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따

라이터 리 2013. 9. 13.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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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 : 패션피플과 셀럽, 파워블로거들과 함께 패션쇼를 진행하거나 관람한다.
  진실 : 백화점 문화행사장에서 쇼핑객이나 판매대리인을 상대로 트렁크쇼를 한다.

  신화 : 와인 마시며 트렌드를 논한다.
  진실 : 소맥 마시며 건배사를 읊는다.

  신화 : 일할때도 샤방하게 입고 다닌다.
  진실 : 주말에만 샤방하게 입고 다닌다.

  신화 : 연예인, 유명 디자이너등과 막역하게 지낸다.
  진실 : 연예인, 유명 디자이너등과 막연하게 지낸다.

  신화 : 패션회사에 다니면 온스타일이나 드라마 <패션왕> 등에 출연할 수 있다.
  진실 : 패션회사에 다니면 온스타일이나 드라마 <패션왕> 등에 출연할 수 있다.. 배경으로.

  신화 : 패션회사는 여성 임직원의 비중이 높은만큼 젠더-폴리틱스가 코렉트(adj.)하다.
  진실 : 패션회사는 여성 임직원의 비중이 높은만큼 젠더-폴리틱스를 코렉트(v.)한다.

  신화 : 패션회사 직원들은 고가의 의류를 저렴하게 살 수 있다.
  진실 : 패션회사 직원들은 고가의 의류를 저렴하게 살 수 있다. 백화점 세일기간에.

  신화 : 패션피플들은 에지있게 컨템포러리 트렌드와 클래식 무드에 대해 디스커스하는 애티투드를 갖고 있다.
  진실 : 옷병 환자들은 지랄맞게 최신유행과 복고풍 중 뭐가 더 있어 보이는지 침이 튀게 논쟁하는 경향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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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을 적엔, 터미네이터랄지, 세상이 진즉 망해버려서 결코 오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고, 지금도 내년쯤 세상이 온통 무너지리라 믿어의심치 않지만, 도리어 속으로는 또 결코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 짐짓 여기는. 어쩐지 얼토당토 공상같은 년도. 2011년은 나의 아홉수였고, 나는 이제 서럽게 서른이 된다. 펜을 꺾고 책을 덮고, 달마다 꼬박꼬박 돈이 꽂히는 삶을 택했고, 그래서 내 삶은 반들반들 시들시들해졌다. 
 비정한 세상에서 제 밥벌이를 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적잖이 쉽잖은 일이다. 때로 그것이 무척 쉬운 일인 사람도 있고, 한편으로는 애당초 불가능한 사람도 있는 가운데, 어쨌든 하루 세끼 밥먹고 예닐곱시간 몸 뉘어 긴장했던 근섬유들을 이완시킬 수 있는 일정한 시간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권리(그래도 최소한 시간만큼은 모두에게 비교적 공평하다, 그러나 공간의 경우에는 얘기가 다른 법이다)가 보장된다는 것은 차라리 권능에 가깝다. 그러나 소유권과 거래에 대한 공정성 혹은 기초적인 상호 신뢰조차 온통 의심받는 작금의 현실(그러니까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자본주의의 조정 단계, 급진주의자에게는 구조적인 위기) 속에선 그 일은 신성한 동시에, 거지같은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교적 편하게 돈을 벌고 있지 싶다가도,  가끔은 이게 다 뭔가 싶어,  분하고 딱할 때가 있어 이빨을 깨물다가,  이러다 나이들어 치과의사에게 낼 돈이 아까워,  헤벌쭉 웃고 만다.  헤,   벌쭉.
 
  

올해의 사건
  
  올 한해 동안 암수서로 정답게 노니는 '미팅' 따위를 서너번이나 했고, 지난 몇해간 잠시 못했던 밤 지새워 술마시기를 또 여러번이었으며..이렇게 말하면 열심히 논 것 같지만 실은 주당 노동 시간은 평균 60시간에 육박하고, 연애는 끝도 시작도 없었으며.. 세상 돌아가는 일은 참으로 복잡다단한데 난 참 단순한 삶을 살아서, 사건이 없다고 할 동시에 사사건건 사건이었다.
 

올해의 영화

 오, 맙소사, 극장에서 본 영화가 거의 없다. <소셜 네트웍> <토이스토리3> 따위를 올여름이 되어서야 DVD로 보았고,
 

올해의 음반 :
 thurston moore - demolished thoughts
 yuck - (self title)
 justice - music, video, dance
 adele - 21
 jayz+kanyewest - watch the throrne

올해의 가요 :
  gd&top+춘여사 <오예>, 씨스타19 <마 보이>, 보드카레인 <숙취>, 캐스커 <wish>

올해의 책 : <긍정의 배신>

올해의 방송 : 무한도전 조정 특집

올해의 키워드 : 쫄지마 씨발

올해의 성취 : 월 100만원 적립

올해의 잘한 쇼핑 : 포이터리 다운 점퍼 (올해의 후회되는 절제 : 쥰지 더블 코트)

올해의 유머 : 도지삽니다

올해의 여행지 : 씨바 여행을 갔어야 좀 적지...............

올해의 관심사 : 노태우 언제 죽지?

올해의 남들은 다 좋다는데 난 별로 : 루시드폴 새앨범

올해의 남들은 다 싫다는데 난 좋아 :  남성용 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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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d calm

최신시사상식 2011. 10. 23. 00:49
아침바람이 냉장고 문 열고 고개쳐박을 때처럼 콧속을 쨍하니 아프게 하는 시월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내가 올 한해를 얼마나 비루하고 미천하게 살고 있나 짐짓 실감해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새 서른이 차근차근 오고 있고, 나는 죽는둥 사는둥 무신경하게, 주변 정리도 제대로 못하고 잠에서 깨나 다시 잠들때까지 별반 의미없는 섭생나부랭이를 반복하고 있다. 진짜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보다 목표의식이 더 불명하다. 심지어 내가 누구를 친애하고 무엇을 대적하는지도 지금은 온통 오리무중이다. 그저 지난날의 가진 관념들이 관성으로 남아 의식무의식적으로 사리를 분별하려 해 보지만, 실은 다 값없는 속단들이고 그래서 실은 죄다 틀려먹은 명제들만 남는다.

이게 자본주의적인, 소외된 삶인가? 맑스니 뭐니 하는 이들의 말을 백날 옮겨놓아도 적당히 먹고 살만한(엄밀히 말해 그렇다고 느끼는) 삶을 사는 필부필부 인생들에게는 그 전언의 진위를 판별할 최소한의 인식적 혹은 도덕적인 여력도 남지를 않는 모양이다. 하긴, 배운 넘들과 배부른 넘들도 다 그모양인데, 정신차릴 틈도 없이 사는 이런 인생에 무슨 성찰과 회의가 깃든단 말인가.

이렇게나 저렇게나 살아가다 문득 이 얄팍한 물질적 토대의 외피가 깨져나가게 되면, 그때그순간 매일 가일층 왜소해져간 존재들은 스스로의 무존재함이 얼마나 가이업고 또 두려울 것인가. 해고 노동자들, 별안간 가족과 동지를 잃은 사람들, 돈 때문에 어떻게 하려 해도 뭐가 안되는 사람들의 외로움과 공포를 새삼 가늠해보면, 아아, 월급쟁이가 되어가면 그 영업권에 대한 이자비용으로 내 영혼의 일부를 야금야금 떼어갔구나, 내 마음이 순식간에 이리도 가난해져갔구나 싶어지며, 예전보다 오히려 더 짙은 경제적 공포와 고독에 휩싸이고 만다.

상스럽거나 범속한 일들에 조금 더 대범하고 싶고, 온당하고 경이로운 일들로 감복하는 삶이 되길 바라보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영수증 한장 더 만들어내는 일밖에 없어서 슬프다. 솔직하고 싶고 솔직한 말 사이사이로 살짝씩 수줍어 보고 싶은데, 마음이 울리지 않으며 입술이 떨어지지 않고 눈길은 가 닿지 않으며 손길은 까슬거리는 것이.. 죽은 자처럼, 무덤 속에서 걸어나갔다가 다시 무덤 속으로 돌아오는 것같만 같다. 인간의 연대와 인간의 공감과 인간의 사랑이 무척 그립지만 난 이순간도 또 어사무사한 말을 채운다.

하여 이토록 말이 많으나 이 말들은 모두 다 죽음처럼 조용하기만 하리라 싶어 쓸쓸한 가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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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른 해 가까이를 사는 동안 한 순간도 강건한 육체를 가져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땐 무척 마르고 허약한 체질이었고, 술이 늘면서 뱃살도 늘었으며 내 헐벗은 몸뚱아리는 참으로 보기가 좋지 않다. 그에 비하면 머리 회전은 그래도 제법 명민한 편이지만, 그게 사실 영재라거나 감각적인 데에 발달한 건 아니다. 오히려 따지고보면 대기만성형에 가까웁다.

나는 따지는 걸 즐기는 편이다. 내 인식론을 굳이 분류하자면 사실 불가지론에 가깝고(내 인생의 모토는 오랫동안 "이게 다 뭐란 말인가?"였다), 굳이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실재론적인 비판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일테면 포퍼에 가깝다(혹은 로이 바스카). 세상에 이유 없는 것이란 없다고 생각하면서, 한 가지 판단을 내릴 때에는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최종적인 판단 바깥에 남아 있을 예외라는 잉여를 항상 염두에 둔다. 개념의 공정성과 객관성에 대해 집착하고, 의사소통 쌍방간의 공리와 합의를 중시한다. 기본적으로 공감 혹은 감정이입(empathy)을 의사소통의 기초로 삼는 사람들과는 사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 편이다.

정치적으로는 질적 공리주의 혹은 정치적 자유주의를 선호하되, 현실정치에서는 중도 사민주의에 마음이 간다. 시장원리를 부정하진 않지만 이데올로기에 대해선 늘 비판적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원래 그러한 것, 당연한 것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공동체중심의 자유주의에 공감하며, 그래서 기본적으로 민족주의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역설적으로 민족주의자이기도 하다.

