. 레지 맥스웰은, 분명히 있었다. 나를 보고 웃으며, 그는 있는데, 나는 그와 닿지 않는다. 닿지 못한다. ‘못한다’ 라는 말이 맞다.

왜냐 하면 나는 그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분명 Portishead의 음악에서였다. 정확히 말하면, 보컬리스트인 Beth Gibbons의 소개로 그를 만난 것이다. 그는 분명히 있긴 있지만, 그가 누군지 나는 설명할 수 없었다. 추측이 불가능했다. 내 어림 짐작이 빗나갔을 때, 레지 맥스웰은 날 비웃을 것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처음부터 ‘닿지 못한다’ 라고 하는 것이 맞다.

신문을 접고 마시던 커피 잔을 씻어두고 일을 시작했다. 이번 달 잡지에 낼 음반 평을 써야 했다. 우리 나라 음악은 트렌드가 있는데, 결코 ‘depeche mode(빠른 유행)’는 아니었다. 유행 작곡가들은 fashionable다기보다는 passionate for money, 하다. 거기에 맞춰 노래를 하는 아이들은, 스포트라이트 속에 노란 머리를 하고 화려하게 웃지만, 스스로 슬픈 삐에로임을 잘 알고 있을지.

하지만 하이틴 잡지에서의 글쓰기란 결코 텍스트의 진실성에 대해 심문 받지 않는다. 얼마나 독자들을 기쁘게 할 수 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앨범의 장르 : 잡탕 댄스 음악, 이었지만 “최신 유행의 테크노와 우리 나라만의 예쁜 멜로디를 잘 섞어 놓았어. 퓨전 음악이라고 해도 될 거야. 해피 테크노라고 하던데?”

이 앨범의 장점 : 짚으라면 뭐, 그 작곡가의 능력, 또 그 작사가의 익숙함, 그리고 잘생긴 아이들의 ‘끼의 분출’ 정도. “히트 작곡가 ○○○씨가 만든 타이틀곡은 80년대 모던토킹을 연상시키는 쉽게 재미있는 리듬에, 발랄한 가사로 너무너무 재밌고 행복한 노래가 가득해. 그리고 이번 안무는 ‘안드로메다’ 춤인데, 한 번 보면 눈을 뗄 수가 없어”

이 앨범의 약점 : 한 마디로 지겨움. “거의 1년에 걸친 준비 기간에, 너무너무 열심히 연습하고 노래하고 작업하는 바람에, 거의 없다고 봐도 될 거야”

평점 : 별 다섯 만점에 별 한 개 반. 건질 것이라고는 개정 증보된 매너리즘. "요즘엔 거의 보기 드문 명작이야, 별 4개 반!"

리뷰하던 음반을 끄고, 다시 Portishead를 틀었다. 음악을 들으며 창밖을 보니, 흐릿하고……, 물방울이 맺더니 떨어진다. 장마철도 아닌데 비는 지겹게 내린다. 구두를 찾아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두를 찾아온 후, 다시 비에 젖어버린 나는 샤워를 하고 있었다.

따스한 물이 가슴을 타고 흘렀다. 머리카락 끝에 맺혔던 물방울은, 제자리에서 몇 바퀴 돌더니 이내 떨어져 땅바닥에 몸을 던지고는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어깨에 맺혀 있던 녀석은 어깨선을 타고 흘러, 팔에 한 줄기 시냇물을 만들고 말았다. 샤워를 하며 나는 the Cardigans의 Carnival을 흥얼거렸다. 가사를 외우지 못해서 그야 말로 흥얼거리는 정도였다. I'll never know, 'cause you'll never show. C' mon and let me know, c' mon and let me now…….

샤워를 마치고, 새로 준비한 옷을 입었다. 기사를 몇 개 더 쓰고, 사진을 준비하기 위해 카메라를 손보고 난 후였기 때문에, 어느새 시간은 점심때를 훌쩍 지나 있었다. 슬슬 배가 고파서 부엌을 뒤졌지만 쌀도 라면도 떨어진 후였다. 다음 한 달치 식료품을 살 돈은 있었지만, 비오는 날 잔뜩 안고 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준비한 티셔츠를 팔에 끼며, 수화기를 들고 근처 중국집에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 예, oo장입니다!

