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에 남긴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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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모 씨와 다방에 갔을 때 옆자리에서는 예술깨나 하게 생긴 이십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아가씨 둘이 심각한 예술론을 주고 받고 있었다. 나 역시 대화상대가 있었으므로 그들의 대화는 우리들의 침묵 가운데 띄엄띄엄 캐치한 몇 개의 문장들로 재구해야했지만, 요는 미술, 문학, 연극 같은 근대예술이나 영화, 비디오아트 등의 '뜨거운 매체'에 해당하는 (탈)근대예술 등에 엄존하는 논리학적/미학적 핍진성은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이 지배하는 현대인의 예술적 감수성에 기능적으로나 당위적으로나 들어맞지 않을뿐더러, 애당초 엄정한 논리성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 대중이라는 가상적인 주체에게는 그들 예술이 전달하고자 하는 어떤 경계를 설정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요였다. 그들은 담배를 피우며 '그래서 결국 TV드라마가 최고야' 라고 결론지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문학이나 예술 전반에 치열한 이성적 능력을 전유할 만한 어떤 기량이나 정력이 있다고 믿어왔으므로, 솔직히 그들의 그런 결론을 나이브하다고 생각해 왔다. 근데 요새 생각해보면 그게 절대 아니었다...
음악.
* 레게에 대한 문화연구적 맥락들을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문화예술(산업)의 전파라는 과정은 곧 '문명'이 그래왔듯 제국주의 논리의 그것을 따르는 반면 레게(혹은 보사노바, 땅고 등 제 3세계 '월드뮤직'을 이 도식에 도입해도 마찬가지다)는 오히려 제반 문화/사회가 후진적인 제 3세계로부터 출발하여 제 1세계로 유입, 하나의 반문화적 문화 혹은 하위장르의 취향으로 공식 등록된다. 이 정반대의 , 말하자면 '역유입'은 문화연구에서 그토록 갈망하는 (반)문화의 정치적인 공정함이 단순한 문화적 작동을 넘어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전화하는 혁명적 과정의 일례로 빈번이 제시된다. 그러나 제 3세계 음악의 어떤 반항성 때문에 제 1세계의 반문화로 공식 등록된다는 식의 설명은 조금 이상하다. 왜냐하면, 자메이카의 레게가 그랬듯 우리의 댄스음악도 10대 반문화에게 있어서 하나의 표상이었으며, 문화적, 정치적으로 기능하는 바는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왜 레게는 제 1세계의 취향이 될 수 있고, 우리의 댄스음악은 카니에 웨스트나 넵튠스, 어셔나 저스틴 팀버레이크의 워너비 밖에 되지 못할까?
* 기왕의 논의는 이래저래 이상한 쪽으로 계속 흐른다. 레게에게는 밥 말리가 있었고, 혹은 보사노바에 있어서 이파네마 소녀가 있었고, 땅고에 있어서 빌라로보스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후진적 지역색이 제 1세계의 반문화로서 가능했다는 식의 설명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씨애틀 그런지 씬에 스멜즈라이크틴스피릿이 있다거나 뉴욕펑크씬에 섹스피스톨즈나 클래쉬가 있었기 때문에.. 라는 식의 설명과 비슷해지고, 이는 프랑스 대혁명과 공화정의 역사가 자코뱅당과 보나파르트의 생에 전반기가 갖는 연관성이라든가 사회주의의 역사와 마르크스라는 개인의 천재성이 갖는 함의...와 같은 식의, (전)근대적인 영웅주의 서사라는 함정으로 흐른다. 그렇게 따지자면 우리 뽕짝에게는 송대관 태진아도 있고, 노 우먼 노 크라이에 해당하는 '네박자'와 '어머나'도 있다. 아니, 뽕짝 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는 '국민가수'급인 쿨과 코요태라는 걸출한 중견 뮤지션도 갖고 있다. 그러니 그건 좀 이상하다. 요는 레게나 보사노바 같은 제 3세계 음악이 제 1세계에 진입할 수 있었던 요건은, 그들 음악 창작자 개인의 탁월함에 있다기보다는 그들 음악을 배태시킨 문화 자체의 우수함에 있다고 함이 옳다. 그런데 보통 문화예술의 수준이란 해당 국가의 여가수준에서 비롯된다는 통념에 따르면 대체 1인당 GDP로보나 출산율이나 교육열로보나 여러모로 후진국인 자메이카나 브라질 같은 나라에서 우리보다 더 높은 수준의 문화예술, 나아가 정치적 경향을 보이는 것일까?
