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민'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9.06.15 미성년 8XXXXX-


 CBS 시사자키, 로 유명한 김용민은 <충대신문>에 기고한 글을 통해 20대들에게 '(정치적으로) 너희는 안된다. 뭘 해도 늦었기 때문이다' 라고 독설했다. 그리고 '(10대) 아이들이 졸업하면 너희 세대를 앞지를 것이고, 곧 우리 사회의 중심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이 아이들에게 판 돈 모두를 걸련다.' 라고 적었다. 이 글에 담긴, 악의에 가까운 날선 비난은 처음 기고되어 원문이 실린 충대신문의 페이지를 떠나 이리저리로 퍼지고 있다. 그리고 논쟁. 논쟁의 요는 결국 20대 전반에 씌운 그 '혐의'에 대한 진위 여부를 밝히고자 하는 (집요한) 공방이다. 그래서 논쟁은 때로 386 세대(라고 쓰고 혹은 '진보개혁진영', 내지는 어떤 '계급'으로까지 읽히는) 386과 20대의 대결 구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사실은, 386 진보개혁세력의 아지트(?)라고 할 서프라이즈에서 이 글에 대한 대체적인 반응은 공감에 가깝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또 386 중산층이 그 주 사용자층인 dvdprime에서도 같은 글은 압도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20대와 386세대간의 갈등은 우석훈 등의 <88만원 세대>부터 시작해서, 작년부터 늘상 나오던 지리멸렬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고 또 해결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니, 하나마나한 소리고 요령부득한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국민이 개가 아니듯, 20대가 정말 병신인 것은 아니다. 김용민은 20대가 명바긔를 지지했다는 점을 들어 그렇게 말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명바긔만이 경제 아젠다를 선점했다는 데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오히려 혹자는, 그러한 투표율을 분석한 결과를 두고 20대야 말로 가장 진보적인 투표를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 주장에 따르면, 20대의 이명박 지지율은 40대(이제 386은 전부 40대가 되었다)의 그것보다 10퍼센트가 낮았고, 정동영을 제외한 범-진보개혁 후보의 지지율도 40대보다 20대에서 더 높게 나타났다. 그것은 현재의 지지도 조사에서도 나타난다. 즉 20대들이 '진보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분명 20대들의 가치 성향은 다른 세대에 비해 비교적 진보적이다. 다만 예전 세대에 비해 '덜 진보적'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20대들의 이해관계를 직접적으로 대변해 주는 정당이 없다는 점에서, 정당지지율만으로는 진보와 보수를 이야기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거리를 나가보자. 20대의 숫자가 과연 적은가? 물론 70, 80년대 독재 타도를 위해 뛰었던 대학생 운동권 조직이 부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쨌든 연령비율 상 20대가 현격히 적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한편으로 '촛불시위'의 기원을 봐도 그러하다. 2002년과 2003년 미군장갑차사고로 촉발된 소파 개정 요구 시위와 탄핵 정국에서 탄핵 반대 시위 등에서 처음 시작된 촛불시위는 (지금은 30대가 된것으로 알고 있는) 네티즌 '깜악귀'(이자 서울대생 김모씨,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만)의 아이디어로부터 출발했다. 그때 수많았던 386 논객들은 무얼하고 있었나? <서프라이즈>니 <컬티즌>을 통해 '말'의 백가쟁명 시대를 열고 있었(고 곧 얼마 안 가 모두 망했)다. 깜악귀 등만이 <컬티즌>을 통해 격문을 띄웠다. 그리고 그것이 노무현을 당선시킬 수 있는 기폭제였고, 지금의 촛불시위를 있게 한 어떤 시스템의 출발이었다. 20대는 정말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 아니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다.