나 : 예, 여기 oo빌라 o동 oo호인데요, 자장면 한 그릇이요.

상대방: oo빌라 o동 oo호, 자장면 하나요?

나 : 아뇨. oo빌라 o동 oo호요.

상대방: 예, 알겠습니다.

(10여분 후)

상대방: 예, oo장입니다!

나 : 예, 여기 oo빌라 o동 oo호인데요, 자장면 시킨 거 출발했어요?

상대방: 예, 방금 출발했습니다. (작은 소리로) 야, 빨리 나가! (또 다른 목소리) 예, 예.

나 : 기다릴게요.

30분이나 기다린 자장면은 뜻밖에도, 양이 무척 많았다. 배가 고파서는 한참을 먹다 보니 자장면이 무척 맛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먹기 시작한 순간엔 맛이 없다거나 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어쩐지 스스로를 속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술이 덜 깼는지 여전히 속이 쓰린 기분이었다. 그야 말로 게슴츠레한 하늘은 회색이다. 우산의 살을 타고 내리는 빗물도, 사람들 사랑 묻어나는 길가의 발자국도, 피냄새가 나는 비를 흘리며 우는 저 구름도 회색 빛이다. 내 걸음도 회색이었고, 어쩌면 내가 흘린 추억도, 어쩌면 눈물까지도……. 회색이라서, 나는 느낀다기 보다는 의식하는 것이다. 준구의 집에 가기 위해 골라잡은 택시에 마저 무거운 회색빛 시트가 나를 안았다.

준구 아내의 요리 솜씨는 꽤 좋은 수준이었다. 맛이 있다, 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남겨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어라 굉장히 맛있네요, 하며 너스레를 떨었고, 그렇게 해야 다른 날 또 얻어먹으리라는 얄팍한 계산도 했다. 그녀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준구와 나는 소파에 앉아 TV를 보았다.

방송에는 유괴 사건의 기사가 흐르고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이름, 을 가진 꼬마가 유괴범에 의해 살해되었다, 라는 것이 기사 내용이었는데, 준구의 아내가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는 한참 웃고 떠들고 있었다. 곧 TV에서는 다음 뉴스로, 눈매가 매섭지만 우유부단하기로 소문난 정치인이 대통령에 출마하겠노라고 선언했다는 기사가 흘렀고, 라디오에서는, 반짝반짝 빛나는 이름을 가진 꼬마의 죽음을 슬퍼했다.

“참, 준구야, 너 혹시 레지 맥스웰이라고 아냐?”

“무슨 맥스웰? 다방 레지?”

“사람 이름 레지.”

나는 안 되는 영어 발음으로 reggie,를 발음했다.

“글세. 맥스웰이라면 인스턴트 커피 브랜드 아닌가? 그건 맥심인가?”

마침 준구의 아내가 커피 세 잔을 내왔다.

“맞다. 진석 씨는 세영 씨랑 취향 비슷하게, 헤즐넛만 마신다면서요? 이거 어쩌죠, 이거 맥스웰인데.”

“상관없어요. 맥스웰이라니 반갑네요……. 차라는 게 끓이는 사람 손맛이죠, 뭐.”

난 웃음 지었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어느새 덮친 어두움을 못 이겨, 레지 맥스웰의 애절한 사랑을 생각했다. 문득 그 사랑이 애절하리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나를 떠도는 모습, 언제나 맴돌기만 하는 모습은 애절함을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학교다. 어릴적 다니던 학교다. 여기 저기, 사내아이들이 뱉어 놓은 침이 고인 계단이 있고, 여기저기에 패인 복도가 있고, 가끔씩 틀에서 떨어져나가 바닥으로 쓰러지는 문이 있고, 발자국에 있는 벽이 있고, 벽이 있고, 며칠 동안 닦지 않은 창문이 있으며, 그래서 비춰지는, 손떼 묻은 모습, 천진함과 발랄함이 ‘타락’과 함께 풍겨져 오는 모습이 있다. 거울이 있다.