* ....해당 사회 경제의 여가 수준이 해당 사회 문화의 수준을 결정한다는 통념이 틀린 것이 아니다. 귀류하자면, 자메이카나 브라질 같은 '경제약국'이면서 '문화강국'(말이야 바른 말이지, 남미의 문학이나 영화, 무용 등 예술 전반의 수준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뛰어나다)인 나라들은 말 그대로 여가 시간이 많다는 뜻이 된다. 생각해보면 실제로 그렇다. 그네들의 나라에는 우리나라처럼 관주도의 치열한 경쟁구도가 없다. 기후 탓이려니 해보지만 어쨌든 매사에 느긋하여 각박함이 없다. 일년에 한두달을 축제로 보내기도 하고, 우리보다 비-논리적인 터부도 적다(고 들었다. 가본적은 없다). 요컨대 주당 노동시간이 문제다. 생각해보면 음악적 전통이라고는 있을리가 없는 바이킹들, 스웨덴이나 노르웨이같은 나라의 밴드들이 심심찮게 영국차트를 석권하고 우리나라까지 흘러드는 건(예컨대 아바와 아하로부터 시작하여 카디건스, 실리예 네르가르드 같은 경우) 그네들의 30시간을 전후하는, 전세계 선진국 가운데 최저수준인 주당 노동시간과 관계한 것이다.
문학과 영화.
* 전 국민의 1/4 수준의 관객을 호가보하는 영화를 네편이나 갖고 있는 나라가 된 우리에게 있어서 문화예술은 이제 응당 즐길만한 것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더하여 인터넷보급률 1위와 1인당 생산하는 사진장수에서 아마 압도적인 1위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도서 시장은 참으로 암울한데, 종당 부수 1만권이 중견 작가의 자존심이 될 정도로 남루하다. (최근 책값이 1만원 전후로 결정되고, 통상인세 8%를 적용하면 1만부를 팔았을 때 작가가 얻을 수 있는 수입이래야 800만원 수준이다. 우울한 수치다) 한때 김진명의 소설들이나 김정현의 '아버지'같은 책이 백만부가 팔리던 시절은 완전히 갔다. 매판 자본의 힘이 이미 영화라든가 하는 파워풀한 여가선용책으로 넘아갔기 때문이라고 본다. 뭐 그렇다고 해서 책이 예전보다 안 팔리느냐,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일 때 해야 하는 ~가지' 류라든가, '마시멜로 이야기' 같은 책들은 백만부 가까이 팔리기도 한다. 소설도 그렇다. 파울로 코엘뇨나 '다빈치 코드'는 수십만부가 팔렸다. 문제는 '지금, 여기'를 다루고 작업해야 하는 문학, 사회과학, 인문학, 철학, 예술, 과학, 종교, 등등의 책들은 외면받는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 (여담인데, 시간이 있으면 교보문고 같은데 가서 '예술' 분야 베스트셀러 1위부터 10위까지를 훑어보라. 'DSLR 잘 찍기' 라든가 '두나의 런던놀이' 같은 책이 8권쯤 된다)
* 책을 왜 읽지 않는가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을 '여가'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에 첫번째 난경이 있다. 독서는 어디까지나 자기계발의 신화에 결부되어 치러지는 하나의 의식이다. '독서'가 취미이자 여가인 사람의 비율은 이미 1%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가선용용 책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앞서 말한 사진잘찍기 같은 책은 여가에 다름아니다. 두번째는, 그러나 만약 독서를 여가로 여긴들 그것이 주는 즐거움의 정수를 한껏 누릴 지적 능력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책의 즐거움이란 조금은 편집광적인 데가 있어서, 읽고 읽고 또 읽어야만, 들이는 시간이 어느정도 되어야만 한다는 조건이 있다. 시드니 셀던을 읽느냐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느냐에 따라 어느쪽이 더 독서의 정수를 느끼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 우스운 것이 아닌 것은, 어느쪽에 재미를 느끼느냐에 있어서 독서에 들인 시간을 생각해보면 된다.