 ...라고 해봤자 결국 하나마나한 이야기이다. 80년대 처럼 강렬한 운동권 조직, 지금은 없다. 전위도 없고 투쟁도 없다. 사명도 사상도 부족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후반까지 태어난 인간들이 생물학적으로 병신이어서일까? 똑같은 인간인데 왜 어디가 모자란 것일까? 20대를 '연령'이나 '세대'로 둘러쳐서 묶고 '왜 너희는 사회 운동 안 하느냐'고 다그치는 것만으로는 아무 답도 얻을 수 없다. 그러니 이야기를 바꿔보자.  한 세대의 정치가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살피기 위해선 사회 구조(social structure)나 조직 체계(organisation/system) 상 어떻게 그리했는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경제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사회심리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다만 어느 측면이 결정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을 따름이다. 기실 항상 케이스 바이 케이스고, 백인백답의 문제이다. 다만 이러한 '담론'이 어째서 횡행하는지를 거칠게나마 살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미성년 8XXXXX- 1 : 세대전쟁 2차전 - 베이비붐 리플렉스 세대 vs 386 2세대

 첫번째 결론을 당겨 보자. 사회구조상, 세대론으로 두루뭉술하게 묶어서 이야기해본다면, 결국 이 양상은 또 하나의 '대리전'이다. 굳이 김용민은 10대 이야기를 꺼내, 10대가 20대보다 낫다는 둥의 이야기를 어째서 늘어놓은 것일까? 왜 굳이 '판돈'이라는, 대단히 불편한 어휘까지 사용했을지 위악적으로 이야기해보자. 결국 386과 20대의 다툼은, 어쩌면 50대 이상의 소위 베이비붐 세대(라고 쓰고 기성세대, 산업화 세대 라고 읽는)와 386세대의 시장을 두고 다투던 싸움의 대리전에 불과하진 않은지. 사실 결국 세대론은 해당 세대에서 진행된 '국가 경제' 발전 정책, 즉 산업화의 진행과 금융 인플레이션에 따른 임금소득과 현금소비의 고리에 의한 노동 시장 재편, 그리고 그로부터 이어지는 자산의 증식과 세습의 문제로 추렴, 요약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한국 사회는 군부 독재 시절 건설과 제조업 드라이브를 통해 고도 성장했고, 그때 생산된 부는 부동산이라는 자산으로 탈바꿈해서 편재되었고, 세습되었다. 쉽게 얘기하면 베이비붐 세대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국사회는 산업화되었고, 그 산업화를 통해 만든 돈은 부동산 거품을 통해 불어났다. 서울 시내 수많은 수억대 아파트의 소유자들은 누구인가? 바로 그 베이비붐세대다. 사실상 386세대가 전두환의 독재와 불의를 이겨냄과 동시에 얻은 것은 DJ와 노무현 정부 10년인 동시에, 그러한 자산의 재분배이기도 했다. 베이비붐 세대의 음영에 어용노조와 종부세와 수구꼴통 등이 있다면, 386세대의 음영에는 기실 디지털스모그와 뉴타운과 주가 조작과 유학열풍-기러기아빠와 급증한 이혼율이 어지럽게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그러한 시각에서 386이 20대를 '까고' 10대에게 '판돈을 모두 걸'겠다고 말하는 까닭은 사실상 자신들의 세대론을 세습한 것이라는 혐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지 묻고 싶다. 지금의 20대들은 베이비붐 리플렉스 세대가 다수이다. 사실상 그 어느 누구도 부모 세대의 경제적 지원과 한계라는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시장은 (명박이가 좋아하는 말대로 '일신우일신') 보다 자본주의적으로 고도화되고 있고, 경쟁은 그 어느때보다 치열하다. 그것이 그들을 원자화시키고 있다. 인플레이션은 사상 최대이며, 임금 수준은 갈수록 격하되고 있다. 취업률은 말할 것도 없다. 386세대인 김용민이 '판돈'을 10대에게 걸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물론 김용민은 정치적 희망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386세대들에겐, 10대들에게 거는 판돈이란 곧 그들이 자립형 사립고를 다니고 대학 등록금을 내고 외국 유학을 가고 결혼하고 나서 살 집을 사는 데 돈을 보태주겠다는 말로 전락되기도 한다.