외로움을 잘 타지 않는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태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한만큼,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소통은 지난하며, 승인엔 첩경이 없다. 역설적으로, 그런만큼 인연을 중히 하고 사랑은 기적으로 여긴다. 그 하고많은 어려움들 속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진 까닭이다.


..라고 생각해왔던 요즘, 하나같이 인생이 어사무사하다. 스스로를 위해 마련해둔 명제나 수사들이 죄 맞지가 않다. (몸뚱이가 저질이란 건 안타깝게도 유효하지만) 하루하루 신속정확한 계량적 판단을 요구받고(판단의 수준이 높지 않고), 거의 매주 새로운 사람을 만나 술먹고 놀고, 국내 제일의 재벌 기업(그것도 그 모태라 불리는 부서)에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문득 지독하게 외롭다. 인간관계는 좀처럼 모색이 쉽지 않았다. 사람사이는 상호 호혜라는 게 없다. 내가 맘 가는 사람에게 그 맘을 전한다고 해서 그것에 보답할 의무가 없다는 뜻이다. 그걸 알면서도 문득 부아가 치밀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면서도 맘가는 사람에겐 맘이 가며 맘가지 않는 사람은 냉대하게 된다. 엇갈리는 게 안타까우면서도, 기왕의 쓴 맘들에 맘이 쓰곤 하다.

이토록 내 속에 내가 많은 요즘인데, 실은 통 스스로를 소중히 못하고 업신여겨오는 것이 당연한것만 같은 나나나날들이라 새벽잠 무릅쓰고 나나나 포스팅. 할말이 더 많은 것 같지만 그만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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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걸이라는 작가(가치중립적인 용어에서의 작가, 그러니까 한국 '문단'의 복잡다단한 사정이나, 저널리즘의 여러 지층들에서 파편처럼 사용되는 '작가'라는 말들의 용례를 고려하지 않은, 혹은 애써 무시한 의미에서의, '글을 적는 사람')를 좋아한다는 것은 범속하거나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알려진대로 그는 패션잡지 에디터 출신이며, 한국사회에서 가장 독특한 (패션)잡지의 편집장 자리를 십년여간 지키고 있는 이다. 물론 몇권의 에세이(혹은 정의할 수 없는 어떤 류)를 출간한 바 있고, 그중 한권은 가장 보수적인 문학상의 심사에서 일독된 바 있으나, 그가 써온 글은 '한국소설'이라는 테두리 내에서 읽고 이해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이충걸이 '소설'을 쓸 것이라고, 다들 기대했으며 예상했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글쎄, 꼭 그랬던 것만은 아니지 싶다.

그가 적는 글에서 그는 매일 엄마에 관해 자랑하는 순진무구한 소년이기도 하고, 이별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베르테르이기도 하며, 내여자에게만 따뜻할 것만같은 다아시 같은 사람이기도 하다. 소설책과 에세이를 내기도 했고, 파리 컬렉션의 오뜨꾸뛰르 쇼에서 맨 앞줄에 앉아 옷에 관한 감상을 적기도 하고, 시사주간지에는 양복에 관한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의 행간뿐만 아니라, 그의 행보 자체가 그의 신간 앞뒤 날개에 적혀 있는 바대로 '세속과 무구가 동시에 섞여 있는' 셈이다. 그러니, 앞서 말했듯 이충걸이라는 작가의 글을 좋아하는 것 자체가 세속과 무구의 모순을 동시에 감식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취향과 협상, 미학과 정치, 문화예술과 문화상품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조율하거나, 혹은, 그 경계에서 방황하는 정체성. 그를 이해하거나 오해하는, 그래서 그를 혐오하거나 사랑하는 모든 까닭은 이 모호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완전히 불완전한' 것이 된다.

그러하니, 첫 두편은 건축과 패션잡지, 혹은 정치라는 작가 본인 사위에 부유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것은 묘사이거나 혹은 농담이지만 진담인 변명들이며, 그 다음 편들은 인간"관계"의 관능, 그리고 그 관능이 지시하고 있는 '생'(생의 지속, 생의 소멸, 생의 재생산) 그 자체에 대한 사변들이다. (<요리수업>은 이러한 분류에서 조금 어긋나 있다, 그래서 맨 마지막에 배치된 걸까?) 이 모든 이야기들은 소재라는 관점에서는 작가 주변의 사실들로부터 비롯되고 있겠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소재들에 대해 사유하는 형식들, 사유의 결과들, 이며, 필연적으로 소설, 이라는 장르를 빌리게 될 수 밖에 없었을까, 싶어진다.

그러니,

난 항상 아름다움을 위한 것에 낭비란 없다는 말을 해요. 아름다움은 곧 삶이에요. 신적인 것을 현실로 드러내게 하는 것, 나에겐 옷을 잘 차려 입고 스타가 돼야 하는 의무가 있어요. (...) 내가 대선에 출마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66)

라는 책 속의 그의 말이 곧 이충걸이라는 작가가 미학과 정치를 연결시키고 있는 방식이며, 지큐라는 잡지가 정치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사실 소설, 넓게는 문학이라는 한 예술의 종류가 시종 시도하고 있는 과업이기도 하다. 물론 이 지난한 주제에 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고, 각각의 개별적인 문제들(일테면, 보테가베네타의 어패럴과 레더구즈와 인류의 존망의 가치를 비교하는 일 같은?)에 있어서 미학적 정당화와 정치(혹은 윤리)적 정당화가 개인의 취향, 혹은 체계적 사유들과의 접점들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져야 '옳은(just)' 게 되는지, 늘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 그러니 이충걸이라는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는 것이 범속하거나 간단한 일이 아니게 되는 까닭이다.

더구나 재밌는 사실은.. 이 '소설'들은, 그가 어딘가에 연재하거나 보여주기 위해 쓴 글이 아니라는 점이다. 월급생활자이자 원고노동자로서가 아니라, 그가 사유하고 체득한 삶에 대한 태도들, 미학에 대한 추구와 정치에 대한 추구들, 삶에 대한 애착들을 올곧이 담아놓은, 그만의 청회색노트가 '현실로 드러'난 것이고, 그래서이 땅에 살며 그의 글을 통해 위로받았던 사람들, 그를 추종했던 사람들, 단순히 그의 글을 즐겼던 사람들 모두 그의 조금 더 솔직하고 내밀한 목소리를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더 잘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다.

여담 ..이 책을 '한국소설'적으로 읽는다면, 물론, 아주 잘 쓴 소설이라고 칭찬을 하기 쉽지는 않다. 어쩌면, 후기자본주의 시대, 주변 사물에 대한 관찰과 그 심리에 대한 언어 감각이라는 점에서는 윤대녕이나 배수아의 중간쯤에 있다고 말하면 쉬울 수도 있겠고, 고종석이나 김훈 같은 저널리즘 출신 작가들과는 매우 멀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읽다보면 비슷한 점이 많다. 인문학적 현학과 술을 좋아하는 개인적 순진함을 읽는다면 김연수와도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모든 비교가 무색하게도, 이 책은 '한국소설'의 질감을 갖고 있지가 않다. 다만 '이충걸이 소설을 썼다'라고 했을 때 기대할 수 있는 글, 그 보다는 확실히 더 나은, 그래서 더 즐겁고 유의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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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가 그랬다. 나는 걸음마를 배우지 않았다고. 돌이 지나서도 앉아만 있다가, 어느날 번쩍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다녔다고 한다. 내가 원체 성격이 그렇다. 실수하는 걸 싫어하고, 최대한 많이 생각하고 시작하고 싶어한다. 살아간다는 건 자기 자신을 버려간다는 것일까? 업무를 시작하고나서부터, 정말이지 태어나서 가장 속수무책이었던 것만 같다. 갖가지 실수들로부터 업무가 돌아가는 방식들을 많이도 배웠다-_-. 덕분에 좀 무던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단순 전산 작업이 9할인 업무에 대해 마냥 만족스럽진 않다. 그래도 이 팀에서 일하고 있다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 이래저래, 자본주의의 가장 막강한 실체인 '회사'와, 그 실체의 행위인 '거래'에 대해 조금이나마 잘 알게 되서.. 기분이 퍽 삼삼하다.

 지난달의 주말들은, 지난 한달만큼이나 다채롭게 바빴다. 3월 한달동안 가장 빨리 퇴근한 것이 여덟시 반이었고.. 날짜를 넘겨 귀가하기 일쑤였다. 사월이 되니, 그나마 좀 사정이 나아서 주말에는 아직 다 한 번도 출근하지 않았다.-_- 온 종일 뭔가 정신 없이 일을 하다가도, 저녁을 먹을 때쯤 되짚어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가 되었고, 금요일이 되고 주말이 되면 마음이 허하다가도 주말동안 해야지 싶었던 일들을 맘 한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두지만 대부분은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고 넘어가 버린다. 그래도 어제는 무려 최신 트렌드 '직딩 미팅'을 성사시켰으며.., 오늘은 한달간 미뤄두었던 옷장정리를 마치고 비교적 깨끗해진 방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예쁜 옷 입고 다니고 싶다. 날씨가 너무 좋다. 어느새 밤이 늦었다. 씻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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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는 무척 바쁜 주말이 되었을 예정이었던지라, 작정하고 놀아야지 하고 있었던 이틀이었는데.. 여차저차 문밖을 나선 시간은 단 십분도 채 되지 않았다. 취소된 약속이 썩 반갑지는 않았던 걸 보면 지난 한 주가 좀 많이 답답했던 모양이다. 나가서는 담배 한 갑, 요구르트 한개 사 온 게 전부. 집밖을 안 나서니 피워문 담배도 이틀동안 세 개피. (라고 적어놓고 이 글을 쓰는 동안 한 개피를 더 피우고 와서 이제 네 개피) 집에서 고기 굽고 동생 나가는 길에 사다준 기네스 두캔에 과자에, 살찌는 소리가 들리는 이월의 마지막 나날들. 