* 책에 관한 문제는 곧 여가시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글쓰기를 통해 세력확보를 해야하는 좌파논객들의 자기맴돎에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좌파논객들, 혹은 정치적인 공정함을 부르짖는 진영의 주의주장은 요컨대 '현실을 직시하라'와 같은 것들인데, 그 구호를 위해 작성하는 글들은 읽기에 불편하고 공부하는 느낌을 준다. 그런 점에서 딴지일보라든가 진중권, 강준만의 몇몇 글들은 '동지'를 얻게 하는 힘에 있어서 충분히 유의미하다. (물론 고종석 같은 사람도 한편으로 유의미하고.. 김규항은 난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의 글은 일반 독자들로 하여금 여러가지 컴플렉스를 자극시킨다. 그래서는 동지를 만들기 어렵다) 여튼 각설하고.. 결국 문제는 '책읽는', 즉 대화와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또 결국 노동 시간을 줄이고 여가 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하여..
* 일전에 김진우 이자해에게 열띤 논쟁을 촉발시킨 반문화의 혁명적, 급진적, 좌파적 가치의 문제에 있어서.. 반문화가 현대 '문화자본주의'의 포섭대상이며 결과적으로 시장의 임상을 위한 백신 정도에 불과하다면 반문화의 재급진화, 재혁명화는 어떻게 이룩해야 하는가 하는 나의 질문에 대해 김진우는 '자본의 퇴행'을 조장하기 때문에 반문화가 가치 있다고 했고 이자해는 그것을, 불가능한 사회가 3년 뒤에 도래하든 5년 뒤에 도래하든 단지 유예라면 의미가 없다고 했다. 그때 나는 솔직히 50-50이었는데, 요새 들어 언어의 핍진적인 소통, 지극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담론의 생성과 교환의 가능성이란 사실상 없는 이때에(즉 상징계의 교란과 상상계로의 교착이라는 이 포스트모던의 저열한 이미지의 세대에, 따라서 현대미술이란 곧 한가닥 벗기고 나면 아무 의미가 없는 무의미의 의미가 횡행하는 시대에, 혹은 악성댓글을 달며 음절로 사맛디 아니한 괴이한 웃음소리를 잔뜩 찍어놓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소통 부재의 작태에) 결과적으로 자본의 속도를 늦추고 상호 존중의 감수성을 기를 수 있는 방법이란 곧 결국 즉물적인 반문화들, 에 있고 또 한편으로 현실에 천착한 서사를 다루며 여전히 차가운 TV드라마에 있어 그것이 내용적인 정치적 공정함만 기한다면 오히려 가장 효과적인 (감성)전략이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
라는 것이 최근 몇주간 한 고민에 대한 일단의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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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모 씨와 다방에 갔을 때 옆자리에서는 예술깨나 하게 생긴 이십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아가씨 둘이 심각한 예술론을 주고 받고 있었다. 나 역시 대화상대가 있었으므로 그들의 대화는 우리들의 침묵 가운데 띄엄띄엄 캐치한 몇 개의 문장들로 재구해야했지만, 요는 미술, 문학, 연극 같은 근대예술이나 영화, 비디오아트 등의 '뜨거운 매체'에 해당하는 (탈)근대예술 등에 엄존하는 논리학적/미학적 핍진성은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이 지배하는 현대인의 예술적 감수성에 기능적으로나 당위적으로나 들어맞지 않을뿐더러, 애당초 엄정한 논리성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 대중이라는 가상적인 주체에게는 그들 예술이 전달하고자 하는 어떤 경계를 설정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요였다. 그들은 담배를 피우며 '그래서 결국 TV드라마가 최고야' 라고 결론지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문학이나 예술 전반에 치열한 이성적 능력을 전유할 만한 어떤 기량이나 정력이 있다고 믿어왔으므로, 솔직히 그들의 그런 결론을 나이브하다고 생각해 왔다. 근데 요새 생각해보면 그게 절대 아니었다...
음악.
* 레게에 대한 문화연구적 맥락들을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문화예술(산업)의 전파라는 과정은 곧 '문명'이 그래왔듯 제국주의 논리의 그것을 따르는 반면 레게(혹은 보사노바, 땅고 등 제 3세계 '월드뮤직'을 이 도식에 도입해도 마찬가지다)는 오히려 제반 문화/사회가 후진적인 제 3세계로부터 출발하여 제 1세계로 유입, 하나의 반문화적 문화 혹은 하위장르의 취향으로 공식 등록된다. 이 정반대의 , 말하자면 '역유입'은 문화연구에서 그토록 갈망하는 (반)문화의 정치적인 공정함이 단순한 문화적 작동을 넘어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전화하는 혁명적 과정의 일례로 빈번이 제시된다. 그러나 제 3세계 음악의 어떤 반항성 때문에 제 1세계의 반문화로 공식 등록된다는 식의 설명은 조금 이상하다. 왜냐하면, 자메이카의 레게가 그랬듯 우리의 댄스음악도 10대 반문화에게 있어서 하나의 표상이었으며, 문화적, 정치적으로 기능하는 바는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왜 레게는 제 1세계의 취향이 될 수 있고, 우리의 댄스음악은 카니에 웨스트나 넵튠스, 어셔나 저스틴 팀버레이크의 워너비 밖에 되지 못할까?