미성년 8XXXXX- 2 : 80년대는 끝나지 않았다

 한편, 왜 20대들은 조직화된 사회 운동을 하지 않는가? 사회 운동의 동학을 설명하는 이론은 크게 군중의 자발성을 원인으로 보는 시각과, 운동 전위 조직의 동원(mobilization)에 의한 것으로 보는 시각으로 대별된다. 재밌는 것은 이 두 가지 시각 모두로 보았을 때, 20대들이 조직적인 사회 운동을 하기에는 현재의 조건이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군중 이론으로 보자면, 이전 정부와 비교해 보았을 때 이명박 정부는 최소한 쿠데타로 집권한 정부가 아니다. 20대들은 이명박 정부를 심적으로는 지지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하지만, 그러나 운동을 통해 변혁시켜야 할만큼 절박함이 아직은 없다. 어떻게 보면, '사사오입 개헌'과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으로 촉발된 6월 항쟁과 비교할 때 '쇠고기 수입 파동'은 그 의제가 훨씬 '덜' 치열해 보이기도 한다. 즉 1960년, 그리고 80년대의 정치 상황과 지금을 비교해 본다면 (물론 나는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현 정국은 비교적 정상적이기 까지 하다는 뜻이다. 까놓고 말해, 명바기가 두환이만큼 사람을 대놓고 학살한 새끼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군중 이론만으로는 20대들의 무행동이 모두 설명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두번째 고리, 동원 이론에 답이 있어 보인다.

 1990년대, 90년대의 주인공은 '서태지'였을만큼, 그 시절은 참 조용하게 시끄러웠다. 노태우가 집권하고, 올림픽이 열리고, 삼당합당으로 민자당이 등장하고.. 그리고 김영삼, 그리고 IMF가 오기전까지 90년대는 꽤 평화로웠다. 그리고 DJ가 대통령이 되었고,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동안 386들은 빠르게 사회의 주류로 편입했다. 노무현 정부 초기, 열린우리당은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없고 다수당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 대학 운동권의 '맥'은, 맥없이, 끊겼다. 1997년 한총련이 연세대 종합관으로 쫓겨나 불타는 건물에서 우왕좌왕하는 동안, 87년 6월 거리를 메웠던 시민들은 차라리 무관심했다. 386(현재의 40대)와 베이비붐 리플렉스(현재의 20대) 사이의 세대, 즉 90년대에 대학을 다닌 현재의 30대들(이른바, 오렌지족과 X세대로 일컬어진 '신인류')은 그렇게 가장 비극적인 시절을 겪어야 했다. 민주화되었다는 명분 아래 '선배'들이 사회로 떠나가고 남은 그들이 사회에 진출할 시기가 되어 한국은 경제 한파를 겪어야 했다. 그리고 겨우겨우 '살아내'고 10년이 지나자 이번엔 이명박이다. 도무지 살 맛이 나지 않는 세대이다. 슬픈 일이다. (생각해보면, 93학번 김용민은 이 시절 대학생이었다)

 90년대의 운동권이 쇠약해져 간 데에는, 87년 6월의 승리가, 사실상 '87년 체제'의 도래가 어떤 식으로든 한국의 민주화의 가장 큰 단절점이라는 데에 그 주역들이 너무 쉽게 동의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윽고 수년이 지나 김대중, 노무현 민주 정부가 10년을 집권했다. 김대중-노무현 10년을 '민주화 공고화 단계'라고 말한다면, 어째서 노무현은 정권 재창출해 실패했던 것인가? 혹은, 87년 직후 출범하고 10년이 지속된 민정당 노태우-민자당 김영삼 정부 시절을 무엇이라 말할 수 있는가? 87년 6월 이후 20년간, 대한민국이라는 한 나라의 '민주화'가 완성되어 가고 있냐고 묻는 것이다. 노무현의 영결식에 노태우는 나타나지 않았다. 모두가 그의 부재를 문제삼지 않을 정도로 그는 '잊혀진' 대통령이 되었다. 김영삼은 오로지 'IMF를 불러일으킨 대통령'으로만 기억된다. 그들에 대해 전두환의 2인자, 삼당합당의 주역이라는 꼬리표가 달리긴 하지만, 다소간의 입장 차이만 있을 뿐, 그들은 '민주화 과정의 부산물' 수준으로 불린다. 하지만 그것은 정답이 아니다. 정치적 국면전환이 있었을 뿐, '민주화 프로젝트'는 사실상 성공적이지 못했다. 87년부터 20년간 진행된 유일한 사회적 프로젝트가 있다면 신자유주의밖에 없다.
 