 어제는 오랜만에 하루종일 창문 열어놓고서는,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는 방구석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어서 빨리 이 집을 떠나야지'라는 맘만 다시 새기고 청소니 정리니 하는 걸 포기했다. 산들산들 들어오는 바람에 봄이련가 하고서는, 긴팔티셔츠에 후디까지 껴입고는 방문 닫고 나와 거실 소파에서 본편보다 광고가 더 많이 나오는 미드 시리즈를 잠결속에서 보는둥마는둥하다가 방에 들어와 창문 닫고 본격적으로 잤다.

 여러모로 혹독한 겨울이었다. 휘청거린 적도 많고, 발발 떤 적도 많고, 눈앞이 캄캄할만큼 길을 나서기가 힘든 일도 있었고, 속앓이도 심했고,그러다보니 위로 아래로 많은 걸 쏟아냈던 시간들이었다. 그사이 장장 육개월이 넘는 입사 연수가 끝나고 명함을 받았다. 학창 시절에 그토록 비웃었던 '관리의 XX'라는 회사의 '경영관리팀', 학창 시절에 그토록 안쓰러워했던 회계사 셤 공부하던 친구놈들이라면 우스워보일, 경비처리하는 일반 회계업무를 한다. 불과 반년전만해도 막연히 나는 미디어 아니면 언어를 다루는 일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전표와 재무제표에 적힌 증빙자료를 검토하는 데에는 맥루한도 소쉬르도 별반 도움이 되질 않는다. 패션 인더스트리에 입성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냥 난 일반 제조업, 혹은 조금양보해 유통(직매)형 제조업 시장의 경리사원이 되고 말았다. 굉장히 표준적이기에 조금은 지루해 보인다, 나의 이십대 끝물이 말이다. 여차저차 '1지망'으로 쓰고 들어온 팀이니 어디 불평하기도 그렇고..그냥 뭐 열심히 해야지. 군대 있을 때처럼.


 2월 한 달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겠다. 금명간에 와서 갑자기 시간도 공간도 녹아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천십년도 이천십일년도, 그리고 내 나이 스물여덟이 그리고 스물아홉이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질 않는다. 나에게 어떤 불연속점이 생겼다는 느낌이 자꾸만 든다. 짧던 사랑놀음도 끝나고, 짧지만은 않던 식자연하는 시간도 끝나 버렸기 때문인가보다 싶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으로, 나라는 인간에 대한 자의식 자체가 엷어져버린 것 같아 홀가분하다가도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 같아 불안불안하기까지 하다. 마치 봄같이, 얼어있던 눈사람같던 내가 녹아서는 바닥에 흥건히 젖은 채 말라가길 기다리는 것같다는 기분까지 든다. 하지만 다시 영하 사오도. 맘을 다시 단단히 하고는 일어나서 걸어야겠지.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한다. 담배를 피우느라 창문을 열었더니 바람 부는 꼴이 심상찮다. 내일은 또 추울 것 같다. 낮에 동네 한바퀴 돌 땐 쌓여있던 눈들이 거짓말처럼 녹아 아스팔트 위에 고여있기도 했는데, 마치 봄 같이 사람맘을 싱숭생숭 녹여놓고는, 다시 얼어붙게 만드려나 보다. 내일 또 휘청거릴까봐 두렵다. 징이 박힌 신발을 신고 자박자박 걷고 싶다.


 할 말은 많은데 누구한테 해야할지 모르겠고, 누군가를 생각하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을 때 사람은 가장 외롭다. 차라리 누군가에게 어떤 말을 해야할지 분명할 때, 하지만 용기가 없어하지 못할 때의 설렘과 불안이 차라리 쉽지 싶다. 봄이 오면 그렇게, 호생심이 살아났으면 하고 희망해 본다. 이러다 어느날 갑자기 가족 얘기니 엄마 얘기를 하는 시시한 남자애가 되고 싶진 않다. 돈 얘기나 혹은 끽해야 옷 얘기나 주워섬기는 재미없는 인간은 더더욱 되기 싫고. 어찌되었건 곧죽어도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에 대해 논하는 근사한 인간이 되어 봄을 맞아야지. 그래도 굳이 옷 얘기를 덧붙이려는데(난 패션회사에 다니니까), 올리브색 혹은 옐로카키빛 트렌치코트와 카멜색 태슬로퍼가 갖고 싶다. 왠지 내가 나라는 동일성을 확인해주는 건 이런 사소한 물욕뿐인 것 같기도 하다. 기분이 참 묘하다. 한시퀀스에서 다른 시퀀스로 디터-디졸브되는 한 프레임을 가만히 응시하듯 이 글을 쓰다가

 결국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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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사'한지 반 년이 넘어가는데, 아직도 교육중이다. 이리도 많은 것을 가르쳐가며 천만원이 넘는 돈을 통장에 넣어주는 회사가 이해가 가질 않으면서도(근데 그 돈은 다 어디에 간거지?)..이 부의 원천도 실은 어디의 누군가의 노동으루부터 비롯된 것인지 조금씩 알게 되면서, 두려움은 줄고 오히려 막연함은 늘고, 차츰 미안해진다. 오늘보다 내일 더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야지..

 오늘 만난 그는 십년동안 알고 지낸 친구였는데, 십년만에 처음으로 가장 우울한 모습을 보았다. 멍하니 창밖보는 모습이 안쓰러워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도닥인다. 사실 아직 손에 쥔 카드가 많은 그는 분명 며칠 뒤에 잘해낼 것이고, 나보다 더 잘살겠지만, 누구에게나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 있고 나는 위로할 깜냥이 있으니까..

 오고가는 길에, 십이월 마지막 한 주에 일했던 백화점 매장에 가서 함께 일했던 분들께 비타오백 한병씩으로 간단히 새해 인사를 갈음했다. 그 길에 흩는 눈발이 있었고, 정처없이 허공을 맴돌다가 차들이 휩쓸리고 인파에 밟히며 보도의 어느 한 자리에 누웠다가, 선배들 틈에서 얼거나 녹거나 흐르거나 한다.

 지난해부터 참, 겨울이 겨울답다. 겨울마다 원래 눈은 원래 많았던 것인지. 또 이리도 추운 것이 온당한 것인지. 아직 명도가 다 올라오지 않은 사위를 헤어나오는 평일의 아침마다, 자박자박 발 밑으로 아직도 하얀 알갱이를 밟는다. 몇주동안 녹지도 얼지도 흐르지도 않던 것이 오늘은 누군가 뿌린 염화칼슘과 섞여 슬그머니 아스팔트 속에 스미고 있다.

 인종갈등이란 주제를 재난영화의 문법으로 푼 토미 리 존스 주연의 십칠년전 영화 '볼케이노'의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 흑인 백인 황인이 화산재를 뒤집어쓰고 허옇게 변한 모습을 보고 한 꼬마는 '우리 모두 똑같아요!'라고 외치는, 참 누가 봐도 뻔하지만 잔잔한 감동을 주는 장면이 있다. ...밤새 하얗게 쌓인 눈은 이 성채같은 도시의 정주민들을 각자의 자리'로부터'('-에'가 아니라) 고립시킨다. 무슨 말이냐면, 눈이 오면 세상은 신세계가 되고, 정주민들은 속절없이 하얗게 변한 세상에서 낭만에 젖거나 혹은 투덜거리거나 하며 눈[snow] 때문에 부신 눈[eye]을 부빈다. 앞으로 펼쳐질 삶을 여생으로 여기게 되는, 길가다 어깨 부딪치면 열에 아홉일 '회사원'이 된지라 눈오는 날의 고생스런 출근길이 주는 세속적 고난에 대해 매일매일 체험하면서도.. 그래도 눈쌓인 풍경이 주는 평등과 박애의 감상을 잃지 않았다는 게 새삼 다행스럽다.



 '지난해'가 된 2010년 하반기에 나는 참 많은 일을 겪었다. 마음 아픈 일이 많았고, 즐거운 일도 더러 있었다. 그 통에 좋은 사람들을 새로 알게 되고, 크리스마스 이브도, 해가 바뀌는 순간에도 회사에서 알게 된 친구와 함께였다. 일주일 내내 보아놓고는 그들과 또 무슨 재미가 있겠냐 싶다가도, 사실상 '전우'인 그들과 지리멸렬한 맥락을 벗어나 일탈하고 싶어지는 마음들을 이제사 이해하고 나니, 인생의 많은 순간들이 서로 교통하지 못하고 서로 배반하고야 마는 것이야말로 종종 생을 다채롭게도 하고, 고통스럽게도 한다는 사소한 진리를 맘에 새기게 된다.

 이삼년동안 블로그, 로 옮겨와서 연말이면 늘 연말결산 하며 '올해의 뭐뭐'를 운위했는데, 그냥 올해는 생략해야지.


 '우리'라는 대명사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그게 가족이 되었든 연인이 되었든 동료가 되었든 혹은 국가나 민족, 인류가 되었든, 오늘날 우리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모처럼 평온한 주말 밤이라, 나조차 찾지 않는 내 블로그에 험블하게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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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이라는 두 글자가 오늘 내 맘을 무너뜨렸어
어쩜 우린 웃으며 다시 만날 수 있어 그렇지 않니?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우습지만 예전엔 미처 하지 못했던 생각도 많이 하게 돼



넌 날 아프게 하는 사람이 아냐

수없이 많은 나날들 속을
반짝이고 있어 항상 고마웠어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얘기겠지만
그렇지만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너 같은 사람은 너 밖에 없었어
마음 둘 곳이라곤 없는 이 세상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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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오호선 오목교역과 충정로역 마천•상일동행 플랫폼에서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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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어증

카테고리 없음 2010. 10. 6. 19:11



  군대 시절이었던 것 같다. 좁은 곳에 갇혀 있다보면 환절을 단절로 느낀다. 기상변화에 맞는 옷가지들을 한 두 벌씩 차근차근 꺼내는 것이 아니라, 날짜를 정해 두고 규율로써 입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기실 바깥 공기를 쐴 일이 많지 않으니 무감해지는 탓인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올 가을도 습격같이 왔다. 그동안 나는 미욱하게도 여름내 외투를 입고도 감기에 걸렸다. 올 동절기는 혹독히 추울 것 같다. 나는 밤마다 털이불 속에서 외로울 것이다.

