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티시즘'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0.01.28 낭만적 사랑의 문화적 표준 모형 3

 예전에 썼던 글의 결론이 미미하다고 생각하여 다시 씀.

 인간들의 연애란 대부분 거개의 양상이 엇비슷하다. 만나고, 헤어지고, 재회하거나, 연을 끊고, 친구로 지내고, 새 연인이 생기고, 옛 연인은 억지스레 부인되거나 은밀한 관계로 남는다. 처음엔 서로를 필요로 하다가, 한때는 부담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상대가 주어이거나 술어로 등장하는 명제를 취해(일테면 'you complete me'나 'to me, you are perfect' 따위) 마음속 도덕률로 삼기도 하고, 혹은 헤어진 뒤 완전히 새로운 삶의 명제를 이끄는 소전제로 전락하기도 하며('love is a lemon', 'no women no cry' 따위), 페르마의 정리처럼 마음의 여백이 부족해 채 결론을 짓지 못하는 그런 무정형의 어떤 것으로 변하기도 한다('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사랑밖에 난 몰라 따위'). 마음을 나누거나, 몸을 만지거나, 함께 기념물을 남기거나 하는 일은 어쩌면 그런 모든 일은 한때 욕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생활의 규율이 되기도 하다가도, 종래에는 결국 일기장 한 귀퉁이의 아포리즘이 되거나, 금단의 외경이 되어 깊이 봉인 되기도 한다. 다 비슷하게 말이다.

 이런 모든 일을 '거기서 거기'라고 말하는 것은 일견 합당하지만 참 부당하기도 하다. 인간은 남녀 불문 보통 1미터 70내외, 50~60킬로그램 전후의 체중의, 1.5킬로그램이 채 되지 않는 뇌를 담은 두개골과 2개의 눈과 귀 1개의 코와 입이 달린 안면을 가진 머리 밑으로 몸통과 사지가 달린 수분과 골격과 단백질과 지방으로 이루어진 몸뚱이를 가지고 70년 가량 생명활동을 한 뒤 존재의 의미를 잃는다. 처음 20년-30년 가량 양육과 훈육과 교육을 받고 다음 30여년 동안 노동한 뒤, 그 다음 삶은 대개 '여생'이라고 부르는 지리멸렬한 나날들로 채워진다. 대개 한 번 내지 두 번 결혼을 하고 5명에서 10명 정도의 성교 대상을 갖는다고 알려져 있으며, 평균적으로 왠만한 인간들은 질병이나 사고로 수개월가량을 병원 신세를 진다. 보통 사람들은 평생동안 7명 내외의 깊은 교우 관계를 갖는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모국어와 약간의 영어를 구사하고, 하루 세번 밥을 먹고 어두울 때 자고 밝을 때 깬다. 이러한 모든 사실들은 표준적이며 동시에 문화적이다. 그러니까 모든 연애들이 비슷한 양상을 띄는 것은 합당하다. 하지만 동시에, 한 인간의 삶이 다른 이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내 삶'이 '너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뼈아픈 일이다.

 대체가능한 표준으로서의 인간의 이 외로운 삶이 현현하는 수많은 부조리와 무의미를 뚫고 행복과 가치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람들은 때로 필사적이다. '필사적'이라는 말이 지시하듯 결국 '그래봤자 장기에 우리는 다 죽지롱'이겠지만.. 토템을 부정하고 터부를 혁파하며 마침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려하고, 각각의 관계에 저마다의 이야기를 불러내려고 한다. 말하자면 낭만주의는 근대의 표준적 삶의 정착, 그 '죽음과도 같은 삶'(말하자면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죽음에 이르는 병'인 절망적인 삶)에 반발하여 등장한 사조였다. 중세의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이야기부터,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낭만적 사랑'에는 괴멸하는 세상과 그것을 이기고자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즉 낭만적인 사랑은 감정적 원형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표준적 생활양식과 개인의 성(섹슈얼리티)간의 지배 문제이기도 하다. 동성애든 이성애든, 두 사람간의 배타적인 사랑이든 대안적인 공동체적인 사랑이 되었든 간에 그것은 항상 섹슈얼리티의 문제이며 섹슈얼리티의 문제는 항상 생명심과 재생산의 결과를 가리킨다. 즉 우리는 장기에 모두 죽는 것이 아니라, '나는 너와 자고 싶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DNA를 재생산하고 싶다'라는 말을 건네게 되며, 이것은 죽음을 초월하고자 하는 본능적인 의지의 발현이다. 에로티시즘 혹은 관능은 그런 생명심과 진면목에 관계되는 바가 크다. 웃자고 하는 소리가 아니고.. 그루피들이 '당신의 아이를 낳아주겠어요(i want to have your baby)'라고 외치거나, 경상도 말로 '사랑해'가 '내 아를 낳아도'라고 하는 것은 인간사의 원형이 결국 그렇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에로티시즘은 인간이 필멸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동시에 무한하다는 농염한 언약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낭만적 사랑의 표준적 문화 모형'과 성적인 방종(일테면 프리섹스주의)은 사실 한통속이다. 왜냐하면 그 모두가 사실 참으로 하나도 '에로틱'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에로티시즘은 말하자면 존재에 대한 감정적인 표현 수단이다. 표준적인 모형은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에, 성적인 방종은 성적인 중독에 그 주도적인 지위를 내준 채, 에로티시즘은 거기에서 감정을 위무하고 쾌락을 주고받는 도구적인 기술의 지위로 전락된다. 에로티시즘은 권력관계 혹은 차별로부터 벗어나 동등한 인간의 성숙한 사회관계를 확인해주는 최초의 심급일 때야 비로소 정당한 것이므로, 소비문화의 지배를 받는 낭만적인 사랑이나 중독적인 사랑은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기능 없이 생물학적인 몸, 정신병리학적인 마음에 맞는 몰핀 역할에 다름아닌, 선무당의 푸닥거리로 남는다. 더욱 나쁜 것은 그것이 끝나고 나면 항상 차별적인 권력관계는 확대재생산된다는 점에 있다. 일전의 글에서는 '그나마 후자가 낫지 앟나'고는 했지만서도..성차별적인 권력관계에서 재연되고 재현되는 성적인 방종은 거의 대부분 일방적으로 약자(보통은 여자)가 피해자가 된다.

 무슨 보수적인 크리스차니티에서 말하는 '영성의 회복' '생명의 존중'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난번 글의 결론대로, 우리는 끊임없이 쾌락과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지만 다만 그 이면에 있는 합당한 자신의 이야기의 처음과 끝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삶의 윤리인 셈이다. 따라서 당신의 사랑이 당신을 온전히 충족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잘못된 것이다. 당신의 사랑의 이야기가 마음속에서 술술 흘러나오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잘못된 것이다. 그냥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능..


 근데 써놓고보니.. 기든스의 <친밀성의 구조변동>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한 글이 된 것 같다.

 다음은 짤방.. 연애의 64단계
Posted by toto le hero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