 민주화 프로젝트가 없기에, DJ-노무현 10년이, 사실상 '진보'의 견지에서 볼 때는 오히려 가장 '보수'적인, 신자유주의의 공고화 과정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는 정치 아젠다가 소멸된 이후, 정치가 사회 속으로 스며들어 없어지자 결국 경제 체계에 의해 생활 세계가 우습게 식민화되어버린 것과 다름없다. 우습게도, 노무현 정부 시절 양극화가 심해진 데에는 보혁 간 의견이 일치한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구 집권 세력이 거기에 대해 이렇다할 반성이 없다는 점이다(물론 자칭 보수인 현 정부는 그것에 대해 비난해 놓고서 해결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점에서 정말 뻔뻔한 새끼들이라는 점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386이 20대를 공격할 때, 20대들이 386을 반격하는 논리도 이러한 선에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를 공고화한 것이 386이며, 386은 그 자유주의화라고 하는 어떤 정치적 프로그램에 의해 주류로 안착한 '가해자'였고 20대는 그 '피해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산업화 세대가 다시 집권했을 때, 20대 입장에서는 산업화 세대나 386세대나 X세대나 '그놈이 그놈'인 것이다. 최소한 부모 세대인 산업화 세대는 '삶의 조건'을 제공해주기나 하지. 실제로 '차기 대권 주자'에 대한 지지율을 살펴볼 때, 놀랍게도 박근혜 지지율이 가장 높은 세대가 바로 40대다. 이러한 '정치적 진공상태'에서, 오히려 20대들은 그 여느때보다 더 열심히 경제 지표를 추적하고 대안을 모색하고 있을 따름이다.

 
미성년 8XXXXX- 3 : 공존이 성숙이다

 저마다 2mb out을 외치지만, 나는 가끔 되묻고 싶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우리는 광장에서, 정말 중요한 이야기들은 놓치고 만다. 막상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보면 저마다들 정의로운데, 종국에 다같이 만나보면 서로가 서로를 헐뜯는데 집중한다. 그럴 때마다 20대들은 참 '만만한 아이들'이다. 김용민은 이명박이 20대를 만만하게 본다고 했지만, 사실 20대를 가장 만만히 보는 것은 오히려 386이 아닌가 하는 억하심정도 생긴다. 386들은 20대에게 '너희들이 역사를 아냐? 정치를 아냐? 데모는 해봤냐?'라고 묻는다. 그래놓고 20대들이 '이런 치열한 경쟁속에서 내일 거지가 될 지도 모른다는 고통을 느껴보았느냐'고 되물으면, 배부르게 살았으면서 투정한다고 말한다. 사실상 IMF 시절의 경제 한파와 이후 도래한 무한경쟁이라고 하는게 얼마나 큰 트라우마였는지, 지금의 386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놓고 우경화와 진보의 가치에 대해 논하려 든다.

 허나 한국의 정치지형만큼 알팍하고 거짓된 것이 어디 있을까?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보수란 말일까? 한국사회가 보-혁을 가르는 기준이 다름 아닌 영남-호남에 불과하진 않을까? 그리고 이제는 심지어 세대별로, 베이비붐/베이비붐 리플렉스 가정은 보수이고 386/386 2세대는 진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일까? 결국 이런 식의 잘못된 '편가르기'는 영호남을 가르는 박정희식 지역 감정론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하니 결국 보수는 보수답지 않고 진보는 진보답지 못한 것이다. 보수나 진보나 그저 권력을 둘러싼 국면 전환에만 몰두한다. 이것은 대단히 아픈 이야기이다. 