  팔월 한달 유성에 갇혀 두려워하거나 혹은 짐짓 무심한 듯했다.
  구월 한달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시의 경계를 넘고,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얼굴맞대고 무상하게 웃으며 통장에 찍히는 돈에 애써 희희낙락해 했다.
  넋없이 시월이 되었고, 나는 이번엔 또 용인에 갇혀 대륙말을 배운다.
  선조들이 이 땅에서 애써 배운 말과 사맛디 아니한 글, 이라면 좋을 수도 있었겠지만 대학중용은커녕 동몽선습도 못되는 값싼 실용회화들이다.
  오늘날 그 말들이 시장에서 비싼 값에 거래되곤 한다. 참으로 세상일은 알수 없는 것이다.

  이제 겨우 예닐곱 날이 지났다. 다 합쳐 오십여일을 견뎌야 한다.

  팔월엔 스티비 원더를 놓치고, 시월엔 이츠하크 펄만과 피시만즈를 놓치게 생겼다. 뮤지크 솔차일드나 lcd 사운드시스템이나 카니에 웨스트나 플러시보를 놓친 것은 아쉽지 않은데, 스티비와 펄만과 피시만즈를 볼 기회가 언제 또 올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니, 원래 공연같은 데 잘 가지도 않으면서도 회사의 연수 정책이 못내 밉다.

  여기는 둘러보아 사위에는 적막한 침묵뿐이다. 연수원 옥내는 믿을 수 없이 시끄럽지만, 그 허다한 외연에 담긴 내포도 믿을 수 없이 공허하다. 나는 최근 며칠 간 한 번도 내 마음을 담아 말한 적이 없다.

  수업은 아침 여덟시에 시작하여 밤 열한시에 끝난다. 공식적인 것이 그러하고, 대부분은 익일 자정을 넘어서도 정신없이 성조와 운모를 익힌다. 모두가 별 말 아닌 것들이다. 나는 건강합니다, 당신의 식구는 몇 명입니까, 방 청소하는 것을 도와주세요, 회사와 집이 멉니다 같은 말들이다. 그런 말들을 일 년에 몇 번이나 쓰는지 가늠해 본다.

  교육을 맡은 담당 강사의 취향이겠지만(그는 이 교육 과정 동안 쓰이는 교재의 저자이기도 하다), 예문들이 지독히도 현실적이다.

 손에 무엇을 들고 있습니까?
 맞추어 보세요.
 쵸콜렛이요.
 틀렸어요.
 금반지요.
 틀렸어요. 알려 드릴께요, 자동차 키입니다. 이것은 제가 당신에게 드리는 생일 선물입니다.
 정말요? 당신, 너무 좋아요.

  교재의 194쪽의 응용 예문이다. 어느 영어회화 교재에 나왔다는 '내 시디 플레이어를 보았니? - 응, 내가 훔쳤어' 가 이오네스코라면, 이건 우디 알렌 정도 되는 것 같다.

 
  사이사이, 회사원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고민했어야 한다는 후회를 한다. 나는 매사에 좀처럼 후회를 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 문제 만큼은 솔직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어느새 내 인생을 하나의 완결될 이야기로 적어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옷을 지어 만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한다. 내가 일함으로써 사람들이 한뼘만치라도 더 우아해질 수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만들까. 그것이 과연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을 늘려가는 일인지, 아니면 부당한 탐욕의 영토를 넓혀가는 인식적 폭력인지 아직 가늠할 수가 없다. 천의무봉이라 했다는데 요사이 옷들은 절개가 많고 성긴 땀들이 많아 우리 몸을 압박해 오기만 한다. 한편으로 최신 기술은 섬유들의 내구 연한을 늘려가지만, 그만큼 그 옷에 더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매분매초 제안되는 모드의 체계들의 뉘앙스는 부지불식간 우리의 의식을 침략하고 정복해온다. 나는 명동거리의 째낸 사람들 틈에서, 차라리 우리 모두 스타트렉의 폴리에스테르 유니폼을 입는 것이 인류 평화에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유명짜한 디자이너들이 죄다 직각의 검정 옷만 입는 것은, 때때로 그들은 그들이 내놓는 색채와 비율이 휘두르는 실재의 공포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 그 사이서 가벼워지는 것은 높은 세번수 모직 원단의 단위 무게 뿐만이 아니라, 내 진득한 성찰의 무게와 그 값어치이기도 하다.

  요사이 내가 떠난 곳들의 소식이 간혹 궁금해진다. 언론고시를 준비하던 사람들의 (흉흉한) 풍문들, 문학과 철학의 땅에서 추워하던 사람들의 (마음의) 건강, 혹은 연희관 주변의 담배꽁초들이 문득 궁금하기도 하다. 베버와 홀과 이글턴과 아론슨과 네그로폰테를 운위하던 시절이 가고, 차변과 대변, 자산과 부채, 수량사와 시량사를 구분해야 하는 나는 아직도 내가 즉자인지 대자인지 궁금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이 의미가 없겠지. 계급적 진실에 굴복했으니 나는 아마도 말장난처럼 스스로를 대자적 즉자라고 할 수도 있겠다.


  블로그에 이런 류의 글을 적는 것이 너무 오랜만의 일이라, 아마 내 주변 사람들조차 좀처럼 찾지 않겠지만, 나는 요사이 많은 것, 중요한 것과 이별중이다.

  앞으로 몇 년을 지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거의 매일의 아침 걷게 될 세종로 정부청사 앞 나무들은 어디에서 뿌리채 뽑혀와 도열하여 있는 것일까. 무엇을 통해 자라서, 무엇을 위해 잎을 흩날릴까, 말 없이 오랜 시간 눈을 가늘게 흡뜨고.

  나는 왜 나무가 아닌가.

  나무는 왜 입이 없는가. 

  또한 왜 나는 입이 있는가.

  왜 인간은 다른 존재의 사체를 짓이겨 삼키는 폭력에 의지해 살아가야만 하는가.

  왜 인간은 다른 존재의 사유를 이해하기 위해 그 지난한 언설을 교환해야만 하는가.

  생각나지 않는 이름들, 그려지지 않는 얼굴들에 내 이름과 내 얼굴을 덧씌우는 나를 볼 때마다 짐짓 환멸한다. 생각없이 사는 것이 부끄럽다가도, 왜 사는 것인가 하는 무참한 맘이 들 때마다 힘없이 절망한다. 나는 이별 속에서 모든 것을 그리워하지 않았으면 해보지만, 모든 게 그립고 모든 순간 외롭다.

  왜 나는 말을 하는가, 대답을 구하지 못한다. 그래놓고 이리도 수다를 떠는 행간행간마다 나는 실낱같은 자존감을 새기며 애써 입을 뗀다.

  그러니 누군가, 왜 말을 듣는가, 에 대해 내게 회답해주면 좋겠다. 어쩌면 이건 살아야겠다, 라고 하는, 내 항상성의 원칙이 요구하는 유일한 해방구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잘 모르겠다. 내가 누군가의 말을 귀담아 들을 준비가 된 사람인지 아닌지.

  말을 잃기 일보 직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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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ws and flows of angel hair And ice cream castles in the air
And feather canyons everywhere I've looked at clouds that way
But now they only block the sun They rain and snow on everyone
So many things I would have done But clouds got in my way

I've looked at clouds from both sides now From up and down,
and still somehow It's cloud illusions I recall I really don't know clouds at all


Moons and Junes and Ferris wheels The dizzy dancing way you feel
As ev'ry fairy tale comes real I've looked at love that way But now it's just another show
You leave 'em laughing when you go And if you care, don't let them know Don't give yourself away


I've looked at love from both sides now From give and take, and still somehow
It's love's illusions I recall I really don't know love at all


Tears and fears and feeling proud To say "I love you" right out loud
Dreams and schemes and circus crowds I've looked at life that way
But now old friends are acting strange They shake their heads, they say I've changed
Well something's lost, but something's gained In living every day


I've looked at life from both sides now  From win and lose and still somehow
It's life's illusions I recall I really don't know life at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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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달간이었지만, 대학원 수업들은 나름 즐거웠던 것 같다. 특히 영화 수업이 가장.. 사실 난 영화가 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지. 여튼 오늘 교수님들께 다 말씀드렸고. 목욜 섭에서 스케쥴 밀린 발제만 해치우면 일본으로 고고.
 취업했다고, 제XX직 간다고 했더니 영화 섭 같이 듣게 된 선생님 한 분이 '아 거기 친구 있는데, 상무.. 정X호~' 거참. 내가 괜히 거길 박차고 나온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능. -_- 토니 레인즈와 친분이 있으시단다. 최근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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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늘었어.. 통일하면 기타음악계는 조선이 접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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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마트폰과 소셜 네트워크, 마이크로 블로그와 같은 뉴미디어의 최신 버전을 둘러싼 정치권의 갈등을 반민주적인 국가기구의 통제와 고전적인 자유권 수호의 대립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많을 것이다. 그것이 정보 기술의 잇따른 진보와 그로 인해 도래할 새로운 합리적 공론장의 이념과 기술이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순간 적절한 규제 모형이 필요하다는 현실 인식을 오가는 건전한 논쟁으로 이어진다면 좋겠지만, 가만히 따져 보면 기분이 개운치 않다. 한국 언론이 지난 시절 경험한 언론통제의 역사와 민주화 이후 극적으로 쟁취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이념의 갈등이 인터넷 시대에도 여전히 반복되며 기형적인 형태로 인각되어 있는 인상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 사회는 여전히 체계 통합의 메커니즘과 사회 통합의 메커니즘이 서로 불화하며, 도구적 합리성의 전략적 행위와 의사소통 합리성을 통한 공론장 작동은 여전히 서로를 배반하고 있다.