거울은 깨져 있던 것을 수습하여 붙인 것이다. 거기 맺힌 상은 일그러져 있었다. 라고, 생각했다. 아, 저것은 거울이 아니다…….

그저 내 모습일 뿐이구나, 아마 나도 모를 내 어릴 적의 시간이로구나. 그때가 생각난다.

복도에 단발머리를 한 키 작은 소녀가 마구 달린다. 그 뒤로 빡빡 머리를 한 소년이 따라 간다. 그리고 무언가를 집어든 커다란 사내가 쫓는다. 모두, 마구 달린다. 좌측에서 우측으로, 달리고, 내 고개는 따라 움직인다. 이내 지친 빡빡 머리는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뒤따르던 사내는 들고 있던 무언가로, 그 소년을 내리치고 만다.

비명 소리를 들은 듯 했다.

아, 꿈이었구나. 오디오의 패널에 적힌 시간을 보았다. 2시, 23분. 이런 시간에 깨는 것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나는 피곤을 느끼며 몸을 뒤척이다 다시 잠을 청을 청했다.

사내에게 잡히지 않은 소녀는 계속 달렸다. 나는 소녀를 구하고 싶어서, 뒤에서 따라오던 사내와 맞선다. 사내는 이내 사라진다, 나를 피해서 사라진다. 사람들 사이로 사라진다. 나는 소녀가 내려간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여기서 구르면 아프겠지, 하는 생각이 들자 나는 구르고 만다.

멀리 그녀가 보였다. 그 순간, 나는 그녀를 품에 안고, 눕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상들이 겹친다. 겹치고, 또 겹치고, 겹치며, 엉켜버렸다. 그리고 뒤집히며, 다시 엉켜버렸던가 하면, 다시 보일 듯 하다가 만져지지 않으며 잡히지 않는, 그저 소리뿐인, 추상적 공허함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렸다. Portishead의 Roads였다. 레지 맥스웰이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눈을 떠도 천장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머리 속이 하얗게 변해버린 느낌이었다. 햇살이 비춘 듯 했지만 나는 이불을 더 꼭 덮었다. 꿈속의 그녀를 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사랑을 나눈 것은, 그녀를 품에 안은 것은, 레지 맥스웰이었을까, 아니면 나였을까. 나는 분명 그녀를 안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소녀는 결코 나와 사랑을 나눌 사람이 아니었다.

꿈 속에서 나는 Portishead의 Roads를 듣고 말았다. 레지 맥스웰을 떠올린 것이다. 소녀의 사랑과 레지 맥스웰은 겹쳐지고 있었다. 꿈의 기억, 그 어설픈 편린이 어지럽게 흩어지고 있었다. 나는 소녀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다, 라고 생각했다.

아침, 8시 30분. 몸에 물을 적시며, 결코 의미가 없을 하루를 예감했고, 텅 빈 부엌에서 아침 식사를 포기했다. 조간 신문을 뒤적이려는데, 9시가 되지 않은 이른 시각에, 잡지사에서 전화가 왔다. 기사는 잘 받았으며, 고료는 예정된 날짜에 입금하겠다는 말이었다. 오늘 오전에도 다른 잡지사에 낼 같은 종류의 글을 써야 했다. 하지만, 점심을 먹기 위해선, 식료품을 사러 가야 했다.

식료품을 파는 창고형 매장을 향해 가는 동안, 특히 걷는 순간, 나를 향해 부는 바람을 품 안에 안아 보았다. 그저 바람에 맞서 걷는 것뿐인데, 꿈처럼, 무언가를 안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품고 있는, 포근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헌신에 따른 희열을 음미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다만 마음일 뿐이었다. 이때 많은 그저, ‘느끼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고 ‘의식’했다.

꿈속에서 안았던 조그만 소녀가 생각났다. 추억처럼, 그때의 기억이 오버랩되었다. 네모난 캔버스에, 소녀가 내 품에 엎드려 있고, 윗쪽엔 흰색의 밝은 형상이, 오른쪽 아래엔 갈색의 무언가가, 푸른빛이 감도는 회색 빛이 떠돌고, 고명도 저채도의 바닥?이, 고동색의 천장?이, 발끝을 서게 하는 포근함이 전해진다.