 따라서, 다만 386세대는 80년대 자신들의 '명분'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정말 20대들에 대해 신경쓰고 있다면, 돌아와 다시 '가르쳐야' 한다. 20대들이 다닌 2000년대의 대학가에는 '운동권 선배'가 없었다. 다만 '동아리'들이 있었을 뿐이다. 운동권의 마지막 세대들이 저마다 '살길' 찾아간 동안, 20대들은 '정치'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있다. 그러니, 문득 자문해본다. '정치'가 무슨 뜻일까? 政治, 명사, '하다'가 붙어 자동사가 되는 그 말. 사전적 정의만으로 치면 정치는 통치(govern)의 유의어이기도 하다. 원칙적으로는 국가의 주권을 가진 자가 해당 국가의 영토 및 국민을 '통치'하기 위해, 권력을 행사하고 정책을 강제하는 활동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정치에는 '다툼'의 속성이 있다. 즉 사회 집단간에 생기는 이해관계의 대립 등이 조정(되기 위해 반목하거나 합의)되는 과정을 말하기도 한다. 결국 정치노선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를 위핸 합의가 아니라는 뜻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누가 누구의 편인가를 아는 것이 정치라는 말에 담겨 있는 슬픈 함의이기도 하다. 즉 독재권력의 민주화 혹은 세대/집단 간의 이해 관계의 조정의 속성이 정치라는 말 속에서 해석되고 진행된 것이다.

 그러나 정치라는 것은 보다 깊고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20년전의 6월과 작년의 6월이 달랐던 이유는 그 아젠다의 차이에 있다. 20년전에는 정치 프로젝트였고, 지금은 (푸코 식으로 말해) 삶의 문제(건강, 행복추구, 안전, 지위나 재화를 추구하는 생명활동, 생물학적으로서의 '삶'의 문제)였다. 그런데 지난 광장의 의제는 계속해서 '이명박 정권 퇴진' 쪽으로 흐른다. 노무현 서거 이후의 정국도 그런 식이다. 20대 입장에서는 누가 되든 똑같으니, 적극적이기 어렵다. 즉 386은 '87년 체제'가 어떤 완성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민주당도 한나라당도 아닌, 구태적인 진보와 보수로는 말할 수 없는 '삶'을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예컨대 생태주의나 공동체주의, 여성주의, 문화 운동과 같은 의제는 386식의 진보로는 다룰 수 없다. 서로 공박해서 될 일이 없고, 안 될일만 많다. 

 80년대애 태어난 모든 것들은 모두 미성년이다. 인간도, 체제도 그러하다. 정치는 더더욱 그렇다. 우리는 언젠가 완성되었던 사회로 '돌아가고자' 원해서는 안된다. 보편적인 사회, 완성된 사회는 있을 수 없다. 다만 '지금이 아닌 다른 어떠한 체제에서 살고 싶다'라는 끊임없는 진보의 갈망이 있을 뿐이다. 부당한 이득이 없고, 억울한 피해자가 없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공히' 물질화, 구체화시키는 것이다. 여기에는 세대가 따로 없고, 지역이 따로 없다. 전위가 없고, 응당 후위가 없다. 결국 남은 문제는 다시 연대하고 모색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은, 386 운동권이라는 말들

 386 이라는 말은 사실 대단히 복잡한 말이다. 30대, 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의 첫 숫자를 잡고 붙여진 말이었는데, 레이코프 식으로 말해 이는 이미 프레임전쟁에서 지고 들어간 것이다. 먼저 386이라는 말은 인텔의 80386 프로세서에서 따온 말이며, 이는 이미 펜티엄3(굳이 숫자로 치면 786쯤이 되겠지)급 프로세서가 보급된 뒤에 붙여진 것으로 그들이 여전히 시대착오적이거나 시대의 흐름을 놓치고 있다는 조롱의 의미가 섞여 있다. 이미 세상은 차세대 프로세서 - 금융 주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 속에 놓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통치 문제, 정치적 자유주의의 문제, 혹은 북한에 대한 태도 등에 얽매여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40대가 되어 '486'으로 업그레이드가 된다한들 마찬 가지다. 그새 세상의 프로세서는 쿼드코어급으로 올라갔으니까.