인터넷과 뉴미디어가 바투 다가온 6월 지방 선거나 앞으로의 정치 이벤트들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서 예상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지만, 여전히 쉬운 일은 아니다. 선거 과정에 참여하는 주체의 성격에 따라, 때마다 다이내믹하게 제기되고 회자되는 이슈에 따라, 정부 규제나 시민사회의 조응에 따라, 또 기존의 주류 저널리즘이 인터넷에서 회자되는 메시지들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뉴미디어가 갖는 정치커뮤니케이션 도구로서의 역량이 위축될 수도 있고 극대화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영향이 민주주의에 긍정적일 수도, 또 부정적일 수도 있다. 인터넷이나 뉴미디어에 호의적인 주장들은 대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지방 선거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중요한 정치적 과정이다. 지방 선거는 민주주의의 위기, 민생의 위기, 국토와 생태의 위기, 도덕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의제를 상향식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인터넷을 이용한 다양한 의사소통 도구는, 지금껏 말해지지 않았던 것을 말할 수 있게 하는 계기를 열어준다, 중앙 정부와 미디어가 다루지 못하는 지방의 의제, 생활의 의제, 시민의 의제를 다루는 것은 오로지 시민에 의한 것이며 시민의 것이며 시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라고.

그런데 가만히 따져 보면, 인터넷과 뉴미디어에 대한 정쟁은 사실 그 파급력에 얽힌 정치적 이해관계에 대한 동상이몽으로 읽히기도 한다. 뉴미디어를 통해 누가 정치적인 이득을 얻는지의 문제로 요약되는 것이다. 보수 정당의 전통적인 지지층은 뉴미디어에 친숙하지 않으며, 뉴미디어에 친숙한 세대 혹은 계층은 진보 정당에 호의적일 수 있다는 사실은 여러 경험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2002년 우리 대선과 2008년 미국 대선을 보라). 우리네 정치권이 대표적인 마이크로 블로그인 트위터에 보내는 관심과 사뭇 상반된 반응도 그런 순진한 인식에서 크게 멀지 않을 것이다. 정치권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트위터가 갖고 있는 정치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의 매력(혹은 함정)이다. 트위터는 다른 컴퓨터 매개 커뮤니케이션 수단과 뚜렷하게 구별될 만큼 더 뛰어난 선전 도구이거나 동원 수단일 수 있다는 것이다. 트위터를 포함한 마이크로 블로그의의 특징은 보다 더 ‘유비쿼터스’하다는 것, 즉 시공간적 제약에서 더욱 더 자유롭다는 것과 더불어, 짧고 단순한 메시지가 빠르고 광범위하게 전파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트위터에 대한 정치권의 패러다임은 따라서, 강하고 짧은 메시지의 즉각적 반복을 통한 정치적 선전 기계, 혹은 폭넓은 확산능력을 통해 기회구조를 창출하는 정치적 동원 기계라는 시각인 듯하다. 전반적으로 트위터에 미지근한 여당의 입장에서 본다면 뉴미디어를 통한 자기 당의 정치 캠페인의 효과는 높지 않지만, 야당의 유권자들과 지지자들은 트위터의 동원 효과에 포섭될 확률이 높다. 반대로 트위터에 열정적인 정치인들은 트위터가 적은 거래비용으로 선전과 동원에 필요한 수단을 제공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패러다임이 공히 보여주듯, 트위터가 제공하는 의사소통 방식은 사실 뉴미디어와 네트워크사회에 대한 긍정적 이념형들이라 말할 수 있는 ‘참여 민주주의’ 혹은 ‘숙의 민주주의’ 등이 상정하는 공론장 모형과는 이질적이다. 다소 거칠게 말한다면, 마이크로 블로그는 집단 극화나 사이버 캐스케이드(cyber cascade)로 흐르는 기술적 유인 요소로 기능할 공산이 높다. 다량의 짧고 강렬한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파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 메시지들이 정치적 숙의에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다. 트위터에 대한 정치권의 접근은 의사소통 행위를 지향하고 있다기보다는 전략적 행위를 의도하는 것처럼 읽히며, 효율적인 메시지 생산 수단을 갖고 있는 쪽은 어디까지나 시민이 아니라 정치 거대 기업과 정치 정당이다. 특히 선거철처럼 정치권의 공방이 치열해지면 트위터를 통해 전해지는 정보의 범람은 오히려 역정보로 기능하게 되고, 흑색 선전과 네거티브 캠페인이 횡행할 여지가 높다. 정부의 트위터나 UCC에 대한 규제의 표면적인 근거 역시 여기에 있다.

물론 트위터에 대한 정부의 무차별적이고 일방적인 규제는 결과적으로 ‘시민사회적 공론장’의 자율적 규약에 심각한 훼손을 끼칠 여지가 있다. 네트워크의 규약은 중앙의 정보통제자가 없는 개방, 참여, 공유로 요약될 수 있으며, 이는 민주주의의 본질과도 다르지 않다. 개인이 공적 의제를 숙의하고 토론하기 위한 성찰적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서 인터넷과 뉴미디어 환경은 보다 자율적인 환경을 필요로 한다. 강제 없이 일치를 보는 논증적 토론의 합의 수립력이라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합리성에 대한 기본전제에서 볼 때, 뉴미디어 환경에 대한 규제는 최소화되어야 한다. 일반 시민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에 대한 일반화된 규제는 일차적으로 효율적이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규제가 완전히 철폐되고, 표현의 자유가 극대화된다고 해서 네티즌들의 정치적 숙의와 참여의 수준이 자연스럽게 향상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2002년 대선․2004년 총선과는 달리, 2007년 대선․2008년 총선에서는 인터넷의 정치적 영향력이 뚜렷하게 관찰되지 못했다. 이는 선거법 등이 정비 되면서 인터넷을 통한 정치적 의사 표현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었다는 점에 기인한 바도 있지만, 2007년과 2008년 당시 이슈가 경제 문제에 집중되면서 시민의 정치적 무관심이 만연했다는 점에 더 큰 방점이 찍힌다. 한편으로는 인터넷 정치 공론장의 지형이 대단히 정파적으로 변모했다는 사실도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트위터뿐만 아니라, 이미 사이버스페이스를 가득 매운 격문과 선전 슬로건들의 침략은 이미 우리의 인터넷 환경을 ‘공론장’이라기보다는 ‘전장’이라 부르게 만들고 있다.

시민사회가 정부의 반민주적 행태를 견제하기 위해 보여준 지난 2년간의 정치적 성숙도는 인상적이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일련의 정치적 집합 행동이 과연 유효했는가에 대해 긍정하기는 어려운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입에 쓴 말이지만, 우리 시민사회는 공공성에 대한 폭넓은 가치 합의와 상식에 입각한 의사 결정 과정은 결여한 채, 다만 해방 정치의 의제를 감정적으로 표출한 굿판을 벌였던 것은 아니었는가 하는 반성에 이르곤 한다. 정치적 무기력과 공론장의 진공 상태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 네트워크는 이번에도 자칫하면 무의미한 호명들만 반복하고 정보의 과부하만을 가중시킬 공산이 크다.

기술문명에 관한 인문사회과학의 문화적, 윤리적 판단은 그 기술이 가져온 사회의 변동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기술, 그리고 설명과 그에 따른 판단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기술문명의 발달은 그에 따르는 인간행위의 특정 양상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의식적 침략자로 기능한다. 트위터나 인터넷 역시 마찬가지이다. 규제나 규약은 권위적인 통제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정보의 효율적인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임시 방편적 지배(adhocracy)로 기능할 수도 있다. 참정권의 확대를 통해 자유권과 사회권의 확대를 예비하는 숙의 민주주의가 SNS와 마이크로블로그라는 기술적 요인만으로 결정된다는 것은 유토피아적인 발상을 버릴 필요가 있다. 결국 필요한 논의는 인터넷이 없던 시대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정밀하고 신중한 자세로 다양한 의견의 참조와 합의 수립을 위한 진정한 의미의 공론장 형성을 위해 필요한 것은 트위터를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가 아니라, 트위터를 할 때 필요한 최소한의 사회적 원칙과 의사 소통 수행 능력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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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신문 4월호에 기고
시ㅋ망ㅋ

* CCL 플러긴이 맛이 가서... 혹시나... 본 글의 저작권은 기본적으로 본인에게 있으나, 2차 저작권은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문국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냥 그렇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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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하세요

최신시사상식 2010. 3. 25. 11:55


 투표를 하라구!
 꼭 카라 때문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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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붕뚫고하이킥이 오늘 종영. 중간에 일주일치의 에피소드가 결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장 없이 예정된 날짜에 뚝딱 끝이 났다. 덕분에 막판 일주일 분량에는 몇몇 비약들이 눈에 보인다. 엔딩을 둘러싼 여러 논란들은 기실 마지막 대여섯 에피소드들의 낮은 완성도 때문인 듯싶다. 예컨대, 이지훈(최다녤)이 감정선이 영 엉망이다. 갈팡질팡하는 건 갈팡질팡하는 건데.. 22분 안에 억지로 구겨넣으려면 좀 더 타이트한 장면 구성이 필요했고. 등장인물들의 '성장' 이야기들도 중요한테, '떠나는 자와 남겨진 자'라는 파뷸라롤 대입시켜볼 때 '남는 자들', 그러니까 해리, 광수, 준혁, 정음의 성장들 역시 정확히 매조지가 되지 않는다. 마지막 서너개 에피소드를 60분-70분 분량에 압축해 놓고 본다면 괜찮았을 수도 있겠는데.. 25분 이내의 에피소드 플레이를 하다보니 결국 억지스레 서사를 끌어가느라 편집도 좀 망가져 있고, 캐릭터들을 다들 챙길만큼의 시간이 안 나오는지라(9시 뉴스와 일일 드라마가 껴 있는 저녁 방송은 방송시간 연장 편성이 어렵다. 심야 시트콤이면 아마 좀 달랐을 것이다), 좀 성급하게 끝난 듯한 느낌이 든다. '코미디'라는 장르적인 특성만 두고 봐도 유머들도 마무리가 문제가 있고.. 무슨 시네아스트들이나 시도할법한 서사 건너뛰기도 아니고.. 쩝쩝.