소녀가, 바람으로 변한 느낌이었다. 소녀가 공기 안으로 섞여 들어간 것만 같았다. 어쩌면 소녀는 정령인지도 모른다, 라는, 내 이성의 틀을 벗어나는 허황된 상상마저 하게 되었다. 꿈 속에서 만난 소녀는, 그랬다.

창고형 매장 건물의 정문 앞에서, 고개를 높이 들어보았다. 새삼, 커다랗다는 느낌이 들었다. 안에 들어서서도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올 때마다 보던 것들이, 소녀와 함께여서인지, 어쩐지 새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들어서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점점 내려가, 커다란 네모난 타일을 밟고, 과일, 생선, 그리고 출처를 알 수 없는 냄새들이 코 속으로 들어왔다.

비가 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혼자서 먹을 것들이었지만, 한 달치가 넘는 식료품이란 양이 많았다. 자루에 이것저것 집어넣은 채 어깨 위에 올려놓고, 빈 한 팔로 택시를 잡는 모습은 어쩐지 우습게 느껴질 만한 것이었다. 그 모습을 그리며 실소하는 순간마저, 나는 누군가를 안고 있다 느꼈다. 내가 안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내가 안긴 것처럼 포근했다.

택시 안에서는, 내가 있고, 기사가 있고, 라디오에 목소리로 존재하는 두 사람이 있었고……. 소녀가 있었음은, 마치 운명처럼, 레지 맥스웰의 사랑처럼, 그렇게 존재했다.

저녁 무렵 세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저녁을 함께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 저녁은 나가서 먹도록 하지. 그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말하고, 시간과 장소를 상의한 뒤 전화를 끊었고, 나는 곧 나갈 채비를 하고 문을 밀었다.

그녀의 품을 생각하며, 꿈속의 그녀의 여운을 생각하며, 어쩐지 나는 못된 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은근스레 레지 맥스웰을 질투했다. 소녀는 내가 아니라 레지를 택할 것이다. 레지는 내가 닿을 수 없는 공간에 있는 사람이 분명했다. 이것은 ‘느낌’이었다. ‘의식’이 아니었다. 소녀는, 아늑하고, 어눌하다. 흐릿한 꿈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느낌이, 의식이 아닌 느낌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제발 이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했다.

약속 장소에는 세영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웃으며 반겼다. 그 웃음이 어쩐지 새삼스럽게 생각되었다. 우리들은 웃고 있는 것이다. 그냥 웃기만 할뿐이었다. 대학 시절 우리는 서로 보고만 있으면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똑같이, 내내 웃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기분이 좋아서 웃는 게 아니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리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일은 잘 돼 가?”

“언제나 그렇지 뭐.”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서로의 일상을 묻는다. 주로, 일에 대한 푸념이었다. 대화를 열기 위해서, 가장 쉬운 공감대를 형성하는 말은 그것뿐이다. 서로 다른 얘기를 하고 있으면, 관계는 가벼워지고, 벽이 쌓일 뿐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가벼운 관계가 있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이것저것을 먹다보면, 일에서 시작한, 암담한 미래 같은 얘기가 흐르고 만다. 가슴에 와 닿는 얘기를 하는 일이 날이 갈수록 급격하게 줄었다. 사랑이 있을지 모르겠다. 극현실적인 얘기가 오간다. 그 장면은 가히 초현실적이다. 하지만 초현실적인 웃음은 내게 어울리지 않았다. 세영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지나치게 현실적일 때만 웃는다. 더 이상 사람들은 꿈에 대해선 얘기하지 않았다. 꿈은 아무도 보지 않는 타블로이드 같은, 물에 젖은 신문지 같은 뭉글한 것에 불과했다.

