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무척 바쁜 주말이 되었을 예정이었던지라, 작정하고 놀아야지 하고 있었던 이틀이었는데.. 여차저차 문밖을 나선 시간은 단 십분도 채 되지 않았다. 취소된 약속이 썩 반갑지는 않았던 걸 보면 지난 한 주가 좀 많이 답답했던 모양이다. 나가서는 담배 한 갑, 요구르트 한개 사 온 게 전부. 집밖을 안 나서니 피워문 담배도 이틀동안 세 개피. (라고 적어놓고 이 글을 쓰는 동안 한 개피를 더 피우고 와서 이제 네 개피) 집에서 고기 굽고 동생 나가는 길에 사다준 기네스 두캔에 과자에, 살찌는 소리가 들리는 이월의 마지막 나날들. 

 어제는 오랜만에 하루종일 창문 열어놓고서는,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는 방구석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어서 빨리 이 집을 떠나야지'라는 맘만 다시 새기고 청소니 정리니 하는 걸 포기했다. 산들산들 들어오는 바람에 봄이련가 하고서는, 긴팔티셔츠에 후디까지 껴입고는 방문 닫고 나와 거실 소파에서 본편보다 광고가 더 많이 나오는 미드 시리즈를 잠결속에서 보는둥마는둥하다가 방에 들어와 창문 닫고 본격적으로 잤다.

 여러모로 혹독한 겨울이었다. 휘청거린 적도 많고, 발발 떤 적도 많고, 눈앞이 캄캄할만큼 길을 나서기가 힘든 일도 있었고, 속앓이도 심했고,그러다보니 위로 아래로 많은 걸 쏟아냈던 시간들이었다. 그사이 장장 육개월이 넘는 입사 연수가 끝나고 명함을 받았다. 학창 시절에 그토록 비웃었던 '관리의 XX'라는 회사의 '경영관리팀', 학창 시절에 그토록 안쓰러워했던 회계사 셤 공부하던 친구놈들이라면 우스워보일, 경비처리하는 일반 회계업무를 한다. 불과 반년전만해도 막연히 나는 미디어 아니면 언어를 다루는 일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전표와 재무제표에 적힌 증빙자료를 검토하는 데에는 맥루한도 소쉬르도 별반 도움이 되질 않는다. 패션 인더스트리에 입성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냥 난 일반 제조업, 혹은 조금양보해 유통(직매)형 제조업 시장의 경리사원이 되고 말았다. 굉장히 표준적이기에 조금은 지루해 보인다, 나의 이십대 끝물이 말이다. 여차저차 '1지망'으로 쓰고 들어온 팀이니 어디 불평하기도 그렇고..그냥 뭐 열심히 해야지. 군대 있을 때처럼.


 2월 한 달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겠다. 금명간에 와서 갑자기 시간도 공간도 녹아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천십년도 이천십일년도, 그리고 내 나이 스물여덟이 그리고 스물아홉이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질 않는다. 나에게 어떤 불연속점이 생겼다는 느낌이 자꾸만 든다. 짧던 사랑놀음도 끝나고, 짧지만은 않던 식자연하는 시간도 끝나 버렸기 때문인가보다 싶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으로, 나라는 인간에 대한 자의식 자체가 엷어져버린 것 같아 홀가분하다가도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 같아 불안불안하기까지 하다. 마치 봄같이, 얼어있던 눈사람같던 내가 녹아서는 바닥에 흥건히 젖은 채 말라가길 기다리는 것같다는 기분까지 든다. 하지만 다시 영하 사오도. 맘을 다시 단단히 하고는 일어나서 걸어야겠지.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한다. 담배를 피우느라 창문을 열었더니 바람 부는 꼴이 심상찮다. 내일은 또 추울 것 같다. 낮에 동네 한바퀴 돌 땐 쌓여있던 눈들이 거짓말처럼 녹아 아스팔트 위에 고여있기도 했는데, 마치 봄 같이 사람맘을 싱숭생숭 녹여놓고는, 다시 얼어붙게 만드려나 보다. 내일 또 휘청거릴까봐 두렵다. 징이 박힌 신발을 신고 자박자박 걷고 싶다.


 할 말은 많은데 누구한테 해야할지 모르겠고, 누군가를 생각하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을 때 사람은 가장 외롭다. 차라리 누군가에게 어떤 말을 해야할지 분명할 때, 하지만 용기가 없어하지 못할 때의 설렘과 불안이 차라리 쉽지 싶다. 봄이 오면 그렇게, 호생심이 살아났으면 하고 희망해 본다. 이러다 어느날 갑자기 가족 얘기니 엄마 얘기를 하는 시시한 남자애가 되고 싶진 않다. 돈 얘기나 혹은 끽해야 옷 얘기나 주워섬기는 재미없는 인간은 더더욱 되기 싫고. 어찌되었건 곧죽어도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에 대해 논하는 근사한 인간이 되어 봄을 맞아야지. 그래도 굳이 옷 얘기를 덧붙이려는데(난 패션회사에 다니니까), 올리브색 혹은 옐로카키빛 트렌치코트와 카멜색 태슬로퍼가 갖고 싶다. 왠지 내가 나라는 동일성을 확인해주는 건 이런 사소한 물욕뿐인 것 같기도 하다. 기분이 참 묘하다. 한시퀀스에서 다른 시퀀스로 디터-디졸브되는 한 프레임을 가만히 응시하듯 이 글을 쓰다가

 결국 포스팅.
Posted by toto le he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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