 이 다음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

 여튼, 드라마트루기의 가장 주요한 축이라고 할 수 있던 네 사람(순재/자옥은 공간의 주인이었다는 점에서, 세경/지훈은 소위 말하는 '러브라인'의 중심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중 두 사람은 결혼을 하고 두 사람은 죽으면서 끝이 났다. 이 시트콤의 마지막 장면, 대단한 잔상 효과를 남기며 일도양단처럼 넘어가버린 마지막 프레임(무슨 프랑소와 트뤼포도 아니고..)에 갇힌 두 사람의 죽음은 가만 따져보면 이 시트콤의 모든 등장인물의 운명과 맞닿아 있는 듯 싶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 티비쇼는, 세경의 직접적인 언급대로, 계급 상승 욕망의 필연적 좌절에 대한 이야기이다. 결국 계급을 뚫을 수 있는 건 죽음뿐이라는 거지.
 다들 그러려니 해버려서 별 말 안 나오고 있지만, 정말 재밌는 사실은.. 왜 하필 이 시트콤의 제목에서 뚫고자 한 것이 '지붕'이었냐는 거다. 따져보면 이 드라마에서 떠나야 했던 사람들(정음, 세경가족, 인나와 광수 등등)의 유일한 결점은 결국 지붕을 뚫을 수 없다는 것, 그러니까 가부장적인 계급의 속박을 벗을 수 없다는 점이다. '가부장적인'이라고 한정했다고 해서 성차의 문제만은 아니다. 물론 가만 보면 젠더 문제도 있긴 하지만(일테면 순재는 회사를 딸 현경이 아니라 사위인 보석에게 물려준다, 그 무능한 보석에게),  결과적으로 보면 일가를 이룰 수 있는 능력과 관계된 계급 문제가 결정적이다. 이 드라마의 모든 '헤어짐'은 계급 문제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애당초 헤어져 있던 세경부-세경/신애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인나-광수, 세경-지훈, 정음-지훈, 세경-준혁 등등.
 세경의 입장에서 드라마를 보았을 때, 이보다 더 암울한 시트콤 캐릭터는 아마 전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할 것같다. 빚쟁이에 쫓겨서 무작정 상경, 갈곳없이 헤매다가 식모살이 시작, 모든 걸 희생하고 외국으로 가려다가 비명횡사. 연애 한 번 못해보고 말이지. 그녀의 이지훈에 대한 '사랑'은 사실 그녀 캐릭터의 말대로 계급상승의 발버둥이었지. 그러니까 준혁에게도 '공부 열심히 해서 그 대학에 가라'라고만 하는 것이다. 광수와 인나의 헤어짐은 마치 '로마의 휴일' 같지만, 사실 새로운 '지붕'에 들어가버린 인나를 잡지 못하는, 그러니까 다른 지붕을 뚫지 못한 광수의 계급 상승 좌절의 드라마다. 모든 커플들 가운데 유일하게 이어진 커플은 순재-자옥인데, 이들은 각자의 지붕을 갖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유일하게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예컨대 드라마의 주요한 갈등 중 하나였던 정음의 학벌 문제 같은 경우도 그렇다. 준혁, 지훈은 그걸 덮어주고 싶어하지만, 현경은 끝내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해결될 수 없는 건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나와 광수의 이야기도 그렇다. 인나가 데뷔를 하긴 했지만, 그러면서 또 하나의 억압 속에 들어가야만 한다(사실 쇼비즈의 세계에 대한 과장이 좀 섞여 있긴 하다. 인나가 광수와 헤어지게 되는 이야기는 대단한 비약이었다). 곁다리지만 쥴리엔과 신애의 사랑(?)도 마찬가지고. 그러고보면 가장 평범하게 신파스러운 이야기는 해리와 신애의 우정뿐이었던 것 같다. 그나마도 결국 계급문제고. '너 이중에 2개 가져' 라고 하고 하필 가장 '계급적인 표지'가 잘 드러나는 엘리자베스 인형을 주는 해리의 센스..도 이 드라마의 인간관계가 사실 계급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드러내준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게 무슨 기분인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만듦새와 상관없이 말한다면 이 결말은 참, '슬프지만 진실' 어린 결말이지 싶다. 그들이 떠나간 뒤 남겨진 이들의 성장..해리가 신애에게 선물을 주고 슬퍼하던 장면, 광수가 만화방을 인수해서 사장이 된 사연, 번듯한 대기업 부팀장이된 정음, 어쨌든 대학생이 되서 입대를 하게된 준혁.. 등등을 상상하며 마지막 흑백 프리즈 프레임의 멈추어진 시간들에 각자의 염원을 담는 수밖에 없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재/자옥은 '나이'를 초월한 '계급'의 힘으로 행복하게 살 것이고, 보석/현경 역시 '나이'를 초월한 '계급'의 힘으로 늦둥이를 볼 것이다. 말하자면 이 드라마에서 뚫린 것은 벽 뿐이고, 이토록 적나라한 드라마에는 '실장님'도 '구준표'도 없다.

 
  컬러로 된 인물들만 상류층이라 행복하게 살아간단 말씀. 존나 적나라한 포스터 아님??

ps. 글 다 쓰고 여기저기 뒤져보니, 한참 전에 세경이 미술관에서 가만히 보고 있던 그림의 제목이 '마지막 휴양지'라고 한다. 비오는 날, 빨간 옷을 입은 여인을 데리러 차를 끌고 온 남자..를 그린 암울한 색채의 그림이다. 세경이 가려던 곳은 타히티고. 이 그림에 스텐레스김이 제대로 꽂혔던 모양.
2ps. 다 보고 나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냄세가 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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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ps. 밤새 별 얘기가 다 있었던 모양이다. 신세경 귀신설/쌍둥이설 어쩌고 하면서 김병욱 천재..이런 인간도 있고, 완성도가 낮다고 애써 폄훼하는 사람도 있고, 신세경이 나쁜 년이라고 하는 인간도 있다. 생각해보면 첨엔 사람들이 해리만 미워하다가, 나중엔 오히려 '꾸질꾸질 신신애'를 보며 짜증내 했다(사실 나도 좀...-_-). 그러니까 신세경이 뜬금없이 이지훈을 '죽게' 만든 것을, 그리고 본인도 죽은 걸 두고만 볼 수 없는 것. 이런 서사를 인정하기엔 좀 너무 우울하니까.. 그러니까 어떻게든 서사의 완성도를 깎아내려서 극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다른 내용이 있다는 식으로 왜곡시켜 받아들이거나(쌍둥이설/귀신설), 그도 아니면 걍 캐릭터 개인을 부정함으로써 그런 비극적 최후를 '개인의 윤리'로 정당화하는 것 같다(지옥에서온 식모 신세경 어장관리녀 설). 이런식으로 다르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엔 좀 너무 우울하니까..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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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ps. 생각해보면.. 마지막 프리즈 프레임은 정말 짠한 것 같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세경의 바람이 이루어진 셈이니까. 생각해보니 교통 사고 암시나 3년후 인서트 같은게 죄다 사족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3일 후쯤 어느 날 세경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대충 어떻게 어영부영 사는지 보여주고 다시 돌아와 프리즈 프레임으로 끝났으면 좋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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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카고 미시건 애비뉴?에서 열린 오프라 윈프리 쇼의 24번째 시즌을 축하하는 공연으로 보임. 사전에 교감이 있었던듯.. 나도 사전정보 없이 보다보니 첨엔 사람들이 넘 심심하게 있네 하고 생각했는데.. 쇼 호스트였던 오프라 여사는 얼마나 신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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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교 동창인 김원이 지난 토요일에 결혼을 했다. 여러 가지 소회가 든다.

 햄볶으며 잘 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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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랑을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되는 거 같다. 열라 웃김

in minne~so~~ta~~ frozen tundra that we are pond of~
there's nothing you can’t do, in minne~so~~ta~~
deer lake(? 맞나?) will make you feel brand new~
big trees will inspire you~
light in here minneso~ta~ so~ta~ 
;;

이것이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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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썼던 글의 결론이 미미하다고 생각하여 다시 씀.

 인간들의 연애란 대부분 거개의 양상이 엇비슷하다. 만나고, 헤어지고, 재회하거나, 연을 끊고, 친구로 지내고, 새 연인이 생기고, 옛 연인은 억지스레 부인되거나 은밀한 관계로 남는다. 처음엔 서로를 필요로 하다가, 한때는 부담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상대가 주어이거나 술어로 등장하는 명제를 취해(일테면 'you complete me'나 'to me, you are perfect' 따위) 마음속 도덕률로 삼기도 하고, 혹은 헤어진 뒤 완전히 새로운 삶의 명제를 이끄는 소전제로 전락하기도 하며('love is a lemon', 'no women no cry' 따위), 페르마의 정리처럼 마음의 여백이 부족해 채 결론을 짓지 못하는 그런 무정형의 어떤 것으로 변하기도 한다('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사랑밖에 난 몰라 따위'). 마음을 나누거나, 몸을 만지거나, 함께 기념물을 남기거나 하는 일은 어쩌면 그런 모든 일은 한때 욕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생활의 규율이 되기도 하다가도, 종래에는 결국 일기장 한 귀퉁이의 아포리즘이 되거나, 금단의 외경이 되어 깊이 봉인 되기도 한다. 다 비슷하게 말이다.