 또한 386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내재적인 편가름, 배제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80년대 학번' 때문인데, 80년대 후반 전두환 정권 시절 늘어난 대학 정원의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가 된 '80년대 학번 대학생 출신들'을 직접 지칭함으로써 일단의 배제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80년대 대학 운동권이 '호헌 철폐, 독재 타도' 만을 외친 것이 아니다. 그들이 투쟁한 첫번째 동기 중 하나는 프랑스식의 교육제도, 즉 다수 입학 - 소수 졸업이라는 정책에 반대했던 것이다. 일례로 80년대 강단의 '황당한' 운동 사례 가운데 하나는, 학칙에 의거 낙제 학점을 준 교수에 대한 린치 등도 포함된다(서강대 등에서 실제로 자행된 일이다). 80년대 학번, 대학생 출신의 386들은 이후 무난히 사회 주류로 진출하거나, 혹은 DJ-노무현 정부의 금융 및 IT 드라이브의 직접적 수혜를 입었다.

 지난 시절 우리의 적들이 '운동권'이라는 말로 사회운동과 일반 인민/시민, 즉 '민중', '민생'을 갈라놓았고, 그 다음은 386이라는 말로 그들의 공을 조롱한 것이다. 결국 386이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 자체가 사실 이미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결국 진짜 중요한 것은 진보적인 가치, 삶의 진정성을 추구하는 가치이지, 어떤 세대론이어서는 안된다. 즉 386이라는 한 개념어(idiom)를 진보진영은 거부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들이나 한겨레 신문, 혹은 진보 논객이나 진보 정당 내의 '386출신' 운동가들은 그 말을 너무 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80년대 운동권의 진짜 정서는 '부채 의식'과, 그에 의거한 '연대 의식'이었다. 서울대 상대생들이 지방대 출신 전대협 의장을 위해 몸을 날렸다. 농민과 노동자들을 보고 슬퍼서 대학을 떠나 공장으로 갔다. 그랬던 386들은 물론 지금 20대들에게 '너희들은 부채의식이 없느냐' 라고 말할 자격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다시금 부채의식을 가져야 하는 '386'들, 즉 사회 주류로 편입되어 신자유주의 공고화의 직접적 수혜자가 된 그들이 자신의 운동 이력을 어떤 신화로 만들어 미화하고 추억하면서 20대들을 공박하는 것은 조금 이상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구조적으로 20대들에게 분명한 부채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부채의식과 연대의식이 없고, 이상한 편가르기만 하려 한다. 20대들도 386과 같은 편이 될 마음이 없다. 김용민의 글을 읽어봤자 귓등으로 듣지도 않는다. 따라서 김용민식의, 혹은 이미 그 전에도 있어왔던 수많은 세대론에 의거한 그 음험한 편가르기는 '수사'로도 불편하다. 김용민의 그런 글은, 그 글에 담긴 의미로서도, 위악적인 포즈의 '쇼크요법'으로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다시 말하지만, 결국 이런 식으로 편갈라 놓고 싸우기를 시도하게 된다면, 20대들은 그저 산업화세대의 한 후계자로서 다시금 박정희를 불러내고, 또 전두환과 노태우를 불러낼지도 모른다. 기성세대 진보진영들이 그꼴을 보지 않으려면, 20대들을 조금 더 가까이 어여삐 여기고 가르쳐야 한다. 이 글을 적으면서 틈틈이 다른 블로거들의 반응을 읽었다. 그들 대부분은 사실상 김용민이 공격한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김용민이 비난한 부류들은 김용민의 글을 읽지도 않으며, 설혹 읽어도 '흥,386 운동권 같이' 이라고 생각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리고 386들은 그것을 '조롱'으로 듣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이 땅의 새로운 편가름의 현 주소다.

Posted by toto le hero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