* 기왕의 논의는 이래저래 이상한 쪽으로 계속 흐른다. 레게에게는 밥 말리가 있었고, 혹은 보사노바에 있어서 이파네마 소녀가 있었고, 땅고에 있어서 빌라로보스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후진적 지역색이 제 1세계의 반문화로서 가능했다는 식의 설명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씨애틀 그런지 씬에 스멜즈라이크틴스피릿이 있다거나 뉴욕펑크씬에 섹스피스톨즈나 클래쉬가 있었기 때문에.. 라는 식의 설명과 비슷해지고, 이는 프랑스 대혁명과 공화정의 역사가 자코뱅당과 보나파르트의 생에 전반기가 갖는 연관성이라든가 사회주의의 역사와 마르크스라는 개인의 천재성이 갖는 함의...와 같은 식의, (전)근대적인 영웅주의 서사라는 함정으로 흐른다. 그렇게 따지자면 우리 뽕짝에게는 송대관 태진아도 있고, 노 우먼 노 크라이에 해당하는 '네박자'와 '어머나'도 있다. 아니, 뽕짝 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는 '국민가수'급인 쿨과 코요태라는 걸출한 중견 뮤지션도 갖고 있다. 그러니 그건 좀 이상하다. 요는 레게나 보사노바 같은 제 3세계 음악이 제 1세계에 진입할 수 있었던 요건은, 그들 음악 창작자 개인의 탁월함에 있다기보다는 그들 음악을 배태시킨 문화 자체의 우수함에 있다고 함이 옳다. 그런데 보통 문화예술의 수준이란 해당 국가의 여가수준에서 비롯된다는 통념에 따르면 대체 1인당 GDP로보나 출산율이나 교육열로보나 여러모로 후진국인 자메이카나 브라질 같은 나라에서 우리보다 더 높은 수준의 문화예술, 나아가 정치적 경향을 보이는 것일까?
* ....해당 사회 경제의 여가 수준이 해당 사회 문화의 수준을 결정한다는 통념이 틀린 것이 아니다. 귀류하자면, 자메이카나 브라질 같은 '경제약국'이면서 '문화강국'(말이야 바른 말이지, 남미의 문학이나 영화, 무용 등 예술 전반의 수준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뛰어나다)인 나라들은 말 그대로 여가 시간이 많다는 뜻이 된다. 생각해보면 실제로 그렇다. 그네들의 나라에는 우리나라처럼 관주도의 치열한 경쟁구도가 없다. 기후 탓이려니 해보지만 어쨌든 매사에 느긋하여 각박함이 없다. 일년에 한두달을 축제로 보내기도 하고, 우리보다 비-논리적인 터부도 적다(고 들었다. 가본적은 없다). 요컨대 주당 노동시간이 문제다. 생각해보면 음악적 전통이라고는 있을리가 없는 바이킹들, 스웨덴이나 노르웨이같은 나라의 밴드들이 심심찮게 영국차트를 석권하고 우리나라까지 흘러드는 건(예컨대 아바와 아하로부터 시작하여 카디건스, 실리예 네르가르드 같은 경우) 그네들의 30시간을 전후하는, 전세계 선진국 가운데 최저수준인 주당 노동시간과 관계한 것이다.
문학과 영화.