 이런 모든 일을 '거기서 거기'라고 말하는 것은 일견 합당하지만 참 부당하기도 하다. 인간은 남녀 불문 보통 1미터 70내외, 50~60킬로그램 전후의 체중의, 1.5킬로그램이 채 되지 않는 뇌를 담은 두개골과 2개의 눈과 귀 1개의 코와 입이 달린 안면을 가진 머리 밑으로 몸통과 사지가 달린 수분과 골격과 단백질과 지방으로 이루어진 몸뚱이를 가지고 70년 가량 생명활동을 한 뒤 존재의 의미를 잃는다. 처음 20년-30년 가량 양육과 훈육과 교육을 받고 다음 30여년 동안 노동한 뒤, 그 다음 삶은 대개 '여생'이라고 부르는 지리멸렬한 나날들로 채워진다. 대개 한 번 내지 두 번 결혼을 하고 5명에서 10명 정도의 성교 대상을 갖는다고 알려져 있으며, 평균적으로 왠만한 인간들은 질병이나 사고로 수개월가량을 병원 신세를 진다. 보통 사람들은 평생동안 7명 내외의 깊은 교우 관계를 갖는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모국어와 약간의 영어를 구사하고, 하루 세번 밥을 먹고 어두울 때 자고 밝을 때 깬다. 이러한 모든 사실들은 표준적이며 동시에 문화적이다. 그러니까 모든 연애들이 비슷한 양상을 띄는 것은 합당하다. 하지만 동시에, 한 인간의 삶이 다른 이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내 삶'이 '너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뼈아픈 일이다.

 대체가능한 표준으로서의 인간의 이 외로운 삶이 현현하는 수많은 부조리와 무의미를 뚫고 행복과 가치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람들은 때로 필사적이다. '필사적'이라는 말이 지시하듯 결국 '그래봤자 장기에 우리는 다 죽지롱'이겠지만.. 토템을 부정하고 터부를 혁파하며 마침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려하고, 각각의 관계에 저마다의 이야기를 불러내려고 한다. 말하자면 낭만주의는 근대의 표준적 삶의 정착, 그 '죽음과도 같은 삶'(말하자면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죽음에 이르는 병'인 절망적인 삶)에 반발하여 등장한 사조였다. 중세의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이야기부터,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낭만적 사랑'에는 괴멸하는 세상과 그것을 이기고자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즉 낭만적인 사랑은 감정적 원형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표준적 생활양식과 개인의 성(섹슈얼리티)간의 지배 문제이기도 하다. 동성애든 이성애든, 두 사람간의 배타적인 사랑이든 대안적인 공동체적인 사랑이 되었든 간에 그것은 항상 섹슈얼리티의 문제이며 섹슈얼리티의 문제는 항상 생명심과 재생산의 결과를 가리킨다. 즉 우리는 장기에 모두 죽는 것이 아니라, '나는 너와 자고 싶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DNA를 재생산하고 싶다'라는 말을 건네게 되며, 이것은 죽음을 초월하고자 하는 본능적인 의지의 발현이다. 에로티시즘 혹은 관능은 그런 생명심과 진면목에 관계되는 바가 크다. 웃자고 하는 소리가 아니고.. 그루피들이 '당신의 아이를 낳아주겠어요(i want to have your baby)'라고 외치거나, 경상도 말로 '사랑해'가 '내 아를 낳아도'라고 하는 것은 인간사의 원형이 결국 그렇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에로티시즘은 인간이 필멸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동시에 무한하다는 농염한 언약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낭만적 사랑의 표준적 문화 모형'과 성적인 방종(일테면 프리섹스주의)은 사실 한통속이다. 왜냐하면 그 모두가 사실 참으로 하나도 '에로틱'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에로티시즘은 말하자면 존재에 대한 감정적인 표현 수단이다. 표준적인 모형은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에, 성적인 방종은 성적인 중독에 그 주도적인 지위를 내준 채, 에로티시즘은 거기에서 감정을 위무하고 쾌락을 주고받는 도구적인 기술의 지위로 전락된다. 에로티시즘은 권력관계 혹은 차별로부터 벗어나 동등한 인간의 성숙한 사회관계를 확인해주는 최초의 심급일 때야 비로소 정당한 것이므로, 소비문화의 지배를 받는 낭만적인 사랑이나 중독적인 사랑은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기능 없이 생물학적인 몸, 정신병리학적인 마음에 맞는 몰핀 역할에 다름아닌, 선무당의 푸닥거리로 남는다. 더욱 나쁜 것은 그것이 끝나고 나면 항상 차별적인 권력관계는 확대재생산된다는 점에 있다. 일전의 글에서는 '그나마 후자가 낫지 앟나'고는 했지만서도..성차별적인 권력관계에서 재연되고 재현되는 성적인 방종은 거의 대부분 일방적으로 약자(보통은 여자)가 피해자가 된다.

 무슨 보수적인 크리스차니티에서 말하는 '영성의 회복' '생명의 존중'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난번 글의 결론대로, 우리는 끊임없이 쾌락과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지만 다만 그 이면에 있는 합당한 자신의 이야기의 처음과 끝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삶의 윤리인 셈이다. 따라서 당신의 사랑이 당신을 온전히 충족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잘못된 것이다. 당신의 사랑의 이야기가 마음속에서 술술 흘러나오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잘못된 것이다. 그냥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능..


 근데 써놓고보니.. 기든스의 <친밀성의 구조변동>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한 글이 된 것 같다.

 다음은 짤방.. 연애의 64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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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맙소사, 이 앨범의 제목은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라 'les miserables'(악쌍은 넘어가고)이다. 그것부터가 이 앨범의 '실수'에 가까운 태도를 지시하고 있는게 아닐까? 나는 위선도 선이라고 생각하고 살지만 이쯤 되면.. 좀 너무 세련된 것 아닌가? 어쩌면 화법이 앞서서 진심이 가려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메시지 송은 락이나 포크여야만 한다는 그런 음악적 편협함? 편견? 이 있는 지도 모르겠지만, 보사노바나 재지한 스탠더드 챔버 팝으로 착한 노래를 부르는 이 '잘 빠진 세련된' 음악이 어쩐지 '들으나마나' 하게 들리는 건 왜일까. 그건 아마 조윤석의 가사쓰는 방식,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 때문이기도 한데.

 음악적으로만 볼 때 이 앨범은 참 잘 빠진 앨범이다. 유희열이 자기가 진행하는 프로에서 '이 앨범을 듣고 참 많이 반성했'다고 말했는데, 그런 말을 왜 했는지 어렴풋 알것도 같다. 유희열은 3집,4집,5집을 통해 음악적으로 다채로워졌으며, 한국땅에서 어덜트컨템포러리 팝뮤지션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을 정확히 짚어냈지만.. 인기를 얻고 연예인이 되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면서부터 나온 앨범은 사실 초기 사카모토 류이치를 베껴버렸기 때문이다. 비슷한 짓을 하던 김현철이나 윤상도 한 번씩 겪던 문젠데.. 조윤석의 이 앨범은 어쨌든 '할 수 있는 것'을 개정증보해내고 있으며, 한국적인 포크-어덜트컨템포러리 씬 내에서 어떤 가치의 조응을 만들어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앨범은 음악적으로 볼 때 지난 3장의(혹은 4장의) 솔로 앨범들로부터 한 발짝도 발전하지 못한 앨범이지만, 그런 제자리걸음이 마냥 매너리즘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이 유희열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걸어가자> 간주의 복잡한 편곡과 악기 편성은 <파노라마>의 성공적인 기타 리프와 <몽유도원>의 실패한 일렉트로니카 사이를 맴돈다. 그리고 누구나 <걸어가자>가 전작의 <날개>나 1집의 <풍경은 언제나>를 또 다시 부르고 있는 것에 다름아님을 느낄 수 밖에 없겠지.

 어쩌면 이 앨범의 정서를 가장 잘 드러내는 곡은 챔버팝인 <고등어>일텐데.. 건반에 스트링에 콘트라베이스에 나일론기타에 알토색소폰? 까지 동원한 세련된 편성에다가 '나를 고를 때면 내 눈을 바라봐줘요 나는 눈을 감는 법도 몰라요 가난한 그대 날 골라줘서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오늘 하루도' 같은 짠한 가사를 얹는다. 김창완의 목소리로 듣던 <어머니와 고등어>에서부터 노라조의 신나는 <고등어>까지.. 고등어는 사실 이름만 빼고 모든 것이 하등한 서민들의 친구로, 이전까지의 노래는 고등어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노래를 한 건데 반해 조윤석은 아예 화자로서의 고등어를 들이민다. 이건 시에서나 가능한 것은 아닌가? 직접 불러야 하는 가사에서는 신중해야 한다. 노래는 가창되는 순간, 몇 분간의 자기-내러티브의 '분명한 시간'을 갖는다. 지면 상의 시와 낭송하는 시가 다른 이유는 물리적 육성의 확산, 그리고 그 시간의 지속이라는 분명한 특징 때문이다. 메시지송이나 내러티브가 있는 스토리송은 영화음악이나 뮤지컬이라는 제의적인 조건이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다보니 <고등어> 같은 가사를 들으면.. 조윤석은 정말 '착한 사람 컴플렉스' 같은 게 걸려서, 착한 노래를 부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응시를 강박적으로 되풀이하는 셈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일테면 이런 것이다. 이전에 <오, 사랑>에서 당신을 만나기 위해 돛대가 없어도 바다를 가르던 '나'는, 마침내 스스로 '고등어'가 되어 '나를 원하는 곳으로 (자유롭게) 헤엄치'는, '돈이 없는 사람들도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바다를 가른다. 그러니까 사실 이 노래를 지탱하고 있는 이면적인 감정은 연애인데, 그것이 표면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우리 곁의 가난한 억울한 죽음이다. 이러한 '3인칭의 1인칭화'가 성공적인지 아닌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분명 어색하게 들리는 것만은 사실이다. 첫 트랙인 <평범한 사람>은 '보사노바 양념을 치고 나일론 기타로 맛을 낸' (운동권) 포크송의 21세기식 리바이벌인데, 이 작위적인 가사를 보면 그 '오르고 또 오르던' 사람들이 투쟁현장의 망루에 오르던 사람, 혹은 지난해 투신자살한 전임 대통령의 목소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자신이 대신한다. 조윤석은 마치 자기가 무당이라도 된듯 살풀이를 해내려고 하지만.. 살풀이 치고는 곡이 너무 유려하다는 게 문제겠지. 그런 게 아니라면 설마 죽은 사람들을 꼭두각시로 내세워 복화술을 하고 싶은 건가? 그런거라면 좀 고약하지 않나.