헤어질 때조차 우리는 웃었다. 다시 만날 것을 믿으며 헤어진다. 님의 침묵, 처럼, 즐거웠냐고 자문하며, 대충, 이라고 자답하며. 대충이라는 답변이 즐겁지 않다라는 뜻은 아니었다. 세영은, 현실적으로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인 것에 불과했다. 현실은 설명이 가능했다. 설명이란 늘 지나치고, 늘 부족하다.

나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 에 대해 잊고 지낸지 오래였다. 설명할 수 없는 존재를 만난 것은 바로 어제였다. 레지 맥스웰, 나는 그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세영은 레지 맥스웰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나는 레지 맥스웰을 알지 못하는 세영과, 레지 맥스웰과 사랑을 하는 소녀를 서로 비교해 보였다. 나는 세영 앞에서 꿈속의, 그리고 공기 안에 떠도는 소녀를 떠올렸다.

세영과 함께한 저녁식사 마저, 나는 소녀와, 레지 맥스웰과 합석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것은 4각 관계였다. 희뿌연 연기 속에 가려진 4각 관계였다. 이런 드라마를 만든다면 분명 fashionable이란 말이 어울리리라고 생각했다.

하루의 끝. 침대에 누운 나는 오늘도 꿈을 꾸고 싶었다. 꿈속에서 다시 그 소녀를 만나, 레지 맥스웰을 아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녀가 어떤 대답을 할지 몰랐다. 다른 특별한 대답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그저 솔직한 대답이었으면 했다. 하지만 어떠한 생각도 나를 재워주지를 않았다.

그 소녀는, 꿈 속의 존재일 뿐이었지만, 신선했다. 현실이란 권태가 아니었다. 짜릿하다라는 것과는 달랐다. 스며들어오는 신선함이었다. 낙엽을 태울 때의 냄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낙엽을 밟을 때의 느낌을 짜릿하다고 한다면, 나뭇잎이 낙엽이 되가는 과정을 편히 않아 수초 안에 포착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 신선함이라고 생각했다.

검은빛이 쌓여 가는 야경으로, 오늘은 어제로, 내일은 오늘로 다가오는 시간에, 나는 정말 잠들고 싶었다. 나는 잠이 필요했다. 현실의 피로를 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소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레지 맥스웰 때문이었다.

밖에는 다시 빗소리가 들려 왔다. 하늘이 흔들흔들 쏟아지더니, 서로가 서로를 부둥켜 안은 채 뜨락으로 몸을 던지는 비를 쏟고 있었다. 비속으로 달이 보였다. 둥그런 달이 보였다.

잠이 오질 않았다. 농담처럼, 하지만 진담처럼 정말 그랬다. 차라리 악담이면 좋을 것을, 거짓말처럼 진짜 그랬다. 말장난 같은 시간이 계속 흘렀다.

차라리, 허공에 이어진 내 시선을 누군가가 끊어줬으면 좋겠다. 그래서라도 내 무의식의 세계, 그 아름다운 소녀를 만나고 싶었다. 소녀를 만나서 다시 품에 안고 싶었다. 그녀의 사랑이 레지 맥스웰이었다면, 내가 레지 맥스웰이 될 수 있는 것이 꿈이라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Beth Gibbons(Portishead의 보컬)의 애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지 맥스웰의 사랑. 그녀는, 내게 선명히 다가왔다. 그녀가 소녀를 내게 데려와 나에게 소개하고 있었다.

나는 소녀를 따라 달렸다. 그리고 그 소녀를 만났다.

“레지…….”

그 소녀는 조그맣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공기 속을 떠돌며 조용히 소녀를 안았다. 아침이 오면 끝날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의식하는 게 아니라, 느끼고 있었다.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빠져들 듯, 내 프로이트적, 생리적 자아에 대한 오르가슴이 아니라, 내 영혼의 중추를 즐겁게 만드는 느낌으로, 소녀를 안았다.

그리고 나는,

깊은 잠. Giger의, 혹은 Reggie의, 현실이 되지 못할 영원의 요원.

아무도 보지 않는 타블로이드를 가득 매운,

슬픈,

레지 맥스웰의 사랑.


(1998년 5월)

으아 무려 10년된 거네 -_- 이 파일을 가지고 있는 내가 더 신기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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