* 전 국민의 1/4 수준의 관객을 호가보하는 영화를 네편이나 갖고 있는 나라가 된 우리에게 있어서 문화예술은 이제 응당 즐길만한 것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더하여 인터넷보급률 1위와 1인당 생산하는 사진장수에서 아마 압도적인 1위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도서 시장은 참으로 암울한데, 종당 부수 1만권이 중견 작가의 자존심이 될 정도로 남루하다. (최근 책값이 1만원 전후로 결정되고, 통상인세 8%를 적용하면 1만부를 팔았을 때 작가가 얻을 수 있는 수입이래야 800만원 수준이다. 우울한 수치다) 한때 김진명의 소설들이나 김정현의 '아버지'같은 책이 백만부가 팔리던 시절은 완전히 갔다. 매판 자본의 힘이 이미 영화라든가 하는 파워풀한 여가선용책으로 넘아갔기 때문이라고 본다. 뭐 그렇다고 해서 책이 예전보다 안 팔리느냐,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일 때 해야 하는 ~가지' 류라든가, '마시멜로 이야기' 같은 책들은 백만부 가까이 팔리기도 한다. 소설도 그렇다. 파울로 코엘뇨나 '다빈치 코드'는 수십만부가 팔렸다. 문제는 '지금, 여기'를 다루고 작업해야 하는 문학, 사회과학, 인문학, 철학, 예술, 과학, 종교, 등등의 책들은 외면받는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 (여담인데, 시간이 있으면 교보문고 같은데 가서 '예술' 분야 베스트셀러 1위부터 10위까지를 훑어보라. 'DSLR 잘 찍기' 라든가 '두나의 런던놀이' 같은 책이 8권쯤 된다)
* 책을 왜 읽지 않는가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을 '여가'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에 첫번째 난경이 있다. 독서는 어디까지나 자기계발의 신화에 결부되어 치러지는 하나의 의식이다. '독서'가 취미이자 여가인 사람의 비율은 이미 1%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가선용용 책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앞서 말한 사진잘찍기 같은 책은 여가에 다름아니다. 두번째는, 그러나 만약 독서를 여가로 여긴들 그것이 주는 즐거움의 정수를 한껏 누릴 지적 능력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책의 즐거움이란 조금은 편집광적인 데가 있어서, 읽고 읽고 또 읽어야만, 들이는 시간이 어느정도 되어야만 한다는 조건이 있다. 시드니 셀던을 읽느냐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느냐에 따라 어느쪽이 더 독서의 정수를 느끼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 우스운 것이 아닌 것은, 어느쪽에 재미를 느끼느냐에 있어서 독서에 들인 시간을 생각해보면 된다.
* 책에 관한 문제는 곧 여가시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글쓰기를 통해 세력확보를 해야하는 좌파논객들의 자기맴돎에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좌파논객들, 혹은 정치적인 공정함을 부르짖는 진영의 주의주장은 요컨대 '현실을 직시하라'와 같은 것들인데, 그 구호를 위해 작성하는 글들은 읽기에 불편하고 공부하는 느낌을 준다. 그런 점에서 딴지일보라든가 진중권, 강준만의 몇몇 글들은 '동지'를 얻게 하는 힘에 있어서 충분히 유의미하다. (물론 고종석 같은 사람도 한편으로 유의미하고.. 김규항은 난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의 글은 일반 독자들로 하여금 여러가지 컴플렉스를 자극시킨다. 그래서는 동지를 만들기 어렵다) 여튼 각설하고.. 결국 문제는 '책읽는', 즉 대화와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또 결국 노동 시간을 줄이고 여가 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하여..
* 일전에 김진우 이자해에게 열띤 논쟁을 촉발시킨 반문화의 혁명적, 급진적, 좌파적 가치의 문제에 있어서.. 반문화가 현대 '문화자본주의'의 포섭대상이며 결과적으로 시장의 임상을 위한 백신 정도에 불과하다면 반문화의 재급진화, 재혁명화는 어떻게 이룩해야 하는가 하는 나의 질문에 대해 김진우는 '자본의 퇴행'을 조장하기 때문에 반문화가 가치 있다고 했고 이자해는 그것을, 불가능한 사회가 3년 뒤에 도래하든 5년 뒤에 도래하든 단지 유예라면 의미가 없다고 했다. 그때 나는 솔직히 50-50이었는데, 요새 들어 언어의 핍진적인 소통, 지극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담론의 생성과 교환의 가능성이란 사실상 없는 이때에(즉 상징계의 교란과 상상계로의 교착이라는 이 포스트모던의 저열한 이미지의 세대에, 따라서 현대미술이란 곧 한가닥 벗기고 나면 아무 의미가 없는 무의미의 의미가 횡행하는 시대에, 혹은 악성댓글을 달며 음절로 사맛디 아니한 괴이한 웃음소리를 잔뜩 찍어놓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소통 부재의 작태에) 결과적으로 자본의 속도를 늦추고 상호 존중의 감수성을 기를 수 있는 방법이란 곧 결국 즉물적인 반문화들, 에 있고 또 한편으로 현실에 천착한 서사를 다루며 여전히 차가운 TV드라마에 있어 그것이 내용적인 정치적 공정함만 기한다면 오히려 가장 효과적인 (감성)전략이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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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것이 최근 몇주간 한 고민에 대한 일단의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