 타이틀트랙인 <레 미제라블>은 두 곡으로 되어 있는데, 두 남녀의 헤어짐을 남자와 여자 목소리로 각각 부르는 일종의 뮤지컬송인데.. 준희가 광주 얘기가 아니겠느냐, 라고 해서 가사를 뜯어보니 광주 얘기로 해석될 여지가 참 많은데.. 음악은 광주가 아니라 어디 니스나 깐느나 아비뇽쯤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철수와 영희가 헤어지는 게 아니라 폴과 마리가 헤어지는 게 이 노래라는 거지. <버스, 정류장>에서 '정류장에서'라고 안 하고 'sur le quai'라고 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불쌍한 사람들'을 굳이 'les miserables'라고 한 이유도 모르겠고. 그러니까 결국 이 노래들 역시, 지탱하고 있는 건 '이런 추운 날에는 트뤼플을 먹으며 뱅 쇼를 곁들어야지'하는 연애 감성으로 만든 메시지송이라는 거지. 물론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 프랑스 혁명기를 운위하는 건 알겠고, 리영희 선생도 만년에 <레 미제라블>을 다시 읽고 느끼신 바가 있다고 하신 것도 있지만.. 아무리 그렇게 연결해서 들으려고 해도 이건 너무 세련된 노래다. 이건 GQ에서 환경문제를 운운하는 것보다 좀 더 심한 것 아닌가? 이 노래를 들으면서 감동해야 하는 건 멋들어진 스트링 편곡에서일까, '조금 더 살고 싶어요'와 '그댈 어떻게 잊어요'로 대구를 맞춘 가사에서일까? 그리고 그 '감동에의 의무'에 당혹스러워하는 내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이전까지 나왔었던 메시지송이었던 <사람이었네>나 <kid>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치질>이나 <진달래 타이머>가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확실히 하고 있는 노래였던 반면에.. 이 앨범은 타자의 목소리를 담으며 주체가 타자를 점령해버린 앨범이다. 레비나스식으로 말해 주체가 타자의 인질이 된 게 아니라.. 타자가 주체의 포로가 되어 있다는 거지. 그래놓고 이렇게 세련된 음악을 듣게 만든다. 이 모든 경험을 제공하는 이 앨범을 듣는 시간이.. 우리의 죄책감을 자극시키려는 의도에서 계산된 결과물이라면 정말 대단한거고. 그럴린 없겠지만 말이지. 생각해보면 그냥 앨범 제목만 '불쌍한 사람들'이었어도 많은 게 괜찮아졌을텐데.. 왜 굳이 불어를 사용한 걸까? 경상도 사투리와 프랑스말이 억양상, 발음상 가장 먼 언어인데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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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시사상식 2010. 1. 7. 10:41


점쟁이「긴자의 나」에 의한, 특별한 점괘 결과

이정규 당신은 이런 경향이있다

+ 미묘한 부분에서 이해타산에 민감하다.
+ 평화로운 매일을 보내고 싶다.
+ 강한 사람을 따른다.
+ 남 모르게 표 나지 않게 노력한다.
+ 머리 회전이 빠르다.
+ 앞의 일을 지나치게 생각하여 행동을 할 수 없다.
+ 강하게 말하면 그런가? 라고 생각해 버린다.


특히 이정규 에게는 이러한 경향이 있다.

・배신당하는 것이 무섭다는 변명을 한다.
・가끔 의미 불명한 말을 꺼낸다.
・아무렇게나 취급 당하면 은근히 충격 받는다.
・세상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
・저렴하면 필요 없는 물건이라도 그만 사 버린다.

나로부터 이정규 에게의 어드바이스

・흐리멍덩한 생각도 정도껏 해 둬라.

 by ore운세 http://kr.oreuranai.com/



이거 왠지 너무 잘 맞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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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물질의 느낌을 말할 때 '밍숭맹숭하다' 라고 한다. 이 물질을 '물질 X'라고 하자.

 물질 X는 용제로 쓰이며, 대부분의 물질이 이것에 쉽게 녹기 때문에 공업용으로 매우 많이 사용된다. 이 물질은 극히 위험한 물질 중 하나이며, 따라서 한 해 동안 이 물질로 인해 생명을 잃는 사람의 숫자는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람의 숫자보다 수만 배는 더 많다. 다음은 이 물질의 대표적인 위험성과 해악에 대한 설명이다.

 1) 물질 X는 음용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 물질을 과량 섭취할 경우, 두통·경련·혼란 등의 증세가 나타나며, 심할 경우 사망할 수 있다.
 2) 이 물질이 피부에 오래 접촉될 경우, 피부 박리와 같이 피부에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심한 경우 피부가 녹는 사고를 초래한다.
 3) 사람을 물질 X 속에 잠기게 넣으면, 이 물질은 즉각적으로 잠긴 사람의 호흡기에 침투해 산소공급을 차단하고 폐의 폐표면 활성제를 녹여 버려서 빠르면 5분 이내 질식사에 이른다.
 4) 지난 해 미국 메사추세츠주의 2,30대에 요절한 젊은 사망자들을 임의 표집 조사해 본 결과, 모두가 이 물질을 습관적으로 섭취한 것으로 밝혀졌다. 예외는 단 한 명도 없었다.
 5) 지금까지의 모든 범죄자들 역시 물질 X를 어떤 방법으로든 섭취하였다. 
 6) 수많은 돌연사 사고를 조사해본 결과, 돌연사로 인한 사망자들은 거의 대부분 사망 전 24시간 이내에 이 물질을 섭취한 것으로 밝혀졌다.
 7) 물질 X의 중독성이 매우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단 이 물질을 한번 입에 대고 나면, 다시 섭취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버티기 힘들 것이다.
 8) 이 물질은 산성비의 주 성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물질은 토양의 침식을 일으키며, 많은 금속의 부식과 산화를 일으킨다.
 9) 이 물질이 기체상태로 피부에 접촉할 때, 막대한 화상을 입힐 수 있다.
 10) 이건 암 말기 환자의 체내에서 대량으로 발견되는 물질이다.
 11) 당뇨병 환자의 오줌에서 대량으로 검출되는 물질이기도 하다.
 12) 아무리 적은 양이라도 무의식중에 흡입하면 사망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거의 모든 정부는 이 물질을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자국민들에게 저가에 공급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또한 이 물질을 상업화하여 판매하는 경우도 있다. 중독성이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물질을 습관적으로 또 지속적으로 구매하여 섭취하기 때문에, 이 물질과 관련된 사업은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발전할 전망이다. 따라서, 제조나 판매를 제외하고 음용이나 섭취, 사용에 있어서 정부 차원의 아무런 규제 조항도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거의 항상 이 물질에 노출되어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산업화된 미국 전역의 강과 호수에서도 양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이 물질이 검출되었으며, 아프리카 오지에서도, 남극 빙하에서도 검출된 적이 있다. 단, 건조기후에서는 이 물질에 접촉될 환경에서 다소 자유로운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와 관련된 현상인지는 확인될 수 없지만, 온대/한대 기후 지역에서도 기온이 많이 상승하는 여름철에 이 물질의 섭취가 평소보다 증가하다는 연구 결과가 보고되었다.

 의학계에서도 물질 X에 대한 위험성을 여러 차례 경고한 바 있다. 다음 임상 사례는 의학계에서 이 물질 X에 의한 사건 사고의 대표적인 예를 종합 정리한 것을 요약한 것이다.
 
 1) 고체 상태의 물질 X에 장시간 접촉한 환자. 이 환자는 물질 X와 접촉한 부위의 세포 조직에 손상을 입었으며, 심한 경우 해당 부위를 절단한 사례가 있다.
 2) 기체 상태의 물질 X에 접촉한 환자. 이 경우에는 고체 상태보다도 더 심각한 피해를 초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즉각적인 접촉만으로도 심각한 화상을 입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3) 드물게 알레르기를 일으킬 수 있다. 
 4) 초기 상태의 종양 혹은 궤양 조직에서 종종 발견되며, 환부에서 물질 X를 제거해내는 수술을 지속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과학, 공학계에서도 물질 X를 사용할 때 주의할 점을 강조하고 있다.

 1) 전자제품과 물질 X가 접촉하면 쇼트를 일으킬 수 있다.
 2)  물질 X는 자동차 브레이크의 성능을 저하시키고, 전면 유리의 시계를 방해하는 주범이기 때문에 사고 위험을 크게 58% 이상 높이는 것으로 연구되었다.

 또한 이 물질 X는 다음과 같은 부수적인 위험성도 지니고 있다.
 
 1) 적대적인 개들로부터 치명적인 공격을 받게 만들 수 있다.
 2) 플로리다, 뉴올리언스 등지에서 나타나는 대형 폭풍을 포함한 미국의 중서부 지방에 나타나는 치명적인 사이클론과 자주 연관된다.
 3) 물질 X의 열 특성 변화는 엘니뇨 현상의 가장 유력한 원인이다.


 따라서.. 물질 X의 무분별한 사용 금지도 이상한 일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이 물질의 특성을 '밍숭맹숭하다'라고 하며, 밍숭맹숭한 것을 '이 물질 같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물질은 산소원자 하나와 수소원자 2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화학식은 H₂O이다.  


 

 

Posted by toto le he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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